신영균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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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申榮均
출생일 1928년 11월 6일(1928-11-06) (90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별명 (號)는 평주(平洲)·산남(山南)
연극배우 데뷔 초기 예명신일천(申一川)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침례회)
정당 무소속
부모 신태현(부), 신순옥(모)
배우자 김선희
자녀 신언식(아들), 신혜진(딸)
학력 1964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0기
복무 대한민국 해군
복무 기간 1953년 3월 ~ 1958년 3월
최종 계급 대한민국 해군 대위
근무 군의관
지휘 군의관 군의무장교 공중보건의
주요 참전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은관문화훈장
기타 이력 영화배우, 치과의사, 기업가,
예술기관단체인, 정치가
공화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1970년)
민정당 문화예술행정위원(1988년)
민자당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1992년)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특별초빙교수(1993년)
신한국당 상임위원(1996년)
한나라당 상임고문(1997년)
제주방송 명예회장(2002년)
자민련 문화예술행정특임고문(2005년)
자유한국당 문화예술행정특임고문(2017년)
명보아트홀 명예이사장
동아방송예대 석좌교수
웹사이트 平洲 신영균 예술문화재단
신영균 - 대한민국헌정회
신영균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대표작
마부 1961년
5인의 해병 1961년
연산군 1962년
열녀문 1962년
빨간 마후라 1964년
달기 1964년
갯마을 1965년
물레방아 1966년
대원군 1968년
천하장사 임꺽정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1968년
삼일천하 1973년

신영균(申榮均, 1928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영화배우연극배우(연기자)와 가수 분야에서 모두 은퇴한 치과의사 출신의 기업가이자 영화기획가 겸 영화제작자이고 예술기관단체인을 지낸 대학 교수 겸 前 정치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대위이다. 그의 현재 주요 거주지는 제주도 제주이다.

이력[편집]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평주(平洲)이며 데뷔 초기에는 신일천(申一川)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194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8년 영화 《검사와 여선생》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그의 아들 신언식기업인이며 한국 맥도날드 사장이다.

학력[편집]

비학위 수료[편집]

  • 1993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정책과정 수료
  • 1995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예술교육자과정 수료
  • 1996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언론정책과정 수료

명예 박사 학위[편집]

생애[편집]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신태현과 어머니 신순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초등학교 3학년 때 경성부(서울)로 이사해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고,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연극부에서 활동했다.[1]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예원좌의 후신인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고, 연극은 취미로 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1]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피란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도 연극을 해서 생활비에 보탰다.[1]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하여 연극부장으로서 공연활동에 빠져들었다.[2] 195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미 2년 전인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 해군 중위(군의무장교)로 임관하였고, 1958년 대위로 전역하였다.[3] 29세 때, 7세 연하로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아내 김선희와[4]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다.[1]

서울대학교 치대 재학시절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친분있는 연극인들이 찾아오게 되고 연극을 하자는 권유가 늘어갔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영균은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게 된다.[5] 당시,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긍하 감독이 그 무대를 보게 되고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다.[5] 1960년, 조긍하 영화감독의 제안으로 32세의 늦깍이 나이에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맡아 영화계에 전격 데뷔하였다.[1] 이어 출연한 《마부》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6]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국내외 유수의 영화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그의 히트작인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었다.[7] 1960년부터 1978년 배우 은퇴하기 까지 《과부》, 《연산군》, 《열녀문》, 《갯마을》, 《시장》,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삼일천하》등 주옥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총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1960~70년대 영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다.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던 그는 1963년,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인수하여 새로 개관하였다.[8][9]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하여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8]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8]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업수완을 보였다.[10] 1977년 8월에는 명보제과 바로 옆에 있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원을 들여 사들인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영화를 배급·상영하여 대박을 터뜨렸다.[8][11][12] 198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소극장을 차렸다.[13]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외식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사와 신영균이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원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서울에 합작회사인 '맥신산업'을 설립하였다.[14]

사건·사고[편집]

1968년 9월 12일, 이신명 감독을 때려 말썽을 빚은 영화배우 박노식의 처리문제를 두고 서울예총회관 회의실에서 한국영화인연합회 감독분과위원회와 연기분과위원회 연석회의가 끝난 뒤, 영화감독 정진우의 뺨과 입언저리를 때려 여섯바늘을 꿰매는 전치 10일의 상해를 입혔고 재떨이를 던져 동료 배우 황정순, 김지미 등을 다치게 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15][16] 서울시경수사과는 9월 16일, 신영균을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하고 영화배우 최성호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서울지검에 송치했다.[17] 한편, 피해자 정진우 감독은 경찰에 고소취하장을 제출하였다.

정치 분야 입문[편집]

1970년대부터는 좋은 학벌과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의 단체수장 선거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정치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며, 1978년 잠정 은퇴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정치행보를 이어나갔다. 197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에 당선된 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18] 그리고 공화당 소속으로 서울 영등포을구의 조직책으로 발탁되어[19] 출마채비를 갖추었으나, 상대방이었던 김수한 민자당 당무위원을 의식해 도중하차하였다.[20] 1979년, '영화인 권익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포부로 한국영화인협회 회장에 단독 입후보하여 선출되었다.[21] 1981년 2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제15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984년까지 역임하였다.[22] 1993년 2월 제20대 예총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23] 1996년에 재선에 성공하여 제21대 예총 회장까지 역임하였다.[24]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25] 제15대, 16대 각각 신한국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26][27] 2004년, "새로운 정치를 위해 후배들에게 의자를 물려주고 떠날 때가 됐다"며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 "이제 다시 영화인 신영균으로 돌아가 문화예술사업에 마지막 힘을 쏟으면서 우리 정치와 한나라당을 위해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며 정계 은퇴를 시사했다.[28]

영화박물관 건립[편집]

1999년 6월 5일, 남제주군 남원읍 바다기슭 2만 4천여평 대지에 사재 100여억원을 들여 한국 최초의 영화박물관인 '신영 영화박물관'을 개관하였다.[29]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양성을 위해 500억원 상당의 사재인 서울 중구에 위치한 복합공연시설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영화박물관인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하여 화제를 모았다.[30]

연극배우 분야 복귀[편집]

2012년, 서울대학교 출신 배우 이순재가 주축이 된 '서울대학교 연극동문회' 소속 선후배 연극인들이 모여 제작한 연극 《하얀 중립국》에 출연하여 65년 여만에 연극 무대 복귀하기도 했다.[31]

출연작[편집]

영화[편집]

연극[편집]

  • 2012년 《하얀 중립국》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영화 제작 작품[편집]

경력[편집]

상훈[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3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성동구 병) 13대 민주정의당 30.87% 36,142표 2위 낙선
제15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5대 신한국당 34.5% 6,783,730표 전국구 8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6대 한나라당 37.9% 8,083,609표 전국구 5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각주[편집]

  1. 신영균씨가 걸어온 길… 서울대 치대 나와 32세 배우 데뷔… 재선의원 지내 《문화일보》, 2013년 5월 15일
  2. 기립박수! 멋진 할아버지 스타 신영균 《뉴시스》, 2010년 10월 5일
  3. 영원한 영화인 신영균 《헤럴드경제》, 2012년 1월 5일
  4. 500억원 재산 기부한 원로 배우 신영균 《한국일보》, 2010년 10월 8일
  5. 예술인의 아내 7 김선희 여사 《매일경제》, 1982년 7월 13일
  6. 마부 백림영화제서 은곰상 수상 《경향신문》, 1961년 12월 10일
  7. 11회 아시아영화제 폐막 다시 빛낸 방화 《동아일보》, 1964년 6월 20일
  8.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서울신문》, 2011년 3월 25일
  9. 신영균이 세운 금호극장 개관 《경향신문》, 1963년 1월 4일
  10. 한주흥산 신영균 회장 《매일경제》, 1990년 11월 1일
  11. 서울 명보극장 신영균씨 인수 《경향신문》, 1977년 8월 15일
  12. 명보극장 사들인 신영균 《동아일보》, 1977년 6월 25일
  13. 영화배우 신영균 명보소극장 차려 《경향신문》, 1985년 8월 23일
  14. 맥도날드 복수합작법인 세운다 《매일경제》, 1992년 3월 3일
  15. 신영균씨 구속검토 《경향신문》, 1968년 9월 13일
  16. 폭력연예인 모두 구속 《경향신문》, 1968년 9월 14일
  17. 정감독 고소취하 신영균씨 송청 《경향신문》, 1968년 9월 16일
  18. 회장단 일사천리 선출... 예총 앞날에 정치작용 우려 《동아일보》, 1970년 2월 19일
  19. 공화 31지구당위장 확정 《경향신문》, 1970년 4월 30일
  20. 정치와 연예인 《동아일보》, 1990년 12월 7일
  21. "영화인 권익 앞장서겠다" 신영균 영협 새 이사장에 《경향신문》, 1979년 2월 9일
  22. 예총 새회장 신영균씨 《동아일보》, 1981년 2월 3일
  23. 신영균씨 예총회장 단독출마 《경향신문》, 1993년 2월 4일
  24. 인터뷰 예총회장 재선 신영균씨 《매일경제》, 1996년 3월 31일
  25. 신영균씨 신한국당 입당 《동아일보》, 1996년 1월 31일
  26. 국회보좌진이 뽑은 ‘여의도 얼짱’ 계보 《일요시사》, 2013년 7월 3일
  27.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누가 있나 《주간한국》, 2012년 12월 7일
  28. 신영균·유흥수·정문화... 한나라당 불출마 선언은 계속된다 《오마이뉴스》, 2004년 1월 9일
  29. 영화박물관 건립 신영균 의원, "영상인 교육의 장으로 활용" 《TV REPORT》, 2010년 10월 4일
  30. 원로배우 신영균, 500억원 사재 공유재산으로 기부 《TV REPORT》, 2010년 10월 4일
  31. 이순재 등 서울대 선후배 모인 연극 ‘하얀 중립국’ 무대 올라 《서울신문》, 2012년 8월 11일
  32. 작품상은 '연산군' 제1회 대종상시상식 거행 《경향신문》, 1962년 3월 31일
  33. 아시아영화제서 세종풍작상을 획득 《경향신문》, 1962년 5월 16일
  34. 주연상에 신영균, 이민자양 《경향신문》, 1963년 2월 23일
  35. 영화지 인기상 주연상에 신영균, 엄앵란 《동아일보》, 1963년 3월 5일
  36. 제2회 대종상 시상 《경향신문》, 1963년 3월 9일
  37. 아시아영화제서 한국 5개 부문 수상 《경향신문》, 1964년 6월 20일
  38. 주연상에 김진규, 문정숙 《경향신문》, 1964년 12월 2일
  39. 제4회 대종상 시상 《경향신문》, 1965년 4월 1일
  40. 작품상에 '저 하늘에도 슬픔이' 주연상 최무룡군 엄앵란양 《경향신문》, 1965년 12월 1일
  41. 극단 산하에 대상 연극영화예술상 수상 《경향신문》, 1966년 1월 26일
  42. 청룡상 시상 《동아일보》, 1966년 10월 15일
  43. 작품상에 비무장지대 《동아일보》, 1967년 1월 31일
  44. 작품상 '산불', 청룡영화상 시상 《경향신문》, 1967년 12월 21일
  45. 대상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경향신문》, 1969년 1월 30일
  46. 청룡영화상 시상 《경향신문》, 1969년 3월 7일
  47. 대상에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일보 연극영화예술상 시상 《경향신문》, 1970년 1월 29일
  48. 신영균, 윤정희에 주연상 트로피 《경향신문》, 1973년 3월 7일
  49. 서울시 문화상 시상식 가져 《경향신문》, 1979년 11월 28일
  50. '공로상' 신영균, "44년만에 이자리에 섰다" 《마이데일리》, 2007년 6월 8일
  51. 신영균,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수상..."초등학생 때 꿈 이뤘다" 《이데일리》, 2008년 12월 4일
  52. 영화배우 신영균, 충무로국제영화제 공로상 수상 《이데일리》, 2009년 8월 24일
  53. '특별상' 신영균, "최고의 영광, 값진 상에 감사" 《마이데일리》, 2010년 10월 29일
  54. 신영균, 영평상 공로영화인상 “치과의사 영화 위해 한것” 《뉴스엔》, 2010년 11월 8일
  55. 대한민국 국회 대상- 공로상 수상한 신영균 《뉴시스》, 2010년 12월 20일
  56. 차인표·장동건 부부 등 21명 '이달의 나눔인' 장관상 《뉴시스》, 2011년 2월 8일
  57. 대중문화예술상 신영균, 이수만 문화훈장 수상 《헤럴드경제》, 2011년 11월 8일
  58. 제22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승효상·신영균·황창규 《뉴스원》, 2012년 10월 22일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