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기전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전주 경기전 정전
(全州 慶基殿 正殿)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보물
종목 보물 제1578호
(2008년 12월 1일 지정)
면적 49,527.4m2
수량 6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 국유
위치
전주 경기전 (대한민국)
전주 경기전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풍남동3가)
좌표 북위 35° 48′ 54″ 동경 127° 9′ 1″ / 북위 35.81500° 동경 127.15028°  / 35.81500; 127.15028좌표: 북위 35° 48′ 54″ 동경 127° 9′ 1″ / 북위 35.81500° 동경 127.15028°  / 35.81500; 127.15028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경기전
(慶基殿)
대한민국 전라북도유형문화재(해지)
종목 유형문화재 제2호
(1971년 12월 2일 지정)
(2008년 12월 1일 해지)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전주 경기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한옥마을 부근에 있는 조선 시대의 묘사(廟祠)이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을 모신 건물이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다.

역사[편집]

전주는 전주 이씨인 조선 왕실의 본관지로써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조정으로부터 우대받았다. 태종(太宗) 10년(14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경기전이 세워졌으며, 조선 태조의 어진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었다.

전주 외에도 계림 · 평양에도 어용전을 세워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세종(世宗) 24년(1442년) 각지의 어용전들의 이름을 개칭하면서 전주의 어용전은 처음으로 경기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令, 종5품) 1명, 참봉(參奉, 종9품) 1명이 배속되었다.

경기전에 소장된 조선 태조의 어진(대한민국 국보 제317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 유생 안의, 손홍록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과 함께 내장산에 숨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전주의 판관 민영승(閔泳昇)에 의해 조경묘의 위패와 함께 위봉산성으로 일시 옮겨지기도 했다. 이때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4월 28일에 전주 남쪽 봉우리에서 전주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는 와중에 경기전 경내까지 대포가 날아들어 건물의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자, 당시 전주를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접주 전봉준(全琫準)은 초토사 홍계훈에게 보내는 소지문(訴志文)에서 "전주감영에 대포 쏜 것이 저희 죄라고는 하지마는 성주를 시켜 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라고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1]

조선 조정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하였다. 숙종(肅宗) 14년(1688년) 모사를 위해 서울로 이안(移安)했다가 전주로 돌려보냈으며, 서울에서 새로 모사된 태조 어진은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되었으며, 고종(高宗) 9년(1872년) 경기전의 어진이 낡자 영희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금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 경기전은 이왕직(李王職)에 속했으며, 전주 이씨에 한해서만 참배가 허락되었다.[2]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부터 7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경기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중앙국민학교(현 전주중앙초등학교)를 성심여중고 부지로 이전하고 해당 부지에 사고, 전사청, 시위청, 수문장청 등을 복원한다는 계획이 세워졌으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건축[편집]

경기전 내부

일제 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부지의 절반이 잘려 나가고,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3]

경내에는 조선 태조 어진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사공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왕조의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복원),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4]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 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 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조경묘
전주 이씨의 시조로 전하는 신라 시대의 사공공 한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 경내 북쪽에 있으며, 영조 41년(1771년) 유생 이득리 등 7도 유생들의 상소로 세워졌다.
내·외삼문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어진박물관

기타[편집]

경기전은 고종 황제의 서녀로 알려진 이문용(李文鎔)이 만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염(廉)씨 성을 가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상궁 소생으로 알려진 이문용은 1917년 17세의 나이로 당시 김한규의 아들 김회진과 결혼했고 진명여고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김회진은 결혼 생활 3년만에 일본유학을 떠났다가 사망하고 그 해에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이도 잃었다. 상궁 소생이었기에 황실 호적에 오르지도 못했고, 상하이(上海)로 피신했다가 해방 뒤에 시댁인 원산으로 돌아와서 두 명의 시동생과 함께 서울 명륜동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북에 남아 좌익운동을 하던 시동생이 생활비로 쓰라며 가져다 주고 간 금덩이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1950년 6월에 출감하자마자 발발한 6.25 전쟁으로 다시 부산으로 피신, 전쟁 뒤 강릉에서 셋방살이를 하다 다시 1960년 반공법 위반죄로 몰려 체포, 10년형을 얻도받고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1970년에 만기출소한 뒤 이리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5]

이리천주교회 캐나다 선교사 구미해가 30만원을 주어 얻어준 이리시 갈산동 단칸짜리 셋방에서 손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면서 연명해오다 노쇠해져서 캐나다선교회 서울본부로부터 매달 1만원씩 생활비를 받아쓰면서 근근이 살아갔는데, 1974년 이문용의 생애를 소재로 류주현이 극본을 쓴 일일극 《황녀》(皇女)가 MBC에서 방영되면서 이문용의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고, 1975년 3월 18일 황안성 당시 전북지사가 이문용을 방문해 금일봉을 전하기도 했다. 호적이 없었던 이문용은 또한 새마을봉사회 이학선이 적극 주선해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을 수 있었다.[6] 동시에 21일 전북문화공보실은 국유문화재였던 경기전 조경묘의 사용승인을 문화공보부에 요청하고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생계유지비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 5월 20일부터 이문용은 조경묘 수직사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전주시에서 3만원, 전북도에서 1만원으로 총 4만원의 생계비가 매달 지급되었다.

다만 이문용이 정말 고종의 숨겨진 딸인지에 대해서는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논란이 있었는데, 생전에 이문용은 세 번 서울의 낙선재(樂善齋)를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낙선재에서는 번번이 이문용의 방문을 거절했고, 1974년 일반 면회객 자격으로 이방자 여사를 잠깐 만났으며,[7] 1975년에는 드라마 황실 출연진들과 함께 홍릉(洪陵)을 참배하였다.[8] 1983년 낙선재 전 비서실장 이공재와 고종의 당숙질(학부대신 이재곤의 아들) 이면용은 이문용의 얼굴이 고종과 꼭 닮았다며 "당시의 왕실 사정 때문에 기록에는 누락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문용은 틀림없는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이문용은 1987년 3월 28일 조경묘 수직사 안방에서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는데, 장례 일정이 발표되자 당시 낙선재 비서실장 이영주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사무총장 이규성은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고종의 정실은 물론 후실까지 포함해 6명의 부인에게서 얻은 13명의 고종의 후손 모두가 관련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록(璿源錄)은 물론 왕실 기록의 가장 기본이자 소상한 내용을 담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조차 이문용이 고종의 친딸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으며, 고종의 막내딸이었던 덕혜옹주(德惠翁主)보다도 12살이나 위인 이문용을 당시 왕실의 호적 관리 전담부서였던 종친부(宗親府)에서 빠뜨렸을 리가 없다고 보았다. 상궁 출신이었던 성왕염(1987년 당시 70세) 역시 "임금과 하룻밤만 자도 당호가 붙는 법인데 임신까지 했었다면 그것을 상궁들끼리 모를 리가 없다"며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는 이야기는 헛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9]

갤러리[편집]

각주[편집]

  1. 김삼웅 《녹두 전봉준 평전》 시대의창, 2007년
  2. 《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자
  3. 《전주한옥마을》, 이병천, 채병선, 최상철 저, 대원사(2013년)
  4. 문의 좌우에 잇대어 지은 행랑.
  5. 《동아일보》 1987년 3월 30일자 10면 기사.
  6. 《경향신문》 1975년 3월 21일자 7면 기사.
  7. 《경향신문》 1974년 9월 17일자 8면 기사.
  8. 《경향신문》 1975년 2월 1일자 8면 기사
  9. 《경향신문》 1987년 4월 1일자 7면 기사.

관련 문헌[편집]

함께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