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칠십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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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킨다. 공자가어사기공자의 승당제자를 72명으로 언급하고 있다.[1] 동국 18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이며, 두문동칠십이현은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절개(節槪)와 충(忠)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72현의 구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994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고려역사선양회에서는 72현과 관련된 고려조, 조선조의 각종 역사서와 각 가문의 족보와 문집 등을 고증하여 가장 공통된 인물만을 선별하여 2007년 8월 30일 경기도 파주에 완공된 고려대전 충신각에는 정몽주(鄭夢周), 하자종(河自宗), 문자종(文自宗),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을 포함한 72현을 배위하여 봉안했다.[2][3]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두문동(杜門洞)에 들어와 역조(易朝) 즉,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며, 또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산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조에 출사한 72현의 자손들과 관련된 인물들은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하여 발령까지 했으나 그 즉시 사퇴하거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벼슬을 계속 증직하여 제수하기도 했다.

이후 정조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徐有防)이 두문동 72인 중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孟)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세 명을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그대로 배향이 시행되었다.[4] 이후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다.[5]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인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6]가 가문 내에 전해지다 순조 1809년 간행되었고, 고종 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成大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속록(杜門洞實記(幷)續錄)》이[7]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 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원래, '두문불출'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 권68 상군열전 '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인원 구성[편집]

1783년 개경부유수 서유방의 상소문에 의하면, 두문동 태학생(太學生) 72인 중에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은 조의생, 임선미와 맹씨 뿐이라고 하였다.[4] 이로 보아 정조 대에는 72명의 이름이 거의 잊혀져 파악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대전 《충신각》의 72현.[8][편집]

〈두문제현충렬록〉에 확인되는 인물들[편집]

《두문동실기》〈두문제현충렬록(杜門諸賢忠烈錄)에서 '두문동에 들어갔다(入杜門洞)'거나 '두문동에 살았다(居杜門洞)'고 기록되는 등 두문동과 관련된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각각 호와 이름을 기재하였다.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기재가 없거나 다른 지역에서 은거한 것이 분명한 사람은 기재를 보류하였다.)

《두문동록》의 72현[편집]

《두문동록(杜門洞錄)》(김진근(金振根) 지음, 1928년 발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여조병절신칠십이인록(麗朝秉節臣七十二人錄)〉에는 고려 말기 충절을 지킨 신하 72명의 이름을 적고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두문동에 은거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두문동실기》, 《두문동록》에서 이름이 누락된 인물[편집]

신라박씨 충헌공파 대종회의 72현인 목록[1]과 대조 하였다. 성사제(成思齊)는 국문표기 문제, 민보(閔普)는 마지막 글자 누락 문제로 간주하여 2명은 열거하지 않았다.

각주[편집]

  1. “고려시대의 제도 고려충신 72현”. 신라박씨 충헌공파 대종회. 2017년 2월 15일에 확인함. 
  2. 파주통일동산 '고려통일대전 30일 준공', 연합뉴스
  3. 고려대전 충신각
  4. 정조실록》 정조 7년 7월 14일조.
  5. 순조실록》순조 10년 9월 10일,순조 22년 12월 26일조.
  6. UC Berkeley 소장 링크: http://kostma.korea.ac.kr/dir/viewIf;jsessionid=2B8BEA98A4C44AEABD3FC62A2033577B?uci=RIKS+CRMA+KSM-WZ.1927.0000-20090722.RICH_0129
  7. 조선말에 재간한 두문동선생실기에는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과 권말에 김굉의 발문이 있고, 속록에는 성대진(成大璡)과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ㆍ국립중앙도서관ㆍ연세대학교 도서관ㆍ경북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8. 고려대전 충신각 배향위 현황
  9. 절개의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해 독자인 아들의 이름을 두문동의 첫 자인 두(杜)로 고치고, 아들 '두'를 관향인 창녕으로 피신시켰다. 성두(成杜)의 후손들이 후일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곽재우 가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http://wisrl.kaist.ac.kr/papers/BulOnDangJib.pdf
  10. 길재: 안향,우탁,신현,정몽주의 고려 성리학 대통을 조선 사림성리학으로 잇는 조선 사림 성리학의 시조이다. 고려 멸망 후 고향인 영남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 고려 성리학의 사림적 학맥은 길재의 제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김숙자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종직의 제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굉필의 제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인 한양 출신 정암 조광조가 바로 이 영남 사림의 맥을 기호 지역으로 전파하여 조광조의 제자 청송(廳松) 성수침(成守琛)과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그리고, 성수침의 아들 우계(牛溪) 성혼(成渾, 후일 소론), 백인걸의 제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후일 노론)로부터 기호 사림이 형성된다. 영남우도에서는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의 학맥을 이어받아 창녕 조씨인 남명 조식을 통해 남명학파가 형성된다. 한편, 영남좌도에서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독자적 학문 성취로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중후기를 이끈 조선 4대 성리학파인 남명학파 (북인), 우계학파 (소론), 퇴계학파 (남인), 율곡학파 (노론) 모두 순절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제자 길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닌 선죽교에서 순절한 정몽주가 조선의 정신을 지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