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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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임씨 (羅州 林氏)
금성 임씨 (錦城 林氏)
회진 임씨 (會津 林氏)
관향 전라남도 나주시
시조 임비(林庇)
주요 인물 임붕, 임제, 임서, 임담, 임시철, 임한호, 임긍수, 임병직, 임방울, 임갑수, 임석무, 임종기, 임동원, 임권택, 임성규, 임인택, 임채정, 임채무, 임성훈, 임채진, 임채민, 임춘애, 임창용
인구(2015년) 289,558명

나주 임씨(羅州 林氏)는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임비(林庇)는 고려 충렬왕 때의 장군이다.

역사

나주 임씨의 시조 임비(林庇)는 고려 충렬왕을 원나라까지 호종했던 공으로 1282년(충렬왕 8)에 보좌이등공신에 책록되었고,[1] 1289년(충렬왕 15) 충청도지휘사 대장군을 지냈으며,[2] 판사재시사에 올랐다.

9세손 임탁(林卓)이 고려 말에 해남감무을 역임한 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금성 회진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관향을 회진으로 하였다가 회진이 나주에 속하게 되자 나주로 고쳤다.

본관

나주는 전라남도 나주시이다. 백제 때 발라군으로 불렸고, 뒤에 죽군성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 또는 금성군으로 부르며 무주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여황현·철야현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에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면서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1985년 금성시가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인물

  • 임붕(林鵬, 1486년 ~ ?) :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삼사를 두루 지내고 벼슬은 승지·병사에서 그쳤다.
  • 임복(林復, 1521년 ~ 1576년) : 임붕의 아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의 탄생으로 특사령이 내려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선조 초기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 임진(林晉, 1526년 ~ 1587년) : 임붕의 셋째 아들이며, 임복의 아우. 1546년(명종 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을 거쳐 전라수사·제주목사·회령부사·장흥부사·오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목사 시절에 청백리로서 청정비가 세워졌으며, 1568년(선조 1) 전라도우수사로 있을 때에는 흑산도에 나타난 수적을 토벌하여 이듬해에 가선대부로 올랐다.
  • 임제(林悌, 1549년 ~ 1587년) : 임진의 맏아들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북도 병마평사·관서 도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 임서(林㥠, 1570년 ~ 1624년) : 임복의 아들. 나주 출생.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에 뽑히고, 1601년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안핵사·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병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있을 때 정인홍이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였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유적에서 삭제되자 그는 수성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덕원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1612년 봉산군수가 되고 이어 승지 등을 역임하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1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안동부사가 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쌓였던 폐단을 일소하고 농업의 권장과 군사의 조련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을 도와 적을 토벌하는 한편, 군량을 보급하는 등 열성을 다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에 승계되고 임기가 만료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석촌유고』가 있다.
  • 임담(林潭, 1596년 ~ 1652년) : 1616년(광해군 8) 생원이 되고,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병자호란 때 사헌부지평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총융사의 종사관이 되어 남격대를 수비하였고, 화의가 성립된 뒤 진휼어사로 호남지방에 내려갔다.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하는 폐습을 상소하였다.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의 모반사건을 처결, 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참판과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0년(효종 1) 다시 사은부사로청나라에 다녀와서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652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다녀오다가 가산에서 죽었다.[3]
  • 임한호(林漢浩, 1752년 ~ 1827년) :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지냈다.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복직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형조판서·이조판서·우빈객 등을 지내고 우의정에 올랐다.
  • 임기수(林基洙, 1782년 ~ ?) : 1846년(헌종 12) 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1853년(철종 4)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 임긍수(林肯洙, 1800년 ~ 1876년) : 1837년(헌종 3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공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 임병직(林炳稷, 1893년 ~ 1976년) :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외교관
  • 임석무(林碩茂, 1904년 ~ ) : 제8대 법무부 차관
  • 임광행(林廣幸, 1919년 ~ ) : 보해양조 창업 회장
  • 임종기(林鍾基, 1926년 ~ 2007년) : 제8·10·11·12대 국회의원
  • 임동원(林東源, 1934년 ~ ) : 제 25·27대 통일부 장관. 제24대 국가정보원장.
  • 임권택(林權澤, 1936년 ~ ) : 영화 감독
  • 임성규(林聲奎, 1939년 ~ 2012년) : 제33·34·35대 충청남도 논산시장.
  • 임인택(林寅澤, 1940년 ~ ) : 제35대 교통부 장관. 제10대 건설교통부 장관.
  • 임채정(林采正, 1941년 ~ ) : 제14~17대 국회의원 및 국회의장.
  • 임채진(林采珍, 1952년 ~ ) : 제 36대 검찰총장.
  • 임채민(林采民, 1958년 ~ ) : 제3대 국무총리실장, 보건복지부 장관
  • 임성훈 : MC
  • 임춘애(林春愛, 1969년 ~ )  : 아시안게임 육상 금메달 3관왕
  • 임창용 : 야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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