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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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元天錫, 1330년 ~ ?)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인이다.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1]

생애[편집]

원천석은 고려가 망하자 강원도 원주치악산에 숨어 살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니, 조선 건국 초기에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켰다. 태종이 3번이나 치악산까지 찾아와서 벼슬에 나서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계속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2]

총 6권의 저술 가운데 17세기까지 2권이 없어졌다. 《동락패송》을 보면, 자손들이 그 기록을 보면,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많아 불태웠다고 되어 있다.[3] 사후 한백겸은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칠봉서원(七峯書院)을 세우고 배향되었다.[2]

전해오는 이야기[편집]

〈조선 태종이 스승찾아 헤메다 울고 돌아서〉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처스니 / 석양(夕陽)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고려가 갔다 이미 가버린 고려를 원천석은 몹시도 그렸다 이미 간 나라에 대한 그리움은 원천석으로 하여금 만월대를 찾게했고 석양아래서 눈물을 짜게했다. 바로 그 조선 태종의 스승이자 고려의 충신인 원천석(元天錫)이다.

“싫다싫어 정치가 다뭐냐?”

고려의 수절신(守節臣)으로 추앙받는 운곡 원천석은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쥐자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내놓고 강원 원주땅의 치악산(稚岳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원천석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7월 8일 원주원씨 시조인 원경(元鏡)의 19대손인 원윤적(元允迹)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해박한 그는 고려가망하자 치악산에 숨어서 젊은이들을 지도했다.

이사실을 이중환의 택리지를 통해서 확인해보자.

십승지에도 나오듯이 원주는 두메와 가까워서 난리가 일어나면 숨어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서 세상이 편안하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까닭에 한양의 사대부가 많이 여기에 살기를 좋아했다.

동쪽에 적악산(赤岳山, 오늘의 치악산)이있다 고려말에 운곡 원천석이 여기에 숨어 살면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정대왕(恭定大王, 조선 태종의 이칭)도 총각 때에 원천석에게 가서 배웠고 18살때에 고려조의 과거에 전체 7등의 장원 급제로 합격하였다. 이방원(조선 태종)도 임금이 되기전에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는 내용이다.

당시 변방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아들의 급제소식에 가문의 위상을 세웠다고 칭송하며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장원 급제한 왕으로 조선 태종이 유일하다. 문무합장의 실력으로 이렇게 아버지를 도와서 고려조를 뒤엎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방원은 고려말 충신인 정몽주의 심중(心中)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를 지을 정도로 문장력이 있었다.

이것은 스승 원천석의 힘입음이 컸음을 말해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은 스승 원천석을 찾았으나 이미 심산유곡으로 떠나 있었다. 이방원은 임금이되기전에도 스승인 운곡을 늘 잊지 않았으나 왕위에 오른뒤에도 스승을 더욱 잊지 못했다.

그리고 스승에게 관직을 맡겨 스승의 지혜와 해박한 경륜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사직을 잇는데 한몫을 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운곡은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고려를 뒤엎은 새왕조에 들어가 영화를 누리느니 초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고 싶어했다. 아니 고려조를 뒤엎는데 칼질을 서슴치 않은 제자 이방원 자체가 보기 싫었던지도 모른다. 치악산에 숨은 스승에게 여러차례 벼슬을 권해도 받아주지 않자 태종 이방원은 마침내 스승을 만나러 원주로 내려온다.

자신으로서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뵙는 마음으로 내려가는것이지만 나라의 체통으로 볼땐 귀하신 몸인 "임금"의 신분으로 초야에 묻힌 "촌로"를 몸소 만나러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소식을 들은 원천석은 미리몸을피해 태종을 만나지 않는다. 삼백리길이나 되는 먼길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지체높은 임금의 신분으로 친히 만나러 갔음에도 한때 그의 스승이긴했지만 한낱 "백성"의 몸으로 감히 그 귀하신 지체를 배짱좋게 피한 것이다.

이사실에 대해<택리지>는 이렇게 적고있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온다음 왕(王)씨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징조가 보이자 운곡은 글을지어 간하였다. 얼마후에 공정대왕이 등극하고 적악산에 행차하여 운곡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운곡은 미리피하여 보이지않고 다만 옛날부터 밥을짓던 늙은할미만 머물러있었다 임금이 선생의 행방과 간길을 물으니 태백산에 친구 찾아갔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할미에게 많은 상을주고 운곡의 아들을 기천(沂川)의 현감으로 제수하는 관고(官誥, 사령장)을 두고 떠났다.

태종은 영월 땅까지 가서 운곡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못하고 만다. 결국 태종의"옛스승방문"노력은 이처럼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도 운곡에게는 옛 제자를 만나고싶었던 미련은 있었던 것인가? 자신을 찾기위해 많은 땀을 흘리고 돌아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운곡은 그 미안함을 달랠겸 대궐을 찾아간다. 그때의 일화들이 원주땅의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운곡이 대궐을 들어가려하니 궐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그를 막았다. 옷차림을 보니 대단치않은 선비쯤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운곡은 수문장에게 말했다 들어가 여쭈어라 대왕께서 나를 스승의예로 맞으시겠다면 여기까지 나와서 맞을것이요. 신하로서 만나시겠다면 입궐을 허락하실 것이다.

수문장이 말을 전하러 들어가려 했는데 어느 틈에 태종이 대궐문까지 나왔다 다른 수문장의 말을 듣고 운곡 스승이 찾아온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두사람사이에서 주로 오간말은 나라사정과 운곡의 벼슬문제였다. 그러나 운곡은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면서 정사(政史)에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운곡은 뒤에 고려말과 조선초의 내막과 사정을 자세히 적어 야사를 만들었지만 뒤에 그의 자손이 후환이 두려워 불살라졌다고 한다.

태종이 운곡을 찾아든 치악산일대엔 태종과 얽힌 땅이름이 무척많다. 치악산의 동쪽 골짜기인 지금의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의"태종대"는 태종이 운곡을 찾다가 지처 쉬었다는데서 나온 이름이다.

태종이 여기서쉬며 바위밑 웅덩이에서 빨래하는 노파를 보고 운곡의 행방을 물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미리 운곡의 부탁을 받았던 노파가 엉뚱한 곳을 가리켜 태종이 헛수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 옆의 "할미소"는 그 할머니가 빠져 죽었다는곳 엉뚱한 곳을 가리켜 태종이 헛수고를하고 돌아오자 그 할머니는 치마두른 여자의 몸으로 나라 임금을 속인죄는 죽어 마땅하다하고 그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또 임금앞에서 딴곳을 비켜 가리켰다해서 횡가리치재란 이름이 나왔는데 지금의 횡성군 강림면 가마골의 횡지암(橫指岩)이 그곳이다.

원주시 행구동에서 횡성군 강림면으로 넘는 고개인 "대왕재"는 태종이 쉬어넘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란다. 그리고 강림면에서 원주시 소초면으로 넘는 고개이름인 "수레너미"는 태종이 이곳을 수레타고 넘은 곳이라고도 전한다.

또한 운곡이 만나주지 않아 원통하다면서 태종이 탄식하며 넘었다는"원통재"라는 고개도 있다. 치악산 서쪽 골짜기엔 입석대(立石臺)라는 네모진 돌기둥모양의 큰바위가 솟아있다.

이 입석대는 태종이 운곡선생을 찾기위해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이 묘한 바위를 신기하게 바라보느라 발길을 못돌리고 오래 머물던 곳이다.

입석대밑의 좁고 어두운 골짜기엔 지금도 돌이 많고 비탈이 험한 작은 길이나 있는데 이길은 태종이 운곡을 찾기위해 지난 곳이라고 전한다.

누구보다 지조가 굳었던 운곡 원천석은 죽어서도 자신의 고향인 원주에 묻혔다.

원주시 행구동 돌경이마을의 뒤 골짜기 묘소앞에는 조정에서 운곡의 고절(孤節)을 가상히 여겨 내린 묘비명인 고려국자 진사 원천석 지묘(高麗國子 進士 元天錫 之墓)라고 쓴 묘비가있고 묘소왼쪽 아래로는 이명은(李命殷)이 짓고 허목(許穆)이 쓴 묘말이 세워져 있다.

전에 은둔해 살던 치악산 골짜기의 깊은 소나무 숲속에서 지금도 조선 태종의 스승으로 원천석, 그는 옛날의 그 회고가를 읊는 것인가? ‘석양에 지나는 길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묘역의 잔듸엔 석양이 이미 그 빛을 희미하게 지워가고 있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첬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오며,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려 있는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리어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前冢宰六道都統使崔瑩)〉이라는 시와 우왕과 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한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라는 시를 읊어, 만일 왕씨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던가고 힐책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청구영언(青丘永言)》에 고려의 망국에 대한 한과 자신의 충절을 읊은 시조 1수가 수록되어 있다. 『눈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고, 구블 절(節)이면 눈 속에 프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高節)은 너 이가 노라.』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바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주고 돌아가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풍기, 지금의 영주)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추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절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던 것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1][2]

가계[편집]

  • 고려 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윤열(尹悅)의 손자
  •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尹迪)의 아들
  • 원천석은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원천석이 등장한 작품[편집]

저서[편집]

  • 운곡시사(耘谷詩史)
  • 동락패송
  • 야사(野史)
  • 회고가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원천석(元天錫),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공저, 한국사전연구사(1998년)
  2. 古琴(고금)/ 원천석 매일신문(2014.01.02) 기사 참조
  3. 이중연, 《'책'의 운명》 , 혜안, 2001년, 88 ~ 89쪽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