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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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박씨 (潘南 朴氏)
관향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시조박응주(朴應珠)
집성촌경기도 파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영암군
충청남도 예산군, 금산군 남일면·부리면, 논산시 상월면, 공주시 탄천면
경상북도 문경시, 예천군, 영주시, 안동시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전라북도 진안군
주요 인물박상충, 박은, 박강, 박숭질, 박경리, 박용, 인성왕후, 박응순, 의인왕후, 박동열, 박세당, 박세채, 박태보, 박필균, 박종악, 박지원, 박종래, 박종경, 박윤수, 수빈 박씨, 박규수, 박홍수, 박정양, 박기양, 박제빈, 박제선, 박제순, 박제환, 박이양, 박영효, 박경양, 박승봉, 박서양, 박만서, 박승희, 박승주, 박제승, 박부양, 박지양, 박찬범, 박완서, 박종우, 박찬숙, 박남춘, 박양우, 박항서, 박영선, 박찬대, 박신양 , 박기서,박세현,박하림
인구(2019년)160,964명
비고반남박씨 대종중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기원[편집]

반남박씨의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고려시대에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지냈다. 고려시대 호장은 고려초의 당대등(堂大等)이 고려성종 때 개칭된 것으로서 고려시대 지방호족(귀족) 중 최고위직에 해당하며 조선시대 사대부의 주축이 되었다. 그의 묘는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에 위치하여 재실로 상로재(霜露齋)와 묘역을 수호하는 분암으로 석천암(石泉庵)이 있다.

역사[편집]

시조 박응주의 현손인 박상충(朴尙衷)이 1353년(고려 공민왕 2)에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이자 처남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1,2위로 나란히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경사(慶史)와 역학(易學)에 능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박상충은 신진 유생(儒生)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박상충의 아들인 박은(朴訔)이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에 2위로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1]

반남 박씨는 조선시대 문묘 종사 대현 1명, 종묘배향공신 2명을 배출했다. 특히 박세채소론의 영수로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루면서 반남박씨는 광산 김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여주 이씨, 진보 이씨와 함께 6대 국반(國班)에 등극했다.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정승)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 공신 6명, 장신 3명, 청백리 1명, 호당(부마) 5명이 나왔다. 조선시대 상신(相臣)을 지낸 12명의 박씨(朴氏) 가운데 7명이 반남 박씨(潘南朴氏)로서 인구 대비 높은 비율이다.

분파[편집]

박상충의 아들 박은(朴訔)에게는 3명의 아들 규(葵)ㆍ강(薑) ㆍ훤(萱)이 있고 규의 아들에는 병문(秉文), 병균(秉鈞) 등이 있고 강의 아들에는 륜(耣), 치(䎩) 등이 있다. 그리고 훤의 아들에는 숭문(崇文), 숭질(崇質) 등이 있다. 그리고 박상충의 아우에는 상진(尙眞)ㆍ상경(尙褧)이 있다. 분파로는 세양공파, 도정공파, 부윤공파, 판서공파 등 여러 분파가 있다.

본관[편집]

호장공 박응주로부터 누대에 걸쳐 살아온 반남을 본관으로 삼게되었다. 반남(潘南)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이다. 본래 마한(馬韓)이었으나 백제(百濟)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일명 반나부리현)으로 변경된 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년에(757년) 반남군(潘南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인 현종 9년(1018년)에 현(縣)으로 나주에 속하였고 지금은 나주시 반남면(潘南面)에 이르고 있다.

인물[편집]

가문(家門)을 빛낸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반남박씨가 배출한 7명의 상신(相臣) 가운데 최초로 명문의 기초를 세운 은(訔)이 뛰어났다. 박응주의 6세손 박은(朴訔)이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에 2위로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東德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 이에 누대(累代)에 걸쳐 집성촌에서 세거(世居)해 온 반남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박은은 조선 초 두 차례 왕자(王子)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방원(芳遠:태종)을 도와 공신(功臣)이 되었다. 관직으로는 한성부윤, 형조·호조·병조·이조의 4조 판서와 사헌부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左議政) 에 이르렀고, 아들 3형제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발상(發祥)을 이루어 오늘날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특히 그는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조밥을 먹고 살았으리 만큼 청빈(淸貧)하였고 하직(下職)에 있었을 당시 그를 무척 구박했던 계림군(鷄林君) 류양(柳亮)이 후에 국법(國法)을 어겨 은(訔)이 이를 재판할 기회가 되었음에도 복수는 커녕 오히려 구명(救命)해 주었을 정도로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은(訔)의 맏아들 규(葵)는 세종(世宗) 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치사(致仕)했다. 세계 최초의 로켓포인 ‘대신기전’을 개발한 인물로 밝혀진 둘째아들 박강(朴薑)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좌익삼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책록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다. 그는 군기감에 봉해진 뒤 최무선 때부터 사용하던 ‘주화’에 소발화라는 포탄을 부착하고 200m를 비행할 수 있는 ‘중주화’와 대형포탄을 탑재해 500m 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대주화’를 개발했다. 이들 무기는 세종 30년 총통등록이 발간되면서 ‘중신기전’ ‘대신기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셋째아들 훤(萱)은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훤(萱)의 아홉 아들 중 둘째인 숭질(崇質)은 연산군(燕山君)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내다가 왕(王)의 실정(失政)을 개탄하여 일부러 말 위에서 떨어져 부상(負傷)하였다고 구실을 붙여 3개월간 등청(登廳)하지 않아,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매서운 정치보복에도 화(禍)를 면하여 가문의 융성을 지속시켰다.

한편 청백리(淸白吏) 강(薑)의 손자인 용(墉)은 은율현감(殷栗縣監)으로 있을 때 한 소녀를 끼고 용을 탄 채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딸이 세자빈(世子嬪:인종비)으로 간택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라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조정랑(吏曹正郞) 조년(兆年)의 아들 소(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며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으로 일생을 살았다. 소(紹)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응천(應川)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했고, 둘째 응순(應順)은 선조(宣祖)의 국구(國舅:의인왕후의 아버지)로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청렴결백하게 생활하여 사람들은 그가 국구(國舅)인 줄 모를 정도였다.

응순(應順)의 아우 응남(應男)은 명종(明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6조(六曹)의 참의(參議)와 참판(參判)을 지낸 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으며, 선조 초에 바른말을 잘 하기로 제일 가는 간관(諫官)으로 알려졌다. 선조는 “정치 솜씨가 조선의 으뜸이다” 라고 극찬했다고 하며 강직한 성품으로 불의나 부정에는 인간관계를 초월하여 공박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응천의 아들 동현(東賢)은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과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의금부도사(義禁部都事)에 천거되고 선조 때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그 의 아우 동선(東善)은 선조 때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대사간에 등용되어 이조참판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 동열(東說)은 성균관의 유생들을 지도하여 이퇴계(李退溪)를 배척하는 정인홍(鄭仁弘)과 맞서 싸웠고, 황주목사(黃州牧使)로 나가 부역(賦役)을 고르게하여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광해군 때 예조참의(參議)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그의 아우 동망(東望)은 「조선실록(朝鮮實錄)」편찬에 참여하고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응복(應福)의 막내아들인 동량(東亮:동망의 아우)은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하여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져서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계승하였다. 광해군의 난정 속에서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던 엽(燁:참봉 동호의 아들)은 성지(城地)를 수축하여 방비를 굳게 했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어서는 규율을 확립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진력하여 외침에 대비했다. 당시 권신(權臣)이었던 이이첨(李爾瞻)도 그의 명성에 눌려 굴복했을 만큼 명망이 높았다. 동민(東民)의 아들 환(煥)은 인종(仁宗) 때 양천현령(陽川縣令)과 단양군수(丹陽郡守)를 거쳐 현종(縣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치적(治績)을 올렸던 병(炳)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인 박세채(朴世采)는 연암 박지원(朴趾源)과 함께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박세채(朴世采)는 영·정조 때 탕평책 시행에 기반을 제공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구체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참판(參判) 박정(朴炡)의 아들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했던 박세당(朴世堂)은 숙종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저서인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朱子)를 비판하였으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풍자했다하여, 노론의 반격으로 유배당했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實學者)인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하다. 그는 1737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의 손자로 태어나 과거시험 1차에 장원을 하지만 2차시험은 백지를 내거나 노송을 그려내는 등 사회부조리가 많은 정부의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열하일기는 그가 44세 때인 1780년(정조 4년)에 삼종형(8촌형)이자 영조의 부마인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사절로 청나라 수도인 북경(당시의 연경)과 건륭제의 피서산장인 열하(熱河, 현재 중국의 하북성 승덕)에 가면서 보고 듣고 필담으로 나눈 것들을 남긴 견문기이다. 일반 여행견문기와 다르게 조선의 낙후된 농업기술과 물류 및 유통산업의 낙후성을 비판하고, 멸망한지 100년이 넘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실용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해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그밖에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호질, 허생전 등과 같은 작품도 남겼다. 그는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실학자로 활동하였고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그의 아들은 현감을 역임한 박종채(朴宗采)이며 이조판서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종채의 아들은 개화사상가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이다. 박규수는 1848년 중광문과에 급제한 후 한성부 판윤, 이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무장한 제너럴샤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는 실학사상을 발전시킨 개국통상론을 주장하였다. 개국통상론은 조선이 부국강병의 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서 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공관계가 아닌 국가 간 평등한 통상관계로 보아야한다는 점과 서양기술의 실리를 취해야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의 개국통상론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는 초기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말인 1800년대 후반에 형조참판(1879년) · 최초의 주미전권공사(1887년) · 홍문관 부제학 · 호조판서 · 한성부 판윤 · 내각총리대신(1895년) · 내부대신 겸 수상(1896년) ·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을 지낸 박정양(朴定陽)이 있으며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던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형제가 있다. 박영효는 1861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공조판서인 박원양(朴元陽)이다. 12세 때 철종의 유일한 혈육인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금릉위(錦陵尉) 상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또한 1882년에 그가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태극사괘(太極四卦)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재도안해 국기로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태극기의 원형이 되었다.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1884년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압하였지만, 삼일천하로 그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였으며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재차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했다. 그는 철종의 부마이자 고종의 친척매제, 조선말의 문신이자 정치가 그리고 개화사상가로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가인 박찬익(朴贊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에서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간민교육회 평의원·부회장, 동제사(同濟社)에서 호응조직건설과 독립운동자금마련 활동, 신흥무관학교 중국어·한국사 교사, 김좌진장군과 여준선생 등과 협의해 대한독립의군부 결성, 김구·안창호·이동녕·이시영 선생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국무위원과 법무장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국가 성명 설명
고려 박응주 반남박씨 시조
고려 박은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인성왕후 조선 인종의 왕비
조선 의인왕후 조선 선조의 왕비
조선 박세채 종묘문묘 동시 배향공신
조선 박세당 조선의 실학자
조선 박지원 조선의 실학자
조선 박규수 조선의 학자
조선 박태보 조선의 학자
조선말기 박정양 조선 말기의 문신
조선말기 박영효 조선 말기의 관료
조선말기 박제순 조선 말기의 관료
일제시대 박찬익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박계양 대한민국 초대의사 (의사면허 제1호)
대한민국 박찬법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2]
대한민국 박찬숙 전 국회의원[3]

항렬자[편집]

반남 박씨의 항렬(行列)은 모든 파(派)가 동일하다.[4]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편집]

인구[편집]

  • 2000년 139,438명
  • 2015년 160,964명

집성촌[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