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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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National Emblem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국기 국장
국가의용군 진행곡
People's Republic of China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베이징
최대 도시상하이 (도시 인구)
충칭 (행정 구역 인구)
정치
공용어표준 중국어
정치체제일당제, 공산주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공산당 총서기
(최고지도자)
시진핑
국무원총리
전인대 상무위원장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검찰원장
리커창
리잔수
왕양
저우창
장쥔
역사
건국 
 •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1931년 11월 7일
 • 대장정1934년 11월 5일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 10월 1일
지리
면적9,596,960 km2 (4 위)
내수면 비율2.8%
시간대CST1 (UTC+08:00)
인구
2016년 조사1,374,370,000명 (1위)
인구 밀도140명/km2 (72위)
경제
GDP(PPP)2015년 어림값
 • 전체$18조 9,758억 (1위)
 • 일인당$13,801 (75위)
GDP(명목)2015년 어림값
 • 전체$11조 2,119억 (2위)
 • 일인당$ 8152
HDI0.719 (91위, 2014년 조사)
통화런민비 (위안)2 (CNY)
기타
ISO 3166-1156, CN, CHN
도메인.cn3
국제 전화+86
1 전국이 단일 시간을 쓴다.
2 다음 지역은 다음 통화 단위를 사용한다.
 • 홍콩: 홍콩 달러
 • 마카오: 파타카
3 다음 지역은 다음 국가도메인을 사용한다.
 • 홍콩: .hk
 • 마카오: .mo

중화인민공화국(중국어 간체자: 中华人民共和国, 정체자: 中華人民共和國, 병음: 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 중화런민궁허궈[*] 이 소리의 정보듣기  영어: People's Republic of China)은 동아시아에 속하는 국가이다. 줄여서 중국(중국어 간체자: 中国, 정체자: 中國, 병음: Zhōngguó 중궈[*])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베이징(北京, 북경)이며, 최대 도시는 상하이(上海)이다. 주요 도시로는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난징, 시안, 푸저우, 칭다오, 충칭 등이 있다. 중국은 일본제국의 전쟁 범죄에 의한 괴뢰국들이 생겨났고 여러 서양 열강의 식민 제국들에 의해 식민 지배 당하면서 서양 식민 제국들의 중국 식민지 범죄로 탄생한 여러 군벌 정부 국가들로 나뉘어졌으나 후에 러시아의 간접 지배의 영향으로 공산화되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공 내전에서 소련의 원조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의 중심인 마오쩌둥이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고 초대 국가주석이 되었다,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일당제로 통치되고 있으며, 건국 이후 크게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과 수많은 국가적 피해와 민간인 피해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 문화대혁명 등이 벌어지고,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중국이었다. 소련의 영향력이 없어진 후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을 시행하였고 시장경제체재가 도입되어 사회주의화하였다.

국명[편집]

국명의 약칭은 중국(中国)이고 중화(中华)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밖에도 국외에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공은 본래 중국 공산당의 약칭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서 중국 공산당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건국 초기에는 1949년 이전의 시대를 구중국,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를 신중국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하였다.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분단국가로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의 합법 정부는 자국임을 표방하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원[편집]

황하

황하 문명 이래 중국 대륙에서는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그리고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 그리고 여러 이민족들과 싸워온 역사가 매우 길었으며, 그런만큼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정복한 역사가 대부분이었지만 반대로 이민족에게 침략받아 지배받은 역사도 길게 있었다. 한마디로 중국이 강성해지면 이민족들이 몰락하고 이민족들이 강성해지면 중국이 몰락하는 구조였다.

한나라 때 중국인의 기원이 되는 한족의 기틀을 세워졌고 한무제 치세와 광무제 치세에는 전성기를 맞아 주변 이민족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도 했었지만 서진의 멸망 이후 북방 이민족이었던 선비족이 중원으로 쳐들어와 북조를 세우면서 남북조시대 때 이민족들이 북방 한정으로 중국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선비족들이 중국 각지를 지배하면서 이주하면서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화가 진행되었다. 400년 넘는 시간 끝에 수나라가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했었지만 무리한 토목공사와 대규모 원정으로 인해 나라가 멸망해버렸다. 이후 당나라가 건국되어 당태종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주변 이민족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거나 정복했지만 말기에 들어서 황소의 난으로 멸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송나라는 오호십육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했으나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한 탓에 군사력이 약해져 주변 이민족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었다. 원나라 때는 많은 중국인들이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많은 몽골인들이 지배층으로서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한족은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영락제 때 전성기를 맞이해 영토를 크게 넓혔으나 말기에 극심한 부정부패와 임진왜란으로 크게 약해졌다. 이후 만주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청나라로 중국을 통일하면서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의 한족의 혼혈화가 진행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대영 제국에 패배하였고 서양 열강과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조계지를 설치하였고 중국 대륙은 서구 열강의 거의 반식민지 유사하게 전락했다. 홍콩대영 제국에 넘어갔으며 마카오포르투갈에 넘어갔다. 청나라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피지배층이던 한족의 농민들과 노비들이 양무 운동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청나라와 열강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각지의 군벌에 의한 내전으로 중화민국은 분열되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 중일 전쟁 중 세력을 늘려 온 중국 공산당1945년일본 제국이 패망 이후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한편 내전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의 총통 장제스타이완으로 도피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편집]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 날을 궈칭제라고 한다. 그해 마오쩌둥는 “5억 중국 인민이 분연히 일어나 혁명을 이룬 만큼 국가 건설의 과제를 달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이른 시일 내에 온전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된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추진하면서 인민공사와 전국적인 대약진 운동을 실시했다. 그러나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행된 급진적이고 무모한 정책 운용은, 농촌부의 황폐화로 인해 식량난과 대량의 아사자를 발생시키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경제를 재건할 방법으로 마오쩌둥류샤오치가 대립하였고, 마오쩌둥은 권력 탈환을 위해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중 마오쩌둥으로부터 “반혁명파”라고 규정된 많은 사람이 탄압당하거나 학살되어, 국내는 일시 내란 상태가 되었다. 또 중국 각지의 귀중한 전통 문화재도 반혁명적인 존재 간주되고 파괴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고, 일단 화궈펑(華國鋒)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었다.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실권을 잡았다.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유롭게 미국서방 세력에 개방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를 견지함과 동시에, 혼합경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진행했고 이를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은 경제가 빠르게 발전했다.

급격한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의 확대와 환경 파괴가 문제가 되어 왔다. 또 중국 공산당 체제를 위협하는 활동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열을 촉진할 수 있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며 강경한 자세를 취해 왔다. 이는 1989년 톈안먼 사건 진압과 2005년 반분열국가법 성립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한편, 2010년에는 민주화 운동가 류샤오보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다.

지리[편집]

중국 대륙의 위성 사진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1 km²이며 2015년 11월3일 러시아로부터 아편전쟁 시기 러시아에 할양했던 4.7km2의 영토를 반환받아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5.7 km²로 확장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 있다. 국경은 총 22,117km로, 국경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이다. 북동쪽으로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북한), 북쪽으로 러시아, 몽골,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남아시아네팔, 부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파키스탄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라오스, 미얀마, 베트남과 접한다. 해상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 동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과 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므로 지방마다 기후 등 지리 특색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지형은 서고동저로 동쪽에는 화베이 평원둥베이 평원 등의 평지가 있고, 서쪽에는 티베트 고원, 톈산 산맥 등의 험준한 산지가 많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곳은 티베트 자치구에 위치한 에베레스트 산(주무랑마 봉)으로 높이는 8,850m이다. 가장 낮은 곳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위치한 투르판 분지로 높이는 -154m이다.

정치[편집]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정당, 정파, 군, 기타 개인 등으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탄생시킨 모체로서 국가권력기관의 핵심을 이루었으나 사실상 공산당의 절대우위가 인정되었고 1954년 이후에는 공산당이 정치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949년 '공동강령'(임시 헌법)의 채택 이래 1982년까지 4차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국가권력기관·인민해방군에 대한 권력구조 조정작업이 수반되었다.

헌법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이고,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나 국가주석은 군통수권도 없고 요직을 겸할 수도 없는 의전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으며 전인대 역시 공산당이 우위에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총서기·정치국·군사위원회 주석)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편집]

3권 분립을 특징으로 하는 서구의 정치와 달리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사법과 행정을 감독하도록 하는 민주집중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에 의한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이다(혹은 일당 집권, 다당 협상 체제라 일컫는다). 그 외에 8개의 정당(‘민주제당파(民主諸黨派)’라 부름)이 존재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따르고 있으므로 사실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편집]

형식적으로는 최고 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에 권력이 집중되는 민주집중제를 취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서구의 의회에 상당하는 기구로 32개의 성, 자치구, 직할시, 홍콩 특구 및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되는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의 개정과 헌법 실시, 감독 및 기본 법률을 제정, 개정하며 국가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하고, 국가 경제, 사회 발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심의, 비준한다. 산하의 상무위원회가 소집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는 18세 이상의 중국 공민에 의하여 선출되는데, 향과 현2급의 인민대표는 직접선거를 거쳐 선출되지만, 그 상위의 대표들은 간접으로 선출된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들은 성급인민대표들의 선거로 선출된다.

국가 주석[편집]

국가 주석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으로 2회를 초과하여 연임할 수 없다. 국가주석은 국내외에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며, 법률을 공포하고,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부장, 각 위원회 주임, 국무원 비서장을 임명한다. 하지만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헌법에 국가주석 임기를 폐지하고 개헌하게 되면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장기집권하게 된다

국무원[편집]

총리가 수장인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회의의 집행기관으로 법률에 근거한 행정법규 및 명령을 제정, 공포한다. 인민 경제, 사회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한다.

인민검찰원[편집]

인민검찰원은 중국 최고 검찰기관으로 지방의 각급 인민검찰원과 전국인민검찰원의 활동을 지도한다.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상무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정치국 상무위원회[편집]

실제로 국정을 움직이는 것은 ‘당(黨)’이며, 당의 최고 지도집단인 정치국이 있고 정치국안에 상설집행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政治局常務委員會)가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이다.

말단 행정기구[편집]

중국공산당은 중앙뿐만 아니라 말단 행정기구까지 장악한다. 말단행정기구 역시 중앙과 같은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각급 지방 행정기구는 해당 지역 공산당 서기가 실력자이며 공산당 부서기인 장이 행정을 관리한다.

민주화 요구[편집]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민주화 요구도 확대되어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국외에서는 미국의 화교 매체인 대기원시보가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사설 ‘구평공산당(九評共産黨)’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홍콩마카오일국양제[편집]

1997년 영국에서 반환받은 홍콩1999년 포르투갈에서 반환받은 마카오는 고도의 자치권을 가진다. 입법부의 일부 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이 자치권은 일국양제라 불리는데 홍콩인들과 마카오인들은 리보실종사건 등의 발생을 보며 지켜지지 않는 일국양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현재 홍콩같은 경우는 독립을 주장하는 본토주의가 유행할 정도이다.

타이완[편집]

타이완은 청나라 때 중국의 영토였다가, 일본과 청·일전쟁에서 진 후, 센카쿠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와 타이완반도를 일본에 넘겨줬다가 나중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패망하자, 중국영토에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49년까지 중국 공산당을 이끄는 모택동(마오쩌둥)과 중국 국민당을 이끄는 장제스(한국명:장개석)두 세력이 국공내전을 하다가 국민당을 이끄는 장제스가 패하여 타이완반도로 내려와 중화민국인 대만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1949년 10월 건국하여 정식국가로 인정받았으나, 세계 여러나라들과 중국, 한국 등은 장제스가 타이완 섬에 세운 중화민국을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정부는 타이완도 원래 중국영토라며 하나의 중국, 중화사상을 내세워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독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중국 본토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하며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의 각각의 정부는 여전히 분쟁 중이다.

행정 및 행정 구역[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행정기관은 국무원으로 즉 중앙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내정, 외교, 재정, 경제, 문화, 교육, 위생, 공공사업 등 행정사무를 조직하고 관리하여 행정결정과 명령을 반포하고, 전국 지방 각급 국가행정기관의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국무원은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위원회 주임, 각부부장, 심계서 계장, 비서장으로 구성된다. 28개의 부서로 조직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22개의 (省)[1], 5개의 자치구(중국어 간체자: 自治区, 정체자: 自治區), 4개의 직할시(중국어 간체자: 直辖市, 정체자: 直轄市), 2개의 특별행정구(중국어 간체자: 特别行政区, 정체자: 特別行政區)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홍콩, 마카오,타이완를 제외한 지역을 중국 대륙(중국어 간체자: 中国大陆, 정체자: 中國大陸; 중국 본토)으로 칭한다.

사법[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사법 절차에서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영장 없는 자의적인 체포 등의 인권 유린이 발생하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법은 1949년 당시 초강대국이던 소련 법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고, 1979년 이후 경제 현대화 과정에서 미국유럽 등지의 투자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되고 있다.

대외 관계[편집]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지배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유 경제 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이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것은 분단국가중화민국에 대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스스로를 "중국의 정통한 정부"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구조 하에서, 건국 당초에는 완전히 동측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의 중소 대립을 거쳐, 1964년 1월에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2] 1979년 1월 1일부터 미국과 수교하는 등 서방 측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고, 동시에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냉전 하에 있어서 서방측 여러나라와 소련과의 대립 관계의 미묘한 밸런스의 중간에서 [모호한 표현], "중국을 대표하는 정당한 정부는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다"라는 기정 사실을 서방측의 다수 국가로부터 확인받아 하나의 중국 정책도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원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 이후부터 경제 면에서의 민주주의인 여러 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도 가맹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92년경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한 것으로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타이완을 실효적으로 통치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UN 회원국22개국(바티칸은 준회원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있고, 부탄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모두와 외교관계가 없다. 폴란드는 1949년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양국은 10월 7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3][4]

외교 문제[편집]

  • 영토
  • 역사 분쟁
    • 둥베이(동북공정):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서 동북공정이 대표적인 외교 분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부여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 다른 나라와의 갈등: 중화인민공화국은 베트남, 몽골 등 주변의 이웃 국가와도 역사 문제로 서로 대립하고 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은 내몽골 자치구칭기스칸의 묘를 만들어 몽골의 역사를 왜곡하기도 했다.
    • 타이완 문제: 타이완 문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문제이다.

대외 정책[편집]

1970년대 이전, 국제사회가 공산주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놓여있다고 인식하고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오쩌둥 중심의 대외정책이 그런 상황에서 우방인 소련과의 전쟁을 막기위한 동맹정책이었다면, 마오쩌둥 사망부터 1991년 소련 붕괴덩샤오핑장쩌민 중심의 대외정책은 국제사회가 평화의 발전 단계에 놓여있으며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독립자주 비동맹정책을 고수하는 대신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소련 붕괴 이후 기존의 군사적 위협보다 정치, 경제, 사회적 위협이 증가하자 장쩌민은 전통적 안보위협요인에만 주목하는 기존의 안보관이 아닌 신안보관을 주요 안보정책의 기조로 활용하게 되었다.

군사[편집]

중국 인민해방군의 훈련 모습

헌법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는 국가(정부)의 군대가 아닌 의 군대이다. 따라서 군대의 정식 명칭은 ‘중국군’이 아닌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과거에는 징병제였으나, 현재는 경제발전과 인력의 고급화로 인하여 실질적인 모병제로 운용하고 있다. 현역병이 2,285,000명이다. 전차 7,470대, 전투기 4,092대, 전함 562척을 보유하고 있다. 조만간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군사력 순위 2위의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국은 러시아의 T-72를 개량한 '99식'전차를 주전차로 사용하며, IL-28이라는 구형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다. 숫자만 많고 약하다고 무시당하던 중국인민해방군은 현대화로 해군·공군 및 사이버·위성 전력을 크게 확대하고 러시아쿠즈네초프 항공모함을 사들여 강력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 일본, 몽골, 필리핀, 베트남 등은 국가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경제[편집]

경제사[편집]

경제발전시기[편집]

상하이 증권거래소

중화인민공화국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대생산국으로 특히 1949년 정부수립 후 각종 산업의 생산고가 점차 증가일로를 걸어왔다. 제2차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경제의 발전단계는

  1. 1949~52년의 경제부흥기
  2. 1953~57년의 제1차 5개년계획기
  3. 1958~60년의 제2차 5개년계획기 (2년 앞당겨 달성)
  4. 1961~63년의 조정기
  5. 1966~70년의 제3차 5개년계획기
  6. 1971~75년의 제4차 5개년계획기
  7. 1976~85년의 경제발전 10개년계획

을 착수했으나 결함이 노출되어, 1979~81년의 경제조정기를 거쳐 1986~90년의 제7차 5개년계획에 이어 2010년까지 제9차 5개년계획에 들어갔다.

상하이의 주요 쇼핑가 난징루의 야경

경제부흥기[편집]

이들 각 시기의 특징은, 경제부흥기에는 1952년에 이미 전전의 최고생산고에 도달하여 문자 그대로 경제재건에 성공했고, 제1차 5개년 계획기(1953~57년)에는 소련의 원조로 중공업의 확충이 단행되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말기에는 (a) 중공업의 중시와 농업의 경시, (b) 중공업 편중, 경공업 경시, (c) 대규모화·기계화의 무리한 목표설정에서 오는 자금의 낭비와 국내기술의 부실, (d) 공업의 내륙편중 등의 결함이 노정되었다.

대약진 운동[편집]

1958년에 시작된 제2차 5개년계획(대약진운동)에서, 마오쩌둥 전 주석의 정책으로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경제부흥기의 미해결문제의 해결을 위해 (a) 농업과 지방공업, (b) 경공업과 중공업, (c) 중앙공업과 지방공업, (d) 대규모 공업과 소규모 공업, (e) 재래식 생산과 외래식 생산의 조화를 지향했고, 이 기간중 공업생산 증가율은 40%에 달했다. 그러나 공업발전은 내용적으로 극히 불건전하여 (a) 생산품이 품질조악으로 사용가치가 적었고, (b) 재래식 생산 방식은 원료, 노동력, 연료의 낭비를 초래했고, (c) 기술문제가 등한시되었기 때문에 사고의 발생률이 높았으며, (d) 공업부문의 균형적 발전이 저해되었다.

인민공사[편집]

농촌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1958년부터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소위 대약진기라는 이 시기에 이어 1959~61년에 걸친 연속적인 자연재해로 인민공사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어 농업생산은 크게 줄고 공업원료는 부족하여 경공업생산도 그 파급으로 타격을 입는 등 농·공 사이의 균형이 크게 문제가 되고 게다가 1960년 7월 국경 분쟁으로 인한 중·소대립의 악화로 소련의 공업전문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소련의 무상원조, 자재지원도 중단되어 심각한 경제위기가 찾아들었다.

경제조정기[편집]

그래서 1961년부터는 경제조정기가 시작되어 농업재해, 대약진의 실패, 소련의 원조중단 등에서 온 위기를 극복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었다. 1961년에는 조정·공고화·충실·생산제고 등의 목표로 정책이 전환되어 공업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1962년부터 농업생산이 호전하여 경제 전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순차적인 발전이 도모되어 공업의 위치가 2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공업구조 내부의 조정이 중시되었고, 농업 지원도의 재고로 공업의 내적 충실화가 모색되었다.

현대공업체제[편집]

3차 5개년계획(1966~70년) 실시 이후 독립되고 거의 완전한 근대공업체제의 건설단계에 들어갔다. 1967년 이후 홍위병 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종 산업, 특히 광공업 부문에서 생산이 상당히 저하했다. 중국의 산업건설의 기본방향은 농업을 기초로 하고 광공업에 선도구실을 시키려는 것인데, 1968년 이후 홍위병 난동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 생산도 다시 호전의 기미를 보였다.[5] 결국, 국가 성립 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경제는 대약진정책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뒤떨어져 있었다.

개혁개방[편집]

1978년에는 경제발전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4개 현대화에 착수했으나 각종 누적된 결함이 노출되어, 1979년 조정방향이 설정되면서 본격적인 개방과 개혁정책이 건의되었다. 1980년초에는 기업의 자율화, 외국기업의 투자 보강, 금융의 자율화, 세제 도입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채택한 후, 1984년 대규모 경제개혁이 채택되었다. 이에 1985년 인플레와 과열경기현상이 나타났고, 1986년 4월 안정과 균형에 기저를 둔 지속적 성장을 목표로 한 제7차 5개년계획(1986~90년)을 채택했다.[6]

세계의 공장[편집]

덩샤오핑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제도 도입 등의 개혁 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세계의 공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7]세계무역기구(WTO)의 발표로는, 2003년의 대 중국 직접투자는 535억 달러가 되어 미국을 제치고 실질적으로 세계 최대의 직접투자 수입국이 되었다.[출처 필요] 세계 최대의 인구와 강한 경제력 덕분에 중국 경제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국내 노동자들은 연안부나 대도시 근교를 제외하면 지방 인민의 대다수가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동일한 정도의 빈민층이며, 농업을 할 수 없는 계절에 도시 지역에 유입되어 객지에서 노동하고 있다.[출처 필요] 그들은 매우 저렴한 임금으로 도시 지역에서 일하기 때문에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을 목적으로 미국, 서구대한민국·일본의 기업 진출도 번성하여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도 대한민국에 무역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출처 필요]

현재 경제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8.5%로 예상하였다. 다른 나라인 인도 역시 경제성장률을 6.3%로 큰 폭으로 예상하였다.[출처 필요]

농업[편집]

물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모습

중국에는 농사를 짓기에 편리한 3대 평야가 있는데, 호북평야, 호남평야, 사천평야이다.

지역별 농업[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토는 신석기(新石器) 시대에 이미 경작되어 있었고, 경지도 널리 분포해 있어 각지의 토지 이용이나 농업 경영방식은 지역별 자연조건이라든가 사회환경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치밀한 현지조사를 한 로싱백은 화이허(淮河)와 친링(秦嶺)선에서 수도(水稻)지역과 소맥(小麥) 지역으로 크게 둘로 나누고, 나아가서 다시 소맥지역을 창장(長江)수도 소맥구, 쓰촨(四川)수도구, 수도·차(茶)구, 서남수도구, 수도 2기작구(二期作區)로 세분하고, 한편 북부의 소맥지대를 겨울보리·수수구, 겨울보리·조구, 봄보리구로 구분했다.

전통적인 농업방식[편집]

이러한 지역구분은 주변 지대로의 확대도 가능하여 동북지구를 콩·수수구로 보고 내몽골 지방과 티베트 및 칭하이(靑海) 지방을 목축구로, 타이완과 하이난섬(海南島)을 2기작구로 볼 수도 있다.종래 중화인민공화국의 농가는 주로 자급용기의 곡물과 콩 종류를 재배하고, 여력이 있으면 판매용 작물을 길렀다. 수도(벼)는 기온이 높고 강우량이 많은 화이허 이남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특히 광둥·푸젠(廣東·福建) 양성(兩省) 연해 지방은 이모작(二毛作)이 가능하다.

[편집]

쌀의 총생산량은 17,825만t(1994년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에 이어 세계 제2위이지만 국내소비가 많기 때문에 수출은 소량이다.

[편집]

소맥(밀)은 중국본토 북부와 동부지구 북부를 중심으로 하며 화이허와 양쯔강에 연하여 평야지대에서도 제2기작으로서 재배된다. 산시(陜西), 산시(山西) 북부에서 옌산(燕山)산지 북서에 걸치는 지방에서는 기후가 한랭한 관계로 춘경보리가 재배된다. 총생산 3,200만t(1994년 기준)으로 만주, 바오즈 등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된다.

고구마[편집]

고구마는 산둥(山東), 허베이(河北), 허난(河南)에서 재배되고 조, 수수 등은 동북과 화북의 평야 및 쓰촨(四川) 분지에서 많이 산출된다.

옥수수[편집]

옥수수는 랴오둥반도, 황하 이북의 후베이(湖北)평야, 산시·산시의 남부에서 쓰촨에 걸치는 지대에서 많이 나는데 식량과 사료로 쓰인다.

[편집]

콩은 둥베이 평원산둥 반도에서 많이 나오는데 총생산고는 약 1,212만 t이다.면화는 랴오허(遼河) 하류의 평야에서부터 후난(湖南), 쓰촨, 구이저우(貴州)의 각 성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해 있으며 허베이 평야지대, 산시·산시의 남부, 후난,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의 제성이 그 생산 중심이 되어 있다.

면화[편집]

면화는 관개작물로 결실기의 건조한 기후가 양질의 작물을 낳는다.

가축[편집]

가축은 돼지, 닭, 오리 외에 노력과 배료원으로서 나귀, 노새(밭농사지대), 소, 물소(수전지대), 말(초원지대) 등이 많으며 양은 식육 및 모(毛) 자원으로서 동북지구, 내몽골 지방, 신장·위구르 지방, 티베트 등 변경 지대에서 많이 사육된다.[8]

문제점[편집]

중화인민공화국에는 고도 경제 성장의 이면에, 농업의 저생산성, 농촌의 황폐, 농민의 저소득이라는 3농 문제가 심각하여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의 수입격차가 계속 확대하면서 토지 수용에 과한 쟁의도 빈발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농업생산진흥책과 농업세의 폐지 등에 열의를 보여서, 2007년 3월의 제10기 전인대 제3회 회의에서는, 물권법을 제정하여 토지사용권의 물권화를 인정하고 농촌대책비를 긴급 증편하여, 농촌의 의료와 교육에 대한 보조금의 증액을 결정하였다.

공업[편집]

양쯔 강 유역의 공장 지대

2차대전 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업 분포는 일본이 지배했던 동북지구와 함포(艦砲) 외교 아래 열강이 투자한 연해 지역·대하천 유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이 1937년에 발발하면서 국방상의 배려로 공업이 내륙지방으로 소개되고, 또 전후에는 공업의 적정재배치가 단행되어 종래의 공업 편재상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전전 동북지구의 안산 벤시후를 비롯해 허베이, 산시, 쓰촨, 후베이 등지가 중심이 되었던 제철·제강업은 전후 기간산업으로서 중요성을 더하여 우한(武漢), 바오터우(包頭) 등지에 거대한 철강공업 기지가 신설되었다. 중기계공업을 보면, 광산·야금기계가 타이위안(太原), 선양(瀋陽), 치치하얼(齊齊哈爾) 등지에서, 발전기가 상하이(上海), 하얼빈(哈爾賓) 등지에서, 그리고 정유기계가 란저우(蘭州)에서 제조되고 있다. 중형 기계공업으로는 방직기계가 유위츠(楡次), 상하이, 칭다오(靑島) 등지에서, 조선(造船)이 뤼다(旅大), 상하이 등지에서, 철도 차량이 뤼다, 치치하얼, 칭다오 등지에서 자동차가 장춘(長春), 뤄양(洛陽), 정밀기계가 상하이, 하얼빈, 샤먼(廈門), 염료·의약품이 상하이에서, 비료가 난징(南京)에서 생산되고 있다.전전(戰前)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업은 경공업 위주였는데 특히 방적업이 성한 톈진(天津), 칭다오와 면방직이 성한 상하이, 우시(無錫), 난퉁(南通) 등 양쯔강 연안의 여러 도시가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전후(戰後) 상하이의 면방직공장이 확충되고 면화지대인 스자좡(石家莊), 한단(邯鄲), 정저우(鄭州), 시안(西安), 셴양(咸陽), 우한(武漢), 우루무치(烏魯本齊) 등지에 대공장이 건설되는 등 내륙의 원료 산지로의 공업 진출이 활발하다.식품공업은 전전 상하이, 칭다오 등지가 중심이 되어 연초가공, 제분, 육류가공, 양조 등이 성했는데 전후에는 유류(乳類)를 가공하는 대공장이 하이라얼(海拉爾), 시닝(西寧)에, 육류가공공장이 우한(武漢)·청두(成都)에 건설되고 또 상하이로부터 이전한 방푸(蚌埠)의 일용품공업이나 뤄양(洛陽)의 제분·착유공업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동북지구는 유지·제당, 본토 북·동부는 제분·연초·유지·남부는 제당으로 각각 알려져 있다.[9]

무역[편집]

2017년 기준으로 중국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미국 (19.01%), 홍콩(12.34%), 일본(6.06%), 한국(4.54%), 베트남(3.16%)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한국(9.63%), 일본(8.99%), 아시아(8.46%), 미국(8.38%), 중국(7.18%)으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모두 인접 아시아 국가들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263,37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843,793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변속기 장치(165,991,555.66달러), 저장 장치(89,690,331천 달러), 전자 부품(74,102,011천 달러), 반도체(68,167,379천 달러), 전화기 부품(51,057,293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반도체(260,920,122천 달러), 석유(163,820,666천 달러), 철광석,604,641천 달러), 금광석(48,740,696천 달러), 전화기 부품(41,293,629천 달러)이다.[10]

소득 격차[편집]

개혁 개방 이후의 활발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농민과 도시 지역 사람들과의 소득 격차 문제가 있으며, 이는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산주의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이 빈부 격차 문제는 향후의 중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이며, 새로 출범한 후진타오 정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농촌과 도시 지역 간의 빈부 격차 문제 해소를 논의하는 등 긴급하게 대응하고 있다. 2005년 3월의 전인대 이후, 후진타오 지도부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경제성장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 치안, 실업, 부패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생활고 및 토지수용이나 독직 등 당국에의 불만으로부터 중국 각지에서 데모와 폭동이 빈발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의 악화를 염려하며,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중요과제로서 제기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을 확립하고, 빈부의 격차의 해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이해에도 저촉하기 때문에, 그 실현에는 곤란이 뒤따르고 있다.[11] :497 1990년 빈곤율은 50%이나, 최근 많이 줄었다. [출처 필요] 또한, 열악한 노동 환경도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교통[편집]

아시아에서 제일 바쁜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중화인민공화국의 교통은 1949년부터, 특히 1980년대 초반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공항, 도로, 철도 건설은 2010년대에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운송 수단으로서 중요한 철도는 20세기 중반이래 2배의 길이로 늘어났고, 전국을 잇고 있다. 주요 대도시들은 전철 시스템을 운영 또는 건설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다. 고속도로와 도로 체계도 급속히 성장하였고 그 결과 중국 전역에서 자동차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중국의 교통 체계는 방대한 국토에 걸쳐 넓은 교통 교차점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나, 교차점들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발달한 해안 지대와 주요 강을 따라 발달한 도시들에 집중되어 있다. 중국 교통 기반시설의 물적 상황과 그 이용 실태는 지리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골 지역에서는 아직도 비기계적인 운송 수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반면, 상하이푸동 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자기부상열차도 건설되었다.

티베트과 중국의 녹차를 주로 교환한 것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차마고도 (윈난 성 ~ 티베트)도 지금은 국도와 고속도로, 티베트 철도로 대체되어, 이제는 관광객들이 일부 이용할 뿐이다. 현재 중국의 교통 체계의 상당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은 현재 교통 인프라의 업그레이드를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까지, 중국의 경제는 인프라 개발 부족에 불구하고, 교통 인프라를 개발할 여력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 정부는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물자를 수송하고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세계 은행의 1990년대 중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로 인하여 손실되는 물류량이 중국 GDP의 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물류 비용은 생산 원가의 20%로서 미국의 10%, 기타 선진국의 5%와 크게 대비된다. 중국의 항구는 수로의 이용을 위해 크게 개선되고 있으며 공항 설비도 향상되고 있다. 건설 장비, 엔지니어링, 콘테이너 보안, 전자산업, 안전 도구와 같은 교통 관련 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베이징 역

철도는 동북지구와 북부에 편재해 있다. 철도는 중국에 있어서 현대 운수의 근간을 이룬다. 중국 철도의 총 길이는 2009년에 86,000km로 연장되었다. 철도 밀도는 89.6km/10,000km2로, 이웃한 대한민국에 비하여 0.29배에 불과하다. 여객 수송은 연간 215억명/km, 철도선은 60여개를 헤아리고, 수송량은 전수송량의 85%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도로의 적극적인 건설로 1978년에는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한 도로의 총연장이 89만km에 이르렀다.[12] 항공 교통이 1990년대 말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철도 교통은 여전히 가장 이용객이 많은 교통 수단이다. 1990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노력으로 중국의 고속도로는 2009년 기준으로 65,000km를 넘는다.[13] 이것은 길이 기준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자랑하는 수치이다.

1,200여개의 하천은 예로부터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고 경제적 동맥이 되어 왔으며, 특히 창 강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부터 중국에서 남선북마(南船北馬)라 일컬은 것은 창 강 수계가 차지하는 경제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수나라 때부터 화중의 농산물을 화북으로 운송할 목적으로 건설된 대운하는 현재는 국부적으로 이용될 뿐이고, 남북간의 물자 수송은 경한선·진포선 등의 철도로 하고 있다.[14] 주 강, 쑹화 강도 주요한 하천이다. 1956년 중국의 민간항공로의 총 연장은 1만7,194km 였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평양, 하노이, 양곤, 울란바타르 등지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고 국내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항공망도 정비되어 있다. 영토가 광대한 중국에서는 항공 발전은 큰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철도편으로 10~15일이 소요되는 베이징 우루무치간의 거리는 항공로로 8~10시간이면 갈 수 있다.[15] 중국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16]

사회[편집]

공휴일[편집]

설날, 청명, 노동절, 현충일, 단오, 추석, 국경절 등에 연휴[17]가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노는 것도 아닌 게 바로 전이나 그 다음 주말에 출근하는 대체평일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이 영토가 매우 넓은 대신 비행기 등을 이용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 적어서 연휴를 짧게 하면 고향 방문이나 여행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에 연휴를 길게 하는 대신 주말근무로 때우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인구와 주민[편집]

중국은 56개 민족이 거주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한족(漢族)들이다. 한족(漢族)이 중국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55개의 소수 민족들이 8%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의 특이성은 혼혈 종족이며 그 이유는 한족(漢族)들이 원주민으로서 살던 베이징, 난징, 상하이 등 한족의 도시에 수 많은 튀르크계, 몽골계 민족들이 침략해 와서 한족(漢族)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특히 선비족들이 북조를 건국하고 관롱집단 선비족이 건국한 당나라 때까지 중국 한족들은 귀족과 노예 귀천에 상관없이 선비족 무사 귀족들에게 정복되어 있었다. 선비족들이 중국인들은 선비족, 몽골인, 만주인들의 오랜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족(漢族, 중국인)들은 사실상 지배자 선비족-몽골인에 의해 피지배자 한족들이수동적으로 수혈되어 몽골-만주인들의 혼혈들이다.

중국 전체의 인구는 2015년 말에 13억 5569만 명이다. 인구의 55.6%(2015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인구증가율은 0.52%(2010년~2015년)이며 199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1979년부터 인구 억제책으로서 한 부부에 한 자녀라고 하는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1자녀 가정에는 장려금, 학교에의 우선 입학 등의 혜택이 주어지나, 위반한 자에게는 반대로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다(多)자녀의 전통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강하여, 정책이 형해화된 지역도 많다. 중위 연령은 37.0세이며 2015년 노인 인구 비율이 9.55%로 고령화 사회에 해당한다.2040년경에는 65세 이상의 노령 인구가 20%에 달하고,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부는 2002년 9월 1일에 "인구와 계획 출산법"을 시행하여, 조건부로 1자녀 정책을 완화하였다.[11] :497[18] 중국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성(省)은 서남부의 윈난 성(雲南省)으로 35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부계 중심의 가족, 확대 가족이며 조상 숭배를 강조한다. 아들의 출산을 통해 가족의 혈통을 계승하려 한다. 효도를 중시하며, 결혼은 가문의 관심사이자 대(代)를 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핵가족화 추세이나 농촌은 대가족 제도를 계속 유지한다. 연애 결혼과 중매 결혼이 공존하며, 가족 중심적이고 이혼율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보다는 낮은 편이다.[19]

언어[편집]

공용어는 표준 중국어(普通話)로, 중국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다. 표준 중국어는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타이완이나 국외에서 거주하는 화인(華人)들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사용자가 많은 언어가 되었다.

중국어는 여러 가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북방방언(北方方言), 오어(吳語, 상하이어 등), 광둥어(廣東語), 푸젠어(福建語), 객가어(客家語)의 5개로 대별되며 그 방언들 간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중국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표준 중국어는 베이징화(北京話)의 발음을 표준음으로 하고 북방어를 기초로 하여 현대백화(現代白話, 구어)의 문장을 문법 규범으로 하고 있다.

중국어를 표기하는 한자는 총 6만 자 가량으로, 그 중 2,500자가 상용한자로 선정되어 있다. 한자 간략화 정책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는 대한민국한국어 한자(정자; 正字)와 다른 간체자(簡體字)가 통상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56개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나 98%는 중국인 한족(漢族)으로 소수민족의 인구는 매우 적다. 한족(漢族)의 비율이 98%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한족(漢族) 단일 민족으로 봐도 무관하나 신분증 표기에 소수민족과 한족(漢族)의 구분이 되게 표기되어 있으며 중국은 사실상 외국인의 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소수민족이 될 수 없으며 원래 살고 있던 매우 적은 인구의 소수민족들이 신분증에 표기되어 있다. 소수민족은 대부분 각 민족 언어와 북경어(표준 중국어)를 병용하지만 인구가 적어 북경어를 사용한다. 소수 민족 언어로는 좡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이 널리 쓰인다. 그중에는 극 소수의 인구인 나시족(納西族)의 동파 문자(東巴文)와 같은 표의 문자도 있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한국어, 일본어 등이 널리 사용되며, 1990년대 말에 반환된 홍콩, 마카오에서는 중국 대륙의 공용어인 표준 중국어뿐만 아니라 광둥어영어(홍콩), 포르투갈어(마카오)도 공용어로 지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교육[편집]

국가 전체의 문맹률은 미국 CIA 조사를 따르면 약 9.1%로, 중간 이하이다. 도시 지역에서는 문맹률이 많이 낮아졌으나 티베트 자치구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 서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문맹률이 높다.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민들의 의무 교육 기간을 초등학교[20] 까지의 6년에서 9년(중학교[21]까지)으로 확대하였다. 학년은 9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7월쯤 끝난다. 중국에서는 고등학교 수학에서 미적분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는 대신 복소평면역삼각함수를 다루고 있다. 또한 중국의 대학 입시는 가오카오라고 부르며, 고급중학(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 3학년 말인 6월 7일6월 8일에 치른다. 과목은 어문, 수학, 문과종합, 이과종합, 외국어.

언론[편집]

2019년 6월 5일 미국 프리덤하우스는 중국의 언론 지수에 최고 점수 4점 중 가장 낮은 점수인 0점을 주었다. 즉 언론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히 편향적이라는 것이다.[22]

통신[편집]

국영통신으로는 신화통신이 있다. 신화통신1931년장시 성 루이진에서 '홍색중앙통신사'로 처음 발족했고, 1934년에는 대장정마오쩌둥과 함께 올랐으며 1937년에는 옌안에서 '신화통신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에 이른다. 이곳은 《인민일보》, 중국중앙방송의 기사를 보내고 있다. 또 이 통신사에서 발간하는 간행물로는 《신화매일전신》, 《참고신문》, 중국신화방송 등이 있는데, 《참고신문》은 주로 공산당원이 많이 읽는다.

신문[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신문은 《인민일보》로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이다. 이 신문은 1948년에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당보인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입장, 정책설명, 당의 공보 등을 발표하고 있으며, 영어판과 한국어 서비스를 비롯해 7개의 외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다. 이 외에 《해방군보》, 《광명일보》, 《공인일보》를 발행하며, 《중국일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일간지이다. 외국어판 신문인 《베이징타임스》는 재미있는 기사와 강렬한 천연색 사진을 편집하여 외국인과 중국인에게 많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방송[편집]

방송은 국영방송인 중국중앙방송(CCTV)과 북경TV방송, 홍콩스타TV방송 등이 있으며, 중국중앙전시대는 원래 광고편성을 하지 않았으나, 1980년대광고를 시작했다. 중국정부에서는 언론을 검열하므로 BBC를 들을 수 없다.[23]

환경[편집]

중국 각지에서 대기오염, 수질오염, 고형 폐기물, 소음, 사막화, 산성비, 물부족 등의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1973년에 제1회 전국환경보호회의가 개최된 이래, 환경보전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시작되어, 1979년의 환경보호법(시행) 채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983년에는 환경보전을 기본 국책으로 위상을 높였다. 1988년에 환경보호법이 수정되어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업에게 벌칙이 강화된 이외에, 1997년의 형법 개정으로 자원환경파괴죄가 신설되었다. 또한 1998년의 국무원 개혁으로 1984년에 설치되었던 국가환경보호국이 국가환경보호총국으로 격상되었고, 2008년 3월에는 환경보호성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는 의연히 악화경향에 있다. 이것은 환경개선에의 기술적, 자금적인 문제도 있으나, 환경보호단체를 비영리단체로서 조직하는 것이 일부 규제되고 있는 등, 일반시민에게 환경보전의식이 침투하기 어렵다고 하는 정치체제에 기원하는 것도 크다.[11] :497

사회문제(국제문제)[편집]

성매매[편집]

한국인 남성과 즐기기위해“명문대 여대생, 모델, 여자 공무원, 외자기업 직원 등 다양한 직업과 10대 연령대 여성들까지 제발로 매춘을 하러 온다" 라고 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은 매춘이 중국인 여성 전계층에 확산되자 섹스 산업을 근절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24]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의 중국 여자(中国女性)들은 한국인남자(韓國人男性)사업가들에게 원조(援助)를 받으며 원조교제(援助交際)를 해왔다. 또한 한국남성(韓國男性)과 원조교제(援助交際)를 하려고 중국여성(中国女性)들이 카라오케 등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을 抗贫乏援助中国女交際战争이라고 부른다.중국에서는 한국인 남성이 VIP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한 1992년부터 많은 한국인 남성 사업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등 각지에서 사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들은 한국인 남성 전용 KTV(카라오케)에서 한국인 남성들의 접대부로서 성매매(賣春)을 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다다랐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들이 골프를 빙자로 많은 한국인 남성들과 기생관광매춘을 즐기고 있으며 상하이의 KTV에서는 한국인 남성 고객을 위해 인근 골프장까지 부킹까지 서비스를 하고 있다.[25][26]

낙태[편집]

인구과잉문제는 중국 정부의 오래된 문제로 이 문제는 낙태 전면 합법화로 연결되고 있다. 낙태의 전면 합법화와 함께 낙태 여성의 권리까지 규정하고 있다. 중국의 ‘부녀권익보장법’은 낙태수술을 하는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국가가 보장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또 남편은 낙태수술 후 6개월 이내에는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다. [27]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편집]

중국은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를 초기에 다른 국가들이 모르게 하려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른 국가들이 코로나19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빼앗았다. 또한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된 이유는 코로나19에 걸린 몇몇 이기적인 중국인들이 검역을 피해서 다른 나라들에 입국해 많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감염시켰다. 이런 행동들 때문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국제적으로 혐중(嫌中)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문화[편집]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문화재가 중국 영토 곳곳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

종교[편집]

종교구성 (중화인민공화국)
무신론민간신앙, 도교
  
87.4%
불교
  
30%
기독교
  
2.3%
전통종교
  
2.2%
이슬람교
  
1.7%
기타
  
0.2%
항저우의 영은사(링인쓰)

1982년 제정된 〈공산주의 종교법〉에서 중국 정부는 인민들과의 협조를 위한 공산당원의 종교 활동을 인정하는 등 종교 활동에 대한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28] 만 18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선교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 등 5개 제도성 종교(制度性宗教)는 각각 중국불교협회(中国佛教协会), 중국도교협회(中国道教协会), 중국이사란교협회(中国伊斯兰教协会), 중국천주교애국회(中国天主教爱国会),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中国天主教教务委员会), 중국천주교주교단(中国天主教主教团),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国基督教三自爱国运动委员会), 중국기독교협회(中国基督教协会) 등 8개 관방 종교 단체로 통합되어 있다.

중국 정부의 종교 정책은 자치(自治, 스스로 다스림), 자양(自養, 스스로 키움), 자전(自傳, 스스로 전파시킴)을 중점으로 하는 삼자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는 외세를 배격하는 자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다.

불교[편집]

천주교[편집]

로마 교황청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다. 2006년에는 쉬저우 교구장인 천위룽 주교가 로마 교황청과의 협의없이 천주교 주교 서품을 집전하여 교황청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29]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 인정하는 천주교 단체는 다음 3개이다.

  • 중국천주교애국회(中国天主教爱国会, 약칭 애국회) – 중국 공산당의 영도에 따르는 천주교회 단체이다. 1942년부터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던 로마 교황청국공 내전 이후인 1951년중국 공산당이 주중 교황사절을 추방하고 천주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었으나, 중국 대륙에서의 천주교 전파를 위해 중국 천주교애국협회의 천주교회에 대한 정책을 존중할 생각이라는 피에트로 삼비 바티칸 대사의 말을 예샤오원 중국 국가종교사무국장이 전하는 등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되고 있으며[30] 교황청은 신임 베이징 주교 임명을 승인한 바도 있다. 현재 바티칸 교황청 홈페이지에는 중국어 웹페이지도 개설되어 있다.[31]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없는 중국 내 종교상황에 대한 개선 등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해결해야 할 숙제들도 있다.[30]
  •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中国天主教教务委员会)
  • 중국천주교주교단(中国天主教主教团)

개신교[편집]

양회(兩会)[편집]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 인정하는 개신교 단체는 다음 2개이다. 삼자애국운동중국기독교협회를 중국기독교양회(中国基督教兩会)로 통칭하기도 한다. 주요 정책 발표 등이 공동의 명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정교회[편집]

기독교양회에 속하지 않은 가정교회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가정교회는 비공인된 것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기독교양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발전한 토착적인 교리를 중요시하며, 반외세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33] 최근엔 정부에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사교(邪教) 탄압[편집]

중국 공안부가 사교(邪教)로 지정해 탄압하는 기독교 계열 종교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단체로는 호함파(지방교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동방번개) 등이 있다.

일부 단체는 중국내에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한민국으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외국인의 중국 선교[편집]

중국의 법률은 외국 개신교 단체의 중국 내 선교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의 선교 단체에서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같이 읽기[편집]

각주[편집]

  1.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은 타이완23번째 성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 통치 지역이 아니며 현재 중화민국영토이다.
  2. 1964년 1월에~: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60년편 3권) (2004년, 인물과사상사) 19쪽.
  3. “Major events in Sino-Polish relations”. China Daily. 2004년 6월 8일. 
  4. Poland
  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의 산업
  6.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의 전후 경제발전
  7. “[금융위기 6개월] ⑥ 흔들리는 세계의 공장 중국”. 2009년 3월 11일. 2010년 10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3월 6일에 확인함. 
  8.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의 농업
  9.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의 공업
  10. World Integrated Trade Solution Worldbank
  1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고쿠분 료세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2.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도로
  13. “Chinese highways for fast traffic add up to 65,000 km”. China Daily. 2010년 1월 16일. 
  1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아시아의 교통
  1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항공로
  16.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biz.chosun.com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7. 3일 연휴와 7일 연휴가 있다.
  18. UN 경제 사회국 인구 분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UN 세계 인구 추계 2015년 판
  19. 고등학교 기술·가정 교과서 '천재교육' 2. 가정 생활 문화 - 세계 여러 나라의 가족 생활 문화 - 중국의 가족 생활 문화
  20. 중국에서는 일본처럼 초등학교를 소학교라고 부른다.
  21. 중국에서는 중학교를 초급중학이라고 부른다. 고등학교는 고급중학.
  22.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606_0000673617&cID=10101&pID=10100
  23. 《열정의 편집》/앙드레 쉬프랭 지음/류병훈 옮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52299.html
  25.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03
  26.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03
  27. 지면보기, 입력 2018 05 05 01:18 수정 2018 05 05 04:03 582호 11면 (2018년 5월 5일). “중국선 낙태 전면 합법화 … 스웨덴은 18주 태아까지 허용”. 2020년 4월 12일에 확인함. 
  28. 《중국선교 핸드북》/중국 어문선교회 편역/두란노
  29. 중국, 또 천주교 주교일방 임명 한겨레 2006년 11월 30일 이상수 기자
  30. 바티칸-중국 ‘화해’ 급진전 한겨레 2008년 2월 22일 유강문 기자
  31. 바티칸 교황청 중국어 누리집
  32. 절강교구 주교인 정광훈(丁光训)이 주석을 맡기도 하였다.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33. “보관 된 사본”. 2015년 9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16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정부 기관[편집]

대한민국[편집]

미국[편집]

기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