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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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룽지,주용기
(중국어 간체자: 朱镕基, 정체자: 朱鎔基)
Zhu Rongji at White House 1999.jpg
중화인민공화국제5대 총리
임기 1998년 3월 17일~2003년 3월 16일
전임: 리펑(4대)
후임: 원자바오(6대)

신상정보
출생일 1928년 10월 23일 (94세)
출생지 중화민국 후난성
정당 중국공산당

주룽지(중국어 간체자: 朱镕基, 정체자: 朱鎔基, 병음: Zhū Róngjì, 한자음: 주용기[1], 1928년 10월 23일 ~ )는 칭화대학교의 전 정치지도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제9대 국무원 총리(재임:1998년 3월 ~ 2003년 3월)를 역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에 시장경제를 시행할 수 있게 되는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였고, 자유주의 전통에서 용인되는 합리주의적 국가 경제 계획 사상을 옹호하였다.

중화민국 후난성 창사 출신이며 본관당파 주씨(棠坡朱氏)인데, 선조에 관해서는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의 19세손이라는 설이 있다. 5세 때에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장학금을 얻어 고학하였다. 후난성의 재원으로 1947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국립 칭화 대학 공학원 전기 공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입학 후 원이둬, 주쯔칭 등의 영향을 받아 국립 서남연합대학에서 옮겨온 민주청년동맹 서클 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판광단뤄룽지 등이 활동하던 중국민주동맹과 함께 학내 중국 공산당 지부의 정치적 영향이 있던 학내 정치 모임 성격의 서클이었다. 재학 기간에 대학 총학생회장직에 있기도 했고 1951년 대학 졸업 후에는 동북 지역 계획생산처로 배치되었다.

1952년 국가계획위 전기 관리 부문 소속으로 일하였지만 1957년의 반우파 운동에서 1958년 우파로 강한 비판을 받은 뒤 국가 계획위 소속은 유지되었지만 당적은 박탈되었다. 계획위 소속 전문학교에서 교사로 강등된 뒤 1969년에는 하방(下放)되었고 집단 농장에서 개조를 받았다. 1975년에는 베이징의 석유 공업부 전기 공정원으로 일했다.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당적 회복 조치(1949년 공산당 입당 처리)를 받아 복당 조치된 뒤에 국가 경제 위원회에 배임되었다. 1982년 9월 제12회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84년에는 칭화 대학교 경제관리학원 원장에 취임하여 칭화 대학경영학경제학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987년 상하이 시위원회 부서기, 1988년 상하이 시장을 맡아 푸둥(浦東) 지역 경제 발전을 주도하였고 톈안먼 사태 때는 인민영웅기념비에서 옮겨온 학생, 노동자들의 항의 시위를 홍콩과 중국 텔레비전의 이지적인 연설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해산시키는 등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상하이 시정을 안정적으로 유도했다.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당총서기로 베이징에 완전 전출한 장쩌민의 후임으로 상하이시 당서기에 취임한 뒤는 외자 도입과 공무원 부패의 단속 등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1991년 국무원 부총리(부수상)에, 1992년에는 중앙위원으로부터 3단 도약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93년에는 중국인민은행 총재를 겸임하였으며, 당시 중국내 문제가 되었던 인플레이션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8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장쩌민 국가 주석 체제에서, 5년에 걸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에 재임하였다. 베이징우다오커우왕징 지역 등에 한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을 위한 문화•교육•여가•비즈니스 생활권을 조성한 것은 주의 총리 재임 기간의 중요한 치적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전임
야오이린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1993년 3월 29일 ~ 1998년 3월 17일
후임
리란칭
전임
리펑
제5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총리
1998년 3월 17일 - 2003년 3월 16일
후임
원자바오
  1. “강택민 체제 핵심 인물은 주용기와 호금도[이장석]”. MBC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