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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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习近平
Xi Jinping 2016.jpg
중국공산당제9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임기 2012년 11월 15일 ~
전임: 후진타오(제8대)

임기 2013년 3월 14일 ~
부주석 리위안차오
총리 리커창
전임: 후진타오(제6대)

임기 2012년 11월 15일 ~
전임: 후진타오(제7대)

임기 2008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주석 후진타오
전임: 쩡칭훙(제8대)
후임: 리위안차오(제10대)

신상정보
국적 중화인민공화국
출생일 1953년 6월 15일(1953-06-15) (65세)
출생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학력 칭화 대학교 화학공학, 인문사회대 법학 박사
정당 중국공산당
배우자 커링링 (柯玲玲, 이혼)
펑리위안 (彭麗媛)
자녀 1녀 (시밍쩌)
종교 무신론

시진핑(중국어 간체자: 习近平, 정체자: 習近平, 병음: Xí Jìnpíng, 1953년 6월 15일)은 중화인민공화국최고지도자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제18기, 제19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다.

제17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장으로 2007년 17기 1중 전회에서 권력 서열 6위로 올랐으며, 2008년 3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이 되었다.

2012년 11월 후진타오로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함께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았다. 2013년 3월 14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되었다.

2018년에는 주석 임기제한을 철폐해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이에 대해 "독재 회귀"라는 부정적 평가와 "안정성 기여"라는 긍정적 평가가 엇갈린다.[1]

약력[편집]

초기 활동[편집]

6세 때의 시진핑(왼쪽). 동생 시위안핑, 부친 시중쉰과 함께 (1958년)

시진핑은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 4주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태어났으며, 산시 성에서 자랐다. 시진핑은 시중쉰(習仲勳)의 2남 2녀 중 셋째이다.[2]

확고한 개혁주의자(개방파)였던 그의 아버지 시중쉰은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는 산시 성으로 좌천되었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시기 고초를 겪는 부친을 따라 농촌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입당에 10번 실패한 경력이 있는[3] 태자당 계열이자 개혁파이다.

1978년 11기 3중 전회에서 시중쉰광둥 성 제2서기로 복권되었고 그 후 광둥 성 서기가 되었으며 덩샤오핑후야오방의 사상 해방과 경제 건설 실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시진핑은 1979년 칭화 대학교 공학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였고 학부 졸업 후, 국무원 겅뱌오(耿飈) 부총리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2001년 같은 대학교 사상과 정치 연구소에서 《중국 농촌의 시장화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관료 생활[편집]

허베이 성 정딩 현 당위원회 서기, 푸젠 성 샤먼 시 부시장, 푸저우 시 당위원회 서기 등 푸젠 성에서의 공직 생활을 거쳐,[4] 2000년에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 성 당위원회 서기, 2007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특히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저장 성 당위원회 서기 재직시 경제발전에 공을 많이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중앙무대에서 경험이 없어서 시 주석은 세력 기반이 약했다.[5]

정치 활동[편집]

2012년 미국 국무성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뒤에 보이는 이들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조 바이든 부통령
중국공산당의 제9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2008년 국가 부주석이 되었다.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공산당 중앙 서기처 서기, 중국 국가주석, 중앙 당교 교장이다.

시 주석의 취임쯤에 '보시라이 스캔들', '링지화 사건' 등 최상층부에서 터진 비리 사건들이 있었고, 시 주석은 당 총서기에 취임하자마자 "호랑이(고위관료)든 파리(하급관료)든 모두 잡겠다"며 철저한 부정부패 척결을 선언했다. [5] 이것으로 시진핑은 많은 정적을 제거할 수 있었다.

오랜 인연이 있던 왕치산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이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태자당 출신이면서 상하이방의 후원을 받던 보시라이, 후진타오의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가 중형에, 상하이방의 핵심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 군 최고지도부였던 궈보슝과 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공청단 출신의 차기 주자였던 쑨정차이 전 충칭시 당서기 겸 정치국 위원 등이 잇따라 숙청됐다.[5]

이로인해 상하이방과 공청단 등 기존 계파가 급속히 퇴조하고 시 주석에 충성하는 시자쥔(習家軍·시진핑 측근들)이 공고해졌다. [5]

시진핑의 부인은 중국의 국민 가수로 통하는 펑리위안(彭麗媛)이다. 당 원로이자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보수와 진보의 지지를 모두 받았던 시진핑은 2013년 국가주석이 되었다. 2010년 10월 18일 제 17기 5 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 지위를 손에 넣은 것으로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로 사실상 확정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6] 2012년 11월 15일 중국공산당 제18기 1 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됐다. 그리고 2013년 3월 14일 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취임연설과 다름없는 전인대 폐막연설을 통해 중화민족의 부흥[7]을 역설하며 '중국의 꿈(中國夢)'[8]을 강조하였다.

2018년 3월 11일에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중국 헌법에서 '국가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을 삭제해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전인대는 2964표 가운데 찬성 2958표, 반대 2표, 기권 3표, 무효 1표로 99%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개헌 전 중국 지도자의 임기는 10년으로 제한됐으나, 개헌 후에는 원칙적으로 '종신집권'도 가능할 수 있게 된다.[1][9]

국정운영[편집]

소수 민족[편집]

시진핑은 2009년 7월 5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 시에서 우루무치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사후 문제 해결을 지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혈 사태는 위구르인 주민과 한족과 무장 경찰이 충돌한 사태이다. 2009년 7월 19일 기준으로 중국 당국에서는 사망자 197명, 부상자 1,721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망명 위구르인 조직인 세계위구르 회의는 중국 당국과 한족의 공격으로 위구르인이 최대 3,000명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10]

종신집권 논란[편집]

헌법 개정으로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다. 서구 지식인의 주류적 시각은 부정적이며, 국내에서도 반발이 있다. 반면 관영매체들은 찬성에 앞장서고 있으며, 일부 지식인들 또한 긍정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편집]

중국 헌법에서 국가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을 삭제해 종신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 대해, 법치주의의 붕괴, 1인 독재로의 회귀를 불러올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데이비드 섐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는 "장기집권 추진은 권력의 개인화를 초래할 것"이라며 "정치 엘리트의 권력을 제한하고 규제하기 위해 세웠던 원칙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비판했다.[1]
  • 천제런(陳杰人) 중국정법대학 교수는 "우리는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많은 인재가 중국 내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며 "중국의 운명을 한 사람이나 소수에 맡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중국 인민에 대한 불신을 의미한다"고 비판했다.[1]
  • 컬럼비아대학의 앤드루 네이선 교수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그가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사람들이 지도자의 정책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할 때 정책 실패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말했다.[1]
  • 톈안먼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 지도자였으며 미국으로 망명한 왕단(王丹)은 "시진핑이 황제의 야심을 지니고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이는 중국 인민에게 중대한 재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양심을 지닌 중국인들은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왕단이 발표한 성명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장을 역임한 옌자치(嚴家其) 등 100명 가까운 중국 안팎의 저명학자들이 동참해 힘을 실었다.[11]
  • 유명 기업인인 왕잉파(王瑛發)도 성명에서 "개헌 추진은 (인민에 대한) 배반이자 역사의 퇴행"이라며 "개헌이 만장일치로 통과되겠지만 나에게 침묵할 것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11]

긍정적 평가[편집]

주로 관영매체들이 긍정적 평가에 힘을 실어줬으나, 외국 학자들 가운데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이 있다.

  • 킹스칼리지런던의 케리 브라운 교수는 "시진핑과 당 지도부는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며 "어떠한 중국인도 국력이 약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뚜렷한 목적성, 안정성, 확실성을 지향하면서 중국의 미래에 대한 역동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면서 "(장기집권 추진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권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권력의 집중이 가져올 문제도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정책 결정과 지도부 인선의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1]
  •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는 1면 논평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개헌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라면서 "이번 개헌안은 헌법의 지속성과 안정성, 권위의 기초 위에 시대에 맞게 헌법을 완성하고, 당과 전국 각 민족 인민의 염원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1]
  •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사설에서 "서방의 가치관으로는 이번 개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서방의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특히 "서방사회가 장기간 추구하고 실천해왔던 '민주' 등 가치 등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심각한 '궤양'이 발견되고, 소외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며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을 부각시켰다.[11]
  • 개헌 이후 한 중국 국책연구기관은 "정세 변화에 따라 임기를 연장하는 것일 뿐 결코 종신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당심과 민심을 좇는 헌법개정은 역사적 사명에 대한 책임이자 최대의 실사구시"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 61년을 집권한 청나라 강희제, 53년을 재위한 러시아 표트르 대제 등의 사례를 들며 임기 연장 논리를 옹호하고 나섰다.[12]

가족 관계[편집]

시진핑은 1979년 커화 전 주 영국 대사의 막내딸인 커링링(柯玲玲)과 결혼했지만 1982년에 이혼했다. 뒤에 인기 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을 만나 1987년 9월 1일 샤먼에서 펑리위안과 재혼해서 1992년 외동딸인 시밍쩌(習明澤)를 낳았다.

대한민국과의 관계[편집]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 대한민국의 THAAD 배치가 결정되자, 보복 조치를 취했다.
  • 2015년 9월 2일 베이징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 2014년 7월 3일 박근혜 대통령 초청으로 부부 동반으로 방한했다.
  • 2012년 8월 31일 주중 한국대사관과 중국 인민대외우호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국과 중국 수교 20주년 기념식에 축하차 직접 참석했다.
  • 2009년 12월 16일 방한했다.
  • 2005년 7월 18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전라남도 초청으로 저장 성 당서기의 자격으로 방한하였다.

각주[편집]

참조 : 박근형 《후진타오 이야기》 명진출판, 288쪽-290쪽.

  1. 안승섭 (2018년 3월 5일). “시진핑 '장기집권'에 엇갈린 시각…"독재회귀" vs "안정성 기여". 《연합뉴스》. 
  2. 조선일보 최유식, 시진핑, 아버지의 부하의 딸과 이혼한 이유, 밝혀졌다.
  3. 홍제성 기자 (2010년 10월 20일). “시진핑 "공산당 가입 10번 퇴짜". 연합뉴스. 2010년 10월 22일에 확인함. 
  4. 고쿠분 료세(国分良成). 〈中国〉. 《현대용어의 기초지식(現代用語の基礎知識)》 (일본어). 지유고쿠민샤(自有国民社). 499쪽. ISBN 978-4-426-10128-2. 
  5. “[MT리포트] 마오쩌둥의 권력 복원해 시황제가 되려는 시진핑…아무도 예상 못했던 반전 - 머니투데이 뉴스”. 2018년 3월 1일에 확인함. 
  6.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2014년 8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0월 19일에 확인함. 
  7. <발간사>, 《문철월간(文哲月刊)》, 1935.10
  8. 홍콩 가수 뤄원(羅文)이 불렀던 1984년 히트곡 명칭
  9. “시진핑 ‘1인 체제’ 시나리오 중국 개헌안 99% 찬성으로 통과”. 
  10. 일본어 위키 번역
  11. “中 안에서도, 밖에서도…'시진핑 독재' 비판론 확산”. 
  12. 정주호 (2018년 6월 1일). “중국, 박정희·푸틴·강희제 예로 들어 시진핑 장기집권 옹호”. 《연합뉴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National Emblem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전 임
후진타오
2012년 11월 15일 ~ 후 임
현직
마오쩌둥 · 화궈펑 · 덩샤오핑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Flag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svg 제9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Danghui golden.svg
전 임
후진타오
2012년 11월 15일 ~ 후 임
현직
천두슈 · 샹중파 · 보구 · 장원톈 · 마오쩌둥(주석) · 화궈펑(주석) · 후야오방 · 자오쯔양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전임
후진타오
제7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2013년 3월 14일 ~
후임
현직
전임
쩡칭훙
제9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2008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후임
리위안차오
전임
후진타오
제4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2013년 3월 15일 ~현재
후임
현직
전임
후진타오
제7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2012년 11월 15일 ~ 현재
후임
(현직)
전임
쩡칭훙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2007년 ~ 2012년
후임
(현직)
전임
쩡칭훙
제19대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장
2007년 ~ 2012년
후임
(현직)
전임
한정
상하이 시 당위원회 서기
2007년
후임
위정성
전임
장더장
저장 성 당위원회 서기
2002년 ~ 2007년
후임
자오홍주
전임
허궈창
저장 성 성장
2002년 ~ 2003년
후임
뤼쭈산
전임
허궈창
푸젠 성 성장
1999년 ~ 2002년
후임
루잔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