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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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이린(중국어: 姚依林, 병음: Yáo Yīlín, 1917년 9월 6일 - 1994년 12월 11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오랫동안 경제 부문 국무원 상무 부총리를 담당한 경제 관료이다. 안후이 성 구이츠 구 출신이다.

생애[편집]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과 함께 장쑤, 저장, 상하이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1934년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칭화 대학 이학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부터 학생회 간부로 중화 항일 혁명 모임에서 활동했으며, 1935년 11월 중국 공산당 당원에 가입했다가 학교에서 퇴학되었다. 그후 톈진으로 옮겨 항일 활동을 이어간 후 톈진 시 당 위원회 청년 선전부원이 되었으며, 허베이 성의 학생 운동에서 활동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무역부와 상업부 그리고 중앙재정무역부의 부부장(차관)을 맡아 일했다. 1958년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문화 대혁명에서 반동파로 실각했지만, 1973년에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부장에 다시 임명됐다. 1977년 제1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1978년에 당 중앙위원회 부비서장, 당 중앙판공청 주임, 1979년에는 국무원 부총리. 1980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장관급)을 겸했다.

1985년에는 샤먼 시선전 시, 하이난 섬경제특구와 준경제특구에 대하여, 외화 획득과 외화 유출에 대한 균형 정책을 폈다. 같은 해 7월, 중국 지도부로서는 21년 만에 고르바초프의 소련을 방문한 후 경제 및 기술 협력 협정의 조인을 위해 노력했다. 8월, 일본 사회당 대표단과 회담했을 때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국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써 처음 비판했다. 이후 외교부도 이를 계속 비판하면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국제 정치 문제'로 자리하였다.

자오쯔양이 총서기로 취임한 1987년 11월의 제13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자오쯔양은 야오이린을 자신의 후임 국무원 총리로 추천하려고 했지만, 나이 조건을 감안하여 기술 관료 리펑이 총리로 취임했으며, 야오이린은 상무 부총리에 머물렀다. 또한 완리, 톈지윈 등의 상무위원 진입을 반대했다. 1989년6•4 톈안먼 사건 때는 시위 추이를 지켜보다가 중국 민주 동맹과 함께 덩샤오핑의 계엄령을 지지했다.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경제 정책 전반에는 정책 조정 기조가 형성되었다. 1990년 9월, 제8기 5개년 계획에는 신중이 기해졌으며 최종안은 덩샤오핑주룽지 상하이 시 당위원회 서기 등과의 협의를 거쳐 도출되었다. 그후로 중국 개혁과 개방 정책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방향이 귀결되었다.

1994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전 임
왕둥싱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1978년 ~ 1982년
후 임
후치리
전 임
위추리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발전화개혁위원회 주임
1980년 8월 - 1983년 6월
후 임
쑹핑
전 임
쑹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발전화개혁위원회 주임
1987년 6월 - 1989년 12월
후 임
雛家華
전 임
완리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1988년 - 1993년
후 임
주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