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대구직할시(당시)에서 편찬된 《대구시사》는 대구의 역사에 대한 서술에 있어 "대구의 발상지가 되는 달구벌, 달구화현, 대구현은 지금의 대구에서 본다면 보잘 것 없는 좁은 구역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지금의 대구는 오랜 세월을 겪는 동안 달구벌로 출발했던 당시보다 몇 배가 되는 넓이로 확대되었다. 이는 지금의 대구라는 것이 근세, 중세, 고대, 선사 때의 대구와는 크게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고, 과거에 대구가 아니었던 넓은 지역이 대구의 이름으로 변신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 사실을 잘못 이해하면 발상지 대구의 근간을 잃게 하거나 대구시역내에 위치한다 뿐 비대구적인 것으로 조명하게 될 염려가 있다. 다시 말해서 대구의 역사는 달구벌을 근간으로 주변의 비달구벌 집단이 흡수되는 과정의 당위성을 기술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1]고 말하고 있다.
문헌에 나타나는 가장 오랜 대구 지명은 달벌성, 달구화현, 대구현이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신천에서 서쪽으로 성서와 금호강까지를 경계로 하는 구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구역도 역사시대에 들어와 형성된 범위이고, 그 이전의 선사 시대 대구 지명의 핵심지가 어디였는지를 기록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대구 분지 지역에 사람이 정착하고 자연취락이 형성되는 시기가 언제였고, 그 최초의 유적이 어디였는지 현존하는 자료로서는 언급하기가 매우 어렵다. 2006년 발굴된 달서구월성동 주거지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좀돌날(細石刃) 석기가 포함된 유물 등을 통해 대략 2만~1만 년 전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2] 달성군 하빈면 소재 감문리 유적, 시지 유적, 달성 도동리 강변들 일대에서 채집된 찍개 유물을 통해 중기 구석기 시대인 8만 년에서 5만 년 전부터 대구 지역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3] 것으로 연대가 더 올라갔다.
대구 지역은 5,500년 전을 전후하여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가장 이른 시기의 마을은 검단동 유적으로 10기의 집터(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일부 집터의 목탄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값이 전기에 해당하는 것도 있지만,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의 특징으로 보아 중기 유적으로 여겨진다.[4] 대구의 신석기 유적은 2024년 기준으로 열여섯 곳이 확인되었고, 낙동강이나 금호강 주변의 나지막한 구릉이나 하천가에 소재하고 있으며, 절반 정도는 토기편만 확인되었다.[5]
청동기시대 달성을 중심으로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달성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문화층은 뚜렷하지 않으나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층 및 유물은 갑자기 큰 규모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주변 지역의 동시대 유적과 비교해도 월등히 큰 생활유적이자 유물 또한 질 높은 기술에 의해 제작된 것들로, 달구벌의 중심지가 달성토성 일대이고, 달성이 초기 철기 시대부터 중심지적 위치를 형성하였음을 말해 준다.
한반도 중남부에서 농경 공동체가 지역 정치체인 소국(小國)으로 성장한 시점은 삼한 시기이다. 대구에 있었던 소국의 사정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3세기)에는 진·변한 24개 소국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지만, 이 가운데 대구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비정은 학자마다 견해가 다 다르다. 신라에 편입된 이후의 지역 명칭인 달벌, 달불, 달구벌이 대구에 있었던 옛 소국의 국읍 명칭이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으며, '달'로 대표되는 지역 명칭 탓에 《삼국사기》의 다벌국 혹은 《일본서기》의 탁기탄, 탁국, 탁순을 대구에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최근 학계의 동향은 모두 근거가 미약하다 하여 따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지역 정치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그 이름이 채록되기도 전에 소권역별로 우세한 소국이 우선 통합되었으며 그 상태에서 다시 통째로 신라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름이 채록되지 않았던[6] 것으로 보기도 한다. 2024년에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역사총서1 - 한 손에 들어오는 대구 역사》(저자는 주보돈 외 31명, 고대 부분 집필은 함순섭국립경주박물관장이 맡음)에서는 대구 지역이 인접한 경산 지역의 우세한 소국인 압독국에 먼저 편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경산 임당 고분군에서 대구 달성 고분군보다 최소한 한 단계 이상 이른 4세기 말부터 이미 경주(사로국)의 신라 능묘와 연계된 고총이 조성될 만큼의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음이 그 한 가지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6]
삼한 시기 대구의 정치체의 구성 및 존재 양상은 고고학 조사 결과를 토대로, 동쪽으로 신천 범람원과 서쪽으로 월배 선상지를 잇는 넓은 충적지를 기반으로 하나의 소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그 '국읍'(중심지)은 삼한의 유력 개인묘와 달성토성 이전 단계의 방어 취락이 확인된 비산동·평리동·침산을 잇는 일대였으며, 거석 문화유산과 유력 개인묘가 각각 분포하고 있는 '읍락'으로 동부(신천동·만촌동·연암산·검단동)와 서부(월배 선상지), 그리고 남서쪽(대봉동·이천동·대명동)과 남동쪽(상동·지산동·범어동)에 네 개의 읍락이 있었으며, 금호강과 낙동강에 접한 소규모 충적지에 소국과 연계된 서너 개의 소별읍이 있었던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8] 이밖에 8세기 경산의 속현이 된 금호강 너머 동촌이나, 청동기 시대 연암산의 석기 제작소에 재료를 공급했던 동화천 수계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대구 지역에 일찍보다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8]
《삼국사기》에는 244년부터 시작하여 첨해왕 15년(261년)에 달벌성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편입된 이후 대구 지역에 축조된 성으로는 대구의 국읍이었던 중심 거점 세력이 치소로써 쌓은 달성에 물길의 요충지에 쌓은 검단토성, 옛 대구 지역 정치체에 속해 있던 주요 거점 촌락들이 쌓은 화원토성과 봉무토성 등이 있었다.[9] 주로 낙동강변과 주요 교통로에 저고도 성곽이 집중 축조되었으며, 이들 성곽에 인접하여 대명동 고분군(용두산성), 성산 고분군(화원토성), 죽곡리 고분군(죽곡리산성), 문산리 고분군(문산리산성), 구암동 고분군(팔거산성), 불로동 고분군(봉무토성) 등의 고총 고분군이 조성되었다.[10]대가야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변경 지역으로써 대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이 점이 대구가 성장하는데 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9] 신라에서 마립간이라는 왕호가 등장하여 사용되었던 시기 후반에 이르러 영남 지방에서 성곽 등의 공공 기념물이 면적으로 가장 확대되었던 지역이라는 점은 대구의 위상이 그만큼 월등히 높았음을 보여준다.[9]
무술명 오작비. 신라 중고기에 농업용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남긴 비석이다.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신라 중고기(514-654)에는 해발 200~300m의 산정 평탄면을 이용하여 지역의 교통로와 충적지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지점마다 석성이 기획 축조되었는데, 대구 분지의 동쪽 끝인 도동의 용암산성과 서쪽 끝인 설화리의 설화리산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구 분지의 동서 끄트머리마다 하나씩 중고도 산성을 배치한 것은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지휘하고자 지방에 파견한 군주(軍主)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1] 또한 대안동에서 발견된 무술명 오작비는 국가 차원에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 증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2]
신라의 삼한일통 이후인 신문왕 9년(689년) 신문왕이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달구벌 천도계획).
5세기말 - 6세기 초에 대구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던 달구화현(達句火縣) 또는 달불성(達弗城)이라는 지명이 경덕왕 10년(757년) 한화 정책으로 주요 관직명과 지명을 한풍으로 바꿀 때, 달구화현을 대구현으로 개칭하고 양주 관하에 두었다. 이 시기 대구현은 독립된 군현이 아닌 수창군(壽昌郡)에 속한 속현이었다.
신라 하대 왕위계승전에서 흥덕왕 사후 김균정-김우징 부자와 김제륭-김명간의 싸움이 벌어져, 김균정이 죽고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했다가 다시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자신이 민애왕으로 즉위하였다. 균정이 죽은 뒤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의 비호를 받게 된 김우징은 장보고의 힘을 빌어 다시금 왕위를 노렸다. 이때 김우징을 도와 김양이 평동장군으로 청해진 병력 5천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무주 철야현에 이어 민애왕 2년(839년) 1월 대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김양의 승리로 끝났고, 민애왕이 죽고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했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나온 것으로 전하는 납석사리호는 대구 지역이 신라 하대 왕실과 관련이 있으며, 동화사가 민애왕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 준다. 납석사리호 명문에는 경문왕이 민애왕의 추선을 위해 동화사에 삼층석탑을 세웠으며, 민애왕이 선강대왕으로 추봉된 이찬 충공의 장남이었음과 사망 당시 나이가 스물세 살이었다는 것, 동화사를 '동수'(桐數)라 하여 민애왕가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음을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의 저술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시기의 저작인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는 동화사가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도 대구 지역의 대표적 사원으로 존재하고 있음과, 신라 말기 대구 지역 호족의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그 내용은 수창군의 호족으로 호국성을 거점으로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을 자임한 중알찬 이재(異才)가 효공왕 12년(908년)에 연 팔각등루 낙성법회의 모습을 예찬한 것으로, 신라 말기 불교의 모습이나 대구 지역 호족들의 동향을 엿볼 수 있다. 이재가 거점으로 삼았던 호국성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연암산, 대덕산성, 대구읍성 일대, 고성동, 검단토성, 용두산성, 대구읍치, 옛 성 유지 등 일곱 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발호로 신라의 지배력은 경상도 일원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경북 북부 지역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였던 것과는 달리 대구, 고령, 의성 일대는 후백제에 우호적인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견훤전에는 공산 전투 당시 왕건이 공산에 왔을 때 동수의 병력이 고려군의 깃발을 보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때 동수 즉 동화사 승도(혹은 인근 지역민)들이 왕건에 맞서는 입장에 있었고 고려군이 이들을 쫓아 몰아내는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지 주민들이 친후백제, 적어도 친고려적 성향은 아니었다는 점은 고려군이 향후 벌어지게 되는 공산 전투에서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근암성과 고울부를 함락시키고 수도 서라벌로 쳐들어갔고,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견훤이 먼저 서라벌에 입성해 경애왕을 몰아내고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후백제군과 고려군은 팔공산 일대에서 큰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왕건 자신도 겨우 목숨만 건져 빠져나왔다. 팔공산 및 대구 지역에는 이때의 왕건의 패주와 관련된 설화와 전승들이 얽힌 지명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대구 지역이 고려의 세력권에 포함되게 되는 것은 고창 전투(930년) 이후의 일이다.
고려 초기 대구는 대부분 동경유수관과 상주목의 광역 행정구역 안에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다. 재통일 이후인 태조 23년(940년) 군현의 개편과 토성분정(土姓分定)이 이루어졌고, 수창군을 수성군으로 개칭하였다.
토성분정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어 통일 이후 제도화되었다.[13] 군현의 명칭을 개정하면서 고려에 협력한 지방 세력에게 사성(賜姓)을 행하고, 그들의 거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고 그 지역의 토성(土姓)으로 정하는 것이었다.[13] 이는 신라의 골품제적 질서를 재편하면서 후삼국의 쟁패로 분열되었던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대개 고려 초 토성을 받은 계층은 지방의 유력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방의 지배가 확고하지 못했던 고려 초 상황에서 일정한 지역의 유력층에게 성씨를 내리고 본관을 지정함으로써,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용인함과 동시에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13]
조선 초기에 성립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 지역 고을의 토성에 대해 언급하고, 이 가운데 수성과 해안의 경우는 각각 토성들의 거점이 되는 성을 함께 명시하고 있는데, 수성의 경우는 양성 빈씨, 구구성 나씨, 잉조이성 조씨·혜씨, 해안의 경우 성화성 모씨, 무가성 신씨, 불좌성 백씨·하씨, 명성 정씨 등이다.
성종대에는 12목 설치와 10도제 시행 등이 진행되고, 현종 9년(1018년)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이 설치되면서 전체적인 지방 지배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때 수성군·장산군·해안현(解顔縣) 등 동남부와 대구현·화원현(花園縣)·팔리현(八里縣)·하빈현(河濱縣)의 서남부로 행정 계통이 양분되었으며, 전자는 동경유수관(경주), 후자는 상주목 관내 경산부(성주)의 속현이었다.
현종 9년(1018년)까지도 대구 지역에서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대신 주현에 부임한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속현으로써 '향리'로 통칭되는 지역 세력들에 의한 간접 지배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한 손에 들어오는 대구 역사》고려 시대 파트 집필에 참여한 임지원은 1)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벽진의 성주장군 이총언이나 고창의 삼태사(三太師) 등과 달리 대구에서는 왕건을 도와 공헌한 호족의 사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대구는 고려 통일 이후 지역 개편 과정에서 주현의 위상을 얻지 못했고 2) 공산 전투가 벌어졌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구 지역이 신라 수도 경주로 통하는 길목이자 방어의 요충지였기에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여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고 인구 감소 등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을 반영한다고 해석하였다.[14] 고려 시대의 대구 지역 출신 인물 관련 사례들은 주로 고려 후기 내지 말기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고려 시대 대구 지역 출신자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시점이 비교적 늦었음을 보여준다.[15]
인종 21년(1143년) 처음으로 대구현을 비롯한 여덟 개 현에 지방관인 현령이 파견되면서 대구는 속현에서 주현으로 거듭났고, 하빈현, 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된다.
무신졍변(1170년) 이후 고려 사회는 크게 동요하였다. 명종 20년(1190년) 이후 동경(東京,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란의 움직임이 인근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15년에 걸쳐 경상도 지역에서는 무신정권에 반대하고, 더불어 그간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봉기가 잇따랐다(동경민란)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동경민란의 흐름은 신종 6년(1203년)의 경주 별초군의 난으로 드러난다. 경주 별초군이 영주 별초군을 공격하면서 이 과정에서 운문사의 반적[참고 1]과 함께 대구 지역의 사찰인 동화사와 부인사의 승도들을 끌어들였는데, 경주 별초군의 난이 진압된 이듬해에 부인사 승려들은 홍주(영주)의 부석사, 송생현(청송) 쌍암사 승도들과 함께 다시 한번 최충헌의 정권에 맞서 반란을 도모하기도 하였다.[17]
이 경주 별초군의 난을 계기로 동경민란에서 '신라 부흥 운동'이라는 구호의 등장이 본격화된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 지역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세력들이 산발적으로 봉기하고, 또 함께 행동하는 데에는 '신라 부흥'이라는 지역성을 매개로 한 구호에 담긴 명분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8]
고종 19년(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되었다. 기록상 확인되는, 대구 지역민의 피해 양상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1254년에서 1259년까지 이어졌던 몽골의 마지막 침입 때였다. 무신정권은 당시 몽골의 침략에 맞서 내륙 지방의 주민들은 산성으로, 바닷가 주민들은 섬으로 소개시키는 해도입보책을 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숱한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고종 42년(1255년) 공산성(公山城)에 입보해 있던 대구 및 인근 고을 주민 가운데 양식이 떨어진 먼 곳에서 온 자들 가운데 굶어죽는 자들이 많아 노약자들의 시신이 계곡을 메울 정도였고, 자기 자식을 나무에 묶어놓고 가버리는 자도 있었다고[19] 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조선 초기 대구의 영역은 대구현을 중심으로 수성현, 해안현, 하빈현 등이 속현으로 부속되어 있는 구조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 수성현과 해안현이 대구 임내에 속하게 되었는데, 두 현은 잠시 경주부로 이관된 때도 있었으나 태종 14년(1414) 모두 대구현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종대 대구현의 인구가 1,300호가 넘으면서 비로소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세조대에 도호부사가 되었다.
대구시 중구 덕산동·상서동·하서동·남성로·수동·계산동1가·계산동2가·장관동·사일동·남일동·동일동·동성로1가·동성로3가·전동·종로1가·종로2가·북성로1가·북성로2가·서내동·북내동·대안동·포정동·서문로1가·서문로2가·서야동·인교동·동산동·시장북로·대신동·달성동·수창동·도원동·화전동·향촌동·태평로2가·서성로1가·서성로2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