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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동화사
동화사 전경(봉서루 쪽)
종파법상종(法相宗)→교종(敎宗)→선종(禪宗)→대한불교조계종
본존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건립년대삼국시대 신라 소지 마립간 15년(493년)?
신라(新羅) 혜공왕(惠恭王) 8년(772년)?[주 1]
흥덕왕 7년(832년) 이전
창건자극달화상?
심지조사?
별칭초명:유가사(瑜伽寺)
약칭:동수(桐藪), 동사(桐寺)
위치
소재지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길 1
좌표북위 35° 59′ 35″ 동경 128° 42′ 15″ / 북위 35.99306° 동경 128.70417°  / 35.99306; 128.70417

동화사(桐華寺)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소재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경북 5대 본산 중의 하나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대표적인 말사로는 운문사, 파계사, 부인사, 북지장사, 남지장사, 유가사 등이 있다.

1992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석조 약사여래불인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이 또한 유명하다. 높이가 33 m에 이른다. 동화사의 랜드마크다.[2]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입장이 가능해졌다.[3]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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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대사의 지팡이가 자란 것으로 겨울에도 꽃을 피웠다고 하는 오동나무. 동화사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다.[4]

동화사의 연혁을 전하는 사적기에는 흥덕왕(興德王) 7년(832년) 심지조사(心地祖師)가 중창을 하면서 동화사(桐華寺)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그 이전에는 유가사(瑜伽寺)라는 이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화사(桐華寺)의 '동'(桐)은 오동나무 '동'자, '화'(華)는 "빛나다, 화려하다, 꽃"이라는 뜻이 있는데, 심지조사가 중창할 당시, 겨울인데도 절의 오동나무가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 '동화사'(桐華寺)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5] 또는 심지조사가 절을 지을 때 던져 땅에 꽂힌 오동나무 지팡이가 그대로 뿌리를 내려 자랐다는 전승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동화사의 다른 이름으로는 동수(桐藪) 및 동사(桐寺)가 확인된다. 《삼국유사》나 《고려사》, 팔공산 와요지에서 출토된 '桐藪彌勒堂'명 기와에서 '동수'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신라 최치원의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는 '공산동사'(公山桐寺), 동화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대구동사(大丘桐寺)명 향로 등을 통해 동화사를 '동사'라는 이름으로 불렀음이 확인된다.[6]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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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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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사적비》(1931년)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유가사(瑜伽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으며, 흥덕왕(興德王) 7년(832년) 심지조사(心地祖師)가 중창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전하고 있다.[7] 하지만 동화사에서는 5세기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아[8] 5세기 창건설은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 《삼국유사》(13세기)에 따르면 속리산의 영심(永深)이 금산사(金山寺)의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고 이를 다시 심지조사에게 간자 두 개를 전하였는데, 심지조사가 그것을 봉안할 땅을 찾고자, 중악(中岳, 팔공산)의 두 신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 서쪽을 향해 던지니 간자가 곧 바람에 날려 현재의 동화사 위치에서 작은 개울을 하나 건넌, 참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가에 떨어졌고, 심지조사는 그곳에 강당을 지어 간자를 봉안하였다는 전승이 실려 있다. 동화사 금당선원(금당암) 자리가 당시 심지가 던진 간자가 떨어졌던 자리라고 전하고 있다(금당암·금당선원 항목 참조).[9] 13세기 고려 후기의 법상종 고승으로 동화사의 중창주로 꼽히는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의 탑비를 '고려국대유가동화사주지오교승통보자국존증시홍진비명'(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이라 해서 동화사를 '대유가동화사'라고 칭하였는데, '유가'는 주로 법상종 계열 사찰에서 많이 사용한 이름으로, 이는 동화사의 실제 건립연대가 9세기이고 창건주가 심지조사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동화사 홈페이지에서도 극달이 아닌 심지야말로 동화사의 실질적인 창건주라고 소개하고 있다.[10] 실제로 심지는 동화사의 첨당과 비로암 석탑 건립에 관여하였으며, 동화사 안에서도 심지가 832년 사찰을 중창하고 절의 이름도 '동화사'로 바꾸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등 심지와 동화사 간의 밀접한 관계가 확인된다.

하지만 심지조사가 동화사의 창건주라는 전승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삼국유사》 안에서조차 심지가 동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최연식은 헌덕왕 14년(822년) 왕이 김충공(金忠恭)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이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제로는 헌덕왕의 혼인 기사로 해석할 수 있고, 심지는 헌덕왕과 정교 사이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이 경우 동화사 창건 시점이라고 전하는 832년 당시 심지의 나이는 겨우 열 살 미만이므로 하나의 절을 지었다고 보기는 무리라는 것이다.[11] 한지만은 심지가 진표의 법맥을 이은 점이나 진표가 창건한 금산사를 비롯하여 진표계 법상종의 영향을 받은 동화사, 법주사에서 모두 금당과 탑이 직교하는 가람배치가 보이는 점에 주목하여, 동화사의 창건주는 심지였고 금당에는 미륵불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12]하였으나, 박상현은 금산사는 진표 이전에도 숭제(순제)가 주석[13]하고 있었으므로 진표는 금산사의 창건주가 아닌 중창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 경우 금산사의 가람 배치라는 것도 진표계 법상종만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금산사와 동화사가 유사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거나 심지가 진표의 법맥을 이은 점만으로는 심지가 동화사를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삼국유사》에서 심지가 세운 당우를 금당이 아닌 첨당으로 연결시킨 점도 심지가 동화사의 창건주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하였다.[14]

(왼쪽)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863년에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오른쪽)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민애왕이 사망한 839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화사는 창건 초기부터 민애왕가의 원찰로 기능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동화사 창건 당시의 석조물로 이해되는 당간지주, 금당암 영역의 대석단 및 극락전 하부 기단 등이 모두 9세기 중반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15] 심지의 중창 시기로 전승되는 832년 무렵에는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6] 또한 창건 시점으로 전해지는 832년이라는 시점을 전후하여 민애왕의 어머니인 선의왕후(宣懿王后)와 아버지인 김충공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863년 민애왕에 대한 추복이 동화사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려하면, 창건주는 명확하지 않더라도 동화사가 민애왕계의 추선 등을 위한 원찰로서 창건된 것으로 파악된다.[17]

심지가 진표의 제자 영심으로부터 간자를 받아 돌아온 뒤에는 첨당을 중심으로 진표계 점찰법회를 설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미륵간자를 봉안한 첨당의 건립 이후 동화사는 미륵신앙과 깊게 연결되었고, 효공왕 12년(908년) 수창군의 호족 이재(異才)가 일곱 구의 미륵상이 등장하는 꿈을 꾼 뒤, 호국성에 팔각등루를 건립하고 동화사의 승려인 홍순(弘順) 대덕을 초청하여 좌주(座主)로 삼아 낙성법회를 개최하는 등[18] 10세기 초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미륵신앙 사찰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9] 경순왕 7년(934년) 중창하였다.[10]

고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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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말기 고려 왕건의 생애 최대의 패배로 유명한 공산 전투가 이 동화사가 소재한 팔공산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고려사》에는 왕건은 몸소 5천 기병을 거느리고 공산동수(公山棟藪) 즉 동화사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견훤과 충돌했고, 견훤에 대패했다. 신숭겸, 김락(金樂) 등의 무장들이 전사하고 왕건 자신은 목숨만 건져서 겨우 도망쳤다. 팔공산 일대에는 이때의 왕건의 도주와 관련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동화사와 파계사 올라가는 갈림길에 신숭겸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지명을 파군재(破軍岾)라고 한다.[주 2]

정종 2년(1036년) 개경(開京)의 영통사(靈通寺), 대구의 부인사(符仁寺)와 함께 관단사원(官壇寺院), 즉 승려가 본인이 출가한 사찰 외에 별도로 각자 업으로 하는 불경과 계율 시험을 치르고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의식을 치르는 사찰로 지정되어[10] 《계단도경》에 의거한 계단(戒壇)을 건립되었다.

이는 동화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점찰간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 나아가 유식학이나 미륵사상 같은 법상종의 학문적 배경이나 사리신앙의 성격 변화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신라에는 9세기 후반 당으로부터 골아형 사리가 수용되어 유행하고, 또 계단(戒壇)에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도선의 영향으로 계단이 곧 불탑(佛塔)이라는 인식이 퍼져 고려 시대에는 불사리를 계단에 보관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진표가 미륵으로부터 받았다는 간자를 '부처의 뼈'라고 적어 놨지만, 진표 당시만 해도 이 점찰간자가 부처의 뼈라는 인식은 없었는데, 어느 시기엔가 점찰간자 가운데 제8, 제9간자만은 미륵의 손가락뼈라는 인식이 형성되었고, 이를 보관한 동화사에 계단이 설립되고 동화사가 관단사원으로 지위가 격상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고려 예종 때에는 동화사의 간자를 성간(聖簡), 즉 신성한 간자라 부르며, 개경의 대궐로 모셔다 법회를 열어 공경하기까지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이때 두 간자 가운데 제9간자를 잃어버려서 상아로 모조품을 만들어서 동화사로 돌려보냈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무렵에는 색이 변해서 어느 것이 새 것이고 어느 것이 오래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충렬왕 24년(1298년)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동화사를 하안소(下安所)로 삼고 다시 대규모로 중창하였는데, 동화사 경내에는 '도학동 승탑'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승탑이 홍진국사의 부도로 전하며, 동화사 홈페이지에 소개되었다.[10] 경내에는 홍진국사의 탑비도 있었지만 실물은 사라졌고 비문의 탁본만 남아 전하고 있다.

동화사 조사당에 봉안된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 《동화사사적비》에는 보조지눌이 명종 20년에 동화사를 중창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는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동화사사적비》에는 동화사의 고려 시대의 연혁에 대하여 933년에 나말선초의 선승 영조선사(靈照禪師, 870~947)가, 명종 20년(1190년) 조계종의 개조(開祖)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동화사를 중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으로 유학한 뒤에 947년 입적할 때까지 줄곧 중국에서 활동했던 영조선사의 행적이나, 명종 18년(1188년) 보제사에서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으로 옮겨 온 이래로 그곳에서 나가지 않고 수행에만 몰두했던 보조지눌의 행적을 볼 때 해당 기록을 실제의 사실로 받아 들이기 어렵고[20] 18세기 중반에 찬술된 동화사 자체 사적에서 전혀 살필 수 없어, 18세기 후반 이후에나 생겨난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사실과는 별개로 영조선사, 보조국사와 같은 선사들을 중창주로 인식한 점 역시 조선 후기 동화사가 선종을 표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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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은 대구의 열 가지 볼거리 즉 '대구십경'(大邱十景) 가운데 일곱 번째를 '동사심승'(桐寺尋僧) 즉 동화사로 승려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꼽으며 시를 남겼다.

동사심승(桐寺尋僧) - 서거정(徐居正)

원상초제석경층(遠上招提石徑層)
청등백말우오등(靑縢白襪又烏藤)
차시유흥무인식(此時有興無人識)
흥재청산부재승(興在靑山不在僧)

멀리 절에 올라가는 좁은 돌층계 길
푸른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한 검은 지팡이
저토록 흥겨운데 아는 이 없으니
청산에 흥겨움이 있지, 스님에게 있지 않거늘

동화사 조사전에 봉안된 사명당유정진영. 동화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 지휘소 가운데 하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선조 25년(1592년) 대구가 왜병에게 함락되자 대구부사 윤현은 동화사를 관군의 본부로 삼고, 대구부 관리들은 염불암에 들어가 머물렀다.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영남도총섭(嶺南都總攝)이 되어,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을 설치하고 동화사 봉서루에 편액을 걸어 영남 지방의 승병을 지휘하였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9년(1606년) 동화사를 중창하기도 하였다.

숙종 3년(1677년) 상숭대사(尙崇大師)가 동화사를 1차로 중창하였다. 2차 중창은 1725년 3월 동화사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화재가 계기가 되어 이루어졌다. 대웅전중창상량문에 따르면 이 화재로 법당과 삼세여래(三世如來) 및 누각(樓閣), 정문(正門), 불공장(佛公藏), 향로전(香爐殿), 서상실(西上室), 미륵전(彌勒殿) 그리고 선당(禪堂)과 승당(僧堂) 등 모두 아홉 채의 건물이 소멸되었다고 하였다. 화재 직후 낙빈홍제(落賓弘濟) 및 관허(冠虛)와 운구(雲丘), 청월(晴月)[10] 등을 중심으로 가람의 재건이 이루어졌고, 7월부터 영조 4년(1728년)까지 서상실과 미륵전(1725), 승당과 선당(1726), 대웅전(1727), 누각(1728) 등이 차례로 중수되었다. 《팔공산동화사사적》(1732년)에 실린 '중창별록'에서는 이시기 금당암이나 비로암 영역의 중창은 전하지 않고 있어서, 화재가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화재였고, 소실된 전각들이 모두 대웅전 영역에 소재했음을 보여 준다.

영조 8년(1732년) 당시까지의 재건에 대한 기록과 사찰내에 전승되던 사적을 모아 《팔공산동화사사적》을 편집, 사찰의 재건을 마무리지었다.

두 차례의 재건을 거치면서 동화사는 기존의 금당암이나 비로암 영역이 아닌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미륵신앙보다는 선종을 표방하는 등 가람의 모습이나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다.[21] 《동화사사적비》에 933년에 영조선사가, 명종 20년(1190년) 조계종의 개조(開祖)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동화사를 중창하였다는 전승이 실린 것은 실제 사실과는 별개로 영조선사, 보조국사와 같은 선사들을 중창주로 인식한 점 역시 조선 후기 동화사가 선종을 표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종 17년(1880년) 동화사는 수릉(綏陵)의 제사에 쓸 향목(香木)과 탄목(炭木)을 기르고 두부를 공급하는 조포사가 되었다. 고종 17년(1880년) 11월의 《예조첩지》에는 "禮曺 釋敏軒爲 綏陵造泡屬寺 慶尙道大邱桐華寺 兼 香炭封山守護總攝八道僧風糾正 都僧統者 光緖六年 十一月"라고 하여, 동화사가 소재한 팔공산 역시 향목과 탄목을 기를 향탄봉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동화사 입구에 수릉향탄금계표석(綏陵香炭禁界標石)과 팔공산 수태골 등산로에 있는 수릉봉산계표석(綏陵封山界標石)이 남아 있다(다만 현존하는 수릉향탄금계 표석은 원래 위치에서 10m 가량 위쪽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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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강제해산되고 대구진위대 소속의 군인이었던 24세의 우재룡(禹在龍)이 7월 정용기(鄭鏞基)가 청송에서 일으킨 산남의진(山南義陳)을 찾아가 연습장(練習將)을 맡아 산남의진 소속 의병들을 훈련시켰고, 7월 12일부터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시작했다. 산남의진은 7월 17일 청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9월 1일 포항 죽전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했고, 의병장 정용기도 이때 전사했다.

이후로도 산남의진은 경북 일원에서 유격 전술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우재룡은 산남의진의 선봉장(先鋒將)으로 활약했으나, 1907년 12월 7일 영암에서 의병장 정환직(鄭煥直)이 전사했다. 이후 우재룡은 영천 서부 방면을 맡아, 동화사를 근거지로 팔공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듬해 1908년 7월 산남의진의 의병장 최세윤(崔世允)과 선봉장 우재룡이 일본군에 체포되며 산남의진의 의병활동도 끝났고, '내란죄'로 '종신형' 처분을 받아 복역하던 우재룡은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 제국이 멸망한 뒤 '합방 특사'로 풀려났고, 대한광복회에 합류해 활동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 동화사는 31본산의 하나였다. 당시 동화사 주지였던 김남파(金南坡)가 1917년 대견사 폐찰을 조선총독부에 청원하는 등 친일로 돌아선 것과 달리 동화사 지방학림 소속의 학승 윤학조(당시 25세), 김문옥(당시 20세), 권청학(당시 21세), 이성근(李成根, 당시 19세), 김종만(金鍾萬, 당시 21세), 김윤섭(金潤燮, 당시 20세), 이기윤(李起胤, 당시 21세), 박창호(朴昌鎬, 당시 19세), 허선일(許善一, 당시 23세), 이보식(李普湜, 당시 20세) 등은 3월 28일 경내의 심검당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덕산정시장(염매시장) 장날인 30일을 하루 앞둔 29일 반월당 언덕에 있는 동화사 포교당(보현사)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30일 오후 2시 덕산정시장에서 시장을 찾은 일반 민중들과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들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승들은 10명 전원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서울 중앙학림 소속이었던 윤학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화사 지방학림 소속이었다.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은 윤학조에게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하였고 동화사 부속 지방학림생도들에게 독립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고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옥고를 치른 이 가운데 김문옥은 1990년[22], 이기윤은 1992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받았다. 이들이 만세운동을 모의했던 동화사 지방학림은 1개월간 강제 휴교 조치를 당했다.

대구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사흘 뒤인 3월 4일 즈음에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도착했고, 학생과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3월 8일에 서문시장에서 1차, 10일에 덕산정시장에서 2차, 그리고 이날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3차 만세운동(3.30 대구만세운동)이다. 보현사는 동화사에서 대구 시내 포교당으로 세운 부속 사찰로, 이후 현대식 건물로 개축하고 기존의 법당을 영천의 용화사로 옮겨 지어서 지금은 그 절의 대웅전 건물로 쓰이고 있는데, 2021년에 영천 용화사 대웅전에서 승려들의 교재로 쓰던 《선문염송》(禪門拈頌) 사이에 끼워져 있던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가 발견되었다. 3.30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동화사 학승들이 독립만세운동하면서 등사한 것이라 여겨진다. 보현사 벽에는 당시 3.30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한 승려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설치물이 세워졌다.

1922년에 동화사는 경북 경내의 고운사(의성) ‧ 은해사(영천) ‧ 김룡사(김천) ‧ 기림사(경주) 등의 본산과 함께 경북오본산연합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는 1936년 경북불교협회로 발전한다. 경북불교협회는 1936년 7월부터 『경북불교』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발간하여 불교계 소식을 전하였고,[23] 1937년 8월에는 다섯 본산의 창건과 가람의 중수, 각 사찰에서 입적한 고승들의 비문 등의 연혁을 기록한 자료집 《경북오본산고금기요》를 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1939년 중등학교인 오산불교학교(五山佛敎學校)를 설립하여 1940년 4월 8일 개교하였다.

오산불교학교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으며, 태평양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일제의 '학교전시비상조치법'(學校戰時非常措置法)으로 신입생 모집이 정지되었다가 광복(1945년) 이후 오산농림실수학교(五山農林實修學校)로 개편, 이듬해 1946년 능인중학교(能仁中學校)로 설립이 인가되어 대구의 이천동에서 개교했다. 1951년 학제 개편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며, 1986년 수성구 지산동으로 이전하였다. 능인중학교[24]와 능인고등학교[25]는 자교 공식 홈페이지에 자교 연혁의 시작을 오산불교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오산학림이 세워졌던 1938년 1월로 잡고 있다.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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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을 조성하고,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을 새롭게 지었다.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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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안내도

동화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 우에 각각 금당암과 비로암을 갖춘 형태의 사역(寺域)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이래로 조금씩 변화해 온 결과이다. 창건 이후 신라 시대의 동화사 사역은 고려 시대와 달랐고, 조선 시대와도 달랐다.

금당암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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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당시의 동화사의 모습은 동화사 금당암 동탑지 제1지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삼층석탑(금당암 동탑)은 가람을 만들었을 때로부터 건부 2년 을미(875, 헌강왕 원년) 9월까지 강당의 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금당 아래에 새로운 탑을 건립해서 부득이하게 옛 탑을 당(금당) 위(동쪽)로 옮겼다."[26]고 하여, 현재의 동화사 사역과 같은 대웅전 중심이 아닌 금당암 중심으로 사역(寺域)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금당 정면이 아닌 측면에 동서로 탑이 배치되는 형태는 금당암 영역의 협소함이라는 공간적 제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7] 863년 경문왕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동화사 비로암에 세운 삼층석탑은 민애왕사리함기에 따르면 '동수원당의 앞'([桐藪願堂之]前)에 건립되었는데, '동수원당' 즉 민애왕의 원당으로써의 동화사는 863년 비로암 석탑 건립 이전에도 비로암 영역을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며, 동화사는 동수원당이 조성되었던 839년부터 시작해 863년 비로암 석탑 건립에 이르는 등 창건 직후부터 비로암 영역으로 그 사역을 확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8] 또한 '망자의 추선'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주불전인 금당에는 아미타불이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고려 후기 금당암서탑중수기에 언급된 무량수전의 존재나 현재까지도 금당암 영역이 극락전, 수마제전이라는 아미타신앙 전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등 아미타신앙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신라 이래의 전통으로 주불전인 금당이 고려 후기의 무량수전을 거쳐 현대에까지 이어진 결과로 이해된다.[29]

832년 무렵 민애왕가의 원찰로서 금당암 영역을 중심으로 창건되었던 동화사는 839년 무렵 동수원당, 858년 이전에 첨당, 863년 비로암 석탑 등의 조성을 통해 금당암 영역을 넘어 비로암, 대웅전 영역으로 사역을 확대했다. 이때 현재의 금당암 영역이 중심사역이 되고, 비로암 영역은 민애왕의 원당으로, 그리고 대웅전 영역은 첨당을 중심으로 한 진표계 점찰법회의 설행 장소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0]

첨당과 점찰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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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가 진표의 제자 영심으로부터 간자를 받아 돌아온 뒤에는 첨당을 중심으로 진표계 점찰법회를 설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화사의 창건주를 심지로 보는 관점에서 첨당의 위치는 동화사 사역이 처음 형성되었던 금당암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는데[31] 박상현은 점찰법회라는 불교 법회가 이루어지는 첨당의 특성상 대중들이 오체투지 등 참회를 할 수 있는 '마당'으로 쓸 만한 장소라고 하기에는 금당암 영역이 협소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사역 안에서도 가장 넓은 현재 대웅전 영역으로 쓰이고 있는 곳을 첨당의 위치로 지목하였다.[32] 대웅전중창상량문을 통해 1725년 동화사에 큰 화재가 있었고 이로 인해 법당(대웅전)과 미륵전(彌勒殿) 등이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가 미륵간자를 회수한 장소가 '첨당 북쪽의 작은 우물'이라는(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까지 남아 있었던) 《삼국유사》의 기록에 맞는 '우물'의 흔적이 금당암 영역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과는 달리 1980년대까지 동화사 대웅전 심검당 뒤편에 심지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작은 규모의 우물이 존재[33]했던(우물은 이후 콘크리트로 메워 원형이 소실됨) 점 등을 통해 삼국유사에 언급된 첨당이 현재의 동화사 대웅전 안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고 해석하였다.[34]

또한 대웅전중창상량문에 언급된 '미륵전'과 관련하여 동화사에서는 고려 전기의 '동수미륵당'(桐藪彌勒堂)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수습되었는데, 《금당암서탑중수기》에는 금당암 서탑 중수 과정과 함께 당시 금당암 영역의 무량수전이 언급되고 있고 이는 신라 이래의 금당(주불전)이 유지된 결과로 이해되므로, 동화사의 미륵당은 금당암 영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고 그곳이 대웅전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35]

금당암 영역에서 대웅전 영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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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재건을 거치면서 동화사는 기존의 금당암이나 비로암 영역이 아닌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미륵신앙보다는 선종을 표방하는 등 가람의 모습이나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다.[21] 1732년 당시 동화사 소재 전각과 중수내력에서는 조선 후기 동화사의 불사가 기존의 중심 사역이었던 금당암 영역(4건)이 아닌 대웅전 영역(13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조선 후기 동화사가 대웅전 영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을 시사한다.[36]

1748년 동화사를 유람했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기행문에는 봉황문(鳳凰門)으로 들어가 종루(봉서루)에 오른 뒤 약사전에서 묵었다고 하였는데,[37] 이는 모두 대웅전 영역에 소재하는 전각들로 동화사가 조선 후기에 대웅전 영역 중심의 사찰 진입로를 형성하는 등 이곳을 중심 사역으로 활용했음을 보여 준다.[38] 뿐만 아니라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3년경)와 《영남읍지》(嶺南邑誌)(1895년)에서는 동화사의 부속암자 중 하나로서 '금당암'이 언급되는 등, 창건 당시부터 사찰의 중심 사역이었던 금당암 영역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동화사의 '부속 암자'로 전락하는 등 위상이나 기능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38]

주요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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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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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문은 동화사의 산문(山門) 즉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선조 11년(1633년)에 건립되었다. 원래 동화사 옹호문 자리에 있었으나 196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39] 흔히 옛길로 부르는 경로에 위치해 있어 동화사의 입구 역할을 했었으나 이후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는 동화문이 세워지면서 예전에 비해 입구로써의 기능은 약해졌다.

옹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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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의 중문인 옹호문(擁護門)은 불법(佛法)을 호위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모셔둔 곳으로, 예전에 있었던 옹호문 자리에 새로 건립하여 2003년 12월 1일 낙성하였다.[40]

봉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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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鳳棲樓)는 동화사의 누문(樓門)으로. 대웅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치게 되는 문이다. 이름 자체는 '봉황의 기운이 서린 누각'이라는 뜻이다.

주로 제사나 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된다. 대웅전 방향으로 유리문을 설치하여 큰 법회시 봉서루에서도 대웅전을 향해 법회에 동참할 수 있다. 동편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그 좌우에 영구위패롤 모셨다. 봉서루는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41]

봉서루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흔히 이 부분을 '봉황의 꼬리'라 부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세 개의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예전에는 큰 바위가 봉황의 알이라고도 했었다). [41] 풍수지리상으로 팔공산이 봉황의 모습으로 대구광역시를 감싸 안고 있으며 동화사는 그 봉황의 아기궁이 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서루 안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서 동화사에서 승병(치병)을 지휘했던 것에 기인한다. '치영'이란 승병의 본부라는 뜻이다. 원판은 동화사 경내의 통일대불전 지하 승보박물관에 전시하고 봉서루에는 복제품을 걸어 두었다. 모각한 현판의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조선 말기에서 일제 시대에 걸쳐 활약한 서예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6)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영남일보》에서 제기되었다.[42]

대웅전(大雄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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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의 금당이다.

영산전(靈山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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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에서는 영산전이라고 하지만 절에 따라서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의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맞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 양식을 갖춘 현재의 영산전은 현종 10년(1669년)에 학찬(學贊)이 세웠던 것을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에 요사채가 있는데,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산신각과 칠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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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山神閣)은 산신을 모신 전각이고, 칠성각(七星閣)은 칠성신을 모신 전각으로, 기존의 산신 신앙과 칠성 신앙 등의 토착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신화된, 한국의 사찰에만 존재하는 전각이다.

동화사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신 탱화는 1857년(철종 8년)에 그려진 것이다.[43]

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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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전(祖師殿)은 대웅전 뒤편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경의 건물이다.

동화사를 처음 세웠다는 극달 화상과 중창조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등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진영(복사본)이 봉안되어 있다.

금당암·금당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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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암(金堂庵)의 '금당'은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전이라고도 부른다. 즉, 원래 금당암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던 암자였지만, 이후 선원이 세워지면서 금당선원이라고 더 많이 부르게 되었다. 선원은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44]

심지대사가 처음 간자를 봉안할 곳을 찾으려고, 팔공산에서 간자를 던졌을 때 간자가 날아가 우물가에 떨어졌고 그곳이 금당선원 자리라고 전한다.[45]

해방 이후로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 등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세웠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정비되었으며,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삼층 석탑 2기(보물 제248호)가 극락전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45]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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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3년(1600년)에 금당선원의 중건이 시작됐다. 그중 극락전을 제일 먼저 건립했다.[46]

수마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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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제전은 금당선원의 극락전 뒤쪽에 있고, '고금당'(古金堂)이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한때 동화사의 금당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세종 11년(1465년)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 28년(1702년)에 중창되었다. [46]

비로암·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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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암(毘盧庵)은 863년민애왕을 위해 건립하였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蹟記)에는 비로암이 아니라 비로전이라고 하고 있어, 원래 같은 사찰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47] 참고로 현재는 비로전을 대적광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율원으로서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하다. 팔공총림 동화사 율학승가대학원(율원)은 2013년에 설립되어 2015년 2월에 1기 졸업생을 배출하였다.[48]

심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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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검당(尋劒堂)이라는 이름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참선이나 불경 강설용으로 쓰이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동화사 심검당은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천령(天靈)에 의해 지어졌다.

1919년 3.30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영남 지방학림의 승려 아홉 명이 당시 만세운동 계획을 결의하고 수립했던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에 중건된 것으로, 동화사 승려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통일대불과 통일기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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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불 전경

통일대불(統一大佛)은 1990년 10월 26일에 착공하여, 1992년 11월 27일에 점안식을 올렸다. 당시 대선기간이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참석했었다.[2]

통일대불의 높이는 총 33m(17m, 좌대의 높이가 13m, 지하암반에서 참배단까지 높이가 3m)이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석공 108명이 7개월 동안 황등석 2,000톤으로 불상을 3,000톤으로 좌대를 만들어, 팔공산 동화사로 옮겼다. [2]

약사여래불을 통일대불로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반도 통일에 갈등이 되는 걸림돌을 약사여래불이 하루 속히 치유하여, 통일을 이루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자는 뜻이라고 한다. [2]

통일대불 조성에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많은 시주를 하였고, 부인인 변중석 여사도 1만 5천평을 매입해 주차장 부지로 시주하였다.[49]

통일기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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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불 맞은편 통일기원대전(統一祈願大展)이 있다. 전각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바로 통일대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법화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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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는 있는데,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법화경 법당이 있다. 나머지 공간은 박물관과 참선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108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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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2가지가 있는데, 108계단 쪽으로 가면 힘은 들지만 다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면 아찔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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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와 연관된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목록은 다음과 같다.[50] 문화재 지정번호는 2021년 11월 19일부터 표기하지 않기로 법이 개정되어 현재는 쓰지 않는다.[51]

지정 종류 명칭 시대 지정일 참조
보물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
신라 1963년 1월 21일 [1]
보물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大邱 桐華寺 毘盧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
신라 1963년 1월 21일 [2]
보물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신라 1963년 1월 21일 [3]
보물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大邱 桐華寺 金堂庵 東·西 三層石塔)
신라 1963년 1월 21일 [4]
보물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大邱 桐華寺 幢竿支柱)
신라 1963년 1월 21일 [5]
보물 대구 도학동 승탑
(大邱 道鶴洞 僧塔)
미상 1975년 8월 4일 [6]
보물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
(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통일신라 1982년 12월 7일 [7]
보물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
조선 2006년 12월 29일 [8]
보물 대구 동화사 대웅전
(大邱 桐華寺 大雄殿)
조선 2008년 4월 28일 [9]
보물 대구 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
(大邱 桐華寺 木造藥師如來坐像 腹藏典籍)
조선 2009년 2월 23일 [10]
보물 대구 동화사 아미타회상도
(大邱 桐華寺 阿彌陀會上圖)
조선 2009년 2월 23일 [11]
보물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
(大邱 桐華寺 普照國師知訥眞影)
조선 2010년 2월 24일 [12]
보물 대구 동화사 삼장보살도
(大邱 桐華寺 三藏菩薩圖)
조선 2012년 8월 24일 [13]
보물 대구 동화사 지장시왕도
(大邱 桐華寺 地藏十王圖)
조선 2012년 8월 24일 [14]
보물 대구 동화사 봉황문(大邱 桐華寺 鳳凰門) 조선 2022년 12월 28일 [15]

부속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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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승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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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가 위치한 팔공산 일대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산지에 위치한 사찰끼리 서로 필요한 물품을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거래하던, 이른바 승시(僧市)라고 하는 승려들의 시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동화사는 이 승시를 재현한 '팔공산 승시축제'를 2010년부터 개최하고 있다. 승시라는 독특한 전통의 계승 및 불교문화의 대중화를 목표로 승시와 관련된 학술 세미나와 승시에서의 물물교환 재현 및 승려들이 제작한 불교용품 자선바자회를 비롯하여, 사찰 음식 시연 및 영산재, 극달화상 영정이운식, 승무 시연, 판각 및 탁본체험, 단청 및 불화(탱화)그리기, 염주, 목탁, 컵등 만들기 등의 체험행사와 외국의 불교문화 소개 등의 행사와 더불어, 전통문양 활용 패션 경연대회, 찬불가 경연, 요일별 풍물공연과 줄타기, 널뛰기, 청소년 댄스공연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부터는 승려들간의 씨름 경기인 ‘동화사 주지스님배 씨름대회’도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개최되었다.

체험 및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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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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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에서는 내·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52]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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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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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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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화사 내부의 전승 자료에서는 심지의 동화사 중창 시기에 대해 일제강점기에 찬술된 《동화사사적비》에 기재된 832년을 제외하면 '대웅전중창상량문', 《동화사사적》 등에서 772년이라는 시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동화사사적비》는 가장 후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신뢰성 문제가 있고, 심지는 헌덕왕대(809~826년)에서 경문왕대(861~875년)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772년이라는 시점은 《동화사사적비》보다 신뢰하기 어렵다. 772년과 832년은 모두 임자년으로 딱 한 갑자(60년) 차이가 나는데, 18세기 중·후반 동화사 자체 사적이 찬술될 때 모종의 착오로 772년이란 시점이 계속해서 전승되다가 《동화사사적비》 찬술 시점에서 이를 832년으로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1]
  2.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국서에는 공산 전투를 회상하면서 "(고려의) 좌상(左相) 김락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제 해골을 볕에 쬐였다."고 하였는데, 파군재에서 동화사-파계사 갈림길 올라가는 길 사이에 왕산이라는 산이 있고, 미리사는 이 산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조선 시대까지는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위치는 왕산 아래 위치한 신숭겸의 순절단과 표충단과 멀지 않은 곳으로 여겨진다. 왕산이 위치한 지역의 행정구역명인 지묘동(智妙洞)도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왕건으로 변장하고 나아가 싸우다 죽었다는 이른바 '위왕대사(爲王代死)'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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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상현 (2025년) '통일신라~조선후기 동화사 가람의 변화 과정과 의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3~124쪽
  2. “세계최대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디지털대구동구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2월 28일에 확인함. 
  3. “4일부터 조계종 산하 사찰 문화재 관람료 면제”.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3년 5월 1일. 2023년 5월 2일에 확인함. 
  4. “다송문고(茶松文稿) / 茶松文稿卷第一”. 《한국불교전서》. 불교문화기록유산 아카이브. 2023년 3월 2일에 확인함. 
  5. 김위석. “동화사 (桐華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3월 2일에 확인함. 
  6.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6~127쪽 주
  7. “대구 동화사 사적비 (大邱 桐華寺 事蹟碑) 탁본”. 《불교중앙박물관》. 불교중앙박물관. 2023년 3월 2일에 확인함. 
  8. 오세덕, 2017, '八公山 桐華寺의 창건시기와 伽藍의 변화과정 고찰' 《佛敎學報》79, 162쪽
  9. 《삼국유사》권4, 의해제5, 심지계조
  10. 동화사 - 소개
  11. 최연식, 2021, '민애왕의 가계와 추복 과정에 대한 검토' 《佛敎美術》32, 80~81쪽 및 91쪽
  12. 한지만, 2021(b), '진표계 법상종 사원의 가람 구성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30, 62~65쪽
  13. 《삼국유사》권4, 의해제5, 진표전간
  14.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4~125쪽 주
  15. 오세덕, 2017, 앞 논문, 163~165쪽
  16.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5쪽
  17. 최연식, 2021, 앞 논문, 86~87쪽
  18. 《東文選》권64, 記,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19.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8~129쪽
  20. 한상길·심효섭, 2011, 《팔공산 동화사》, (재)대한불교진흥원, 79쪽
  21.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41~142쪽
  22. 김문옥 판결문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23. 《경북불교》 - 불교기록유산 아카이브
  24. 능인중학교 학교연혁
  25. 능인고등학교 학교연혁
  26. )《金堂庵東塔誌》第1誌石, “若夫三層石塔者, 從迦籃治成, 到於乾符二秊乙未九月, 任[在]於講堂南. 然而於金堂下, 建新塔已, 不獲已故塔傳在於堂上.”
  27.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5~126쪽
  28.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7쪽
  29.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35쪽
  30.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30쪽
  31. 강삼혜, 2009, '팔공산 동화사 연혁' 《팔공산 동화사》, 208쪽 ; 서지민, 2018, '新羅 景文王代 桐華寺 毘盧庵 佛敎美術品의 특징과 의의' 《고문화》91, 10쪽
  32.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8쪽
  33. 이하석, 1995, 《삼국유사 현장기행》, 문예산책, 230~231쪽
  34.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9쪽
  35.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35~136쪽
  36.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44쪽
  37. 《大山集》 권42 雜著 南遊錄【戊辰】, “遂向桐華寺, 洞府幽深, 白石齒齒.…入鳳凰門, 上鐘樓少憩, 見巖壁隱隱爲後障. 南望石峯, 屹立似印几. 山勢回合,結構周匝, 世傳桐華爲八公第一, 有以也.… 宿藥師殿, 明日上念佛庵.”
  38.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46쪽
  39. 박명한 (2022년 10월 30일). “동화사 봉황문 ‘보물’ 지정 예고”. 《BBS NEWS》. BBS불교방송(재). 2023년 5월 16일에 확인함. 
  40. “[사찰기둥에 걸린 법문. 33] 동화사 옹호문”. 《영남일보 - 위클리포유》. 영남일보. 2003년 12월 25일.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41. “봉서루(동화사-가람배치도)”. 《팔공총림 동화사》. 팔공총림 동화사.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42. “[사찰기둥에 걸린 법문 .5] 영남치영아문”. 《위클리포유》 (영남일보). 2003년 6월 12일. 
  43. “[사찰기둥에 걸린 법문 .12] 동화사 칠성각”. 《위클리포유(영남일보)》. 영남일보. 2003년 7월 31일.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44. “금당암”. 《디지털동구문화대전》. 한국중앙학연구원.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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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장영섭 (2021년 7월 21일). “칠곡 송림사 대웅전‧대구 동화사 극락전 및 수마제전 ‘보물‘ 지정”.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47. “비로암”. 《디지털동구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48. “율원소개”. 《팔공총림 동화사》. 팔공총림 동화사.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49. 이동관; 심헌재 (2023년 5월 14일).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 의현 대종사 "호국불교 다시 꽃 피우는 것이 제 마지막 소임". 《매일신문》. 2023년 5월 19일에 확인함. 
  50. “동화사 - 주요문화재”. 《팔공총림 동화사》. 2023년 3월 2일에 확인함. 
  51. “국보·보물, ‘지정번호’ 안쓴다…국보 1호 숭례문→‘국보 숭례문’으로”. 《동아일보》. 2021년 11월 19일. 2023년 5월 16일에 확인함. 
  52. 동화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외부 링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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