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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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건립년대 804년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
좌표 북위 36° 00′ 04″ 동경 128° 38′ 28″ / 북위 36.00111° 동경 128.64111° / 36.00111; 128.64111좌표: 북위 36° 00′ 04″ 동경 128° 38′ 28″ / 북위 36.00111° 동경 128.64111° / 36.00111; 128.64111

파계사(把溪寺)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중대동)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의 말사이다. 본존은 관음보살이다.

약력[편집]

'파계'(把溪)는 '물줄기를 잡는다'란 의미로, 본래 절 주위에 아홉 갈래나 되는 물이 흘렀는데,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절 아래 연못을 파고 물줄기를 한데 모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정리된 《파계사사적기》에는 애장왕 5년(804년)에 심지왕사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파계사는 17세기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크게 중건된 것으로 현존하는 전각 대부분이 이 시기에 중수되었다.

영조와의 인연[편집]

파계사는 조선 왕실과 연이 깊은 절로 전하는데, 그것은 파계사의 중창자였던 현응(玄應)이 숙종의 부탁을 받고 왕자 생산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려 그것이 효험을 얻었다는 전설에서 기원한다. 이 백일기도로 태어난 것이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英祖)인데, 실은 전생의 농산 화상으로서 전세의 과보를 받아 현세에 왕실의 자손 즉 국왕 숙종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숙종은 연잉군 탄생과 관련하여 현응의 공을 높이 사고, 특별히 파계사 둘레 40리 안팎의 토지에서 거두는 세금을 모두 파계사에서 맡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파계사에 선왕의 위패를 모시게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선조부터 숙종과 덕종, 영조에 이르는 네 명의 국왕의 신위가 파계사에 모셔짐으로서 숭유억불의 기치가 드높던 조선 후기에도 유생들은 함부로 파계사를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 파계사 앞에는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무조건 말에서 내려라)'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으며, 1979년 6월, 파계사 원통전(금당) 관음보살상 개금불사 당시 불상 안에서 영조가 실제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도포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파계사에 전해지는 영조 관련 설화가 신빙성이 있는 것임을 시사하는 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주요 당우[편집]

진동루
원통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마주치는 파계사의 누문이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규모는 2층으로 다듬지 않은 네모꼴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얹어, 동화사 봉서루와 마찬가지로 아래층 어칸에 통로를 내었다. 파계라는 이름 자체에 절 주위의 아홉 갈래나 되는 물줄기를 따라 새어나가는 땅의 기운을 막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곳의 기를 제압할 수 없다 하여 문에도 진동(鎭洞)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원통전
원통전은 관음전이라고도 불리는데, 관세음보살을 주불(主佛) 즉 본존으로서 봉안한 불전을 말하며, 파계사의 금당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으로 한 번 소실되었던 원통전은 선조 38년(1605년)에 계관 법사에 의해 중건된 뒤 숙종 21년(1695년)에 다시 수리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가구식 기단 위에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활용하여 둥근기둥을 올렸다. 내부 불단은 은해사 백흥암의 수미단과 같은 형태로, 불단 상부에 보개가 설치되어 있다. 당우 앞에는 당간지주와 석등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설선당
인조 1년(1623년)에 계관에 의해 지어진 뒤 1646년과 1725년, 두 차례에 걸쳐 재건되고 1762년 지붕을 다시 잇는 공사가 있었으며,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식당과 강습소로 쓰이고 있다.
적묵당
파계사의 전승에서는 애장왕 당시 파계사를 지을 때 함께 지어졌다고 하는데, 광해군 12년(1620년)에 지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마찬가지로 숙종 때인 1695년에 중건되었고, 1920년에 중창되었으며, 1976년에 기와를 다시 잇는 공사가 있었다. 원통전 왼쪽에서 설선당과 마주보고 있는 'ㄱ'자 형태의 건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6칸으로 앞면만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이다.
기영각
불교 사찰인 파계사 내부에 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세워진 당우이다. 다른 이름은 어필각으로 숙종과 영조, 정조의 어필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모셔져 있던 위패는 1910년 국권강탈로 서울로 옮겨져 현재는 탱화만 걸려 있는 상태이다. 건물은 숙종 35년(1696년)에 성전암과 함께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974년1983년에 두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바른층쌓기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로 겯처마를 한 팔작지붕을 얹었다. 주심포계 양식을 보이면서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 후기의 공포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꼽힌다. 상부의 가구는 5량가인데도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지정 문화재[편집]

종목 명칭 시대 지정일 비고
보물 제992호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 조선 1989.04.10
보물 제1214호 파계사영산회상도 조선 1995.01.10
중요민속자료 제220호 영조대왕의 도포 조선 1987.11.23

대중교통[편집]

101번, 101-1번, 칠곡3번(1일 2회)이 파계사 입구까지 운행된다. 종점은 팔공산 순환도로변 파계삼거리 파계사입구 주차장에 있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