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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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Daegu subway fire 1.JPG
화재로 그을린 기물들
날짜 2003년 2월 18일
시간 9시 53분 (KST)
위치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원인 방화
최초 보고자 대구중부소방서
참여자 대구도시철도공사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
실종자 21명
조사 전동차 내부 방염설비 강화 등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大邱地下鐵火災慘事)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방화로 일어난 화재이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2개 편성 12량(6량×2편성)의 전동차가 모두 불타고 뼈대만 남았으며 192명의 사망자와 21명의 실종자 그리고 151명의 부상자라는,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앙로역도 불에 타서 2003년 12월 30일까지 복구를 위하여 영업을 중지하였다.

사고 개요[편집]

방화범 김대한(당시 56세)은 2001년 상반기경 뇌졸중(뇌경변) 으로 쓰러져 오른쪽 상·하반신의 장애가 오게 되어 같은 해 11월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고 증세가 호전될 가망이 없게 되자 삶을 비관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고, 2003년 2월 18일 오전 8시 30분경 대구시 서구 내당동 소재 자신의 집 안방에서 1회용 가스라이터 2개를 상의 주머니에 넣고, 창고에 있던 자동차 세척용 샴푸통(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을 꺼내 검은색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지하철 송현역 부근에서 내린 다음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 7,500원어치 상당을 구입하여 샴푸 통에 담은 후 송현역으로 들어가 안심방향 승강장에서 9시 30분경 안심역 방면으로 운행되는 1079열차의 1호차에 탑승하였다.

9시 53분경,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할 무렵 2호차와 가까운 1호차 노약자석 옆 일반석에 앉아 있던 김대한은 1회용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망설이던 중 맞은 편에 앉은 승객으로부터 "왜 자꾸 불을 켜려고 하느냐"는 나무라는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불을 붙이기로 결심하고, 1회용 가스라이터를 켠 다음 샴푸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김 씨는 옷에 불이 붙자 황급하게 가방을 객실 바닥에 던졌고 불길은 순식간에 객실내로 번지면서 화재가 확산되었다. 불길이 번지자 승객들은 우왕좌왕하며 황급히 대피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 1079열차 기관사는 중앙로역에 도착해 출입문을 연 뒤 "불이야!"하는 소리를 듣고, 운전실 앞에 있는 CCTV 화면에 객차 쪽에서 승객들이 서둘러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고 운전실 옆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 나와 불을 끄려 했지만 가연성 소재로 가득한 전동차 객실 내부의 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승객들에게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9시 55분 30초 경 1079열차와 반대방향(대곡)으로 운행하는 1080열차가 대구역을 출발하여, 9시 56분 45초 경 현장상황을 알지 못한 채 상행선 승강장에 진입하여 정차함으로써 1079열차에서 발생한 불길이 1080열차로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확산되었다.

화재 발생 20여초 만에 대구지하철공사 종합사령실에 설치되어 있던 승강장 감시용 CCTV의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연기와 유독가스 분출량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되며, 화재가 진행되면서 지하 3층 승강장과 1079, 1080의 두 열차 내부는 유독가스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거나 우왕좌왕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1079열차의 승객 대부분은 정차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한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1080열차의 경우 중앙로역에 진입할 때 이미 승강장의 연기로 인해 전동차 외부의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었으며, 특히, 발화지점인 1079열차 1호차와 인접한 1080열차 5~6호차의 승객들은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정차 후 전동차 외부상황에 대해 알 수 없을 만큼 이미 화재로 인한 연기가 지하 3층 승강장에 꽉 차 있는 상태였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1080열차에 타고 있던 대구선 금호역의 권춘섭 역장이 비상 개방 장치를 취급하여 문을 열고 주위 승객들을 대피시켜 피해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었다.[1] 훗날 권씨는 이 활동을 인정받아 2013년 6월 7일 개설된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사고 당시 화재가 처음 화재 발생한 안심행 1079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명이, 반대방향(대곡)행 1080열차에는 180여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던 상태였다.

지하철에서 불이 나자 중앙로역 일대는 유독가스로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으며, 환풍구와 출입구 등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는 시내 전체를 뒤덮어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정도였으며, 사고소식을 접한 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또한, 지하철에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승객 가족들은 현장에 나와 발을 동동 굴렸고, 일부 가족들은 경북대학교병원과 동산병원 등을 뛰어다니다 눈물을 흘리며 현장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였으며, 사고수습대책본부와 언론사에는 사고경위와 사상자 명단을 알 수 없겠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하였다.

사고가 나자 경찰관과 소방관이 긴급 출동하여 현장지휘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중앙로 일대 차량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소방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화재진화와 구조작업을 펼쳤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자 이를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명피해[편집]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으로 총 343명에 달한다. 사망자 192명중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가 185명, 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인정사망 1명이었다. 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중에서 DNA가 확인된 사망자가 3명, DNA 확인이 불가능한 사망자가 3명이었다.

실종자로 접수된 사람은 총 619명 이었고 이 가운데 생존 380명, 지하철 화재사고와 무관한 사망 60명 지하철 사고 부상자 4명 기타 54명 을 제외하고 121명의 인정사망 심사를 하였고 인정사망 심사 에서 확정사망 99명, 인정사망 1명, 불인정 20명, 판단유보 1명으로 결정하였다.

  • 무연고시신 묘비
  1.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A26-ca03, A24-ca08 의 묘
  2.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K42 의 묘
  3.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K14 의 묘
  4.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K35(여) 의 묘
  5.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K05(여) 의 묘
  6.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D08-ca01 의 묘
  • 성별
  1. 사망자 - 186명(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제외) - 남자:61명, 여자:125명
  2. 부상자 - 151명(법적보상 제외자포함) - 남자:80명, 여자:71명
  • 연령별
  1. 사망자 186명 - 0~9세:4명, 10~19세:30명, 20~29세:52명, 30~39세:28명, 40~49세:15명, 50~59세:28명, 60세 이상:29명
  2. 부상자 151명 - 0~9세:3명, 10~19세:18명, 20~29세:38명, 30~39세:39명, 40~49세:30명, 50~59세:12명, 60세 이상:11명
  • 직업별
  1. 사망자 186명 - 무직:29명, 학생:47명, 가사:26명, 자영업:11명, 일용직:2명, 회사원:15명, 공무원, 교사:5명, 기타:51명
  2. 부상자 151명 - 무직:5명, 학생:29명, 가사:37명, 자영업:10명, 일용직:17명, 회사원:32명, 공무원, 교사:14명, 기타:7명
  • 지역별
  1. 사망자 186명 - 중구:1명, 동구:92명, 남구:4명, 북구:8명, 수성구:6명, 달서구:8명, 달성군:2명, 경북:48명, 기타:17명
  2. 부상자 151명 - 중구:2명, 동구:78명, 서구:5명, 남구:11명, 북구:10명, 수성구:6명, 달서구:13명, 달성군:6명, 경북:14명, 기타:6명

지하철이 대중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사고 발생시간이 오전 9시 53분경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의 규모가 컸다.

사상자 가운데 동구 주민이 가장 많았던 것은 안심역에서 출발한 1080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의 인명피해가 컸고, 달서구 대곡역에서 동구 안심역으로 가던 1079열차에 동구 지역 주민들이 많이 탑승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한, 청~장년층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시기적으로 봄방학 기간 이었던 점과 사고 당일 계명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가족이 함께 탑승하였다가 사고를 당한 사례가 18가족이나 되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였다.

이번 지하철 사고에서는 부-모, 모-자, 처-자 등 1가구에 2명 이상의 가족이 동시에 참변을 당한 유가족이 12가구나 되었으며, 특히 두 딸을 동시에 잃었던 모친 김모씨의 경우 보상합의 후 두 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 제를 지내기 위하여 경상남도에 위치한 한 사찰을 찾았다가 같은 해 9월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태풍 "매미"로 인하여 사찰내 요사체가 붕괴되면서 모친도 두 딸의 뒤를 따라간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 동시 사망자 현황
  1. 부-모:2가구
  2. 모-자:1가구
  3. 처-자:6가구
  • 자녀
  1. 딸:1가구
  2. 아들:1가구
  3. 딸, 아들:1가구

문제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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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소방 기술[편집]

초기 신고자로부터 현장상황에 대한 정보파악 시도가 전혀 없이 무작정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절박한 신고자에게 '출동했다.','예, 갑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녹음자료로 확인된 사실) 또한 지하철 화재진압 기술 및 대비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분진 마스크, 방독면, 산소통, 방열 소방복, 연기 강제배출 장비 등이 절대 부족하여 사고 발생 후 3시간 이상이나 구조대 현장진입 불가능 상태였다. 소방차 84대, 소방관, 경찰 등 3200명이 출동했지만 실속 있는 조치는 전무하였다.

사고 관리 시스템 부재[편집]

사고발생의 원인을 구조적 문제와 같은 근본 원인보다는 하위직의 개인 실수에서 찾아 처벌하려고 하였다. 또한 사망자, 실종자 파악, 현장수습, 유가족 대책수립(인정사망 기준과 보상), 행정처리 절차가 미흡하였다. 결정적으로 현장 보존에 실패하였다. 소방관의 진화, 구조 활동에 의한 훼손, 취재 기자들에 의한 훼손방치, 고위 정치인의 이튿날 현장방문에 대비한 현장 훼손(군 병력 투입, 물청소 실시), 뚫린 창문에 대한 응급조치도 없이 소실된 전철 차량의 이동 등 사고 관리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부실한 사회 안전망과 저질 전동차[편집]

대중교통수단인 전철의 객차가 화재에 매우 취약한 가연성 재질(폴리우레탄 폼 재질의 시트, FRP 소재로 구성된 내장재, 폴리염화비닐 재질로 된 내부 통로 자바레 및 바닥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 시트가 빠른 속도로 불에 타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발생시켰다. 당시 열차 차량에 대한 소방안전대책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작 소화기 비치가 전부였고 객차의 경우 건축법, 소방법 및 전기사업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관계자 몇 명 정도만 과실과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수준으로 매듭 되었다. 또한 1993년 대구도시철도공사에서 매입한 전동차량의 단가는 1량 당 5억 원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낙찰 이후 예산부족을 이유로 대금을 더 삭감하였다. 이는 전동차를 부실한 재질로 제작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선진국에 수출하는 전동차의 단가는 약 17억, 서울지하철 단가는 약 8억이었던 것에 비해 무척 싼 가격이었다.

휘발유를 함부로 용기에 담아 판매하는 안전 불감증[편집]

사건이 발생하기 전, 범인은 방화를 목적으로 주유소를 방문하여 자동차 세척용 샴푸통(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에 휘발유를 구입해 갔다. 한편, 주유소 측에서는 정확한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인화성과 폭발 위험이 높은 휘발유를 용기에 담아 판매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나는 데 한 몫을 한 셈이었다. 석유관계법에 따르면 자동차용 휘발유는 절대로 변형된 방법으로 임의의 용기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적발될 경우 해당 주유소에 강력한 행정 처분이 내려지게 된다. 그렇지만 기름보관용 플라스틱통에는 휘발유는 20리터까지, 경유는 30리터까지 구매&운반이 가능하다.

사고 후[편집]

화재로 그을린 벽에 쓰인 추모글
사고 이후 새롭게 단장한 중앙로역. 대곡 방면 역명판 아래에 형광 처리된 긴급 전화번호판과 대피용 손전등은 새로 설치한 것이다.

관련자 처벌[편집]

방화 용의자는 사고 발생 2시간 뒤 북구 노원동3가 조광병원에서 치료 중 경찰에 붙잡혔다.[3]

4월 23일에는 대검 특별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방화범 김대한을 현존 전차 방화 치사상죄로, 기관사, 관제사, 역무원, 시설 책임자 등 지하철 직원 8명을 업무상 중과실 치사상죄로 각각 구속 기소하고, 2명을 업무상 과실죄로 불구속 기소했다.[4],[5]

같은 해 8월 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방화범 김 씨에 대해 검찰사형을 구형하였으나, 김 씨는 심신 장애는 없었으나 범행 당시의 정신 상태 등을 감안하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일으킨 범행이라 보기 어려운 점과, 직접 방화한 1079호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그다지 없었던 점(1080열차의 진입으로 사고가 크게 확산[6]) 등이 감안되어 2004년 1월 7일에 대구고등법원에서 무기 징역이 선고되었다.[7]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김대한은 2004년 3월 8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같은 해 8월 30일에 지병 악화로 사망했다.[8] 한편, 검찰이 일괄하여 법정 최고형인 금고 5년을 구형했던 지하철 직원들에 대해서는 1080열차의 기관사 최상열은 열차의 출입문을 닫아 버려 승객들의 탈출을 막아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점에서 구형대로 5년 금고형이 선고되었고, 2008년에 집행 기간이 끝나 출소했다.[9] 1079열차 기관사 최정환과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받은 관제사 방정민에 대해서는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 홍순대, 손영일 등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년이 선고되었으며, 나머지 세 피고인(시설사령 2명 및 중앙로역 역무원)에 대해서는 직접 책임이 없음을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선고 공판 직후 재판부의 양형에 불만을 품은 유족들이 격렬히 항의하며 법정을 점거하기도 하였다.[10]

중앙로역 통제 및 복구[편집]

열차 운행은 사고가 난 중앙로역을 전후한 교대~중앙로~동대구역 구간이 불통되어 양쪽 구간만이 운행되었고, 동대구역의 경우 큰고개역의 회차선을 통해 돌려서 운행했다. 교대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시내버스 중 일부 차량들을 가져와서 셔틀버스로 수송하는 파행 운행이 이어졌다.[11]중앙로역이 운전 취급 역이었던 관계로 중앙로역 반복 운전을 하지 못하고 상당한 구간이 불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2] 게다가 중앙로역의 구조물이 손상되어 2월 25일에 반월당네거리와 중앙네거리 사이가 전면 통제되어 시내버스들이 반월당역에서 우회 운행했다.[13] 차량 통행금지는 같은 해 4월 10일에 전면 해제되었다.[14] 운행 재개는 가복구가 이루어진 10월 21일에 이르러 중앙로역을 무정차 통과하는 형태로 교대역~동대구역 구간의 운행을 재개[15] 하였고, 12월 31일이 되어서 비로소 중앙로역에 정차가 가능해져 완전히 정상화가 이루어졌다.[16]

유족 및 피해자 후유증[편집]

희생자들과 그에 관계된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고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생존자들은 대부분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충격으로 자살하거나 정신 이상을 일으킨 사람, 울화병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 등도 적지 않았다.[17] 매년 2월 18일에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18]

정부의 대처 : 내장 불연재 교체[편집]

사고 이후 정부는 전국 대도시의 각 지하철 운영 주체 및 광역 철도 운영 주체인 철도청 등의 기관에 2006년까지 전 차량에 대한 내장재 교체를 완료하라고 지시하였다. 기존의 차량은 좌석, 벽 내부 단열재 등에 가연성 소재인 천이나 면 따위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조의 시작은 승객들이 직접 사용하게 되는 좌석이었다. 수도권 전철 운영기관 중에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現 서울메트로) 및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5678 서울도시철도)는 견고하고 불에 안타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금속으로 하였고 철도청(現 코레일)은 불연재 모켓시트로 교체하는 것이 1단계의 화재예방 대책이었다.

그 후 시공사와 예산을 확보하여 2003년 하반기부터 2006년까지 로윈, SLS중공업, 흥일기업에서는 해당 차량기지에 출장 나오는 식으로 실시하였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철도차량현대로템에서 제조된 전동열차는 당시의 로템 의왕공장으로 회송되어 내장재를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사고 전동차 고철 매각[편집]

대구도시철도공사는 총 12량의 사고 전동차중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보존될 1량을 제외한 11량을 안심차량기지 보관공간 부족과 재원마련을 이유로 들어 2008년 6월 26일 경기도 고철처리업체에 매각했다.[19] 하지만 유족들의 반발이 커지자 사고 전동차 반출을 중단하고 6량을 남겨 두었다. 이후 추모사업추진위와 협의 끝에 2008년 7월 25일 3량을 더 반출하여 사고 전동차는 3량이 남게 되었다.

함께 보기[편집]

주석과 인용[편집]

  1. "대구 지하철 방화 : 참사 60여명 구한 금호驛長 권춘섭씨", 《동아일보》, 2003년 2월 19일 작성.
  2.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 건립", 《한국철도공사》, 2013년 6월 7일 작성.
  3. "경찰, 방화용의 50대 검거", 《매일신문》, 2003년 2월 18일 작성.
  4. "‘대구’사망자 190~220명선", 《문화일보》, 2003년 2월 24일 작성.
  5. "대구지하철 참사-조 시장 무혐의 윤전사장 불구속 기소", 《매일신문》, 2003년 4월 23일 작성.
  6. "전동차 불 왜 빨리 번졌나?", 《매일신문》, 2003년 2월 22일 작성.
  7. "대구지하철 방화범 무기징역", 《매일신문》, 2003년 8월 6일 작성.
  8. "대구 지하철 방화범 수감 치료 중 사망", 《동아일보》, 2004년 8월 31일 작성.
  9. 대구 지하철 참사 기관사, 5년 복역 뒤 출소해 - 중앙일보
  10. "1심 선고공판…….두 기관사엔 금고 4·5년씩", 《매일신문》, 2003년 8월 6일 작성.
  11. "무료셔틀버스 첫날부터 '삐꺽' 대책위 지하철 운행중단 '촉구'", 《오마이뉴스》, 2003년 3월 10일 작성.
  12.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의 운전 취급역(회차선이 설치된 역)은 대곡, 진천, 송현, 교대, 중앙로, 큰고개, 방촌, 반야월, 안심의 9개 역이다. 그리고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의 운전 취급 역은 문양, 다사, 강창, 이곡, 감삼, 반월당, 수성구청, 대공원, 사월, 영남대의 10개 역이다.
  13. "구조물 손상 중앙로 버스통행 금지", 《매일신문》, 2003년 2월 25일 작성.
  14. "중앙로 차량 통행 재개", 《매일신문》, 2003년 4월 10일 작성.
  15. "대구지하철 8개월 만에 운행재개", 《문화일보》, 2003년 10월 21일 작성.
  16. "'지하철 참사' 대구 중앙로역 정상화", 《한겨레》, 2003년 12월 31일 작성.
  17. "지하철 참사 2주기", 《매일신문》, 2005년 2월 18일 작성.
  18. "마르지 않는 눈물…지하철 참사 추모식 풍경", 《매일신문》, 2008년 2월 18일 작성.
  19. "지하철 참사 전동차 왜 고철로 팔리게 됐을까?", 《매일신문》, 2008년 7월 5일 작성.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