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구 출생)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 동암(東菴). 본관은 대구.

생애[편집]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사실상 집단지도체제하의 정당의 최고위원이라 할 수있는 8총무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48년 5월 초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1] 그러나 1950년 5월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1952년 전쟁중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6ᆞ25기념식장에서 당시 현역의원인 2대국회의원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전의열단원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념식 행사를 촬영중이던 국립영화제작소의 촬영카메라에 김시현이 쓰고있던 중절모에서 권총을 꺼내 유시태에게 건네주는 장면이 포착되어 두 사람은 모두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배후를 수사하던 특무대는 전국회의원 서상일이 당시 현역의원이던 김시현에게 거사자금으로 2백만원을 지원한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당시 치안국장(오늘날 경찰청장) 윤우경도 사전에 암살음모 첩보를 입수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김시현을 불러다 한번 다그친 후에는 차량이 없는 그에게 경찰찌프차와 운전사까지 대여해주었던것이다 구속된 서상일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지만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1954년의 3대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수 없게 되자 자신의 선거구(대구 을구)에 조병옥을 대신 출마시켜 당선되도록 했다 이런 인연이 있음에도 후일 서상일이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가를 설득하자 조병옥은 냉정히 거절하였으며 이때문에 두 사람은 멱살잡이와 욕설까지 주고 받게 된다.그런데 이때 조병옥 장면 김준연 등 주로 보수야당 한민당 출신들이 조봉암의 민주당 합류를 반대했던 것은 이승만의 사사오입개헌 발의안에 서명까지 했던 자유당 출신 김영삼도 아무 이의없이 받아들인것을 감안하면 매우 자가당착적인 것이었다

결국 1954년 이승만의 3선저지를 위해 결성된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던 서상일은  박기출, 장택상 등과 함께 조봉암호헌동지회 참가를 반대하는 조병옥, 김준연, 장면, 박순천 등에게 항의하고호헌동지회를 탈퇴했다.그런데 그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조봉암이 원래 서상일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기로 했던 두 사람간의 밀약을 깨고 조봉암 자신이 대통령후보로 나서려하자 이때문에 심기가 상한 서상일은 조봉암과 사실상 결별의 수순에 들어가 후일자신을 당 대표로 한 민주혁신당을 창당하였다
일단 서상일은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는 하였으나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하자 한사코 이를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었다.[2]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공갈·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정치깡패 유지광이 이끄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2]

56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론에 떠밀려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단일화협상을 갖게 되었는데 협상장에서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 신익희에게 양보의사를 밝히는대신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민주당측이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3] 일단 신익희는 이 제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민주당 으로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왜냐하면 당시 신구파연합체였던 민주당은 당내경선에서 구파의 영수 신익희와 신파의 영수 장면을 나란히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던 것인데 신익희가 신파를 설득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익희ᆞ조봉암 회동이 이루어진지 6일만에 호남유세에 나섰던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안에서 뇌출혈로 급사함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는 엉뚱하게 조봉암으로 되어버렸지만 민주당은 당차원에서 조봉암을 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민주당 최고위원 김준연은 조봉암의 사상적 문제점을 들어 이승만 지지를 공개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때 서상일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놓고 조봉암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좋은 결론을 심사숙고하려 했다. 조봉암, 서상일 등은 원래는 선거가 종반전에 들어갈 때 정부통령 후보를 모두 민주당측에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으나 신익희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조봉암이 사실상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자 선거말미에 가서 부통령 후보 박기출만을 사퇴시켰던것이다.[3] 대선이후 서상일은 겉으로는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 운동을 추진했으나 이미 대선후보 결정당시 조봉암과 감정이 상했기 때문인지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사실상 1인정당인 민주혁신당을 창당했으나 이 당이 사실상 힘을 쓰지 못하자 서상일 또한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지게 되어 정계은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1962년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약력[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상일을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1.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7
  3.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8 페이지

참고 자료[편집]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대구부 을)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한국민주당
대구부 갑: 최윤동
대구부 병: 백남채
후 임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대구시 병)이갑성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대구시 갑) 신도환
(대구시 을) 이병하
(대구시 병) 임문석
(대구시 정) 조재천
(대구시 무) 조일환
(대구시 기) 최희송
제5대 민의원(대구시 을)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사회대중당
대구시 갑: 서동진
대구시 병: 임문석
대구시 정: 조재천
대구시 무: 조일환
대구시 기: 장영모
후 임
(대구시 중구) 송관수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