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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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대구, 경상도 대구도호부 출신이다.

생애[편집]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다. 이후 자유당 독재에 반대하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가입이 무산되자 호헌동지회를 탈퇴하였다.


4.19 혁명 직후 실시된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혁신 정당인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여 대표총무위원에 취임하였으며, 제5대 민의원으로 대구시 을 선거구에서 당선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의정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1962년 사망하였다.

친일 의혹[편집]

1941년 매일신보의 기사에 친일 집회의 참석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상일이 나오며 12월 12일 일제가 미국 진주만을 습격한 지 6일 뒤 대구 신사(달성 공원)에서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을 선동하는 대회가 열렸다. 당시 집회를 보도한 신문 기사에는 이날 참석자 대표로 서상일이 참여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신문은 "피끓는 국민대회, 성대하게 열렸다"며 당시 집회를 현장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이 신문은 서상일을 포함한 참석자 대표들이 일제의 침략 전쟁을 이처럼 목청 높여 찬양했다고 보도했다.

“멸사봉공과 신도(臣道) 실천에 매진하여 총력을 결집, 미국과 영국을 타도하여 정전을 관철하자”(매일신보 1941년 12월 14일자)


이에 앞서 1939년 조선군사령부가 주최한 병사부장 회의에 서상일이 대구 병사부 소속 대표로 참석했다는 사실도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 1930년대 이후에는 독립운동가와는 상반된 행보를 보인 사실이 잇따라 확인된 것이다.[1]

약력[편집]

서상일을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1. [1] Archived 2019년 7월 27일 - 웨이백 머신 건국 훈장의 그늘 ,뉴스타파 (사진&영상 있음)

참고 자료[편집]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대구부 을)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한국민주당
대구부 갑: 최윤동
대구부 병: 백남채
후임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대구시 병)이갑성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대구시 갑) 신도환
(대구시 을) 이병하
(대구시 병) 임문석
(대구시 정) 조재천
(대구시 무) 조일환
(대구시 기) 최희송
제5대 민의원(대구시 을)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사회대중당
대구시 갑: 서동진
대구시 병: 임문석
대구시 정: 조재천
대구시 무: 조일환
대구시 기: 장영모
후임
(대구시 중구) 송관수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