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동산병원(東山病院)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3·1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9년4월에 임시정부에서 국내외를 연결시키며 통제하기 위하여 설립한 교통부의 교통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19년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11월에는 국내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한 뒤 만주, 봉천(奉天)으로 가서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12월에는 러시아 니콜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1921년자유시 참변으로 이만(달네레첸스크)을 탈출한 이범석이 약 6개월간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하고, 독립운동을 보다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