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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도[편집]

인도아리아어군[편집]

인도아리아어군인도이란어파의 한 어군이다. 오늘날 인도 중북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언어가 여기에 속하며 9억 명 이상의 인구가 모국어로 사용한다. 대표적인 언어로는 힌두스탄어(5억 4000만 명), 벵골어(2억 명), 펀자브어(1억 명), 마라티어(7,000만 명) , 구자라트어(4,500만 명), 오리야어(3,000만 명)이 있다.

산스크리트어[편집]

산스크리트어
संस्कृता(IPA: [səmskr̩t̪əm])
사용 지역 인도남아시아동남아시아, 동아시아불교 학자들.
언어 인구 제1언어: 14,135 명(2001년 조사)
제2언어: 194,433 명(1961년 조사)
언어 계통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
  인도아리아어군
   산스크리트어
공용어 및 표준
공용어로 쓰는 나라 인도의 기 인도
표준 없음.
언어 부호
ISO 639-1 sa
ISO 639-2 san
ISO 639-3 san 사용자:Dolicom/철학/종교/종교사

산스크리트어(संस्कृता, [saṃskṛtā]) 간칭 범어(梵語)는 인도의 고전어로, 힌두교 · 대승불교 · 자이나ㆍ교 경전의 언어이자 수많은 인도 제어의 고급 어휘의 근간을 구성하는 언어이다.

인도 공화국의 공용어 중 하나로, 아직도 학교에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고 관련된 문학/예술/방송활동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브라만은 산스크리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

계통[편집]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며, 현대 인도 북부에서 쓰이는 힌디어를 위시한 아리안계 인도 제어의 조어(祖語). 인도의 고전언어가 유럽의 고전언어인 라틴어희랍어와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 착안한 유럽의 학자들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어족을 샅샅히 밝혀내게 되었고, 이가 곧 비교언어학의 시초가 된다.

같은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의 동계어를 예로 들면,

mus - mouse
sharkara - sugar
manu - man

명칭[편집]

그 이름인 '삼스크르타'의 '삼'은 '같이'를 뜻하며 '크르타'는 '두다'를 뜻하니, 이는 '같이 두어진' 즉 '잘 정돈된' '세련된' 등의 의미를 지닌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범어(梵語)라 하는데, 이는 철학체계인 브라만의 음역에서 유래하였다.

역사[편집]

산스크리트어는 베다 산스크리트어의 발전형으로, 베다 산스크리트어와 구분하여 고전 산스크리트어라고도 한다. 기원전 4세기에 파니니(Pāṇini)에 의해 고전 산스크리트어 문법이 완성되면서 베다 산스크리트어는 완전히 사어가 되었다.

문자[편집]

현대에 산스크리트어를 기록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데바나가리 문자가 쓰이나 역사적으로 범어 표기는 특정한 문자에 국한되지 않고 각 지방에서 널리 쓰이는 문자가 사용되어, 나가리(Nagari· 그란타(Grantha· 샤라다(Sharada· 모디(Modi) 등 여러 가지 문자가 쓰였다.

메소포타미아[편집]

v  d  e  h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들
  : 수메르의 도시[1]
  : 엘람의 도시
  : 아카드 제국의 도시
  : 아모리인의 도시
  : 바빌로니아의 도시
  : 아시리아의 도시
  : 현대의 이라크 · 이란의 도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ία'에서 온 말로서 '메소'는 중간이라는 뜻을, '포타미아'는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지리학상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역사[편집]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기원전 4000년경, 이라크 남부의 지방 군소 도시들의 출현에서부터, 기원전 400년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까지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우루크, 니푸르, 니네베, 바빌론 등의 도시와, 아카드 왕국, 우르 제3 왕조, 아시리아 제국등 중요한 영토국가를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우르(우르의 왕), 사르곤(아카드 왕국을 창건한 인물), 함무라비(고대 바빌로니아 왕국 건설),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아시리아 제국 창건) 등이 있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기원전 600년경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시작될 무렵까지를 고대 메소포타미아라고 분류하며,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한다.

사회[편집]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 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수메르의 정치사회구조는 귀족,평민, 노예로 구성된다. 왕, 왕족, 고위 관료,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귀족들은 정치권력과 거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높은 신분을 유지했다. 한편 평민들은 토지의 소유나 처분이 가능했고, 신분을 살 수 있었다. 전쟁포로나 외지인, 범죄자 그리고 채무자들 대부분은 노예였다. 특이한 점은 채무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은 3년 후에 일반인으로 복귀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노예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했다.

종교[편집]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종교는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의 혜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 데 힘써야 했던 수메르 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과 현세적인 가치관은 노아 홍수 설화와 '길가메시 서사시'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근년에 와서 고대사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인류의 가장 오랜 문명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BC 4000년에 놀랄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물질문명이 결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미술·종교 면에 있어서도 그 소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깊은 이해를 나타내는 걸작, 또는 제신(諸神)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갖가지 유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2]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에 의한 비옥한 퇴적평야로서 수메르(Sumer)인은 역사의 시초에 이미 남부에 정주하여, 각지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메르인의 왕은 주신(主神)의 하나인 엔릴의 아들이라 칭하여 신으로서 숭배받았으나, 그들의 뒤를 계승한 셈(Shem)인의 왕은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예컨대 바빌론 제1왕조의 함무라비왕(BC 2000년 전반)은 신 에아와 엔릴에 의해 왕으로 지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2]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주요한 3주(三柱)의 제신을 한 쌍으로 해서 숭앙하는 습관이 있었다. 수메르인 사이에서는 아누(Anu:天神)·엔릴(Enlil:地神)·엔키(Enki:水神) 등이 숭앙받았다. 최고신 아누는 이미 형식적 존재가 되어 있었으며, 수메르 판테온의 실권은 엔릴에 돌아와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2]

왕권의 신장과 함께 주신(主神)은 국가신의 성격을 강화했다. 셈 판테온에서는 셈인의 주신 마르두크가 함무라비왕 시대에 엔릴의 기능을 계승하여 최고신이 되었으며, 샤마쉬(Shamash:太陽神)·신(Sin:月神)과 함께 한 쌍을 이루었다. 기원전 2000년 말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주신 아슈르(Ashur)가 최고신이 되었다.[2]

수메르인은 이미 발달한 신전·제사(祭司) 계급을 갖고 있었다. 고대에서는 후에 분화한 예술·학문과 같은 문화활동뿐만 아니라 세제(稅制)·금융 등의 사회·경제활동도 신전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2]

당시 고급관리가 되는 지름길은 신전 부속의 서기(書記)학교에서 점토판에 설형문자(楔形文字)를 배우는 일이었다. 따라서 문학작품도 습득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가 소유하는 가장 오랜 이야기의 하나이다. 몸의 3분의 2가 신, 3분의 1이 인간이라고 했던 영웅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가 영원의 생명을 구하여, 일찍이 대홍수에서 살아난 제신의 하나가 된 지우도라(아시리아판의 우트나피슈팀)를 찾아간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길가메쉬는 일단 영원의 생명을 얻기는 하나 도중에 이를 잃고 헛되이 우루크로 돌아간다.[2]

또한 새해에는 천지창조의 성극(聖劇)이 제사(祭司)들에 의해 상연되고, 신전은 토지나 양의 무리를 소유, 소작이나 목축자에게 빌려 주어 연공(年貢)을 바치게 하거나,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 주거나, 물가의 기준이 되는 은의 정제가공이 행해졌다. 신전의 경내에는 자주 지구라트(Ziggurat:산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벽돌을 쌓아올린 높이 수십 미터나 되는 인공의 산이 구축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바빌론의 탑'으로 불리는 에산길라 신전의 지구라트가 유명하다.[2]

거듭된 타민족의 침입이나 주권의 교대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어떤 종류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두무지(Dumuzi:후의 탐무즈, 아도니스) 신앙을 들 수 있다. 훗날 탐무즈는 해마다 시들고 봄이 오면 다시금 싹이 돋는 식물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했다. 원래 수메르에서는, 두무지가 사후 이 지상에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의 주민이 되었음에 불과한 듯싶다.[2] 아무튼 그의 아내인 여신 이난나(Inana:후의 이쉬타르, 아티스)와 함께 농산물의 풍요나 가축의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 대상으로서 극히 광범하게 고대 오리엔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2]

그 뒤로 점술은 매우 융성해졌다. 1년의 반 이상이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이 지방에서는 별의 관찰이 용이하여 규칙적인 천체의 운행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2]

문자[편집]

수메르인들이 처음으로 썼던 문자는 상형문자였는데, 이 상형문자는 형체가 있는 물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로 낱말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산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산의 모양을 그려야 하고, 새를 나타내려면 새의 모양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나타내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뒷날 그들은 쐐기 모양으로 나타낸 설형문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이야기 등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뼈나 갈대 줄기를 펜으로 삼아서 점토판 위에 설형 문자를 적고 불에 구워 보존했다. 뒷날, 페니키아인들이 이 설형문자를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이 페니키아 문자에 모음이 보태져서 오늘날 쓰고 있는 알파벳의 근본이 되었다.

역법[편집]

수메르 인은 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를 24시간,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 원을 360°로 나누는 것도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리아인[편집]

아리아인(Aryans)은 인도이란, 유럽에 거주하며 인도·유럽계의 언어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이것은 언어학적으로 분류된 것으로 인도유럽어족(인구어족)이라고 부른다.

아리아인들의 기원[편집]

아리아인들의 기원에 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에 아리안들이 건국한 시점으로 미루어 기원전 2400년 - 2000년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쓰나미 처럼 카스피해, 발칸반도로 남하 해 온 그리스 북부종족인 '빈카문화권'의 사람들에 의한 남진,동남진하였다고 주장한 '쿠르간 가설'에 의하여 기원전 40세기 이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리아인은 기원전 20세기전부터 캅카스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이며 기원전 15세기경에 여러 이유로 인해 동시에 유럽쪽으로 서진하고 인도쪽으로 동진하였다. 이미 17세기말 언어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라틴어,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와 현대 유럽 언어들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했는데 이 언어들의 공통된 조상이 처음에는 스키타이족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가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18세기영국인 윌리엄 존스에 뒤이어 '인도유럽어족' 이라는 용어를 영국의 토마스 영이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그는 "하나의 발상지에서 나온 단일민족이 이웃민족들을 잇달아 침략하여 자기네 언어를 전파했다."라는 학설을 발표했다.

인도유럽어족은 하위 분류로서 10개 언어 파가 있는데 아나톨리아어파, 발트어파, 슬라브어파, 인도이란어파, 아르메니아어파, 알바니아어파, 게르만어파, 그리스어파, 이탈리아어파, 켈트어파, 토하라어파가 있다.

아리아라는 게 산스크리트어 아리야(आर्य, [ārya])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귀한’이란 의미로서 그들이 자칭하는 말이다. 아베스타어아이리야이며 고대 페르시아어의 아리야이다.

캅카스 지역 등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기원전 2400년-2000년경, 남방·서방에 이동하여, 어떤 무리는 인도에 들어가서 인도의 베다 문화 시대를 만들었고(인도·아리아人), 어떤 무리는 중앙아시아이란 고원에 정착하여 소그드인, 메디아인은 고대 이란인의 효시가 되었다.(이란人). 또한 서진을 계속한 아리아인들은 켈트족(갈리아의 제부족: 36개 씨족, 부족), 일리리아족, 원시 슬라브족을 중심으로 하여 동유럽서유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학자들마다 그 기원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기원전 25세기에서 20세기로 보고 있다.

아리아인들의 팽창과 역사[편집]

켈트족은 나중에 이베리아인(스페인)과 동화되고,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프랑크족 등으로 분화, 동화되어 갔다. 지금도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에선 켈트어의 일파인 브르타뉴어를 사용하고 있고,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원하는 스코틀랜드가 켈트족의 후예이다. 또한 웨일스아일랜드, 맨 섬도 켈트족의 후예이다. 아리아인들은 대다수가 목축을 하는 민족으로 처음에는 우랄 산맥을 넘어 온 서방 스키타이로 이해를 했다.하지만 스키타이가 나타난 것은 길어야 기원전 8세기부터여서 기원전 20세기부터 존재한 아리아인과는 종류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또한 발칸 반도트라키아와 아리안계의 일리리아인일리리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의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마케도니아 왕으로 유럽 정복과 고대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제국을 건국하고 이집트 정복과 북인도까지 점령하는 소위 '동방원정'을 하기도 하였다.

아리안인들은 유럽의 주요 민족들의 조상이다. 오늘날 색슨족, 게르만족, 슬라브족 등은 아리아인들의 제 부족에서 갈리어 나온 것으로 유추 해야 한다. 스키타이의 고향은 그리스 신화우크라이나드네프르 강변으로 보고 있으며 그들의 신은 '해신' 오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쌍어문과 물고기숭배 사상이 우연이 아닌 것이며 인도 베다 시대에 아리안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인도의 물고기, 쌍어문 숭배사상은 바로 스키타이 신화를 일컫는 것이며 아리안이 서방 스키타이란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스키타이라고 볼 수 있는 민족의 역사는 기원전 5세기이며 그 훨씬 전부터 유럽에는 켈트족이 존재하였으며 스키타이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인도에 아리아인이 존재하였다.스키타이가 아리아인의 일부인 이란계 민족이지 아리아인이 스키타이인이라는 학설은 부정적이다.

이러한 아리안의 부족들은 동부 유럽의 제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나아가 서부 유럽 국가를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편집]

인더스 문명 도시 분포

인더스 문명 또는 인더스 계곡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은 기원전 약 3300-1700년에 있었으며, 기원전 2600-1900년경에 흥했던 문명으로, 인더스 강과 현재 파키스탄과 북서쪽 인도에 걸쳐 있는 가가 하크라 강(Ghaggar-Hakra -)사이에 있었다. 처음 발굴된 유적지가 하라파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인더스 강의 범람, 삼림 파괴 등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인장 등 인더스 문명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때로는 인더스 가가 하크라 문명(Indus Ghaggar-Hakra civilization), 인더스 사라스바티 문명(Indus-Sarasvati civil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더스 사라스바티 이름은 가가 하크라 강을 리그 베다에 나온 사라바스티 강으로 판정하는 입장에서 부른다. 그러나 언어학적,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이름이 적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인도 공화국[편집]

인도 공화국(힌디어: भारत गणराज्य 바라트 가느라지아, 영어: Republic of India 리퍼블릭 오브 인디아[*], 문화어: 인디아)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으며, 인구는 약 13억 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북쪽으로는 네팔, 부탄, 서쪽에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방글라데시, 남동쪽에는 벵골 만, 남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와 맞닿아 있으며 스리랑카, 몰디브가 있으며,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의 해상경계는 태국, 인도네시아와 접해 있다. 수도는 뉴델리이다.주요 도시로는 뉴델리, 뭄바이, 첸나이, 벵갈루루, 하이데라바드, 콜카타등이 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역사적인 무역로였으며 거대한 제국이 있었던 인도 아대륙은 오랫동안 그 지정학적 지위와 경제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인도는 4개의 중요한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며, 또한 기원후 천년동안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인도에 영향을 미쳐 현재 인도의 다양한 종교 문화를 만들었다. 18세기 초부터 서서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리하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되었고, 간디에 의해 주도된 비폭력주의 독립운동 이후인 1947년 독립을 하게 된다.

인도는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이 세계에서 3번째로 높다. 2011년 기준 세계은행이 발표한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410달러로 저소득 국가이다. 1991년, 인도는 GDP성장률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로 평가되었고, 현재 신흥공업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계속해서 빈곤, 문맹, 부족한 공중보건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 핵 보유국이자 지역 강국인 인도는 세계에서 상비군이 3번째로 많은 국가이며, 군비지출은 세계에서 10번째로 높다. 인도는 연방제 공화국이며, 29개의 주와 7개의 연방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WTO, SAARC, 브릭스, G-20 등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인도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사는 다문화 사회로, 종교 사상인도 영화, 인도 요리 등의 문화가 발전해 있다.

역사[편집]

인도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더스 문명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기원전 1500년~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을 파괴했다. 아리인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이 시기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탄생했고, 산스크리트어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공용어로 사용했다.

불교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에 등장했다. 북부 인도는 찬드라 굽타(기원전 321년경 ~ 기원전 185년)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의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붕괴 이후 수많은 소왕국이 난립하였다가 굽타 제국(320년 ~ 480년)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은 1000년경 부터 시작되었다. 14세기 초,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델리 술탄 왕조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 바만 왕조가 성립(1347년)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 제국가 1336년에서 1556년에 걸쳐 인도의 남부 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8년)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아우랑제브 치세 동안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년) 이후인 1858년에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 국민 회의(1885)와 전 인도 이슬람 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순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 공화국과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년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이 잔존해 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가운데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해가고 있다.

지리[편집]

인도의 육지는 대부분이 인도양에 돌출한 동남아시아의 반도에 있으며, 남서 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서부는 벵골 만으로 구분되는 7000km의 해안선 을 가지고 있다. 많은 지역이 여름, 우기, 겨울의 세 절기를 가지고 있으며, 우기를 제외하고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도 많다. 인도 북부, 인도 중부는 거의 전역에 비옥한 힌두스탄 평야가 펼쳐져 있고, 인도 남부의 거의 전역은 데칸 고원이 차지한다. 국토의 서부에는 바위와 모래로 된 타르 사막이 있고, 동부와 북동부 국경 지역은 험준한 히말라야가 차지한다. 인도가 주장하는 인도 최고점은 파키스탄과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 지방의 (해발 8,611m)이다. 정확한 영토의 최고점은 칸첸중가 봉(8,598m)이다. 기후는 남쪽의 적도 지역에서 히말라야의 고산지대까지 다양하다.

불교 성립[편집]

대중불교[편집]

경전[편집]

팔리어[편집]

빨리어
पाऴि(IPA: [paːli])
사용 국가 동남아시아 여러나라(종교적으로 만 쓰이는 사어)
문자 고유문자 없음
언어 계통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
  인도아리아어군
   중세 인도아리아어
    빨리어
언어 부호
ISO 639-1 pi
ISO 639-2 pli
ISO 639-3 pli 사용자:Dolicom/철학/종교/종교사

빨리어 또는 빠알리어(Pāḷi, Pāli, पाऴि)는 인도아리아어군중세 인도아리아어(중기 인도아리아어) 즉 프라크리트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빠알리어는 성전어(聖典語)라는 뜻이다.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의 설법이 빨리어로 구전되다가 기록되어서, 불교 연구에 매우 중요한 언어일뿐만 아니라, 상좌부 불교에서는 현재에도 실제 종교 활동에 사용하는 주된 언어이다.

빨리어는 고유 문자가 없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문자로 기록되었다. 상좌부 불교 전파에 따라 싱할라어, 태국어, 라오어, 버마어, 크메르어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근대에는 서구에서 로마자로 표기하였다. 이중 가장 오래된 싱할라어 사본들을 우선시하며, 학술연구에는 로마자 표기를 많이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사어화된 문어이지만, 불교 승려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현대 문명에서 사용되는 신조어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름의 유래[편집]

빠알리(Pāli 또는 Pāḷi)는 성전(聖典)이라는 의미로, 빨리어 불경 주석서(Aṭṭhakathā)에 빨리 삼장(Tipiṭaka) 즉 원전을 의미하는 단어로 처음 등장한다. 삼장에는 빠알리라는 말이 없으므로, 주석서가 쓰인 5~6세기경에 처음 쓰인 말로 추측한다.[3]

빠알리가 언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18세기말에 쓰여진 쭐라방사(Culla-vaṃsa 또는 Cūḷa-vaṃsa, 小史)의 코테 왕국(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 왕국) 빠락까마바후(Parakkamabāhu, 싱할라어: Parâkramabâhu) 4세(1410?~1467)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태국 등지에 상좌부 불교가 전파된 12~13세기 경부터 언어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 것으로 추측한다.[4]

이전 불교 문헌에서는 마가다어(Magadhi, Māgadha-nirutti, Māgadhika-bhāsā) 또는 근본어(Mūla-bhāsā, 根本語) 등으로 언급되었다.[5][6][7] 그런데 이후 프라크리트 문학에 마가다어가 사용되므로, 마가다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8]

기원[편집]

빨리어의 기원은 정확히 밝혀져있지 않다. 마가다어설, 공용어설, 코살라어설, 아르다마가디어설, 카링가어설, 마가다어와 피사챠어 혼합설, 피사챠어설, 웃제니어설, 인도 서부의 다른 언어라는 설 등이 있다.[9]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던 언어로 보는 관점도 있다.[10]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마가다국마가다어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빨리어는 프라크리트 문학의 마가다어와 공통적인 언어 특성도 있지만 또 다른 점도 많다.[11]

불교와의 관계[편집]

빨리어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프라크리트어 중에서도 풍부한 자료가 남은 것은 불교 경전이 빨리어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붓다가 빨리어로 설법을 한 것이 그대로 남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기원전 3세기경 현재의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져 싱할라어로 기록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래서 빨리어의 기원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이 나왔으며, 마찬가지로 붓다가 어떤 말로 설법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불교 경전은 이후 부파불교 시대를 지나며 빨리어 이외의 다른 언어로도 기록되었다. 프라크리트어로 쓰여진 《담마빠다》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마하바스투(산스크리트어: Mahāvastu, 大事)》가 남아있다.

현대의 빨리어[편집]

빨리어는 승려들 간의 의사 소통과 편지 등에 현재도 사용된다.[12]

  • 신조어

근대 문명에 대한 신조어도 만들어지고 있다.

  • ākāsa-yāna 비행기(空車)
  • āyo-yāna 기차(鐵車)

기독교[편집]

영지주의[편집]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고대에 존재하였던 혼합주의적 종교 운동 중 하나로,[13][14][15]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신인 데미우르고스가 완전한 신의 영(프네우마)을 이용해 물질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참된 지식인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조를 지닌다.

1945년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고 그 이후 이들 1차 문헌들을 토대로 영지주의가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 새로이 조명되기 이전에는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는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기독교 교부들의 논서들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했다.[16][17] 이들 논서들에서 영지주의는, 정통파 기독교에서 세력을 얻지 못하는 좌절을 겪은 배교자들이 창시한, 타락된 형태의 교의를 가진 기독교의 한 이단인 것으로 대체로 서술되고 있다.[18] 반면,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교의 체계가 다양하여 특정 한 종교 분파 또는 단체로 묶을 수 없으며 기원 또한 기독교로 국한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그러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시기는 기독교가 태동하던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시기로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

정통파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신앙 · faith)"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 "(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것에 있다.

원 안에 십자가가 있는 태양 십자가(Sun cross): 이 표장중세의 영지주의 관련 단체였던 카타리파(Cathars: b. 11세기, fl. 12-13세기)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다.

개요[편집]

영지주의는 나스티시즘(영어: Gnosticism)을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음을 따라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한다. '영지주의자' ·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번역되는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ῶσις gnosis[*])로부터 따온 것으로[13][16][19][20], 이 낱말은 고대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의 반대자들이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 또는 단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19] 당시에 이 종교 운동의 분파들 중 기독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불렀다.[16][19] "나스티시즘(Gnosticism)"이라는 낱말은 고대에 존재하였던 이 종교 운동을 특별히 가리키기 위해 현대 학자들이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로부터 만든 말이다.[13][21][22] 한글 번역어인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낱말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영지(靈知)'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영적 지식', '영적' 또는 '프네우마(Divine Spirit)를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 운동은 특정한 한 형태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13][16] 영지주의는 다양한 신앙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물질 우주데미우르고스라고 불리는 불완전한 하위의 최고신스피릿, 즉 프네우마의 일부를 사용하여 창조한 세계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분파와 무관하게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였다.[23] 이 교의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종종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나 그리스 신화제우스와 동일한 신으로 생각되며, 최고신으로부터 발출되어 형성된 상위의 세계인 플레로마나 지고한 존재인 최고신을 뜻하는 신성(神性)과는 대비된다.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견해는 분파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다. 어떤 분파는 데미우르고스가 악의 물질적 화신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어떤 분파는 최고신에 비해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바실리데스파데미우르고스에 대해 다른 분파들과는 더 뚜렷이 구분되는 견해를 가졌다.[24][25] 이 견해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예수복음에 기뻐하고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최고신이라 주장했던 이전의 무지를 반성하고 우주의 전 체계 속에서의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겸손한 존재였다.[24][25]

영지주의 운동은 헬레니즘 철학 · 유대교 · 기독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16][26] 학자들은 대체로 영지주의가 이원론적인 종교 운동이었다고 보고 있으나[26], 한편, 가장 유력했던 영지주의 분파인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후대의 영지주의 운동들에서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27]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께 이러한 세계관의 다양성은 영지주의 운동에 여러가지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공존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지주의자들과 정통파 기독교인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믿음이 아니라 (그노시스)이 구원의 수단이라고 여겼다는 것에 있었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神性)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16][20][22] 따라서, 영지주의 운동에서는 그노시스를, 영적 요소물질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얻고자 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인이자 구원의 수단이라 여겼다.[22]

한편, 다른 하나의 큰 차이점으로,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윤회를 믿었다. 정통파 기독교교부로 알렉산드리아파를 대표하였던 오리겐에 따르면, 유력한 영지주의 분파 중의 하나였던 바실리데스파의 창시자인 바실리데스는 사람이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받는 유일한 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28] 또한 오리겐은, 바실리데스가 가르친 윤회의 교의로 인해, 악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유익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불만을 제기하였다.[28]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인간을 정신(영혼)과 물질(육체)의 두 요소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 정신(영혼· 물질(육체)의 세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현재의 영적 발달 정도에 따른 구분으로, 인간을 영적인 인간(Pneumatics· 정신적인 인간(Psychics· 물질적인 인간(Hylics)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19][29] 이 구분에 따라,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 세 부류 중 구원을 성취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적인 인간의 부류에 들어가며, 다른 기독교인들, 즉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인들은 정신적인 인간의 부류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만이 그노시스를 가질 수 있으며[29], 물질적인 인간은 이번 생에서 그노시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인간은 물질에 너무 몰입해 있으며 따라서 더 높은 차원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29][30]

예수에 대해서도 영지주의자들은 여러 견해를 가졌다. 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 주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복(至福)의 플레로마를 떠나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존재로, 지고한 존재의 물질적 화신이라 여겼다.[19][21][31] 반면 노쯔림만다야교 등의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특히 중시하였는데, 이들은 예수세례자 요한이 위탁하여 맡긴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였다.[32] 어떤 영지주의 가르침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이나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메시아(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33]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문헌들 중의 하나인 《이집트 복음서》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예수의 전생들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는데, 물질계라는 감옥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구원하기 위해 이라는 메시아화신하였던 것처럼 동일한 목적을 위해 다시 예수라는 메시아화신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있다.[34]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도 정통파 기독교와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현존하는 대표적인 영지주의 성전(聖典)들 중의 하나인 《피스티스-소피아》에 따르면, 예수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다음 하늘로 승천하여 지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일시적 승천 후 다시 지상으로 와서는 지상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11년간을 더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은 첫 번째 신비(First Mystery)를 완전히 알 수 있게 하는 가르침(그노시스)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 운동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 탄생 이전, 즉 서력기원의 몇 세기 전에도 영지주의 체계의 자취가 존재하였다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15][17] 영지주의 운동은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와 여타 다른 칙령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4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영지주의 문헌들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영지주의 반대자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문헌의 근거 자료로 소수의 단편들만이 살아남았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1945년까지 영지주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2차 자료들을 토대로 추론에 근거한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16][17] 4세기 이후에는 많은 수의 영지주의자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남아 있는 유럽의 영지주의자들도 알비 십자군의 활동으로 인해 그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만다야교 공동체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16]

영지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유럽북아메리카에서 있었던 많은 밀교적 · 신비주의적 운동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16][19]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고대에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의 부활 또는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의 1차 문헌들은 영지주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35]


도마복음[편집]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Gospel According to Thomas)는 기독교 신약성서 외경의 하나로서, 서문에서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디두모스 유다 도마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콥트어로 기록된 완전한 사본이 1945년 나그함마디에서 나그함마디 문서의 일부로 발견되었고, 이후 1898년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조각 필사본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토마스 복음서는 예수의 일생에 대한 전기적 내용을 담고 있는 사복음서의 형식과 달리, 예수의 어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겨자씨의 비유 등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같은 공통된 내용이 다수 있다.

토마스 복음서는 이름이 비슷한 토마스 행전(The Acts of Thomas), 도마의 유아기 복음(The Infancy gospel of Thomas)과는 다른 것이다.

판본[편집]

나그함마디 문서[편집]

곱트어로 파피루스에 기록된 완전한 어록 복음서로 1945년 나그함마디 문서의 코덱스 II에 속한다. 이 문서는 이집트 고문서서의 소유로 1956년에 영인본이 공개되었고, 1959년부터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서기 340년 경에 필사된 문서로 추정된다.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조각[편집]

히랍어로 파피루스에 기록된 예수의 어록 조각들이다. 콥트어 도마복음이 발견된 이후에, 학자들은 이집트의 옥시링쿠스에서 1898년 발견된 그리스어 문서들 중에 도마 복음서의 그리스어 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1번, 654번, 655번에 해당한다[36] 흔히 후자를 구별하여 그리스어 도마 복음서라고 부른다. 이것은 200년 경에 필사되었다고 추정된다.

내용[편집]

도마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만을 담고 있는 "어록 복음서"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것은 살아있는 예수께서 했던 비밀의 말씀이며, 그것을 디두모스 유다 도마가 기록한 것이다. 그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말들의 뜻을 밝히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이는 114개의 어구로 이루어져 있어 장 대신 "114구"로 구분한다(따라서 시편보다 더 짧은 구절로 되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되어 있다. 이들 중 다수는 4복음서에 나오는 것들과 비슷하지만, 일부는 새로 발견된 것들이다.

콥트어 코덱스II와 그리스어 옥시링쿠스 전문의 영어번역본(by Tomas O. Lambdin) 및 한국어번역본을 이곳 [37] 에서 볼수 있다.

편집비평[편집]

첫 구절은 디디모스 유다 도마가 기록자라고 되어 있다. 그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그랬듯 도마는 시리아 지역 믿음의 대표격이었다. 따라서 도마 복음은 시리아에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관련하여 니콜라스 페린(Nicholas Perrin)은 도마 복음이 타티아노스(Tatianos)의 "Diatessaron"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도마 복음서의 저작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록 복음서의 특성상 공관복음서보다 먼저 쓰였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고, 영지주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영지주의가 유행했던 1세기 후반 이후에 편집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독교의 역사[편집]

초기 기독교[편집]

산상수훈. 19세기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의 작품

초기 기독교예수팔레스타인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예수의 죽음 이후[주해 1]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동서 교회의 분열 이전까지의 기독교를 말한다. 초기 기독교는 특정한 조직이나, 교리, 건물 등이 없이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다.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38]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39] 사도들이 부활한 예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사명[40] 을 받았다고 여겨졌고, 이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성령을 받기까지 10일간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도했다고 하며, 성령을 받은 사건 이후[41] 이들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42]. 이 사건을 기독교 교회들에서는 성령강림절(성령 강림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었고, 자신들이 유대교와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 쓰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부정적이었다.[43]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훗날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리게 된 회의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면서, 우상 숭배의 금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거나 짐승의 피를 마시지 말것 정도 만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44]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시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점차 서로 다른 교리와 집단을 갖는 별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으며,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르렀다.[45][주해 2]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는 전파와 함께 박해를 받았다. 사도행전 7장 59절에는 스테파노가 유대교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장 2절에는 대 야고보 역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제국은 64년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였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황제가 로마에 일어난 화제를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46] 그러나, 네로의 박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 후로도 3세기 무렵까지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특별히 엄단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후대에 부풀려진 이야기이다. 3세기 무렵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의 민중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았는데, 기독교인들이 도시의 수호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을 매우 무례한 행위로 여기거나, 도시에 재앙을 초래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팽창이 멈추고, 노예제, 빈부 격차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신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불안한 삶을 살던 민중을 위로하였던 것이다.[47]

복음서[편집]

예수는 자신의 행적을 글로 남긴 적이 없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 전승되어 온 예수의 행적을 모아 다양한 복음서들이 제작되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기원후 70년 무렵 마르코 복음서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서루가 복음서가 만들어 졌다고 추측한다.[48] 이 때문에 이들 세 복음서는 요한 복음서와 달리 서로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어 공관 복음서라고 불린다.[49]

초기 기독교는 특별한 교단이나 교리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오강남은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영성을 강조한 요한 복음서나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은 도마 복음서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본다[50] 복음서들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로 살았던 근동 일대의 공용어였던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의 일종인 코이네(koine, 공동)로 쓰였다. 2세기 중엽까지 비슷했으나 통일되지 않은 목록의 복음서과 다른 신약성서 문헌이 사용되었으나 마르키온의 구약제거와 일부 문헌의 사용 주장이 대두되어 전래되던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7개를 정경으로 인정한 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신구약 정경에 어떠한 문헌을 정경으로 수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구약 부문에서 마르키온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교파마다 의견이 다르다.[51]

고대 후기의 기독교[편집]

로마 제국의 공인[편집]
고대의 기독교 전파지역
  325년
  600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52]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53],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이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54]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55]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56] 324년에서 330년 사이 로마 제국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하였다. 새로 지어진 건물 가운데에는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57]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학의 집대성도 함께 이루어졌는데,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대표적이다.

테살로니카 칙령[편집]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58]

같이 보기[편집]


주해[편집]

  1. 기독교의 신학에 따르면 부활승천이후
  2.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나고그가 화재로 불타자 암브로시우스는 제국의 수도에 시나고그가 재건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테오도시우스 1세를 종용하여 결국 유대인의 시나고그 재건을 막았다. - 존 프릴리, 민승남 역, 《이스탄불》, 민음사, 2007년, ISBN 89-374-2591-2,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각주[편집]

  1.  위 지도에는 우바이드(30°58′N 46°05′E)와 우르(30°57′N 46°06′E)가
     같은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2.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원시종교와 고대종교 > 고대종교 >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15쪽.
  4.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15쪽.
  5. http://www.budsas.org/ebud/ebsut059.htm
  6. http://www.haeinji.org/contents/?pgv=v&cno=4204&wno=192
  7.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15쪽.
  8.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16쪽.
  9.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33~41쪽.
  10.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45쪽.
  11.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41~44쪽.
  12. 水野弘元 지음, 김형준 옮김, 《팔리어 문법》(서울: 연기사), 2001, 32쪽.
  13. (영어) "Gnosticism" 항목, 《Encyclopædia Britannica 2009》.
  14. (한국어) "그노시스파" 항목, 《네이버 백과사전》. 2010년 7월 4일에 확인.
  15. (영어) "Gnosticism" 항목, 《유대 대백과사전(Jewish Encyclopedia)》. 2011년 1월 27일에 확인.
  16. 《Microsoft Encarta 2009》, "GNOSTICISM" 항목
  17. 《Encyclopedic Theosophical Glossary》, "Gnostics" 항목. Theosophical University Press, 2009.
  18. King (1887). p.12
  19. Frank K. Flinn, J. Gordon Melton 《Encyclopedia of Catholicism》, "Gnostic/Gnosticism" 항목, Facts On File, Inc., 2007. ISBN 0-8160-5455-X.
  20. Pagels, Elaine. 《The Gnostic Gospels》, Vintage Press, 1989, pgs. 18, 37, 42.
  21. 《Britannica Encyclopedia of World Religions》, "GNOSTICISM" 항목,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6.
  22. Wouter J. Hanegraaff, ed. 《Dictionary of Gnosis & Western Esotericism》, "Gnosticism I: Gnostic Religion" 항목, Koninklijke Brill NV, 2006. ISBN 9004152318, ISBN 9789004152311.
  23. Hinnells, John. 《Pleroma》. A New Dictionary of Religions.
  24. (영어) King (1887). p.81
  25. (영어) 히폴리토스, 《필로소푸메나(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 7권 14-15장. 2011년 1월 27일에 확인.
  26. Walker, Benjamin (1990). 《Gnosticism: Its History and Influence.》, Harper Collins. ISBN 1-85274-057-4.
  27. 《Valentinian Monism》. The Gnostic Society Library. 2009년 2월 12일에 확인.
  28. 《Com. in Matt.》, 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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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Teke, Charles (PDF). Towards a Poetics of Becoming: Samuel Taylor Coleridge’s and John Keats’s Aesthetics Between Idealism and Deconstruction. Universität Regensburg. 2009년 2월 12일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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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David_Mumford Macuch, Rudolf (1965). 《Handbook of Classical and Modern Mandaic》. Berlin: De Gruyter & Co.. pp. 61 fn.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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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Owens, Lance S., "An Introduction to Gnosticism and The Nag Hammadi Library", The Gnostic Society Library. 2011년 1월 18일에 확인.
  36. P.Oxy.1; P.Oxy.654; P.Oxy.655
  37. http://cyberspacei.com/jesusi/light/got/got_commentary.htm
  38. 신인철, 〈성서의 구조인류학 에드먼드 리치〉, 《가자 고전의 숲으로》, 한길사, 2008년, ISBN 89-356-5875-8
  39. R. Gerberding and J. H. Moran Cruz, Medieval Worlds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2004) p. 51
  40. 마태오 복음 28장 18-20절
  41. 사도행전 2장 1절 ~ 13절.
  42. 사도행전 2장 41절에 따르면 성령강림 사건 당일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43. 차용구,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 푸른역사, 2003년, ISBN 89-87787-78-8, 73쪽
  44. 사도행전 15장
  45. MARCUS J. BORG, 김중기 외 역, 《성경 새롭게 다시 읽기》,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년, ISBN 89-7141-662-9, 264-265쪽
  46. Tacitus, Annals, 15.44, translated by Church and Brodribb.
  47. 역사교육자협의회, 《나만 모르는 유럽사》, 모멘토, 2004년, ISBN 89-91136-02-8, 40-42쪽
  48. 《성서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년, ISBN 89-7141-249-6, 182쪽
  49. 연세대학교, 《성서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년, ISBN 89-7141-249-6, 216쪽
  50. 오강남, 《또 다른 예수》, 예담, 2009년 ISBN 89-5913-378-7, 20-22쪽
  51. 한스 요하임 그립, 노선정 역,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 이른아침, 2006년, ISBN 89-90956-62-5, 288쪽
  52. Galerius and Constantine: Edicts of Toleration 311/313, Fordham University
  53. R. Gerberding and J. H. Moran Cruz, Medieval Worlds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2004) p. 55
  54. R. Gerberding and J. H. Moran Cruz, Medieval Worlds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2004) p. 55; cf.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55. 니케아 공회의, 《글로벌 세계 대백과》
  56. 김상근, 《인물로 읽는 교회사》, 평단문화사, 2007년, ISBN 89-7343-256-7, 30-33쪽
  57. R. Gerberding and J. H. Moran Cruz, Medieval Worlds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2004) p. 56
  58. 박상진,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 한길사, 2005년, ISBN 89-356-5635-6, 69-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