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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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역사
Storia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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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역사선사시대 및 기원전 9세기 무렵 고대 이탈리아 부족들까지 소급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이탈리아 반도와 부속 도서에는 여러 국가가 세워지고 사라졌다. 이탈리아는 1861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었으며 1946년 공화국이 되었다.

이름의 유래[편집]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살던 고대 이탈리아 부족인 오스키 족의 왕 비탈리우(Vitaliu)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1세기 무렵 사비네 족, 삼니테 족 등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표현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제국의 중심부인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롬바르드 족의 침략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자 이탈리아 반도는 다시 여러 국가로 분할되었으며 이탈리아라는 말은 이들을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 되었다.[1]

선사 시대,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편집]

기원전 8천여년 경 신석기 시대에 제작된 카모니아 계곡 암각화UNESCO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400여 개의 바위에 140,000개 이상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세계 최대 규모의 암각화이다.[2]

포 평원 유역에서 기원전 15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청동기 시대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를 테라마레 문화라 하는데 테라마레는 검은 땅이란 뜻이다.[3]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기간 동안에는 철기 시대 문화가 존재하였다. 포 평원과 지금의 토스카나 주에서 형성된 이 문화는 빌라노바 문화라 불린다.[4]

에트루리아 유적

기원전 800년 경 이탈리아 북부와 동부에 빌라노바 문화에서 출발한 에트루리아가 성립하였다. 에트루리아에서는 금속 세공업과 무역이 주요 발달했다. 이들은 엘바 섬의 철과 에트루리아의 구리를 자원으로 이용했고, 금, 은, 상아 등에도 숙련된 세공 기술이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 본토, 이집트, 레반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카르타고와 긴밀하게 무역 활동을 했다.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650년 경 이탈리아 반도의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북쪽으로 포 강 유역, 남쪽으로 라티움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 - 7세기 무렵 이탈리아 반도시칠리아 섬에 여러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이 지역을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렀다.[5]
기원전 7세기경에 에트루리아는 이웃한 마그나 그라이키아 지역과 교역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6] 시켈리아(시칠리아)나 마실리아(마르세유)의 그리스 도시들과 무역 경쟁을 벌이면서 에트루리아는 자연스럽게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 왕조가 들어서기도 했으며, 그 후 100년간 로마를 지배하였다. 로마는 농촌에서 거대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또 로마의 간선 도로인 신성로(Via Sacra)의 건설도 이때 시작되었다. 또 에트루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수입하여 로마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가령 로마 문자그리스 문자에서 온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로마[편집]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기원전 600년경 로마는 이미 당대 기준으로 부유하고 번영하는 도시로, 왕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뒤를 이었으며, 평민과 귀족간의 신분 투쟁이 전개되었다. 기원전 272년경 로마 공화국은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남단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동맹 체제를 이끌었다. 그 뒤 150여 년 동안 포에니 전쟁등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뒤를 잇는 지중해 세계의 유일한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한 제정 시대에도 로마는 조금씩 팽창하였으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 ~ 117년)에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5현제 시대가 끝난 뒤로 군인출신들이 황제자리에 오르고 쿠테타가 여러번 일어나는 등 혼란을 겪으면서 '군인 황제 시대'기를 맞는다. 급기야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집권하면서 로마 황제가 처음에 4명이 공동으로 집권하다가 8명씩늘려 공동황제로 집권하는 등 더 큰 혼란기를 유발시키게 만든다. 306년, 8명의 황제들 중 콘스탄티누스 1세가 황제에 추대되어, 정통파 황제를 자칭하고 황제 정리작업에 들어간다. 로마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꺾어야 했고 312년에야 정식으로 황제 지위를 얻었다. 314년부터 로마 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대립하였으나, 323년 고트족의 침입을 막아낸 후 리키니우스를 격파, 제국을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카톨릭교를 인정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오늘날 이스탄불)로 이전하고, 구 로마지역에 또다른 황제를 올려놓아 동 서 로마로 갈라진다.

395년, 분리된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허울 뿐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대신 각지역 군벌의 지도자들이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으로 대거 유입하여 들어오면서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용병들을 단순한 이민족 군대로 취급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훗날, 서로마를 장악한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의 직위를 포기하고 대신 스스로 서로마 황제를 자처하였다. 제국은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게 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476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은 5세기에, 경제적으로 서로마 제국보다 더 부유했고 파괴된 제국을 복구하였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동로마 제국은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일리리아를 빼앗고 옛 영토를 일부분 회복하였으며, 반달족으로부터는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으로부터는 히스파니아를 되찾았다. 동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으나, 북아프리카는 약 1세기간, 이탈리아는 5세기간, 일리리아는 거의 천년간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7세기경에 이슬람 세력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동로마(비잔틴 제국)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1453년 오스만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을 함락으로써 결국 멸망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로마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중세의 이탈리아[편집]

1000년 무렵의 이탈리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게르만 족의 장군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여 493년까지 통치하였다.[7] 493년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이끄는 동고트족이 오도아케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테오도리쿠스는 오도아케르를 처형하고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8]

535년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탈환하기 위해 고딕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55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이탈리아의 남부와 동부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9]

751년 롬바르드 족은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의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이탈리아 남부로 축소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11세기까지 자신의 영토를 유지하였다. 한편 756년 프랑크 왕국이 롬바르드 족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였다. 754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교황령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기증하였다. 이후 교황령은 1861년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될 때 까지 교황이 직접 통치하였다.[10]

카롤루스 대제 시기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 북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북부 이탈리아는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중프랑크 왕국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로타르 1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이 지역은 여러 독립적인 국가들로 나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니스와 같은 도시 국가들이 강성해졌다.

1155년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고자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남부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패배하여 이탈리아의 전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및 중부를 자신의 영토로 확장하게 되었다.[11]

르네상스와 근대 시대[편집]

르네상스는 원래 크리스트교적인 중세문화와 다른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의 부흥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한 고전문화의 부흥이 아닌 이를 바탕으로 신 중심의 중세문화에 벗어나, 개인의 해방과 자각을 강조하는 인간중심의 인문주의문화를 탄생시킨 문화운동이었다. 즉,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현상을 종교적,이상적으로 보는 중세적 자연관을 배격하고 자연계의 법칙성을 탐구하였다. 이러한 인간관과 자연관은 크리스트교 이전의 고전고대에서 유래하는 것이었고, 인간주의와 자연주의라는 두 축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복고적인 혁신운동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14세기경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문화의 중심지이며,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그곳의 고전 학자들이 대거 망명하여 고전 문화 연구가 활발했으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도시들이 번영을 누리고 일찍부터 시민계층이 성장하여 자유로운 기풍이 퍼졌을 때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각 여러 도시의 대상인과 로마 교황의 지원을 받아 학문과 예술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 절정기는 15세기말~16세기초에 걸친 시기였는데, 이후 신대륙의 발견과 신항로의 개척등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크게 쇠락하고 대서양이 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함에 따라 쇠퇴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고, 절대왕정시대, 즉 중앙 집권 시대가 열리면서 유럽 대륙의 패권은 부르봉 왕조, 프랑스 제국 시대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각 지역의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힘이 약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지리적, 정치적인 요충지로 이탈리아 반도를 가운데 둔 두 세력의 끊임없는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야만 했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 이탈리아 통일된 시기부터 1946년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패망하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까지 이탈리아에 존재한 나라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샤르데냐 왕국사보이 왕가를 주축으로 시작된다.

1720년 사보이 공국의 왕가가 사르데냐 섬을 얻은 후 국명을 사르데냐 왕국으로 정했다. 그리고 피에몬테 지역을 장악한 이후로는 국호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로 개칭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중핵이 되어 1814년 제노바를 합병하고, 1859년 롬바르디아 지역을, 1860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 및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의 연합왕국인 양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지원을 한 댓가로 니스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하였다.

그리고, 1861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어 통일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통일[편집]

통일 되기 전의 이탈리아 반도

이탈리아의 통일은 이탈리아 반도에 여러 국가들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인 이탈리아로 통일하자는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이었고, 이후에 샤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된 국가를 말한다.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적으로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체제가 시작된 1815년경으로 잡고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1805년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하여 통치하였는데, 이때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고취되기 시작했었다. 뒷날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유럽의 각 국가들이 모여 국경선을 다시 정하기 위해 빈 회의 (1815년)를 개최하였다. 빈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들중, 이탈리아의 국경선을 나폴레옹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합의결정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는 강대국들의 간섭이 이어졌는데, 특히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많은 간섭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여러 각 지역에서부터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사람들 사이에선 민족주의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빈 체제에 저항하는 행태로 나타났다는게 특징인데,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가 이탈리아의 북동부(베네치아등)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자유주의자,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억누르려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찍이 카르보나리등 비밀결사 단체의 활동과 마치니가 주도한 민족운동이 일어난바 있었는데 실패로 끝나고, 이탈리아에서는 샤르데냐 왕국의 카보우르가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카보우르는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한 후 외교적성과를 돋보여 185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약속받아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통일전쟁을 일으켰다.

롬바르디아를 비롯한 중북부지방 이탈리아를 통합한 샤르데냐 왕국은 공화주의자인 가리발디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남부지역인 시칠리아나폴리를 통합하여 샤르데냐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통일국가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을 만들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제국간의 전쟁을 틈타 베네치아오스트리아 제국 군대를 몰아내고,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이용하여 교황령을 점령함으로써 통일이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통일은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특히 남북지역간 격차와 문화 문제가 제일컸다. 급속한 산업화로 서유럽처럼 산업화된 북부지역과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남부 간의 빈부격차는 매우 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내에서는 내전이 격화되었고, 통일전쟁했을때 사상자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통일된 이탈리아왕국은 급속도록 공업화가 이루어져 발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전쟁 초부터 이탈리아는 중립국이었다. 1914년 8월 3일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독일 제국황제 빌헬름 2세에게 이탈리아가 참전을 해야만 하는 것에 관한 3국 동맹의 조건에 참전 명분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린다. 이날 이후로 이탈리아 정부는 중립을 선포한다.

그 이후 오랫동안 이탈리아 왕국동맹국 그리고 연합국 사이의 교섭이 진행된다. 마침내 1915년 4월 26일, 런던에서 이탈리아는 한달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였고, 또한 연합국의 모든 적국들에게 반대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피에 대한 대가'로서 이탈리아는 영토를 약속 받게 된다. 영국은 이탈리아에게 5억 파운드의 돈을 빌려준다. 이때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이탈리아가 중립국을 유지한다면 이탈리아인들이 사는 영토를 이탈리아인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 독일 대사 뷜로프는 이 약속에 대해 이탈리아 중립 지지자들 대표인 지오리티에게 알리게 된다.

이탈리아 의회 대의원들의 508명 중 320명이 지오리티를 지지했다. 사란드라 수상은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나 이때 전쟁 지지자들이 사회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를 앞세워 의회와 중립 지지자들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이탈리아 왕은 사란드라의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지오리티는 로마로 떠나야만 했다.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알프스 지역과 아드리아 해안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하고 오스만 제국 영토를 노리고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탈리아는 전쟁기간동안 별다른 전과가 없이 피해만 입었다.이탈리아의 전과는 실망스러웠고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승전국답지않게 기대에 못미치는 보상을 받았다.


이것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좌절감과 배신감은 훗날, 파시즘의 발전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파시스트 정당 집권[편집]

로마 진군하는 파시스트 검은셔츠단

제1차 세계대전중에 1915년,뒤늦게 연합국에 합세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전과는 실망스러웠고, 종전 후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국토와 식민지는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들 중 티롤 지방 일부 등 얻은 게 전부였을 뿐 그 이외에 승전댓가가 없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매일 파업이 끊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실직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1919년 3월에 북부 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의 노동자들의 공장 운영과 생산 관리에 강력한 파업행동이 개시되자,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이탈리아 전 국토가 공산혁명 직전의 정세로 변하였다. 이 운동 자체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견 대립으로 좌절되었고, 이미 위태로웠던 국가의 의회 민주주의가 더 약화되어 가면서 지주, 군인, 자본가 세력 등은 이탈리아의 공산화를 두려워하며, 그 당시에 국가주의를 부르짖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를 지지하게 되었다.

1922년베니토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들은 유명한 '로마 진군'을 함으로써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당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추천받아 집권하게 되고, 유럽의 첫 번째 파시스트 국가를 탄생시켰다.

1936년에 이탈리아는 에디오피아를 침공하고 불법 점령을 하면서 이를 계기로 국제연맹으로부터 비난받게되고, 탈퇴한다. 그리고 동시에 나치스 독일과 추축군 동맹을 맺게 된다. 이후 1937년나치 독일일본 제국 3국과 방공협정을 맺고, 1940년,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나치스 독일과 일본제국과 동맹맺으며 추축국동맹을 결성한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무력점령한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40년에 이탈리아 왕국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는 1940년, 영국프랑스선전포고함으로써 전쟁에 참전, 남부 프랑스 지방을 공격했으나 패전하였고, 동시에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선제공격함으로써 공세를 펼쳤으나 패전을 거듭하였고, 이후 1943년,연합군시칠리아 섬 상륙작전 성공하여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 본토로 연합군이 상륙,진격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피에트로 바돌리오장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에 항복한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추축군 나치스 독일은 플란데 작전을 발동,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하고 섬에 갇혀있던 베니토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복귀시킨 후, 북부 이탈리아에 살로 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살로공화국은 사실상 나치스 독일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남부 이탈리아는 연합군이 점령, 북부 이탈리아는 나치스의 꼭두각시정부인 살로공화국이 있었고, 서로 대립하였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살로 공화국도 해체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스위스로 도망가던 중 파르티잔 게릴라에게 잡혀 총살당한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을 하게 된다.

한편,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내각수반으로 임명하고,이를 방관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군주제 폐지 여론이 들끓던 무렵,1946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 왕위를 넘겨주며 퇴위했다. 움베르토 2세입헌군주제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6월 2일 국민투표에서 46%의 적은 입헌군주제 지지율을 받게되어, 군주제가 폐지됨으로써 움베르토 2세를 포함한 사보이 왕가는 국외로 추방되어,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오늘날 사보이 왕가는 2002년 이후가 돼서야 이탈리아 입국이 허용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대[편집]

이탈리아 공화국[편집]

1946년6월 2일 국민 투표로 통해 군주제가 폐지됨으로써, 이탈리아는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다시 태어나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어, 오늘날의 이탈리아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 수많은 정당이 생겨나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가중되었고, 오늘날도 내각이 수차례 바뀌는 등 번복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는 과거 1861년통일된 이래 겪어온 남북지역간 경제적 및 문화적 갈등이 오늘날까지도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 이탈리아는 나토EU의 원년 회원으로 서유럽의 정치,경제적 통일 노력에 참여해오고 있다. 1999년에는 유로를 통화로 도입하였고, 오늘날 G8에 포함될 만큼 국제적인 영향력이 있는 국가들 중 하나다.

주석[편집]

  1. Guillotining, M., History of Earliest Italy, trans. Ryle, M & Soper, K. in Jerome Lectures, Seventeenth Series, p.50
  2. Rock Drawings in Valcamonica, UNESCO
  3. Pearce, Mark (December 1 1998). "New research on the terramare of northern Italy". Antiquity
  4. S. Gozzadini: La nécropole de Villanova, Fava et Garagnani, Bologna, 1870
  5. Luca Cerchiai, Lorena Jannelli, Fausto Longo, Lorena Janelli, 2004. The Greek Cities of Magna Graecia and Sicily (Getty Trust) ISBN 0-89236-751-2
  6. R. 더들리, 도널드 (1). 로마문명사. 서울: 현대지성사
  7. Odoacer, nndb.com
  8. EVELYN ABBOTT, M.A., THEODORIC THE GOTH, 1897, Project Gutenberg
  9. John Bagnall Bury,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10. 콜린 존스, 방문숙 외 역,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2006, 75쪽
  11. Birkenmeier, John W. (2002). "The Campaigns of Manuel I Komnenos". The Development of the Komnenian Army: 1081–1180. Brill Academic Publishers. ISBN 90-04-117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