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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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역사
Geschichte Österreichs
Austrian Flag.jpg
초기 역사
할슈타트 문명(기원전 8 ~ 6세기)
로마 제국
노리쿰 속주
판노니아 속주
라이티아 속주
마르코만니족
아바르족
사모
카란타니아 공국(658년 ~ 828년)
오스트리아 변경백국(976년 ~ 1156년)
바벤베르크 왕가
소특권(1156년)
오스트리아 공국(1156년 ~ 1457년)
합스부르크 시대
합스부르크 왕가
신성로마제국(962년 ~ 1806년)
오스트리아 대공국(1358년 ~ 1849년)
합스부르크 군주국(1526년 ~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1804년 ~ 1867년)
독일 연방(1815년 ~ 1866년)
KnK 이중제국(1867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사라예보 사건(1914년)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 1918년)
전간기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1918년 ~ 1919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1919년 ~ 1934년)
오스트리아 파시즘
오스트리아 연방국(1934년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1938년)
제2차 세계 대전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1938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1939년 ~ 1945년)
전후 오스트리아
연합국 군정기(1945년 ~ 1955년)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1955년 ~ 현재)
주제별 역사
오스트리아 전쟁사
오스트리아 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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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설명한다.

선사시대와 고대[편집]

노리쿰[편집]

선사 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민족의 이동이 많았다. BC 8세기 무렵부터 할슈타트문화의 중심이 되어 정착한 켈트인이 기원전 2세기에는 노리쿰 왕국을 세웠다.

로마의 지배[편집]

기원 전후 로마인도 다뉴브강 남쪽 연안에 이르러 노리쿰을 속주로 편입시켰고 뒤늦게 빈도보나(지금의 )를 건설하였다. 게르만족도 1세기에 이 지방으로 진출했다. 로마 제국은 그 대응책에 고심하면서 4세기 기독교를 전파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435∼453년 아틸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게르만부족들의 재편성과 자립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동방으로부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고, 5세기 말 로마인이 철수했다.

중세[편집]

신성로마제국[편집]

서쪽에서 5세기 후반 이래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프랑크족은 6세기 로마 교회와 손을 잡고 점차 남동쪽으로도 진출하여 카롤링거 왕조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 영도 아래 8세기 말 바이에른을 복속시키고 다시 동진하여 791∼796년 아바르족을 괴멸시켜 여기에 오스트마르크를 설치했다. 9세기 말부터 서진을 시작한 마자르인은 10세기에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작센왕조 오토 1세(재위 936∼973)는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트마르크를 재건,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하였다.

오토 1세[편집]

사촌인 바이에른공과 싸워 이겨 황제가 된 오토 2세(재위 961∼983)는 976년 바이에른으로부터 오스트마르크를 분리시켜 변경백(邊境伯)의 영지로 삼아 이것을 바벤베르크가에게 하사했다. 바벤베르크의 군주들은 동방식민을 추진해서 경제발전을 꾀하였고,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분쟁을 이용해 세습을 관행화하였으며, 슈타우펜가와 벨프가의 분쟁에서도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90)로부터 1156년 세습공령으로의 승격을 획득했고, 아울러 영역 내에서의 재판권을 인정받았다. 1192년 슈타이어마르크공령도 병합하여 남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최후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30∼46)가 전사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1246∼73)를 맞게 되었다.

합스부르크[편집]

주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접 제후들의 무력개입을 초래했으나, 보헤미아(뵈멘)왕 오토카르 2세는 1251년 빈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까지 진출해 동유럽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1256년 독일의 대공위시대(1256∼73)에 때맞추어서 황제위를 요구하였다. 이에 반대한 독일 제후들은 1273년 알자스와 스위스 등지에 기반을 둔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를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 루돌프 1세(재위 1273∼91)는 제국영토의 반환을 거부한 오토카르를 1278년에 죽이고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너무 강대해진 합스부르크가에게 계속해서 황제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1291년 이래, 특히 14세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스위스 독립전쟁으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카를 4세(재위 1347∼78) 밑에서 번영한 룩셈부르크가와도 대립,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에서도 7선제후(七選帝侯)에서 배제되어, 룩셈부르크왕조가 후스 전쟁(1419∼36)으로 단절되고 알브레히트 2세가 1438년 즉위한 뒤에야 합스부르크가가 황제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453년 대공령으로 승격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편집]

합스부르크가의 아들들에 대한 분할상속 전통은, 결과적으로는 결혼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영토분할과 계승권분쟁이 생김으로써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데에는 방해가 되었다. 1477년 부르군트공주와 결혼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1495년 독일 제국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1496년 그의 아들 필립이 스페인 왕녀와, 1515년 그의 손자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정책은 프랑스와의 대립을 장기화시키면서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는 오스만 제국와 대립을 가져와 합스부르크가는 동·서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으나, 필립의 장남 카를 5세(재위 1519~1556)가 프랑스 왕과의 전쟁에서 이겨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세계 제국"이 출현했다.

근대[편집]

종교개혁 시기[편집]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룩한 세계제국도 1521년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6~1564)는 농민전쟁에도 직면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북상으로 헝가리왕 라요시 2세(재위 1516~1526)가 1526년 모하치에서 죽자,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529년 빈을 포위당해 겨우 격퇴하고 1531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북서부를 지배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뒤 1556년 카를 5세로부터 제위를 승계받았으나 종교 쟁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가의 내분 뒤 페르디난트 2세(신성로마황제, 재위 1619~1637)가 1617년 보헤미아왕이 되어 반종교개혁을 강행하자, 1618년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30년 전쟁[편집]

30년 전쟁은 단순히 개신교로마 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의 태동이기도 하였으며 체코 민족주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열강의 간섭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들은 개신교에 대항한 반종교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다시 확립하였고, 서방에서는 영국과 결탁해 루이 14세의 침략을 막았으며, 동방에서는 1683년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를 반격하여 헝가리 전토를 확보하였다. 권력 집중을 도모하고 영토 통합을 꾀하였으며, 산업 육성·농민 보호에 힘썼으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해외 진출을 단념하고 스페인왕위를 포기하였으며, 네덜란드이탈리아에 영토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1740~1748)에서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겼으나 영토분할을 막기 위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이 인정되어,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에게 상속시켰다.

프랑스 혁명[편집]

1756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했으나 7년 전쟁(1756~1763)에서도 슐레지엔을 수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헝가리 귀족과 타협해 동방에서의 제정 러시아의 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왕국의 발흥을 도운 셈이 되었다. 전중·전후의 부흥을 위해 행정·재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 치하인 1781년 <농노 해방령>과 <관용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개혁정책도 좌절되었다.

나폴레옹[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에 직면한 합스부르크가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대관하기에 앞서서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건국했으나, 슬라프코프에서 참패한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메테르니히1810년 황녀 마리아 루이자와 나폴레옹결혼을 추진하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교묘히 해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빈 회의(1814∼1815)를 주최하고, 복고·정통·연대를 기조로 반동체제를 국내적·국제적으로 확립해 자유의 움직임을 탄압했다.

시민계급의 성장[편집]

메테르니히 체제 아래에서도 산업성장에 따라 시민의 힘이 강해졌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빈 등지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망명했다. 혁명의 전면에 하층시민이 부상하자 산업시민층은 혁명에서 후퇴해 10월 말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고, 1851년 이후로는 신 절대주의의 A. 바흐 체제가 되었다. 혁명 뒤에는 농민해방을 정착시키면서 산업 근대화를 추진시켰기 때문에 산업 혁명이 전개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토의 기반을 동·중유럽에 두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혁명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표면화시켰다. 헝가리 토지귀족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군대의 원조로 1849년 진압되었으나, 체코의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슬라브 여러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크림 전쟁에서의 외교적 실패와 고립화 속에서 이탈리아민족주의 운동은 1859년 독립 전쟁으로까지 고조되었고, 그 패전으로 바흐체제는 붕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편집]

위기에 직면한 오스트리아는 여러 민족의 요구를 참작, 1860년 연방주의적인 10월 칙서(Oktoberdiplom)를, 1861년에 2원제의회를 인정하는 2월헌법(Februar-Patent)을 반포하여 부르주아적 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지만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완패하자 헝가리 토지귀족과 제휴, 그 왕국을 인정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성립시켰다.

이 노선은 반발하는 슬라브 여러 민족의 요구를 억압하고 1873년 공황을 거쳐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의 고조와 함께 노동운동도 성장하였다. 이 해에 <모든 민족과 정당을 대표하는 황제내각>이 성립되자, 이로 인한 독일인과 체크인의 민족적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보헤미아에서는 <언어령(Sprachenverordnung)>이 되풀이되었지만 대립은 일상생활로까지 번져 격화를 거듭하였다. 1888년 결성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1907년 보통선거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09년 민족별로 분열되자 민족주의가 고양되어 혼란에 말려들었다.

세계대전[편집]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꾀했다. 이로 인해 범슬라브주의와 대립되었고,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1918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주도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성립되어 국민의회 결의에도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공화국의 한 구성요소>라고 명기되었으나 이 합병은 전승국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특히, 산업이 앞선 보헤미아의 상실, 전후 경제혼란과 1929년 대공황에 따라 기독교 사회당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내부상황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으며, 1932년 돌푸스내각은 사회당, 공산당과 더불어 합병을 주장하는 나치를 탄압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가담해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을 단행하고, 1939년 나치 독일폴란드에 선전포고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되었고, 나치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 역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현대[편집]

연합국의 점령과 제2공화국[편집]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전국이 되었으며 끝난 직후인 1945년 미국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하에서 오스트리아 사회 민주당카를 레너(독일어: Karl Renner)를 대통령으로 하는 사회민주당, 오스트리아 기독교 사회당, 그리고 연합정부로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연합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정부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수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성립되었다. 1945년 3월 빈에 소비에트 연방군이 진주하였고,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 점령 아래 유럽에 대한 경제원조로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고자 한 경제지원책인 마셜 플랜을 받아들였으며, 4개국회의를 거쳐 1955년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자유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영세 중립을 전제로 하여 점령군이 철수하였고, 1955년 12월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유럽 연합에는 1995년에 가입하였으며 2002년부터 유로를 사용하였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