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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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and eagle.jpg
시칠리아 왕
예루살렘 왕
독일 왕
이탈리아 왕
신성로마제국황제
재위 1212년 ~ 1250년
별명 세계의 경이
(Stupor Mundi)
왕비 콘스탄체
욜란데
이사벨
부왕 하인리히 6세
모비 콘스탄차
이전 왕 오토 4세
다음 왕 하인리히 7세
왕가 호엔슈타우펜

프리드리히 2세 (1194년 12월 26일 ~ 1250년 12월 13일)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일원으로 1220년부터 1250년 임종시 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독일 왕(공식적으로는 로마왕)과 이탈리아 왕도 겸임했었다. 원래는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시칠리아 왕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국왕의 딸인 어머니 콘스탄차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애[편집]

세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시칠리아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에 많이 살고 있던 이슬람인이나 유대인과 어울리면서 편견에서 해방된 사고를 가졌다. 그리스어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이슬람의 과학을 배우기 위해 공부한 아랍어에 능통했다. 특히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에 관심이 있어 이탈리아 나폴리에 대학을 세우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팔레르모 궁전 안에 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에 여러 철학자와 과학자 및 문학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때 시인들은 토스카나 방언(이탈리아어의 모체)으로 시를 쓰며 시칠리아 학파를 형성했다. 황제 스스로도 시를 지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뒤 예루살렘 왕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이라는 칭호도 얻었다.또한 그는 도대 로마 제국과 같은 제국을 세우기 위해 시칠리아 왕국에서 독립된 법전을 만들고 나폴리 대학도 만드는 등 교황의 신권정치를 배제하여 이탈리아를 독립시키고 절대주의적인 체제하에 드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없는 독일에 아들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세우고 독일을 속주 상태로 두기위해 독일의 성직자 그리고 세속제후들과 성스러운 제후와의 협정과 제후들의 이익을 위한 협정을 맺지만 결국 이두 협정이 그의 구상을 망치고 아들 하인리히의 반란까지 부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아들 콘라트 4세는 황제가 되지도 못한 채 4년 후 이탈리아에서 죽었고 콘라트 4세의 아들 콘라딘 역시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16세에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업적[편집]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 문화, 그리스 문화, 노르만 문화와 이슬람 문화에 기초를 둔 행정 체제와 통치 제도를 발전시켰다.

전 임
콘스탄차
시칠리아 왕
1198년 - 1250년
후 임
코라도 1세
전 임
장 1세
욜란데
예루살렘 왕
욜란데와의 결혼으로 즉위
1225년 - 1228년
후 임
콘라드 2세
전 임
오토 4세
독일 왕
(공식적으로는 로마왕)
1212년 - 1220년
후 임
하인리히(7세)
전 임
오토 4세
이탈리아 왕(임기:1212-50)
신성로마황제
1220년 - 1250년
후 임
콘라트 4세
(수십 년간의 대공위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