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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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상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이탈리아 시인·인문주의자이다.

생애[편집]

아레초에서 출생하여 교황청아비뇽으로 이전하자 부친을 따라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 그곳에서 중세의 삼학(三學)을 이수하고 몽펠리에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327년 봄 아비뇽의 성 크레르 교회에서 라우라를 처음 만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쓴 서정시는 주로 그 여성을 찬미하고 그 여성을 애도하는 시였다. 교황을 비롯하여 상류층에게 특별히 대우받아 그 사람들의 외교사절로서 활약한 적도 있으나 보클뤼즈에 은거하면서 라틴어 저술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를 찬미하는 장시 <아프리카>로 1341년 봄, 로마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이 되었다. 이것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학식과 애국심을 짐작하기에는 족하였으나 시의 정취가 있는 가치는 낮았다. 1343년 콜라 디 리엔초(1313-1354)를 알게 되어 그 사람의 로마 공화정 부흥이라는 대망에 공명하였으나 1350년 콜라는 실각하고 라우라의 부음을 접했다. 1350년 피렌체에서 보카치오를 만나 평생토록 친교를 맺었다. 말년에는 파도바 근교의 아르콰에서 살았다. 1374년 7월 19일 애독하던 베르길리우스의 시집을 베개 삼아 떠났다.

평가[편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단테 알리기에리에 이어 출현한 이탈리아 최고 시인으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스페인 르네상스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가 특히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에게 크게 받은 영향은 페트라르카주의라고[1] 명명되기도 하였으며, 14행 시는 13세기 시칠리아派(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이 형식으로 쓴 韻調(운조)나 시상 300여 장이 모두 아름다웠으므로,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사용한 이 형식은 유럽 諸國(제국)에서 표준형이 되었으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어 작품을 중시하지 않았으므로 <서정시집>과 연애, 명성, 정절, 죽음, 시간이 각기 소멸하고 영원만이 최후 승리한다는 구상의 장시 <凱旋(개선)>이 있을 뿐이다. 모두 라틴어로 된 기타 작품 중에서도 금욕생활을 찬양한 <고독한 생활에 관하여>, <종교자의 무위에 관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빌어 마음의 괴로움을 풀려고 한 <나의 비밀>이 중요한 시이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세속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쾌락이나 명성을 구하는 일변, 종교에 딸린 고독에 묻혀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로 번민한 근대인이었으며,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발견한 여러 고전의 稿本(고본)도 많고 등산하는 기쁨을 맛보고자 등산한 유럽 최초 등산가이기도 하다.

작품[편집]

  • 칸초니에레(Canzoniere)
페트라르카의 서정시집이다. 1342년경 착수하여 1348년에 일단 완성, 그 후에도 얼마나 계속 퇴고하였지는 바티칸에 소장된 원고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2부로 나뉘어 제1 부는 라우라의 생전에 쓴 시로 소네트 225편, 칸초네 21편을 위시해 합계 246편이고 제2 부는 그 여성 사후에 쓴 시로 소네트 90편, 칸초네 8편을 비롯해 합계 100편으로 되어 있다. 라우라는 베아트리체와 달리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으되 사후는 '손바닥만한 땅에 묻히는' '흙 한 줌'이 된 여성으로서 시인에게는 그 여성의 눈이나 가슴, 금발의 미는 기쁨이자 괴로움으로, 그 심정의 기복을 자연의 묘사, 고전의 인용, 용어의 멋진 표현을 이용하여 완벽한 시형으로 다듬은 시집으로 기나긴 성모의 찬송으로 끝맺는다. 기타 政爭(정쟁)이나 교황청을 비난하는 시 "내 이탈리아여"로 시작하여 "나는 외치고 외치노라. 평화, 평화, 평화라고"하는 명구로 끝나는 애국시도 포함한다.

주석[편집]

  1. pétrarqui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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