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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5일 (월) 22:51 판

한일 관계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일본 관계
alt=대한민국과 일본의 위치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일본의 국기
일본
외교 공관
주한 일본 대사관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일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
alt=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치
일본의 국기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일 관계(韓日關係, 일본어: 日韓関係)는 현재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한국 지역과 일본 사이의 외교, 문화, 경제 등의 교류 관계를 가리킨다. 양 지역에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생긴 삼국 시대(일본의 경우 아스카 시대) 이래로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정치적·군사·사회·문화·경제 등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상호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교류에는 불교유교의 전파, 농작물의 전파 등 평화적인 교류부터 임진왜란일제 강점기 등의 유혈적 관계까지 포함된다. 두 나라의 관계와 이를 둘러싼 국제적 이해관계는 아시아사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되어 왔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에서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이 왜구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는데, 이에 조선 때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을 대량 생산하는 등 이들에 대한 소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도 했다(대마도 정벌). 이에 따라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를 시작하였고,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자 이러한 관계는 잠시 악화되기도 하였다. 근대에 들어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성장한 일본과 지속적인 국가의 쇠퇴와 쇄국을 겪은 조선 간의 국력 차는 벌어졌고, 1876년 이후 일본제국은 대륙의 강대국인 청국·러시아와 맞서서 한국에 대한 침략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1905년 을사조약을 맺고 1910년에는 한국을 완전히 합병하였다. 이후 35년간의 일본 통치 하에서의 강압적 식민정책에 대한 반감은 한국 내에서 반일감정과 민족주의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한국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고, 양국의 대일 정책도 다소 달라지게 되었다. 1952년에는 이승만평화선을 설정하고 영해를 설정하여 일본, 중국 등의 불법조업 어선을 나포하였고, 이 와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분쟁이 발생했다. 1965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국교정상화가 성사되면서 정부 차원에서의 교류가 재개되었다. 현재까지도 도쿄서울에 상호 간의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여러 대도시에 총영사관들이 개설되어 있다.

일본의 침략 행위를 발단으로 하여 현재까지도 한국 내에는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이 상당수 존재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일본의 대중 문화가 자유화되어 일본에 친근감을 가진 사람들이 증가한 반면, 민주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정권의 친일 성향에 대한 반감으로 반일 감정도 부상하였다. 노무현 정권에서 한국은 이웃 나라들에 대하여 강경한 외교를 벌였다. 일본과의 영토 문제와 역사 문제에 강한 자세로 임하여, 반일운동이 활발하였다. 2002년에는 양국이 공동주관하여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과 아베 신조 내각 당시에는 한일 셔틀외교가 중단되는 등 양국관계가 잠시 소원해졌다. 그러나,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후쿠다 야스오 내각의 출범과 한일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금 양국 관계에 훈풍이 불게 되었다. 2008년 4월 대한민국과 일본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중시하는 실용외교를 기반으로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대한민국이 실효지배 중인 독도에 대해 일본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영토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동해(일본해)의 명명(命名)에 관한 분쟁이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역사에 관한 민감한 문제 또한 다수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한류 열풍이 일어 양국의 교류도 보다 증진된 반면,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혐한의 감정 또한 성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대(對)일본 수출은 396억7970만USD, 일본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683억2017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일본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3위의 수출국이자 제2위의 수입국이다.[1] 양국은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발달하였다. 모두 855,725 명(재외국민 500,451 명, 시민권자 355,274 명)의 한민족들이 일본에 거주(2015년 9월 기준)하고 있다.

통사

고대~18세기의 관계

고대에는 벼농사, 종이의 생산 기술, 불교, 한의학 등 선진 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또는 중국 대륙에서 직접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왜의 한국에 대한 외교정책은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맺고, 고구려·신라와는 적대적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무려 33차례나 일본이 신라를 침범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백제와의 교류를 제외하면 고구려, 백제본기에 왜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반면 신라에 대한 왜의 침범이 무척 많아 두드러진다.[2]

3세기 이전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3] 약 2000년 전에[출처 필요]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 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기타큐슈조몬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고인돌에 있는 특유한 간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반도와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고인돌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晩期)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4]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5] 이처럼 벼농사는 한반도를 경유한 것으로 오랫동안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벼 유전자 연구와 각종 유적에서의 출토품, 수경재배 흔적의 증거등으로부터 남쪽의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전래되고,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학설이 일본 고고학계에서의 주류가 되었다.[6] 따라서 일본의 각종 역사 교과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도 수정되고 있다.

문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일본 사가현이 원산지인 흑요석이 한반도(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발굴되고 있으며, 매우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7][8] 곧 일본의 국력이 증대되면서, 역으로 일본의 문물이 조선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장구형 무덤전라남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장구형 무덤이 발견된 것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소지도 있으나, 현재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왜의 사람이 백제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을 때 백제의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왜 본래의 무덤 양식인 장구형 무덤을 택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기원전 20년에 신라에서 활동한 신하 중에는 왜 출신인 자(호공, 瓠公)도 있었다. 그렇지만,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린 것이 역력하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 서기 14년(남해차차웅 11년)에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신라의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신라는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158년(아달라 이사금 5년) 음력 3월에 왜인이 신라에 내빙하였다. 173년(아달라 이사금 20년) 음력 5월, 왜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신라에 내빙하였다. 193년(벌휴 이사금 10년), 음력 6월, 왜인이 크게 굶주려 신라에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천여명이었다. 232년(조분이사금 3년) 음력 4월에는 가 신라의 수도 금성을 포위하니, 조분 이사금이 친정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조분이사금 4년) 음력 5월 왜가 다시 신라의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내물 마립간 때에도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64년 음력 4월 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10]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11]

그리고, 가락국을 공급하였다.[12]

백제와 왜의 교류(4세기 ~ 6세기)

칠지도

고구려·신라·백제가 분립하였던 삼국시대는 7세기까지 계속되었고, (고훈 시대, 250년 ~ 538년)는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6세기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왜는 백제로부터 불교(6세기)와 한자(4세기) 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문화(538년 ~ 710년)를 꽃피웠고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 때(7세기) 로부터 군사인력을 제공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주해 1]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13]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주해 2] 에 이뤄졌다.[14] 이처럼 왜는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하는 등[15],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근초고왕 때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16] 당시 백제가 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마쓰우라 반도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17]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18]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19][20][21]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22]516년 고안무(高安茂)[23]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24]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25]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26][27]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28]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30]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쇼토쿠 태자와 동생(왼쪽: 에구리 황자)과 장남(오른쪽: 야마시로 황손),8세기 목판 복제

위덕왕(재위 554년 ~ 598년) 때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선사·비구니·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31]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32]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33]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34]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35][36]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37]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38]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39][40][41]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佛派)이자 국신파(國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42] 602년 관륵(觀勒)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책력·지리·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43]

신라와 왜의 대립과 갈등 (7세기 초중반)

649년 신라는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 공작이 활발해졌다. 645년에 왜에서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당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왜는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647년)[44] 백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45] 하지만 백제와 왜를 갈라놓으려는 신라의 외교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는 등의 왜의 내부 사정으로 친백제 경향이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진 데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46] 이 무렵 왜 조정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이 왜와는 비교적 사이가 소원했던 고구려가 아닌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바다 쪽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타진되면서 왜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중국 왕조(당)와 한반도의 왕조(백제) 사이에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47] 또한 신라의 급속한 당풍화가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당의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8][49]

백제의 멸망과 왜의 한반도 개입 (7세기 중후반)

의자왕(재위 : 641년 ~ 660년) 13년(653년) 백제는 여전히 왜와 우호를 통하고[50]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한 바 있다.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의 동맹국인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 직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다(661년) 《삼국사기》와 《일본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부여풍은 631년 외교사절로 왜국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51]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52] 고 기록한다.[53] 부흥군과 부여풍은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이에 응하여, 병력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663년 8월,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부여풍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다시금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한반도에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 수적으로 우세였던 왜의 수군이 당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백강 전투).

백강 전투에서 패한 뒤 일본은 백제의 멸망으로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였다. 일본의 황자 나카노오에는 나당연합군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로 방어 전쟁을 준비하였다. 즉, 쓰시마(対馬) · 이키(壱岐)와 북큐슈의 각지에 사키모리(防人,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 북규슈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을 축조하였다. 또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의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에 망명해온 백제 유민들로 하여금 오노 성(大野城, 665년)[54]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55] 이라는 조선식 산성[주해 3]을 축조하고 북큐슈에는 군정기관으로서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였다.[56] 이와 같이 왜는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훗날, 원효의상 등의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신라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57] 이후,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과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성덕왕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58] 로 성덕왕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59]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교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백제를 일본어로는 "구다라"라고 하는데[60],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부여풍의 남동생·선광의 자손은 왜 왕실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백제왕')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간무 천황(재위 781년~806년)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씨의 출신이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현재의 오사카시에 몰려 살면서 '쿠다라스'(백제주, 일본어: 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61] 또한 오늘날까지 당시 백제인이 만든 관계용 저수지인 백제지, 백제씨 일족이나 백제 마을 등도 남아 있다.

외교 갈등의 악화 (8세기 초)

그러나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701년, 다이호 율령) 천황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夜郞自大)적인 태도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서기》등이 편찬(720년)되면서 소위 진구 황후삼한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에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이런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7세기 후반에 설치된 다자이후는 신라와 당나라 등 외국 사신들이 입국할 때 외교 절차를 거치던 곳인데, 《속일본기》에는 이곳에 온 신라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낸 몇 차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신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믿음이 없고 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8세기, 신라와 일본 사신의 외교 마찰은 심각했다. 신라로 간 일본 사신들도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수 차례, 서로 쫓아내고 쫓겨나는 외교분쟁이 끊임없이 불거졌다.[62]

이러한 대립 무드는 성덕왕 후반에 이르러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성덕왕 19년(720년)에 신라가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1년(722년) 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관문으로 삼고, 일본의 적들의 길을 막았다. 성의 둘레는 6,792보(步) 다섯 자에 동원된 역도(役徒)는 39,262인이었으며, 책임자는 원진(元眞) 각간이 맡았다.[63][주해 4][64] 이는 경주의 동남쪽 경계였다. 30년(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고,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65]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 (8세기 중반)

양국간의 극한의 대립은 신라의 경덕왕대(742년 ~ 765년)이자 일본의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집권기에 절정에 달해 있었다. 경덕왕 원년(742년) 10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고,[66] 753년 8월에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67] 755년 당시에 아시아의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안사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가 외부에 눈을 돌릴 틈이 없게 되자 이틈에 일본은 당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신라를 도모할 궁리를 했고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68]

이에 당시에 신라 등 외국과의 외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다자이후에서 신라정벌을 목적으로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이라는 세부적인 계획안을 마련해 이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756년 일본조정은 북 큐슈에 이토 성(怡土城)을 축조했다. 여러가지 축조기술을 동원해 견고히 건설된 성은 근방에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과 용광로와 무기제조공장을 세우는 등 대규모의 병참기지로서 기능했다.

759년에는 3년후인 762년을 기한으로 호쿠리쿠도·산인도·산요도·난카이도 4도에 할당량을 제시해 500척의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한데 이어 761년에는 미노 국(美濃國)·무사시 국(武藏國)에서 20명씩의 소년을 징발해 신라어 교육에 들어가는 등 준비는 유래가 없을 만큼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어 갔다.[69]

안사의 난을 정점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라도 중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혼란스러운 정치 · 경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경덕왕 대에는 군을 중앙의 6기정(六畿停)과 지방의 9주정(九州停)으로 재편하는 등 신속한 군대동원을 위한 군제개혁도 단행했다.

757년 일본은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던 오노 타모리(小野 田守)를 단장으로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하기 시작해 759년과 760년에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원인은 신라가 일본과 발해 양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시엔 발해의 협공과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오노 타모리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楊承慶)이 인솔하는 발해사절단을 같이 데려왔고 일본 측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신라침공일정이 짜여져 있던 762년,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견발해사에 대한 답례사신에 의례적으로 파견되던 무관을 대신해 문관인 왕신복(王新福)을 파견하는 것으로 일본의 신라침공계획에 사실상 거절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굳이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나카마로의 몰락 등으로 신라침략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신라정토계획도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무역의 지속 (8세기)

한편, 무역에 있어서는 신라와 왜가 긴밀하게 통교하였다.[70] 통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의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다.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상인도 포함되어 이들에 의한 사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공무역은 주로 사절단이 건너 와서 예물을 바치면 후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이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관된 보물 중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이 있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71]

신라와 당 對 발해와 일본의 대립 (9세기)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72] 마침내 799년 일본은 신라사(新羅使)의 파견을 중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일본을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대등외교를 표방하는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803년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73]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74] 했으며,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75]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황금을 받쳤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아전인수라는 주장도 있다.[76]

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77]

왜구 퇴치와 교린 정책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한국의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에 대한 퇴치 문제는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큰 숙제의 하나였다.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고려조선은 중국과 조선을 침략하던 일본인 해적인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대마도 정벌). 조선 태조는 즉위하자 곧 아시카가 막부와 교섭하여 왜구를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정식으로 교린(交隣)관계가 성립되었다. 중국의 왕조에 대한 사대정책과 함께 조선 시대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 이러한 교린정책은 일본 이외에 여진에 대해서도 행하여졌다. 그 뒤에 일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회유책(懷柔策)을 써서 통상의 편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역시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1419년(세종 1년)에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대대적으로 정벌(제3차 대마도 정벌)한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왕래가 끊어졌는데,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오(宗貞盛)는 사신을 보내어 다시 통교(通交)할 것을 누차 청하여 1426년(세종 8년) 내이포, 부산포, 염포 이렇게 삼포(三浦)를 열어 교역을 허가하였다.(삼포 개항)

이렇게 하여 내왕 교역하는 데 편리하게 되자 왜선은 더욱 자주 오고 내왕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지므로, 1443년(세종 25년)에는 대마도 도주와 대마도와 조선간의 세견선(歲遣船)에 관한 조약(계해조약)을 맺어 일본의 무역선은 50척으로, 조선에서 주는 곡물은 200석으로 제한하였고 부산포, 제포, 염포의 세곳을 개항하는 것으로 통상에 제한을 가하였다. 이 밖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데도 규정이 있어서, 일본의 국왕·거추(巨酋)·규슈 단다이(九州探題)·대마도 도주·제추(諸酋) 등이 보내는 사신에 대해서는 각각 차등을 두어 영송(迎送) · 체재비(滯在費) 지급 · 상경(上京) 인원수 · 연회(宴會) · 물품 사여 및 삼포에서 머무르는 기한 등을 정하였다.

왜사선(倭使船)이 삼포에 도착하면 도서(圖書)[78]나 문인(文引)[79]을 검사하고 서울에 보내어 진상물(進上物)을 바치게 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이에 대해서 회사품(回賜品)을 주었다. 일본 사신이 서울에 오면 동평관(東平館)을 유숙소로 쓰게 하였다. 이때 일본의 진상물은 은(銀)·동·연·유황·소목(蘇木)·단목(丹木)·백반(白礬)·감초·호초·수우각(水牛角)·상아 등이었으며, 회사품은 면포(綿布)와 쌀을 비롯하여 서적·저포(苧布)·마포(麻布)·인삼·표피(表皮) 등으로서 한국과 중국과의 경우처럼 일종의 관무역이었다.

이 밖에 역시 왜관을 중심으로 사무역이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교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자 왜구도 훨씬 줄어들었으나, 1510년(중종 5년)에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삼포를 폐쇄하고 대마도와 통교를 단절하였다. 그 뒤에 대마도주는 아시카가 막부를 통하여 다시 교역해 줄 것을 애원하므로 임신약조(壬申約條)·정미약조(丁未約條) 등을 맺어 전에 비해 훨씬 엄격한 제한 아래 통교할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과 통신사

그러던 중 1555년(명종 10년)에는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 연안을 노략질하여 전라 병사 원적(元績)·장흥부사(長興附使)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이를 을묘왜변이라 일컫는다. 정부에서 비변사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한 것은 이 왜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내왕을 금하였고, 두 나라 사이의 정식 교섭도 정지되었다. 한편 선조 초기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전국(戰國)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였으며 이에 따라 왜구의 활동은 억제되었다.

임진왜란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경략(大陸經略)의 계획을 세우고 대군(大軍)을 보내어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전후 7년에 걸친 대란(大亂)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한국 전토를 유린하여 국민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은 극도로 피폐하여졌다.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대체로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를 전기와 중기로 구분한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한국의 도자기·활자·주자학 등을 가져감으로써 그들의 문화는 크게 향상되었다. 이 난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망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새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평화적인 국교를 바라고 수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여기에 좀처럼 응하지 않다가 1607년(선조 40년)에야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함으로써 국교가 다시 열렸다. 그 뒤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12회 다녀왔다.

일본은 통신사와 그 일행을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한국 통신사들은 대체로 그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막말(幕末)의 소란기를 당하여서는 내외의 정세가 복잡하였으므로 국교는 서로 정지 상태에 빠졌다. 그 뒤 막부를 넘어뜨리고 메이지유신정부(明治維新政府)를 새로 수립한 일본은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고하고 국교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쇄국 정책을 펼치면서 일본에서 보낸 국서를 거부하여 왔다. 이로 인해, 한때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시끄럽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19세기 ~ 20세기 전반: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음력 9월 20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써, 쇄국정책을 써오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奸計)를 일삼다가 1910년에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 7월 19일(음력 6월 5일) 군료 배급과 관련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구 훈련도감 소속 구식 군인들의 폭동은 7월 22일(음력 6월 8일), 흥선대원군의 지휘하에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구식 군인들은 이날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였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 일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도피하였고, 공사관 건물은 불타버렸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였다.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상호군 조영하(趙寧夏)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尹雄烈, 윤치호의 아버지)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이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청나라에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조선과 일본 간에는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임오군란).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대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한중 관계)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지나치게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갑오개혁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청-일-러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년).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80]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일본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광무 8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이 때에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다(目賀田)는 소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일본에 의해 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위촉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는 일제의 침략 의도를 미화하는데 앞장섰다. 스티븐스는 훗날 장인환, 전명운에 의해 미국에서 처단되었다.

1904년(광무 8년) 한반도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러일 전쟁은 1905년(광무 9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과 러시아 간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로 매듭지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해 일본은 일방적으로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 통치'를 인정할 것을 약속하였다.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영환 등은 자결로써 항거하였으며, 조병세 등은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 장지연은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일본과 을사오적을 규탄하였다.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을사오적의 저택을 불사르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으며, 민종식, 신돌석, 최익현 등은 의병을 조직해 무장 항전을 벌였다.

또한 독립 협회가 해체된 뒤 개화 자강 계열의 단체들이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융희 원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이었다.

한일 병합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4월)의 결과로 일본 제국에 의해 고종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 로 정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8월 ~ 9월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1909년(융희 2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 제국에게 넘겨 주게 되고(기유각서)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국권만 보유하게 된다. 일본 제국은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한일 병합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에서 약 4,000년간 지속되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일본 제국은 한국을 식민 통치 지역으로 편입한다.

20세기 후반 ~ 현재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서로 외교 관계가 없다가, 양국은 1951년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또는 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결국, 한국의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을 조인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였다. 1998년 11월 18일에는 1965년에 수교와 함께 체결했던 기존의 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였다. 2003년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통해 2005년한일 우정의 해로 정했다. 2004년 40년간의 기밀이 해제되고 한일 협정 문서가 공개되자, 한동안 논란에 싸였다. 그러나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미국과 일본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나 긍정적 평가의 계기가 마련된 측면도 있으나 이와 함께 한일 협정을 통해 한국 정부가 받은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개인 피해자들의 몫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경제개발 자금으로 전용한 사실이 재확인되었다.[81]

한국의 광복 직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전후 일본의 처리와 새로운 아시아질서 수립의 일환으로서 선포된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1943년)과 포츠담 선언(1945년)에 의해서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1945년 8월에 주권을 회복하고, 이어서 1952년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체결, 1952년 4월 발효)에 의해 연합국 점령당국으로부터 국권을 완전히 회복한 이후부터 한국과 일본은 동등한 국제적 지위에 입각해서 새로운 관계를 전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 따라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따라서 한·일간에 과거의 역사적 관계를 청산하는 새로운 기본관계의 수립을 가져오게 했다. 동조약의 제4조는 35년간에 걸친 한·일 두 나라의 재정적·민사적인 채권·채무관계를 협정에 의해 해결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일본은 동조약 제9조에 따라서 한일간에 어업협정의 체결의 의무를 명시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내에 계속 주거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에 관한 문제 및 기타 일본 통치에서 생긴 양국간의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양국간에 새로운 우호선린관계의 수립을 필요로 했다.

1948년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정한경(1949년 1월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 김양천 비서, 김동성 공보처장, 이정순 공보국장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1박2일은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1950년 1월 맥아더는 한일 관계의 촉진을 위해서 이승만을 다시 일본으로 초청하였다. 이승만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자기의 집무실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를 불러 이승만과의 회담을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엇갈려있는 두 노련한 정치가는 양국간 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회담이 필요없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입을 열지 않고 있다가 요시다 시게루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국에는 아직도 호랑이가 많지요", "당신네 조상인 가토임진왜란 때 한국을 침략했을 당시 한국 호랑이를 모두 잡아먹어 이제 그것도 없소" 맥아더가 모처럼 주선한 한-일 정상회담은 이 농담으로 유산되고 말았다.[82] 1949년 1월 7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일 배상 청구 문제를 거론하고 쓰시마 섬 반환을 일본에 요구했다.[83]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될 예정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해양 경계선을 획정하고,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이른바 "평화선"(Peace Line, Syngman Rhee line)을 설정하였다. 평화선은 된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러한 이승만 정부의 선언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는데, 특히 당시 일제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불법 조업 어선을 여러 차례 나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어업 종사자가 죽기도 하고, 한국 경찰관이 중국에 납치되기도 하였다. 1956년 5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는 한 강연회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였다.[84] 이승만은 5월 3일 논산훈련소에서 수만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84]

일본이 재일동포의 북송을 추진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1959년 공작원을 일본에 파견하여 니가타 현에서 테러를 기도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깊게 관련된 미국은 두 동맹국 간에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

1960년대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또는 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제3공화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경제개발의 자금 충당이 동기가 되어, 지지부진 하던 회담을 재개하였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에서는 일본의 사죄 없는 한일협상은 굴욕외교라며 시위를 벌였고, 조약 조인 이후에도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고(1965년 6월 22일), 비준서가 교환(12월 18일)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였다. 양국은 또한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재산과 청구권(請求權)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들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 적절했는지 논란이 있어 왔다. 양국 간의 수교로 양국의 대사가 교차 임명되고, 일본의 장관급 인사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미국은 협상의 진전을 위해 독도의 공동소유를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은 이를 일축하였다.

미국의 압력과 야당·학생의 반대

미국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압력을 한국에 가하였다. 제3공화국 정부는 실패를 거듭해왔던 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고 1961년 겨울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는 미국의 압력과 경제 개발을 하는데 지원자금을 충당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가 없이 한일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에 대개 야당에서는 굴욕외교라 주장하였고, 장택상, 윤보선, 허정, 박순천, 함석헌 등 야당 지도자들은 굴욕외교 반대라는 명목으로 시위를 하였다. 1964년 6월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의 시위가 발생했다. 1964년 6월 초, 한국 정부가 총리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자 당시 한일협정에 대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내걸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6·3 항쟁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던 인물 중에는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자 훗날 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 등도 있었다.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1965년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85]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의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86] 이어 1965년 8월 26일 아침,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87]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88]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하였다.

국교 정상화

위와 같은 각계의 반발에 불구하고 박정희는 한일 외교를 재개해 나갔다. 결국 1965년에 한일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1965년 12월 18일 오전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1951년 10월 20일에 제1차 한일 회담이 열린 이래 14년 1개월 28일간에 걸친 양국 간의 교섭을 거쳐 이날 양국 대표는 비준서 교환 의식을 끝냄으로써 두 나라의 수교는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지 60년 만에 다시 한일협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89]

협정들의 주요 내용

한일협정외에도 1965년 6월에 양국은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재산과 청구권(請求權)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특히 기본조약 제2조에 의해 일본은 한국에 대한 과거 일본의 침략적인 모든 조약과 협정을 법적으로 무효화시켰고,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했다.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해결 내용은 일본이 한국에 10년간 무상(無償)으로 3억 달러를 지불하는 동시에 정부간 차관으로 2억 달러를 연리(年利) 3.5%, 7년 거치(据置) 20년 상환의 조건으로 10년간에 제공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商業借款)을 제공키로 약속되었다. 이 합의는 양국간의 경제협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60만 재일교포에 대한 법적지위 및 처우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들과 이들 자손에게 일본 영주권을 획득할 권리를 부여했고, 이들이 일본의 국법을 위반하여 중형에 처해지지 않는 한 이들이 일본으로부터 강제퇴거 및 송환당하지 않도록 이들의 주거보장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생활보호 및 국민건강에 있어 일본국민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 협정으로 인해 재일교포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한국정부의 법적·외교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또 어업협정은 평화선(平和線)을 12해리의 한국의 배타적인 어업관할 수역(水域)으로 대치했으며, 한국의 인접수역에 있어 어업자원의 보존·개발, 어민의 권익보장, 양국간의 어업협력을 내용을 했다.

보상금 논란

한일협정 과정에서도 보상금 8억 달러라는 보상금을 놓고도 적은 액수라는 비판이 있었다.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각에선 이 협정에 대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결렬되어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않던 한일 협정은 완전타결을 보았다. 그를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청구권문제와 함께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일본측에서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 중이다. 이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를 요구했고, 장면은 28억 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필리핀은 14억 달러를 받았다. 한편 북한은 계속해서 일본에게 과거사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전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90]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 독도밀약이 있었고, 이 밀약은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91][92][93][94][95][96]

외교 인사 교류

1965년 12월 18일, 일본의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이 방한하였고, 일본 정부는 북한계 한인 3명에 일본 재입국을 허가하였다. 1966년 1월 14일, 김동조 주한 초대 대사가 쇼와 천황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월 17일,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이 발효되었다. 2월 6일, 일본은 10명의 북한행 민간사절단을 승인하였고, 2월 15일 한일어업공동위 준비회의가 개최되었다. 2월 25일, 한일어업공동위원회 제1차 정기회의가 개최되었다.[97]

독도 문제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1965년 5월 17일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였고 미국의 한일간 외교장관 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고 발언하였다.[98] 하지만 1965년 1월 이미 독도밀약을 맺었다. 그 해 6월 22일 독도를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하는 한일어업협정을 발표했다.

1970년대

1970년대에 한·일 관계의 전개에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은 강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이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함에 따라서 첫째는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의 역할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이었으며, 둘째는 앞으로 한일간의 경제협력의 내용과 방향이었다. 다시 말해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1972년), 베트남 전쟁 종결(1975년), 남·북한간의 대화 등 복잡하고 다원적인 아시아의 정치·군사정세 등의 급박한 변화속에서 금후 일본의 기본적인 군사·외교·경제정책이 한반도의 통일과 한국 대 북한의 대결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⑴ 한·일 경제협력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후부터 한·일 양국간의 협력면에선 가장 활발히 진행되어 온 부분은 경제면이다. 그 이유는 원래 한·일 관계 정상화에 있어서 한·일 양국이나 이를 적극 추진시킨 미국이 경제협력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외지출로 막중한 부담을 느껴온 미국은 한·일 관계의 정상화로 일본이 한국에서 미국의 경제부담을 대신하여 주기를 희망했다. 일본에서 볼 때 한국과의 관계정상화는 제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일본이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아시아에서 새로운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국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외자(外資)를 필요로 하는 경제개발의 추진에 있어 일본의 자본을 필요로 했고, 한국은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통해서 자립경제를 달성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 안정과 국가안보를 보장하고자 했다. 국교정상화 이후 1970년 말까지 일본은 한국에 약 8억 달러의 무상 차관·직접투자를 했으며, 150여 종의 기술협력을 제공했다. 심화되고 있는 양국간의 경제관계는 급속도로 증대되어 가는 무역량으로 알 수 있는데, 무역량은 1965년의 2억 1,000만 달러에서 1970년의 12억 4,3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일 경제협력은 무역량·자본도입·기술도입에 있어 일방적인 일본지배의 경제협력이었고, 한국에 극히 불리한 무역역조(貿易逆調)를 둘러싼 양국간의 불화와 마찰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한국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외자조달면에서 일본에 상당한 의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한·일 경제협력은 한국의 안보태세와 정치적 입장을 간접적으로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도 한·일 경제협력으로 인한 상호이익이 무엇보다도 가장 월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한 경제협력은 계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러한 경제협력을 통해서 일본에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예속화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 것은 아니다. ⑵ 한·일간의 정치문제 ― 한·일간의 정치적 관계는 피상적으로 볼 때 일본이 성의를 다하여 한국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일간의 정치적 관계는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는 못했다. 일본은 한일 기본조약에서 한국 정부가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1969년의 닉슨·사토 성명에서 '한국의 안전은 일본 자신의 안전에 긴요하다'고 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적 입장과 안보의 중요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듯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국과 사전협의에 의해서 한반도에서의 심각한 군사적 사태의 도발에 대비하여 일본과 오키나와를 미군기지로서 계속해 제공하겠다는 언질을 수차 한 바 있다. 한국에서도 한국의 안보와 외교의 강화는 대미·대일협력을 통해서 달성한다는 기본적 입장을 천명해 왔다. 그러나 1972년 9월의 일본·중국이 관계를 개선하여 일본이 중화민국을 제외한 중화인민공화국만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미·일 안보조약의 성격과 적용범위가 수정되고, 이로 인하여 한·일 협력관계가 상당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일본은 유엔에서 미국과 더불어 한국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했고, 아스팍을 창설하는데도 한국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며, 한·일 정기각료 회담, 한·일 의원간담회, 한·일 협력위원회(韓日協力委員會)를 통해서 양국은 정부·민간간의 협력과 교류체제를 강화해 왔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1965년 이후 한·일간의 최대의 정치적인 불화의 초점은 북한을 포함한 대공산권 정책에 있다. 이러한 불화는 한·일 기본조약 제3조의 해석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은 제3조에 의거해서 일본이 법적으로 한국정부를 한반도 전역을 통할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으로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일본은 북한이 불법정체(不法政體)임을 확인했고, 북한과는 여하한 공식적 관계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불리하게 하는 여하한 인적·물적 접촉과 교류도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1962년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두 개의 한국'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해 왔고, 1965년 조약 이후에도 한국의 주권은 한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하다고 공식적으로 말해 왔다. 따라서 일본측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북한을 실질적 존재로 취급하여 왔다. 이러한 일본의 대북한정책 역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이후 시일이 감에 따라 변경되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대한정책의 불투명성은 한반도가 2개의 정체로 분단된 사실과 이로 인해 생긴 일본을 포함한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이며 또 한반도 분단의 부산물로서 생긴 재일교포들의 남북한 체제에 대한 양분된 정치적 상충성문제 등 일본이 안고 있는 정치적 고민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태도는 재일교포의 북송(北送), 친 북한상사와 각서무역(覺書貿易)을 통한 플랜트 및 전략물자의 수출, 조총련계(朝總聯系)의 일본재입국 사증(査證) 발행, 북한의 공식호칭 사용, 재일교포의 국적 정리, 북한과 일본간의 각계 인사들의 교류 등의 문제와 시비로서 나타났다. 한국은 일본의 이와 같은 대북한 접촉과 교류가 일본정부의 묵인 내지는 장려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한국의 안보와 정치적인 입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행위로서 비춰졌다. 중국의 유엔대표권 획득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1972년)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중화민국과의 조약(1952년)을 폐기하였으며, 중국만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72년) 그동안 한국은 북한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남한 단독의 UN 가입을 주장하면서 남북한 동시가입을 반대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기본 외교정책을 바꿔 계속 남북한 UN 동시가입을 추진하였으며, 이것은 일본의 한반도 정책과 일치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일본은 카터와 동북아시아 군사외교정책이 발표된 이후 그전에 취했던 한반도 정책보다 더 조심스럽게 남북한의 현상고정화 정책을 은밀히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의 분단체제 현상 유지를 바라는 일본의 태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남북한은 결국 UN 동시 가입을 하였으며, 일본과 북한, 일본과 남한과의 관계는 복잡한 양태로 변화해 왔다. 최근에는 독도문제·종군위안부 문제·어업협정 문제 등으로 한·일 간의 감정 대립이 두드러지고 있다.

1970년대 초반의 일본의 대한 정책

일본의 국가이익으로 볼 때 기본적인 외교·안보의 진로가 바로 미·일 체제를 통해서 아시아에서 현상유지 내지 현상개선정책을 취하는 것이며, 미국의 주도하에서 일본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기본적인 대한정책은 미국과 한국의 현단계가 유지되는 한 미국의 대한정책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이 동일한 보조를 취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의 일반적인 긴장완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만일 한반도에 새로운 북한의 침략이 야기되는 가상적 사태가 온다면 한·일 기본조약과 지금까지 심화된 양국의 관계에서 오는 도덕적·정치적 의무, 미일 안보조약과 한미 방위조약으로 얽힌 삼각관계에서 오는 일본의 입장, 오키나와 반환에서 미·일간에 양해된 사전협의 조항과 일본 자신의 국가이익 때문에 일본은 그들의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한국에 가능한 모든 협조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래 일본의 대북한정책은 동·서간의 접촉과 긴장완화 추세를 보아 불가피한 현실인 것이다. 앞으로 미·중국, 일·중국의 접근에 뒤따라서 아시아의 정세에 많은 변화가 온다고 가상할 때 일본은 이에 대비해서라도 인접한 북한과는 어느 정도 제한된 관계를 유지해 보겠다고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일본의 대북한정책은 현재의 한·미관계가 지속되는 한, 또 한반도에 극적인 정세의 호전(好轉)이 없는 한 '모든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외교의 기본원칙'이라는 상징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일·중국 국교정상화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일본은 극동에서 한·미·일의 3국 협력체제 속에서 한·일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의 미·중국과 일·중국 관계개선은 어느 의미에서 이러한 협력체제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새 시대의 국제조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탄력성 있는 외교정책을 기도하고 있는 이때 일본의 지위와 위신을 매개로 북한을 포함한 적성국가(適性國家)들의 호전성을 둔화시킬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협력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의 새로운 정책은 금후 아시아에서 새로운 역할을 추구하는 일본 외교의 지향과 화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한·일간의 정치적 협력을 보다 긴밀하게 강화시키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대륙붕 문제

1970년 6월에는 제주도 남쪽 8만km²를 제7광구로 정하고 한국령으로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1972년 당시 정설이었던 자연연장설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유리한 처지에 있었으나 박정희는 공동개발하기로 합의하였다. 1972년 일본이 “한일간의 중간선에서 일본 쪽으로 넘어온 부분은 양국이 50%씩 지분을 갖고 공동개발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현재 일본은 공동개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계속 지연시키면 2028년 대륙붕협정이 만료하는 날 자연연장설 대신 UN의 새 해양법이 적용되어서 일본에 유리하게 된다. 한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이 맺어진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 것은 제주도와 중국 대륙에 붙어있는 7광구의 해저지형 때문이었다. 일본과 7광구는 깊이가 8000m에 이르는 ‘오키나와 해구’가 갈라놓고 있다. 당시까지 지배적 이론이었던 자연연장설로 볼 때 일본이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99]

1970년대 초,중반의 한일관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경제 및 정치·외교적인 면에서 가장 밀착해 오던 한·일 관계는 1973년 8월 8일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이어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에 일본인 두 사람이 관련되어 구속되자 한·일 관계는 극히 악화되어 일본 국내에서는 대한(對韓) 경제협력의 중단론까지 나올 지경이 되었다. 이런 냉각 상태가 계속되고 있던 중 1974년 8월 15일에는 재일 동포 문세광에 의한 대통령 저격음모 사건이 일어나면서 육영수가 희생되자 한일 관계는 최악의 위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광복회를 비롯한 사회 단체가 연일 반일 시위를 벌이면서 양국간의 국교단절이라는 극한 상태로까지 몰고 갈 위기감이 감돌게 되었다. 여기에다 당시 일본 기무라 도시오 외상은 '한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가 아니다'는 발언까지 하여 한국에서의 반일운동을 자극시켰다. 그러나 시나 에쓰사부로가 이끄는 일본의 진사(陣謝) 사절단의 내한과 한·일 양국간의 협상으로 서서히 냉각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한·일 양국은 김대중 사건, 대륙붕협정 비준안, 독도 문제 등의 미해결 사항 때문에 가끔 냉각기가 잦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상호 협조하고 있다.

1980년대의 한일관계

1980년대 양국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100]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가진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또 이듬해 1982년 8월 15일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그는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反日)이나 '배일'(背日) 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국민의 정부의 한일 관계

1990년대 양국은 계속되는 정상회담을 통해 우호협력관계를 강조했지만, 양국 사이에는 독도와 종군위안부, 어업협정 개정 및 배타적 경제수역(EEI) 설정 문제 등으로 팽팽한 긴장이 흐르기도 했다. 한편 양국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위해 '긴밀한 연락체제'를 유지키로 하고 양국 역사를 공동연구할 민간지식인 회의를 발족시키기로 했다.

199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다시 체결되었다. 그 결과 독도가 한일 배타적 경제 수역 안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독도의 영유권이 침해당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어업을 위해 양국이 정한 수역과 섬의 영유권 내지는 영해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 하여 이를 기각했다.[101]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통해 한일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독도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제성호 교수는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102] 독도를 한일중간수역에 놓이게 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고 일축했다.[103]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104] 최낙정 전 장관은 또,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최 전 장관은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고 덧붙였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독도밀약과 한일협정이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91][92][93][94][95][96]

참여정부의 한일 관계

2003년 6월, 도쿄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통해 2005년한일 우정의 해 2005로 지정하였다.

역사교과서 왜곡독도 영유권 주장 문제로 정부는 강경대응책을 펼쳤다. 외교부는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주한일본대사를 초치하는 등 양국 관계는 위기를 맞게되었다.[105] 또한 이같은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기의 한일 관계

이명박정부는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를 모토로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106] 하지만 오히려 일본 교과서의 독도 자국 영토 명기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일관계의 긴장이 고조되고,[107] 미국지명위원회(BGN)에서 독도를 주권미지정지역 ‘리앙쿠르 섬’으로 명시한 상황이 밝혀져 이명박 정부의 대일 외교 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었다.[108]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 총력 대응으로 일주일 만에 미국 부시 행정부에서는 한국령으로 독도의 지위를 원래대로 바꾸었다.[109] 전문가들은 “국제사회에서 한국 편을 서거나 일본 편을 서게 하는 식의 단순한 대응은 곤란하다”면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며 일본의 야욕을 무력화하는 설득력있는 외교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평가했다.[110]

한편 일본 방위성이 발행하는 2008년판 방위백서에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일본측 표기 문제로 한일 관계가 다시 냉각되었다.[111][112] 대한민국 국방부9월 5일, 일본 정부가 각료회의를 열고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담은 2008년 방위백서를 의결한 것과 관련해 “한일관계 미래지향적 발전 가로막는 행위”라며 한국 주재 일본 자위대 국방무관을 불러 항의하였다.[113] 이처럼 일본 방위성은 방위백서를 2008년까지 4년 연속 “독도는 일본땅”으로 명시하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어 한일 관계의 잠재적 마찰 가능성이 우려되었다.[111]

이명박 대통령은 3번째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서 한일관계의 ‘셔틀외교’를 복원하자는 의견에 합의하여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2009년 1월 11일에서 1월 12일까지 이틀간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114] 당시에 아소 총리가 방한하게 되면 한일 정상간 셔틀외교가 다시 복원되는 의미를 갖고있다는 평가가 있었다.[115][116] 이 회담에서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한일 경제연대협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117][118] 그러나 독도 문제와 역사 문제 등 민감한 문제는 논의되지 않아[119] ‘절반의 성과’에 그쳤다는 지적이 있다.[120]

한편, 2008년 7월 9일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 G8 정상회담 기간 중 한일 정상이 만났을 때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중학교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새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을 때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라고 말한 것으로 요미우리 신문은 보도했다.[121] 청와대는 이 사실을 부인했으며, 결국 2009년 8월민주당 및 일부 시민들이 이를 보도한 요미우리 신문에 대해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한 손해배상과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냈으나 패소 했다.[122]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간 나오토 일본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하토야마 유키오가 이끄는 일본 민주당 내각의 등장으로 외교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123] ‘한중·한일 연쇄 정상회담’에서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민주당 새 정권은 역사를 직시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서 양국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나타냈다.[124]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간 공조에도 합의했다.[125] 특히 한미간 합의된 ‘그랜드 바겐’ 처리 방식에 대한 지지,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한 한일 관개 개선 의지 등은 이전 자유민주당 정권과 다른 방식의 접근으로 평가되었다.[126][127]

2009년 12월 14일, 일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은 방한한 자리에서 “일본과 일본 국민으로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과거사 문제에 사과하였다.[128] 하지만 12월 25일문부과학성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고수한 고등학교 지리·역사 과목의 새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하자 정부는 ‘유감’을 표시하였다.[129] 하지만 가와바타 다쓰오 문부과학대신이 “다케시마(竹島)는 우리의 고유 영토로, 정당하게 인식시키는 것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자 이에 대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갈등이 발생하였다.[129]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에 대한민국 대통령 역사상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고 아키히토에 대해 과거 일제강점기 시대의 잘못을 사죄하라는 발언을 하여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하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문재인 한국 대통령,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현재의 한일 관계

2018년 한일 관계는 강제 징용공에 대한 양국 정부 간의 시선 차이, 한일 레이더 갈등, 위안부 합의의 사실상 파기 등의 영향으로 인하여 가히 최악의 해를 보냈다. 2018년 10월 30 10월 3일에는 한국의 대법원이 신일본제철에 대하여 태평양 전쟁 시절 강제로 노역시킨 강제 징용공들에게 보상금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에 일본 우익 세력들이 크게 반발하며 상당한 파장이 있었다. 일본은 외교청서에서 한일 관계에 대하여 서술할 때에 '미래지향적'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였으며,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는 표현 역시 삭제하며 현재의 한일 관계에 대하여 가진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었다. 대신 북일관계의 경우 '북한의 압력'을 삭제하였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이전보다 상당히 유화적인 어조로 내용을 작성하였다.

일본은 2019년 7월 2일 일본 정부는 한국의 무역 관리 조건을 빌미로 삼아 전략물자 수출 절차 우대국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8월 2일에 법에 수록되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이같은 조치는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에 필수적인 포토레지스트, 액체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의 재료들을 한국에 수입되는 것을 어렵게 하여, 한국의 경제에 타격을 가해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정치적인 조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조치라고 밝히고 있으나, 상황적인 여건을 고려하였을 때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130] 이에 따라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 격화로 불매운동이 일어나면서 대마도, 훗카이도 등 일본 비수도권 지역에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겼으며, 한일간 민간 교류도 크게 감소하였다. 또한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항하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를 만료시킬 것을 단언하며 양국 간의 골은 점점 깊어졌다. 7월에 조사된 한국 갤럽의 결과에 의하면, 한국 국민의 일본 호감도는 12%로 1991년 이래 28년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포인트) 다만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호감 41%, 비호감 43%로 2015년도 조사(호감 40%, 비호감 47%)보다 소폭 올랐다. 이번 조사에서도 이전 여론조사들과 비슷하게 20대의 일본/일본인 호감도가 가장 높았고, 60대 이상이 가장 낮았다.[131] 또한 2019년 8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들은 전년 같은기간 대비 -48%라는 큰 감소폭을 보이기도 했다. 한때 증가추세에 있었던 일본인 관광객 수도 10월 기준 전년 대비 14% 줄어들면서 양국 간의 민간 교류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태풍 하기비스로 인한 일본의 천문학적인 피해 발생에도 한국 기부단체들은 동일본 대지진때와 달리 일본에 공개적으로 성금을 보낼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2020년 2월 8일에 도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 열린 2·8 독립선언 10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남관표 대사는 한일관계는 입술과 이 관계라면서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코로나19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부실 대응과 국내 여론의 악화로 인해 3월 5일, 아베 총리는 3월 9일 0시부로 한국과 중국에서 온 입국자들을 2주간 대기(강제격리 아님, 호텔 등지에서 자가격리 요청) 및 대중교통 이용자제 요청을 하기로 결정했다. 추가로 중국과 한국의 비자를 3월 말까지 효력을 정지 시킬 것이며, 이같은 제한은 3월 말까지 시행한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의 일본 무비자 입국이 금지되어 일본여행시 새로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같은 아베 정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한민국 정부가 반발하여 즉각 9일 0시부터 발효되는 일본에 대한 무비자입국, 기존비자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상응 조치를 취했다.[132] 그리고 일본의 여행경보를 1단계에서 2단계로 상향조정한다고 밝혔다. 일본측은 한국인들의 입국제한에 대해 1만 명당 확진자수가 한국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 일본은 연이은 입국 금지 조치 연장을 하였고, 결국 6월 말까지 계속 효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일본측의 조치로 인해 한일을 연결하는 항공노선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거 중단되었으며, 양국 간 하늘길은 코로나 19 시국이라는 최악의 악재를 만나며 거의 봉쇄되다시피 하였다. 참고로 일본에 대해 곧바로 보복 조치를 취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나온다는 지적이 나오자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반박했다.[133]

한편 2019년에 실시된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오히려 한국 기업들은 액체 불화수소 등 상당 부분의 소재들을 국산화하는 데에 성공하여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수급을 이어갔다. 반면 일본 최대의 불화수소 업체였던 스텔라케미파는 실적이 크게 악화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134]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요미우리 신문과 아사히 신문 등도 나서 이같은 문제 상황을 보도한 바 있다.[135]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이 제시한 수출 규제의 조건들, 예를 들어 △양국 간 정책대화를 통한 신뢰 관계 회복 △한국 측 관련 법령 개정 △수출 관리 인력 확대 등을 충족한 점을 들어 일본에게 수출 규제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또다시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하였고 결국 대한민국은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절차를 다시 밟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6월 19일 일본의 가지야마 히로시 경제산업상은 한국의 WTO제소가 유감이라고 밝혔다. 5월 30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대에 뒤처진' G7 체제에[136]한국, 인도, 호주, 러시아 등을 포함시키고 싶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아시아 유일의 G7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일본이 한국의 참여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정치

외무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1949년 1월, 주일본 한국대표부가 발족하고, 1962년 11월 재일동포 서갑호가 현 대사관 토지 및 건물을 한국정부에 기증하였다. 1965년 12월 주일본 한국대표부가 대사관으로 승격하였고, 1979년 9월 현 대사관 청사 및 관저를 신축하였다.[137]

역대 공관장
대수 이 름 임기
제1대 대표부 공사 정한경(鄭翰景) 1949년 1월
제2대 대표부 공사 정환범(鄭桓範) 1949년 1월 ~ 1950년 1월
제3대 대표부 공사 신흥우(申興雨) 1950년 2월 ~ 1950년 5월
제4대 대표부 공사 김용주(金龍周) 1950년 6월 ~ 1951년 5월
제5대 대표부 공사 신성모(申性模) 1951년 6월 ~ 1951년 12월
제6대 대표부 공사 김용식(金容植) 1952년 1월 ~ 1957년 5월
제7대 대표부 공사 김유택(金裕澤) 1957년 6월 ~ 1958년 9월
제8대 대표부 공사 유태하(柳泰夏) 1958년 10월 ~ 1959년 3월
제9대 대표부 공사 유태하(柳泰夏) 1959년 4월 ~ 1960년 4월
제10대 대표부 공사 이재항(李載沆) 1960년 7월 ~ 1960년 9월
제11대 대표부 공사 엄요섭(嚴堯燮) 1960년 10월 ~ 1961년 3월
제12대 대표부 공사 이동환(李東煥) 1961년 7월 ~ 1961년 12월
제13대 대표부 공사 배의환(裵義煥) 1962년 1월 ~ 1964년 10월
제14대 대표부 공사 김동조(金東祚) 1964년 11월 ~ 1965년 12월
제1대 대사 김동조(金東祚) 1965년 12월 ~ 1967년 10월
제2대 대사 엄민영(嚴敏永) 1967년 9월 16일 임명,[138] 1967년 10월 ~ 1969년 12월 10일[139]
제3대 대사 이후락(李厚洛) 1970년 1월 ~ 1970년 12월
제4대 대사 이호(李澔) 1971년 1월 ~ 1973년 12월
제5대 대사 김영선(金永善) 1974년 1월 ~ 1978년 12월
제6대 대사 김정렴(金正濂) 1979년 1월 ~ 1980년 8월
제7대 대사 최경록(崔慶祿) 1980년 9월 ~ 1985년 10월
제8대 대사 이규호(李奎浩) 1985년 11월 ~ 1988년 4월
제9대 대사 이원경(李源京) 1988년 4월 ~ 1991년 3월
제10대 대사 오재희(吳在熙) 1991년 3월 ~ 1993년 4월
제11대 대사 공노명(孔魯明) 1993년 4월 ~ 1994년 12월
제12대 대사 김태지(金太智) 1995년 1월 ~ 1998년 4월
제13대 대사 김석규(金奭圭) 1998년 5월 ~ 2000년 2월
제14대 대사 최상용(崔相龍) 2000년 3월 ~ 2002년 2월
제15대 대사 조세형(趙世衡) 2002년 2월 ~ 2004년 2월
제16대 대사 나종일(羅鍾一) 2004년 3월 ~ 2007년 2월
제17대 대사 유명환(柳明桓) 2007년 3월 ~ 2008년 3월
제18대 대사 권철현(權哲賢) 2008년 4월 ~ 2011년 5월
제19대 대사 신각수(申珏秀) 2011년 6월 ~ 2013년 5월
제20대 대사 이병기(李丙琪) 2013년 6월 ~ 2014년 7월
제21대 대사 유흥수(柳興洙) 2014년 8월 ~ 2016년 6월
제22대 대사 이준규(李俊揆) 2016년 7월 ~ 2017년 10월
제23대 대사 이수훈(李洙勲) 2017년 10월 ~ 2019년 4월
제24대 대사 남관표(南官杓) 2019년 5월 ~ 2021년 1월
제25대 대사 강창일(姜昌一) 2021년 1월 ~ 현재

주한 일본 대사

대수 성명 일본어 이름 부임 날짜[140] 임기 비고
마에다 도시카즈 前田利一 1965년 12월 18일 1965년 ~ 1966년 임시대리대사, 한국어 구사
1 기무라 시로시치 木村四郎七 1966년 3월 9일 1966년 ~ 1968년
2 가나야마 마사히데 金山政英 1968년 7월 15일 1968년 ~ 1972년
3 우시로쿠 도라오 後宮虎郞 1972년 2월 28일 1972년 ~ 1975년
4 니시야마 아키라 西山昭 1975년 3월 10일 1975년 ~ 1977년
5 스노베 료조 須之部量三 1977년 7월 14일 1977년 ~ 1981년 주인도네시아 대사
6 마에다 도시카즈 前田利一 1981년 5월 9일 1981년 ~ 1984년 한국어 구사
7 미카나기 기요히사 御巫淸尚 1984년 12월 14일 1984년 ~ 1987년
8 야나이 신이치 梁井新一 1987년 4월 4일 1987년 ~ 1990년
9 야나기 겐이치 柳健一 1990년 4월 9일 1990년 ~ 1992년
10 고토 도시오 後藤利雄 1992년 9월 1일 1992년 ~ 1994년
11 야마시타 신타로 山下新太郞 1994년 8월 17일 1994년 ~ 1997년
12 오구라 가즈오 小倉和夫 1997년 10월 20일 1997년 ~ 1999년 외무심의관
13 데라다 데루스케 寺田輝介 2000년 2월 24일 2000년 ~ 2003년
14 다카노 도시유키 高野紀元 2003년 1월 24일 2003년 ~ 2005년
15 오시마 쇼타로 大島正太郎 2005년 8월 5일 2005년 ~ 2007년 주제네바 국제기관 일본 정부 대표부 대사
16 시게이에 도시노리 重家俊範 2007년 9월 14일 2007년 ~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
17 무토 마사토시 武藤正敏 2010년 8월 5일 2010년 ~ 2012년 쿠웨이트 대사, 한국어 구사
18 벳쇼 고로 別所浩郎 2012년 10월 30일 2012년 ~ 2016년 외무심의관
19 나가미네 야스마사 長嶺安政 2016년 8월 25일 2016년 ~ 2019년 네덜란드 대사, 외무심의관
20 도미타 고지 冨田浩司 2019년 12월 3일 2019년 ~ 2021년 이스라엘 대사
21 아이보시 고이치 相星孝一 2021년 2월 2021년 ~ 현재 주이스라엘 대사

일본 외무성은 사의를 표한지 오랜 기무라 시로시치 주한대사 후임으로 가나야마 마사히데 당시 폴란드 대사를 전임키로 방침을 굳히고, 한국정부에 아그레망을 신청한 것으로 1968년 4월 5일 알려졌다.[141]

양자 조약

양국은 한일기본조약(조약 제163호)을 비롯하여 많은 양자 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번호 조약명 발효일
조약 제163호 한일기본조약 1965년 12월 18일
조약 제167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관한 합의의사록 1965년 12월 18일
조약 제172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1965년 12월 18일
조약 제173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I) 1965년 12월 18일
조약 제182 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와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 1965년 12월 18일 ()
조약 제183 호 분쟁의 해결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간의) 교환공문 1965년 12월 18일
조약 제190 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무역협정 1966년 3월 24일
조약 제192 호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의 제1의정서 제7조 및 제1의정서의 실시세목에 관한 교환공문의 실시 세칙에 관한 각서교환 1966년 4월 19일
조약 제193 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1조 2의 합동위원회의 기구와 기능에 관한 교환공문 1966년 4월 19일
조약 제2074 호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간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을 위한 협정 2012년 1월 21일

한·일 정기각료회의

일본은 국교수립에 의해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한에도 하나의 오소리티가 있다는 입장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북한의 권위를 부정하기를 꺼려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관계를 제외한 민간차원의 대북한 교류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여 매년 수출입이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도주의의 명목하에 인사교류의 범위를 확대하여 자유민주당 의원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평양방문을 허용하고, 스포츠 단체, 학자의 상호교류까지 인정하게 되었다. 이같이 비록 비공식적인 측면에서의 대북한 관계가 확대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현재까지 일본정부는 유엔문제를 비롯한 외교·정치문제에서 한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국에 많은 협력을 함으로써 한·일 관계는 대미관계 이상으로 밀착되어 왔다.

이러한 한·일 관계에서 국제관계·경제관계 등 양국 공통의 이해관계 사항을 종합적으로 토의·결정하는 중추적 역할을 해 온 것이 1967년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한·일 정기각료회의이다. 1972년까지는 이 약속대로 한일 정기 각료회담이 매년 예정대로 개최되어 양국간의 정치·경제적 협조가 잘 이루어져 왔으나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일본측이 개최 예정일을 바로 앞두고 연기해 버리는 등 결렬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각료회담은 완전 결렬되어 개최되지 못하고 있다가 양국간의 끈질긴 타협과 양보로 1975년 이후 계속 개최하게 되었다. 한일 각료회담은 한일 양국이 안고 있는 많은 현안 문제들을 가장 높은 정책적 차원에서 다룬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이 회담과 병행하여 한일 경제 실무회담을 비롯한 각종 회담이 개최되고 있다.

정치적 현안

1965년에 한일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이후 한일 관계는 급속히 긴밀해졌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가 긴밀화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양국의 협력 관계가 날로 심화됨에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 양국간에는 아직까지 독도에 대한 영토권 문제와 제주도 남서일대의 대륙붕에 있어 석유자원의 소유권 및 개발권 문제 등 분쟁의 요소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이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연해주 및 사할린 섬에 둘러싸인 바다에 대한 호칭 및 명명(命名)에 대한 분쟁이 있다. 이 바다에 대하여 대한민국에서는 동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동해’라 부르는 반면 일본에서는 ‘일본해’라고 부른다. 현재 국제적으로는 일본해(Sea of Japan) 표기가 우세하지만, 점차 동해·일본해 병기로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해결하여야 할 현안 중 하나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또한 민감한 문제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전몰자와 전범들을 안치한 신사인데, 일본 정치인들의 참배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반대하고 있다.

독도 분쟁

독도 분쟁은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말한다.

현재, 한일 양국[142][143][144] 은 독도 외에 동해에 있는 여러 섬들에 대해 영유권 분쟁 중이다. 현재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 문헌, 지리, 지도, 백과사전 등에 기록된 우산도를 대한민국 측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 측은 우산도가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은 일본 측의 입장이 일관성이 없으며, 대체적으로 울릉도 본섬을 제외한 또 다른 섬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러면 도대체 어느 섬이 우산도인지 확실이 증명하지 못하고, 또한 우산도를 죽서(竹嶼), 관음도 (觀音島), 울릉도, 혹은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고 하는 등 상황에 따라서 주장을 바꾸고 있다는 점[145]을 들어 일본 측의 주장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한민국 측은 일본 측이 대한민국 측의 자료를 건건마다 부정하기 위해서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다양한 우산도 자료를 끌어 맞춰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그들의 우산도 추측에는 확실한 근거 자료도, 일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005년 3월 시마네현다케시마의 날 안을 통과했다. 경상북도는 시마네 현과의 자매 관계를 끊었으며, 10월을 ‘독도의 달’로 지정해 도지사에게 일본측의 공무원 등의 방문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조례안을 가결했다.

2012년 8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여 한일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고 이에 반발한 일본정부가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제안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고유영토인 독도를 일본 정부가 국제분쟁지역화 시키려는 의도라 판단하고 이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동해의 명칭에 관한 문제

현재 일본은 위 바다를 "일본해"(Sea of Japan)로 부르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반도일본 열도, 연해주사할린 섬둘러싸인 바다에 대한 호칭 및 명명(命名)에 대한 분쟁이 있다. 이 바다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러시아 등 4개국의 주권과 관할권이 미치는 해역으로, 이들 연안국의 영해배타적 경제 수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동해"(東海), 북조선에서는 "조선동해"(朝鮮東海), 일본에서는 "니혼카이"(日本海(にほんかい)), 러시아에서는 "야폰스코예 모레"(Японское море, 일본해의 러시아식 명칭)로 부르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 양측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 분쟁은 양측이 국내에서 사용하는 명칭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명칭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동해가 역사적으로 '동해(Oriental Sea)' 또는 '한국해(Sea of Korea)'로 불려 왔으므로 '동해(East Sea)'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은 '일본해(Sea of Japan)'가 19세기부터 국제적으로 통용된 이름이며 이를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조선동해(East Sea of Korea)'로 표기하기를 주장한다.

경제 교류

무역

문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일본 사가현이 원산지인 흑요석이 한반도(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발굴되고 있으며, 매우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7][146]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17] 무역에 있어서는 신라와 왜가 긴밀하게 통교하였다.[147] 8세기의 통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의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다.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상인도 포함되어 이들에 의한 사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공무역은 주로 사절단이 건너 와서 예물을 바치면 후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이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관된 보물 중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이 있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148]

2002년 3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간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상호 관세를 철폐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줄기로 하는 한일경제동맹의 실현을 위해, 산업계, 관계, 학계의 3자로 구성되는 공동연구회의 설치가 합의되었다. 2005년내에 실질적으로 교섭을 종료한다는 데에 일치하였으나, 그 실현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일간의 FTA가 실현된다면 인구 1.7억명, 국내총생산(GDP) 약 5조 달러의 거대시장이 출현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아시아 시장지배와 경쟁하기 위하여, 고도의 기술수준을 지닌 경제의 동맹에 의해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생각이 있다.[149]

산업

약 2000년 전에[출처 필요]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 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晩期)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150]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151] 이처럼 벼농사는 한반도를 경유한 것으로 오랫동안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벼 유전자 연구와 각종 유적에서의 출토품, 수경재배 흔적의 증거등으로부터 남쪽의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전래되고,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학설이 일본 고고학계에서의 주류가 되었다.[6] 따라서 일본의 각종 역사 교과서의 벼농사의 전래 경로도 수정되고 있다.

일찍이 가락국을 공급하였다.[12][152]

교통

한국과 일본은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발달하였다. 한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으며, 대한항공 001편도 인천에서 나리타를 거쳐 호놀룰루로 운항하고 있다. 부산발전연구원은 2009년 1월, 부산-쓰시마섬-후쿠오카(222.6 km)를 연결하는 한일 해저터널 구상을 내놓았고, 이어 한국 정부(국토해양부)는 한-일 간 해저터널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을 연구 중이라고 2010년 9월 밝혔다.[153]

한일간 항공노선
거점 도시 공항
IATA
공항
ICAO
거점 공항
이름
항공사 및 상대국 취항지
대한민국 서울/인천 ICN RKSI 인천 대한항공(15개): 가고시마, 고마쓰, 구시로, 나가사키, 니가타, 도쿄(나리타), 나고야(주부), 삿포로, 시즈오카[154], 아오모리, 아키타, 오사카(간사이), 오카야마, 하코다테, 후쿠오카
아시아나항공(20개): 도쿄(나리타, 하네다), 나고야(주부), 오사카(간사이), 후쿠오카, 센다이, 아사히카와, 미야자키, 히로시마, 구마모토, 오조라, 도야마, 하코다테, 다카마쓰, 후쿠시마, 마쓰야마, 오키나와, 시즈오카, 이바라키, 요나고
제주항공(2개): 오사카(간사이), 키타큐슈
진에어(1개): 삿포로[155]
이스타 항공(2개):삿포로[156], 도쿄(나리타)[157]
티웨이항공(1개):후쿠오카
델타 항공 :도쿄(나리타)
콘티넨탈 항공: 도쿄(나리타), 나고야(주부)
이란 항공 : 도쿄(나리타)
이집트 항공: 오사카
대한민국 제주 CJU RKPC 제주 대한항공: 나고야, 도쿄(나리타), 오사카
아시아나항공: 후쿠오카
대한민국 부산/김해 PUS RKPK 김해 대한항공: 나고야(주부), 도쿄(나리타), 도쿄(하네다), 마닐라, 방콕, 베이징, 상하이(푸둥), 오사카, 칭다오, 하노이, 홍콩, 후쿠오카, 삿포로
아시아나항공: 도쿄(하네다), 오사카, 후쿠오카
에어부산: 후쿠오카, 오사카
델타항공: 도쿄(나리타)
대한민국 서울/김포 GMP RKSS 김포 대한항공: 도쿄(하네다), 오사카(간사이)
아시아나항공: 도쿄(하네다), 오사카(간사이)
제주항공: 오사카(간사이), 나고야
코리아 익스프레스 에어: 쓰시마
대한민국 청주 CJJ RKTU 청주 대한항공: 오사카(간사이)
일본 도쿄 NRT RJAA 나리타 일본항공: 서울(인천), 부산, 제주
전일본공수: 서울(인천)
일본 오사카 KIX RJBB 간사이 일본항공: 서울(인천), 서울(김포), 부산, 제주
전일본공수: 서울(인천), 서울(김포)
일본 나고야 NGO RJGG 주부 일본항공: 부산, 서울(인천)
전일본공수: 서울(인천)
일본 도쿄 HND RJTT 하네다 일본항공: 서울(김포)
전일본공수: 서울(김포)

사회

이주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3] 역으로, 기원전 20년에 신라에서 활동한 신하 중에는 왜 출신인 자(호공, 瓠公)도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18]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19][20][21]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학술과 교육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22]516년 고안무(高安茂)[23] 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대대적으로 학자들이 건너갔다.[31][33]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수 차례 교과서 기술이나 강연회, 정치인의 발언 등에서 일본의 과거사 인식이 문제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역사교과서의 내용에 대한 반발로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2001년에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2010년에 그 결과를 발표하는 등 양국의 시각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교과서에 대한 논란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장례

장구형 무덤전라남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장구형 무덤이 발견된 것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소지도 있으나, 현재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왜의 사람이 백제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을 때 백제의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왜 본래의 무덤 양식인 장구형 무덤을 택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문화

종교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24]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25]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26][158]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28]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백제의 많은 학자와 기술자들이 일본에 파견되었다.[30]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31]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32]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33]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34]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35][36]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37]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38]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39][159][160]

602년 관륵(觀勒)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책력·지리·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161]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佛派)이자 국신파(國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162]

음악

552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음악가가 파견된 바 있다.[30]

미술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31][33] 신라에서도 579년에 불상을 보냈다.[34]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39][163][164]

과학

552년에 백제의 의사가 일본에 파견된 바 있다.[30] 성왕은 또한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각주

주해

  1.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2. 일본서기진구 황후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3. 산성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축조되는데 이를 조선식산성이라 부른다.
  4. 개원(開元)은 당 현종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유사”. 국사편찬위원회. 譯註 002 당 현종의 연호로 이때는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

출전

  1. “국가별 수출입”. 한국무역협회. 2011년 11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9월 11일에 확인함. 
  2. 김병훈 (2011).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반디출판사. 37쪽. ISBN 89-5804-089-0. 이밖에도 신라본기에는 혁거세왕 8년(기원전 50)부터 소지왕(炤知王)22년(500)까지 무려 33차례나 일본이 신라를 침범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백제와의 교류를 제외하면 고구려, 백제본기에 왜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반면 신라에 대한 왜의 침범이 무척 많아 두드러진다. 
  3. 강성현 (2005).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156쪽. ISBN 89-8435-224-1.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 
  4. 홍윤기 교수 (2006년 8월 1일). “[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 세계일보. 2009년 7월 19일에 확인함. 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原山)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晩期)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지석묘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5. 홍윤기 교수 (2009년 1월 13일). “[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 ”고 했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 시즈오카 대학 농학부의 사토 요이치로 조교수와 미국의 많은 바이오계 연구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과 한반도, 요동반도 등 극동아시아에 존재하는 벼는, 온대성 자포니카종 및 열대성 자포니카종으로 크게 2종류로 나뉘는데, 그 중 일부 유전자를 가지고 종묘군의 유전자를 확인하면 중국 동북부부터 한반도를 원산지로 하는 개량종에서는 해당 유전자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 명확해졌다. 또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의하여 분석해 보아도 일본에서의 탄화된 쌀은 기원전 4천년 정도까지 소급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증거들을 가지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벼농사가 전래되었다고 본다.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역으로 일본에서 한반도에 전래되었다는 설명이 일본에서는 유력시되고 있다. 佐藤洋一郎『稲のきた道』裳華房/『DNAが語る稲作文明』日本放送出版協会、松尾孝嶺『栽培稲の種生態学的研究』)
  7. 김병훈 (2011).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반디출판사. 47쪽. ISBN 89-5804-089-0. 특히 한반도에서 발견된 흑요석(黑曜石)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원산지가 일본 사가 지역임이 확인됐다. 
  8.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편집부 (2003). 《새문화유적지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32쪽. ISBN 89-85764-39-X. 동삼동패총 ... 또한 일본 신석기시대의 도도로끼식 토기와 흑요석 석재 등은 일본지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를 알 수 있다. 
  9. 김용운 (2010). 《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한얼사. 45쪽. ISBN 978-89-89148 32-6.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린 것이 역력합니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의 왜였을 것입니다. 즉 신라를 침범한 왜는 이즈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는 왜였을 것입니다. 
  10.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 
  11.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12. 이덕일 (1999).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세종서적. 18쪽. ISBN 89-8407-020-3. 서기 3세기 경의 정황을 전해주는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韓)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국(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철을 얻어간다. 장사지낼때에는 철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철을 두 군(낙랑군․대방군)에 공급한다." 여기서 '국(國)'이 어디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가야가 위치했던 변한일 가능성이 높다. 그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13.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근초고왕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14.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 366년)에 이뤄졌다. 
  15.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9쪽. ISBN 89-86142-81-3. 4세기말 이후가 되면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했다. 
  16. 조법종 (2007).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210쪽. ISBN 978-89-368-0359-9.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 때에는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17. 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8.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19.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20. 정윤미 (2011).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시루. 31쪽. ISBN 978-89-966493-2-8.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 
  21.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4쪽. ISBN 89-86361-55-8.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22.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720. 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 
  23.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 
  24.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25.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3). 《세계 종교사 입문》. 청년사. 229쪽. ISBN 89-7278-376-5.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26.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4쪽. ISBN 89-349-1654-0.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27.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92쪽. ISBN 89-86361-32-9.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 
  28.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720. 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29.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 
  30.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31.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720. 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32. 최범서 (2006). 《야사로 보는 삼국의 역사1》. 가람기획. 166쪽. ISBN 89-8435-241-1. 그 후 위덕왕 24년에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 · 주금사呪噤師 · 조불공造佛工 · 조사공造寺工 등 6명을 보내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33. 최용범 (2008).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48쪽. ISBN 978-89-92920-16-2. 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34.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이어서 577년에는 대대적인 학자와 승려 집단, 불상 및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건너갔고,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35.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720. 十二年... 今在百濟火葦北國造阿利斯登子達率日羅、賢而有勇。... 冬十月、紀國造押勝等、還自百濟。復命於朝曰、百濟國主、奉惜日羅、不肯聽上。 
  36. 이기영 (2000). 《한국인의 윤리사상사》. 학문사. 132쪽. ISBN 89-467-1092-6.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본왕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으며, ... 
  37.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720. 十三年... 秋九月、從百濟來鹿深臣、闕名字。有彌勒石像一軀。佐伯連、闕名字。有佛像一軀。 
  38.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6쪽. ISBN 89-349-1654-0. 약 30년 후인 비다쓰(敏達)천황 13년(584)에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은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도 부친처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소가노 우마코는 아버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라는 유언을 받은 터였다. 
  39. 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일본서기》. 720. 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40.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 · 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 
  41.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85쪽. ISBN 89-87787-79-6.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42.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87쪽. ISBN 89-86361-32-9.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조정의 제2위의 장관이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이른바 국신파(國神派)였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불교를 신봉하는 소가노 우마코에게 대립한 것이다. 
  43. 卷第廿二 推古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44. 卷第廿五 孝德天皇〉. 《일본서기》. 720. 三年...冬十月...新羅遣上臣大阿飡金春秋等、送博士小德高向黑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來獻孔雀一隻・鸚鵡一隻。仍以春秋爲質。春秋美姿顏善談笑。 
  45.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또 645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급진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당나라의 동맹국인 신라를 중앙집권화 지향의 개혁 모델로 삼아 신라 지배자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일 관계라면 일단 소홀히 다루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본서기>(고토쿠 천황 3년)에 따르면 647년에 신라의 실세인 김춘추(602∼661)가 직접 도일해 일본 귀족들에게 ‘아름답고 쾌활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백제를 없애려는 김춘추·김유신 일파로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국을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46.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 외교가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왜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수의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긴밀한 통혼 관계를 가진, 그리고 나중에 덴지(天智·재위 661∼672) 천황 으로 등극된 나가노 오에(中大兄·626∼672)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어 친백제 경향은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졌다. 
  47. 이 시기 왜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친백제 노선을 견지했다는 설과, 고토쿠 천황 중심의 친백제파와 나카노오에 황자 중심의 친신라(친당)파로 나뉘어 있었다는 설, 거꾸로 고토쿠 천황이 친신라(친당)파였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친백제파였다는 등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재석은 고토쿠 천황의 지휘 아래 이루어져 온 친신라(친당) 정책이 당의 백제 공격 결정에 의해 파탄나고, 친백제파였던 나카노오에가 아스카 천도를 단행하면서 고립된 고토쿠 천황을 실각시켰다는 견해를 주창하고 있다.
  48. 卷第廿五 孝德天皇〉. 《일본서기》. 720. 二年春三月...是歲、新羅貢調使知萬沙飡等、着唐國服、泊于筑紫。朝庭惡恣移俗、訶嘖追還。于時、巨勢大臣、奏請之曰、方今不伐新羅、於後必當有悔。其伐之狀、不須舉力。 
  49.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나가노 오에 뒤에 있는 소가씨 등의 호족들에게 백제란 ‘우리 조상의 땅’이었을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나라의 너무나 빠른 ‘친해지기’는 왜국 지배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649∼651년에 당나라 관복 제도와 궁중의례 등을 빨리 받아들인 신라의 사절인 사찬 지만(知萬)이 651년 왜국에 오자(<일본서기> 고토쿠 천황 백치 2년) 왜국 지배자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신라 침공’까지 들먹였다. 
  50.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三年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653) ...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 
  51. 卷第廿三 舒明天皇〉. 《일본서기》. 720. 三年...三月庚申朔、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 
  5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 
  53.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76쪽. ISBN 89-86361-55-8. 『일본서기』는 “서명기(舒明紀) 3년(631),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고 적고 있다〔『일본서기』의 서명기(舒明紀) 3년은 백제 무왕(武王) 32년으로, 이때는 아직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지 않았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질(人質)’이라는 의미의 ‘질(質 )’이다. 「백제본기」도 661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고 기록한다. 왜에 있던 부여풍이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역시 ‘질(質)’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백제 왕자 부여풍은 631년에서 661년까지 30년간 왜에 인질로 있었다. 
  54. 卷第廿七   天智天皇〉. 《일본서기》. 720. 四年…十二月…秋八月。…遣達率憶禮福留。達率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 
  55. 卷第廿七   天智天皇〉. 《일본서기》. 720. 六年…十一月…是月。築倭國高安城。讃吉國山田郡屋嶋城。對馬國金田城。 
  56.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46쪽. ISBN 89-86142-81-3.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시마(対馬) · 이키(壱岐)와 북큐슈의 각지에 사키모리(防人,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 북규슈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을 축조하였다. 또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의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에 조선식산성6 )이라 불리는 산성을 축조하고 북큐슈에는 군정기관으로서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였다. … 6) 산성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축조되는데 이를 조선식산성이라 부른다. 
  57. 박노자 (2009년 6월 12일).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한겨레21 제764호.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원효와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58.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二年...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2년(703)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 
  59. 박노자 (2009년 7월 24일).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한겨레21》 (한겨레신문사). 2009년 7월 27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0. 홍윤기 교수 (2006년 7월 25일).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1. 홍윤기 교수 (2006년 7월 25일).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오사카(大阪)는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2. KBS역사스페셜 (2003). 《역사스페셜6》. 효형출판. 16쪽. ISBN 8986361841. 다자이후는 신라와 당나라 등 외국 사신들이 입국할 때 외교 절차를 거치던 곳이다. 『속일본기』에는 이곳에 온 신라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낸 몇 차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신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믿음이 없고 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8세기, 신라와 일본 사시의 외교 마찰은 심각했다. 신라로 간 일본 사신들도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수 차례, 서로 쫓아내고 쫓겨나는 외교분쟁이 끊임없이 불거졌다. 
  63. 일연 (1281). 〈권2 기이 효성왕〉. 《삼국유사》. 開元十年壬戌十月。始築關門於毛火郡。今毛火村。屬慶州東南境。乃防日本塞垣也。周迴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掌員元真角干。開元二十一年癸酉。唐人欲征北犾。請兵新羅。客使六百四人來还國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 (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 (毛火村)으로 경주 (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 (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 5자 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 (元眞) 각간(角干) 이었다. ) 
  64.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冬十月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21년(722) …겨울 10월에 …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 도적들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65.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三十年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秋九月 命百官會的門 觀射車弩 (30년(731)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66. 김부식 (1145). 〈본기 권9 경덕왕〉. 《삼국사기》. 元年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67. 김부식 (1145). 〈본기 권9 경덕왕〉. 《삼국사기》.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12년(753)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68. KBS역사스페셜 (2003). 《역사스페셜6》. 효형출판. 18쪽. ISBN 8986361841. 일본이 762년을 침공 원년으로 삼은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다. 당시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당이 ‘안사(安史,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으로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계속된 난으로 당은 국제 정세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여력이 없었다. 바로 이때 신라를 공격한다면 신라의 우방인 당나라도 돕지 못할 것이라는 일본 나름의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일본이 신라를 침공해야 했던 내부적인 원인이 있었다. 일본 정계를 흔들던 한 인물의 야망 때문이었다. 
  69. 서영교 (2009). 《신라인 이야기》. 살림. 204~205쪽. ISBN 9788952210739.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파병 규정(행군식)을 만들고 여러 지방에 명령을 내려 3년 동안 500척의 병선을 건조하도록 하는 등 신라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761년에는 미노와 무사시 두 지역의 소년 40명에게 신라말을 배우게 했고, 그 후에도 여러 지방에 절도사 체제를 강요하고 전투에 대비하도록 했다. 
  70.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55쪽. ISBN 89-86142-81-3. 대외적으로는 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 
  71.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61쪽. ISBN 89-86142-81-3. 정창원 … 특히 신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 신라의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예를 들면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 다양하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 
  72. 박복원 (2004). 《일본정보뱅크》. 백산출판사. 136쪽. ISBN 8977396271. 그러나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 
  73. 김부식 (1145). 〈본기 권10 애장왕〉. 《삼국사기》.  哀莊王… 四年 … 秋七月 與日本國 交聘結好 (애장왕…4년(803) 가을 7월에 일본국과 서로 사신을 교환하여 예방하고 우호를 맺었다.) 
  74. 김부식 (1145). 〈본기 권10 애장왕〉. 《삼국사기》.  哀莊王… 五年 … 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黄金三百兩 (애장왕…5년(804) …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75. 김부식 (1145). 〈본기 권11 헌강왕〉. 《삼국사기》.  憲康王…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 明珠一十箇 (헌강왕 8년(882)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76. 김성호, 김상한 (2008). 《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맑은소리. 262쪽. ISBN 9788980502219. 그 후 『일본후기』연력 18년(799) 5월 29일자로 일본은 “사신의 신라 파견을 정지했다(停遣新羅使).” 당시 일본은 일본을 상국으로 받드는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대등외교를 표방하는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런데도 「신라본기」엔 제40대 애장왕 4년(803)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했으며, 제43대 헌강왕 8년(882)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왜 황금을 받쳤겠나. 따라서 신라사의 권위 신형식이 나일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235)는 주장은 신라와 일본의 쌍방기록을 대조하지 않고 「신라본기」만 본 아전인수다. ... 235) 申瀅植, “統一新羅의 對日關係”, 『統一新羅史 硏究』, 三知社, 1990 
  77. 허홍범 (2006). 《군함 이야기》. 좋은책만들기. 82쪽. ISBN 8989222931.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78. 일본측이 대조선 무역에서 사용하던, 조선 정부가 일본의 통교자에게 발급해 준 도장. 도서는 도장의 면에 실명이나 성명을 새긴 구리로 된 도장이다. 이를 받은 일본인을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79. 조선에 오가는 일본인이 쓰시마 도주 소 씨에게서 받은 도항증명서. 1436년부터 실시되었으며,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대조선 통교자는 문인을 지참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또한 조선 연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에 대해서도 쓰시마 소 씨의 문인이 발급되었다. 이로 인해서 조선으로 오는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할 수 있었고, 한반도 남해안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80.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5쪽.
  81. “박정희정부 외교적 노력…'굴욕회담' 인식 고쳐질 수도”. 한국일보사. 2005년 8월 26일. 2011년 8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82.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경향신문. 1975년 3월 17일. 
  83. “秘錄 韓國外交<29> : 政府樹立 직후 ⑪”. 경향신문. 1975년 3월 19일. 
  84. 서중석, 《비극의 현대 지도자: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2), 169쪽
  85. 조갑제 (2009년 3월 22일).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조갑제닷컴. 1965년 8월 25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망을 통해 특별 담화문을 19분간 읽어 내려갔다. 
  86. 조갑제 (2009년 3월 22일).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조갑제닷컴. 
  87. 조갑제 (2009년 3월 22일).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조갑제닷컴. 1965년 8월 26일 아침, 정부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윤치영 서울시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衛戍令(위수령)을 발동했다. 
  88. 조갑제 (2009년 3월 22일). “학생들이 정치깡패의 자리에 들어섰다”. 조갑제닷컴. 박 대통령은 27일에는 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워 윤천주 문교부 장관과 申泰煥(신태환) 서울대 총장을 경질하고 후임에 權五柄(권오병) 법무부 차관과 劉基天(유기천) 교수를 임명했다. 
  89. “오늘부터 韓日國交正常化”. 경향신문. 1965년 12월 18일. 
  90. “<한일강제병합100년> ⑫북한은 어떻게 보나”. 네이버 뉴스 (연합뉴스). 2010년 8월 17일. 
  91. “박정희 정권 "독도도 사실상 포기". 시사포커스 폴리뉴스. 2005년 1월 18일. 17일 정부가 공개한 한일협정 문서에서는 '독도'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상 안건이 아닌 '독도' 관련 '제3국 조정안'이라는 대안을 내놓아 한일간 협상거리, 분쟁지역거리로 전락시켰다. 결국 한일간 일체의 논의대상이 될 수도 없는 분명 우리땅인 독도를 '제3국 조정에 맡겨버리는 남의 땅'으로 만든 것이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92. ‘독도문제’, 밀약파기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93.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 `독도밀약` 있었다
  94. “한일문서로 밝혀진 박정희 정권 비화 ‘전모’”. 2011년 11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5일에 확인함. 
  95.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96. "한일협정 뒷거래 박 정권은 매국정권 5년간 일본기업에 6600만불 제공받아"
  97. “日誌1年”. 경향신문. 1966년 12월 17일. 
  98. “美 “독도 한일 공동소유하라", 박정희 "있을 수 없는 일". 프레시안. 2005년 4월 21일. 
  99. [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21>대륙붕을 지켜라 :: 네이버 뉴스
  100. 이는 일본에 의한 강제 침략을 공식석상에서 주장하던 이승만, 박정희와도 대조적이다.
  101. 대한민국과일본국간의어업에관한협정비준등 위헌확인, 헌법재판소 결정문, 99헌마139등, 2001년 3월 21일.
  102. 독도본부 -제성호
  103. 前 해수부장관 "新한일어업협정 수정, 실효성 없어"
  104. <데스크 시각>현명한 분노 표출법
  105. 한·일관계 의식 ‘우려타령’만
  106. 진중권 (2008년 3월 2일). “삼일절, 친일절 되다”. 프레시안. 
  107. 윤경민 (2008년 9월 6일). “정부, 일본에 독도 기술 시정 요구”. YTN. 200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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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 이우탁, 최이락 (2009년 12월 25일). “日'독도영유권' 고수..정부 '유감' 표명(종합)”. 연합뉴스. 2009년 12월 25일에 확인함. 
  130.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131. “한국갤럽 설문조사”. 
  132. "9일부터 일본인 무비자 입국 정지"… '韓 입국금지' 일본에 맞불”. 
  133. “청와대 "일본에만 감정적 대응 아니다" 직접 반박”. 
  134. “수출규제 역풍 맞은 日…‘불화수소 1위’ 스텔라케미파, 영업익 급감”. 
  135. [수출규제 역풍 맞은 日…‘불화수소 1위’ 스텔라케미파, 영업익 급감 “日언론 "한국, 맹렬한 스피드로 소재·부품 脫일본 실현"”] |url= 값 확인 필요 (도움말). 
  136. ““G7에 한국 왜 부르나”…日 ‘트럼프의 초대장’에 심기 불편”. 
  137. “연혁 및 관할지역”.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2009년 4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6월 21일에 확인함. 
  138. “12國大使任命의결”. 동아일보. 1967년 9월 16일. 國務會議는 16일 駐美•駐英•駐日•駐獨大使를 포함해서 12개國駐在大使를 새로 任命키로 議決했다. 이날 議決된 大使級의 大幅移動은 朴大統領의 決裁가 나는대로 月內에 發令케 되었다. … ▲駐日 大使〓嚴敏永(52•參議員•內務長官) 
  139. 재임 중 사망
  140. 대사관 안내 - 주 대한민국 일본 대사관 홈페이지
  141. “駐韓日大使에 가네야마內定”. 동아일보. 1968년 4월 5일. 
  142. The History of Dokdo (pdf)(English) (Japanese) Archived 2013년 10월 29일 - 웨이백 머신 North Asian History Foundation; direct link to texts provided separately as finding it is problematic although the following government page refers to the NAHF home page.
  143. Dokdo Issues Archived 2010년 7월 27일 - 웨이백 머신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of Korea; mostly visuals and multimedia with scanty text information if any
  144. The Issue of Takeshima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145. “10 Issues of Takeshima, MOFA, Feb 2008” (PDF).  p. 4; Article 2, para. 2: "Such description... rather reminds us of Utsuryo Island."para. 3: "A study... criticizes... that Usan Island and Utsuryo Island are two names for one island."para. 4: "that island does not exist at all in reality."
  146.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편집부 (2003). 《새문화유적지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32쪽. ISBN 89-85764-39-X. 동삼동패총 ... 또한 일본 신석기시대의 도도로끼식 토기와 흑요석 석재 등은 일본지역으로부터 들어오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를 알 수 있다. 
  147.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55쪽. ISBN 89-86142-81-3. 대외적으로는 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 
  148.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61쪽. ISBN 89-86142-81-3. 정창원 … 특히 신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 신라의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예를 들면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 다양하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 
  149. 오코노기 마사오 (小此木政夫). 〈朝鮮半島〉. 《현대용어의 기초지식(現代用語の基礎知識)》 (일본어). 지유고쿠민샤(自有国民社). 513쪽. ISBN 978-4-426-10128-2. 
  150. 홍윤기 교수 (2006년 8월 1일). “[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 세계일보. 2009년 7월 19일에 확인함. 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51. 홍윤기 교수 (2009년 1월 13일). “[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세계일보. 2009년 7월 8일에 확인함.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 ”고 했다.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52. 진수 (3세기). 〈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153. 김민철 기자 (2010년 9월 20일). “정부 '3大 해저터널(韓~中 韓~日 목포~제주)' 검토”. 조선일보사. 
  154. “대한항공, 인천~시즈오카 노선 신규 취항”. 매일경제. 2009년 6월 4일.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155. “진에어 인천-삿포로 노선 운항 시작”. 파이낸셜뉴스. 2011년 7월 22일. 
  156. “이스타항공, 인천~삿포로 정기편 취항”. 연합뉴스. 2011년 5월 5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57. “이스타항공, "도쿄 왕복항공권이 9만9천원". YTN 뉴스. 2011년 5월 24일. 2012년 1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1월 20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158.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92쪽. ISBN 89-86361-32-9.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 
  159.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 · 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 
  160.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85쪽. ISBN 89-87787-79-6.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161. 卷第廿二 推古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162.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87쪽. ISBN 89-86361-32-9.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조정의 제2위의 장관이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이른바 국신파(國神派)였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불교를 신봉하는 소가노 우마코에게 대립한 것이다. 
  163.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 · 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 
  164.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85쪽. ISBN 89-87787-79-6.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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