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김대중 납치 사건(金大中拉致事件)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도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누군가의 섭렵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편집]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4만의 큰 표 차이로 석패했는데, 이 대선 전후 기간 동안 김대중에게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다. 1971년 1월엔 동교동 자택 마당에 담배갑 은박지로 싼 장난감 권총용 화약에 배터리가 연결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처음엔 김대중의 조카인 김홍준(당시 15세)이 장난으로 한 것으로 자백하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 되는듯 싶었다.[1] 그러나 김홍준이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한 것으로 이내 진술을 번복하자 경찰 수사는 미궁에 빠졌으며 결국 김홍준은 검찰의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여 법원으로부터 석방 판결을 받는다.[2]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해 5월엔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으며 서거하기 전까지도 이때의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음모로 지목했다. 일련의 사건 사고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의 치료차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일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3] 유신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 규탄하였고 19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의장으로 취임해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1972년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전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답방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남북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10월 유신이 있기 전에도 정부에서 북한에 먼저 통보를 해주게 된다.[4]

사건 경위[편집]

워싱턴에서 미주 한민통을 조직한 김대중은 일본 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나중에 "배를 탈 때 다리에 무게추를 달았다"라고 증언했다.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 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을 서울의 자택 앞에서 풀어주었다.

사건 이후[편집]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직원이 납치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의 양해 없이 김대중을 납치해 한국으로 이송한 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973년 8월 23일에 열린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부기관의 관여 혐의, 주권 침해 여부, 김대중의 재도일(再渡日), 일본의 수사 상황 등을 정부 측에 물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이사지 법무성 장관은 "나의 제6감으로 볼 때 이 나라 비밀 경찰의 소행이 틀림없다"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은 사건에 대해 단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 정부의)해명 이후 일본의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이 사건으로 납치사건에 대해 동아일보를 비난한 논조를 올린 요미우리 신문은 대한민국 문교부로부터 1973년 8월 26일부로 요미우리 신문 서울지국에 대한 전면 폐국 명령을 받았다(사건이 종결된 후 요미우리 신문 서울지국은 1980년 1월 15일에 다시 개국하게 된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73년 8월 25일 한국 대사관의 이상진 정무담당참사관을 통해 '일본 국회 등의 논의나 신문의 보도 등에서 한국 정부의 직원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듯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다나카 법무성 장관은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매우 괘씸한 변명이다"라고 지적하며, '한국 정부의 그러한 태도는 우리 국회에 대한 중대한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주일공사 김재권은 주일 대사관 일등 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김대중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직접 납치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행동대원’은 젊은 말단직원들이 아니었다. 당시 직급으로 윤영로와 한춘은 이사관인 2급 갑, 홍성채·김동운·유영복은 부이사관인 2급 을, 유충국만 서기관인 3급 갑으로 모두 상당히 고위직에 이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5] 

김대중의 납치과정에서 가장 의혹을 받은 인물이 양일동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외교관 여권을 전달받고 출국한 것으로 밝혀졌다.[6] 양일동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평소 왕래가 있던 김대중 납치 현지 책임자 김재권 공사가 양일동에게 끈질기게 접근했다. 양일동이 김대중에 비판적인 입장인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달라붙었다. 양일동이 퇴원하여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실에 투숙한 것은 김재권이 방 세 개를 얻어 그 중에 2212호실을 양일동에게 주고, 나머지 방에는 납치범들의 ‘거사용’으로 사용하였다. 양일동이 납치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엄청난 사건을 목격하고도 40분 내지 1시간 후에야 그것도 일본 경시청이 아닌 김재권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는다. [7]

정보부원들은 원래 양일동이 묵는 2211호의 옆방인 2210호실을 예약했는데 마침 앞방인 2215호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방에 나눠서 요원들이 대기했다. 그중 2215호에 우연히 이북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게 된 것은 복도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통일당 김경인 의원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호실에 있던 납치대원들이 급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호실에 있던 감시조가 뒤처리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시조는 2210호실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와 버렸다. 너무나 어설펐지만 어쨌든 납치는 성공했고, 중앙정보부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도쿄를 빠져나와 무사히 공작선 용금호가 대기중인 오사카에 도착하여 김대중을 국내로 실어 보냈다.

이희호는 양일동이 일본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김대중에게 알리며 그를 너무 믿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양일동 씨, 김경인 씨 오늘 일본으로 떠난대요. 경인 씨가 (김)종충 씨 전화번호 가지고 갔으니까 연락될지 모르나 양 씨도 요즘 당신 말 많이 하고 있데요. 그러나 어느만큼 믿느냐는 생각할 필요 있어요. 양 씨도 오늘의 현실을 보고 당신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니까 생각하는 거지, 이 나라 생각보다는 자기 이해를 더 앞세워 생각함으로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73년 7월 13일) 그리고 호텔에서의 행동에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희호의 회고록을 들춰보자. "나는 신문 보도를 통해 김 의원과 양 총재가 납치 당시 그곳에 있었던 것을 알고 매우 섭섭했다. 왜 곧 호텔 측에 알려서 괴한이 남편을 납치해 갔다고 전하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소리 질러 옆방에 들리도록 못했을까." [8]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9]

이어 1973년 9월 5일, 경시청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 야당 측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 측은 "지금은 진상 규명이 첫째로, 현 단계에서는 주권 침해라고 볼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한국과의 관계를 변경할 생각은 없다"라고 답변했다.

1973년 9월 17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 수사 자료》를 발표하고, "용금호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으나, 현재까지 김대중 납치 용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라고 일본 정부에 회답했다. 이어 9월 21일에는 일본 국회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 불신임안의 제출 이유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포함되었다.

1973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납치 사건에 대한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의 관여 혐의를 인정하고 사의를 표명하려는 의향을 표명했으며,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다만 이것은 김동운 일등서기관이 범인이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다음날에는 김종필 대한민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이듬해인 1974년 8월 6일 일본 수사당국은 수사 보고서를 발표해 김대중 납치 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으로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지목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4년 8월 14일에 그의 혐의에 대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일본 당국에 통보했다. 다음날에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본에서 출생·성장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되어 사망했으며, 시나 에쓰사부로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9월 19일 일본 정부의 특사로 저격 사건의 진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1974년 10월 25일에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수사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며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 요청에 따라 1975년 7월 22일에 수사결과에 대해 다시 회답하면서, 사건 후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어 1974년 8월 14일에 수사를 중단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했으며, 이후 도쿄에서 그의 언동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보여 공무원의 지위를 박탈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9]

일본 정부는 이러한 회답에 1975년 7월 23일미야자와 기이치 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의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다음날 귀국했다. 귀국 즉시 미야자와 외무성 장관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결말이 지어졌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1987년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인터뷰를 한 신동아 10월호의 인쇄 작업을 안기부가 막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락의 인터뷰가 한일간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동아 기자들은 이에 항의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고 동아일보 측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여 유력 외신들에게도 이 사건이 보도되는 등 파문이 확대되었고 결국 안기부 측이 방침을 철회하면서 일단락 되었다.[10]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 《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
  • 《김대중 납치사건 진실규명》,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7년. (이곳이곳 에서 문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주[편집]

  1. 爆發物사건 金候補「15세조카」拘束 동아일보 1971.02.11
  2.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金弘準군 釋放결정 동아일보 1971.02.13
  3. 動靜 동아일보 1972.10.11
  4. 박정희 정부, 유신선포 전 북에 통보 한겨레 2009.09.24
  5. 한홍구.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 혼돈 속의 실행 준비》. 
  6. 김경재. 《'김대중 납치사건과 중앙정보부', <김대중납치사건의 진상>, 291쪽.》. 
  7. 김상웅. “후광 김대중 평전/[13장] 토막살해 수작음모 도쿄납치사건 [87회] 토막살해 위해 배낭 등 준비”. 
  8. 김택근. “DJ 납치, 박정희가 직접 지시했다”. 
  9. 한겨레.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자기 손엔 피를…”. 
  10.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4> 1987년 민주화 물꼬 트다 동아일보 201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