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조봉암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진보당사건(進步黨事件) 또는 조봉암사건(曺奉岩事件)은 1959년 7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여 조봉암을 사형 집행하였으나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사건이다.[1]

사형 판결까지의 전개[편집]

1952년 8월 5일의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9만 7504표(11.4%)를,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려 216만 3808표(30.0%)를 얻은 조봉암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해 가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1]

1956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이 틀림없다. 이러한 위험분자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조봉암과 뚜렷한 대립관계에 있었다.[2]

1958년 1월 9일 서울시 경찰국은 “김달호, 박기출, 조규희, 이동화 등이 사회주의제도로 개혁하고 정부를 변란 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북한 괴뢰집단과의 협상으로 무력재침의 선전구호인 평화통일공작에 호응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사건 인지보고’를 하였다.[1]

1958년 1월 12일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앞두고 서울시 경찰국은 조규희, 윤길중, 김달호, 이동화 등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였다.[1]

1958년 1월 13일 조봉암은 자진출두 도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1]

1958년 1월 14일 이승만은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다. 이런 사정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라고 말했다.[2]

1958년 10월 25일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이승만은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말도 안 되며 그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2]

1959년 7월 30일 조봉암이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기각되었다.[3]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3]

사후[편집]

대법원 재심 무죄 판결 (2011)[편집]

2006년 7월 4일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3]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국가에 권고했다.[3]

2008년 8월 조봉암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였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진보당의 당수로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죽산 조봉암(1899~1959·사진)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2년 만이었다.[4] 대법원은 당시 법원의 법률적용이 잘못됐고 유일한 증거인 관련자의 자백 또한 감금과 약물투여 등으로 인한 것으로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명예회복 활동 (2011~2019)[편집]

2011년 무죄 선고 직후, 조봉암의 문중은 국가보훈처조봉암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지만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1940년 1월 매일신보에 실린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광고와 이듬해 12월 같은 신문에 실린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휼병금(장병 위로금) 150원을 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그 이유였다. 2015년 낸 재심 신청도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자체 심의를 했다며 유족 측에 의견을 알려왔지만 역시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2019년 조봉암의 손녀 이성란씨는 "유족들은 더는 서훈 신청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왜곡된 신문에 나온 단편적인 한 줄짜리 기사를 가지고 친일 행위로 매도하는데 이 상황에서 서훈 신청을 또 하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오히려 누가 되는 행위라고 본다"고 질타했다.[5]

논란[편집]

구소련 외교문서 발견 (2020)[편집]

최근에는 조봉암에 대한 김일성의 육성 기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며 논란이 되고 있다.[6] 2020년 국민대학교 선임연구원인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한국명 이휘성)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서 구소련 외교문서를 발견했다. 이 문서에는 1968년 9월 12~13일 북한을 방문한 드미트리 폴랸스키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 부의장이 김일성과 나눈 얘기가 기록되어 있었다.[7]

  • 이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은 "그(조봉암 )는 우리에게 해당 임무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조선노동당) 정치국에서 이 편지를 토론했고, 다른 동지들을 통하여 그(조봉암 )에게 연결체가 될 수 있는 합법 정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고 폴랸스키에 밝히고 있다.[7]
  • 이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은 "조봉암 은 이승만에 맞서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조봉암 )는 우리의 조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조봉암 )가 이승만 정권의 장관(농림부 장관)이라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소련 측에 털어놓았다."[7]
  • 이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조봉암 측에 선거자금을 건넸다는 사실도 소련 측에 밝히고 있다. 김일성은 "대선 한두 달 지나서 어쩌면 그 이전에 미국은 우리가 조봉암에게 선거운동을 위해 돈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다만 김일성은 자금의 구체적 액수는 소련 측에 밝히지 않았다.[7]

이 문서에 관하여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문서에 나타난 조봉암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아주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으로 본다면 정치가로서 대담한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의 국내외 상황에 비추어 분명히 위험하면서도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며, 조봉암이 ‘간첩’이 아닌데도 ‘간첩’으로 조작해 죽였다는 이른바 법살론(法殺論)을 반박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8]

하지만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1959년의 대법원 판결과 거기에 따른 사형집행이 정당했다고 단정하자는 뜻은 아니다. 당시 검찰의 공소 내용에 구소련의 기밀문서가 기록해 놓은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자연히 대법원 판결도 이 사실은 다루지 않았다. 검찰은 물론 법원도 이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이르게 한 판결이 정당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문명국가 또는 법치국가에서 국민은 누구나 법원에서 입증된 범죄 사실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지 입증되지 않은 추론에 의해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8]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