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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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사건 김변호인 열변 <독립신보> 1946.10.25
"역사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불행히 영어(囹圄)의 이슬이 될지라도 여러분은 안심하기 바라며, 정의는 끝까지 살아 후세에 위폐 인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판명될 것을 확신하여 주기 바란다."
임경석, ‘위조지폐’ 사건의 진실 다툰 조선 변호사 김용암
임경석, 냉전시대 명변론의 대가는 처절했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精版社 僞造紙幣 事件)은 1946년 5월 미군정조선공산당원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고 발표한 사건으로, 학술적으로는 조작된 사건이며 사실상의 사법살인임이 밝혀졌다.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재판부가 판결문을 조작하여 유죄로 만든 사실이 입증되었다.[1] 피고인들이 전쟁 발발 때 학살당한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사법살인’이라 볼 수 있다.[2] 1기 진실화해위원회 시기에도 증거물 중에 기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으나,[3] 진실화해위원회는 본래 각하나 진실규명불능의 경우 이유를 명시해 줘야 함에도 해당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유가족에 대한 통보 없이 조사하지 않았다.[4] 학계와 언론계, 시민사회에서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릴지 주목하고 있다.[5]

정판사 입주 이유 및 정세[편집]

김철수파의 근택빌딩(정판사) 매입[편집]

조선공산당이 근택빌딩(정판사)에 입주한 이유는 김철수 회고록 <지운 김철수> 등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김철수 회고에 기반한 임성욱의 박사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의 내용이다. 이 논문의 지도교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반병률이었는데 반병률은 <남한에 남은 사회주의 항일혁명가 김철수>라는 책도 낸 적 있는 대표적 김철수 연구자이다. 반병률에 따르면 “일제시대부터 민족 중심의 통합을 계속 주장해온 김철수는 좌우합작 등 남한의 현실을 감안한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지만,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했던 박헌영 계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헌영 중심으로 공산당이 재건될 움직임이 보이자 ML계들은 박헌영의 재건파에 맞서기 위해 장안파와 공동전선을 취하는 한편 김철수를 중심으로 별도의 당을 조직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김철수의 친동생인 김광수를 비롯한 박낙종, 송언필도 김철수에게 공산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김광수, 박락종, 송언필은 당시 우수한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던 근택빌딩을 건물주인 일본인(치까자와 시게루(近澤茂))에게 20만원을 주고 정식으로 문서를 받고 매입하여 당의 사업을 위해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1926년 4월 일본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 『대중신문(大衆新聞)』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6월 5일 창간하였고, 이후 귀국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한 일명 ML당의 간부급 인물로서, 모두 신문 등 언론을 통한 당 사업의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ML계의 제안을 김철수는 당의 분열을 우려하여 거부하였으며, 근택빌딩도 당에서 쓰도록 내주었다.[6]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김철수의 친동생인 김광수, 박낙종, 송언필이 김철수를 중심으로 공산당을 만들기 위해 근택빌딩(정판사)을 매입했다. 박낙종, 송언필은 이후 정판사 사건의 피고인이 된다.

근택빌딩(정판사)을 고른 이유는 김광수, 박낙종, 송언필 세 사람 모두 1920년대부터 언론인이라 신문을 인쇄하기 위해서였다. 근택빌딩은 치카자와 가문의 인쇄 및 제본, 도서 출판업 등 사업 확장을 통해 성장한 사설 인쇄소 겸 출판사였다.

흔히 박헌영파가 근택빌딩(정판사)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근택빌딩(정판사)을 산 것은 김철수파가 박헌영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김철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다.

김철수는 박헌영과 대립하였다. 김철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박헌영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출신이었다. 김철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립인 김립 피살 사건, 자유시 참변 등을 직접 겪었다. 또한 김철수는 스탈린이 독립운동가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우고 한인을 이주시킨 것을 대단히 비판하였다.

김철수는 광복 후 소련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김철수는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독립을 위해 소련을 이용할 뿐이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김철수는 좌우합작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이후 좌우대립이 격화되자 이에 가담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한다. 해방 후 혼란상을 거치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죽었는데, 김철수는 유명한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이승만 정권의 좌익 탄압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김철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승만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김철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고 대한민국에 남아 건국훈장을 받는다.

근택빌딩(정판사)은 박헌영파가 아닌 김철수파가 매입해서 김철수에게 사용하라고 했는데 이후 김철수가 당 차원에서 사용하라고 내준 것이다.

정판사 사건의 피고인 중 박낙종, 송언필은 김철수와 1920년대 독립운동할 때부터 3차 조선공산당을 같이 했으며 해방 이후 박헌영과 대립하는 ML파였다.

독립운동가 박낙종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독립운동가 송언필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김철수의 동생 김광수는 박낙종, 송언필과 근택빌딩을 매입했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김철수. 조선공산당에 근택빌딩을 내주었다. 반박헌영파, 반중앙파, 대회파에서 좌우합작 운동에 전념했다.

송언필은 해방 직후 주도적으로 김철수에게 공산당 창당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헌영 중심의 공산당이 만들어지자 한참동안 입당하지 않았다.

박락종은 1945년 10월 경, 송언필은 1946년 2월 경, 신광범은 1946년 1월에 입당하였다.[7]

박낙종은 근택빌딩에 입주하여 근택인쇄소의 이름을 정판사로 바꾼 뒤 사장으로 취임한다. 정판사는 일제강점기부터 근택빌딩에서 일해 온 인쇄공들을 그대로 재고용한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정판사에서 발행된다. 《해방일보》의 사장은 권오직, 편집인 겸 주간은 조일명이었다.

박낙종이 먼저 근택빌딩에서 근무했으며, 상당 기간 이후 정판사 사건의 또다른 피의자 이관술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본부가 입주하기 시작했다.[8]

당시 정세와 피의자들의 행적[편집]

정판사 사건이 발생할 당시는 좌익에 불리하고 우익에 유리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던 상황이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 등 좌익에 불리한 오보가 잇따랐다. CIC가 조봉암의 편지를 탈취해서 신문에 발표한 조봉암 편지 사건도 발생했다. 한편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우익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게 했다.[9]

이후 사건의 피의자가 되는 조선공산당의 이관술, 박낙종, 권오직, 송언필, 신광범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이관술은 이재유 그룹, 경성콤그룹을 이끌면서 신출귀몰한 행보로 신문 보도도 많이 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조직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에 이관술은 중도우익성향의 단체인 ‘선구회’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렸다. 김일성, 김규식, 김원봉보다 높은 순위였다.

'변장의 달인', 그리고 잔혹한 고문을 끝까지 이겨낸 이들에게 붙는 별명인 '고문강자'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이관술. 당대에는 민족 지도자로 불리던 최고 인기 정치인이었다.
이관술의 가장 친한 동지인 이재유는 '당대 최고의 혁명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로 불리는 독립운동가이다. 이재유는 이관술과 2년 넘게 동거했으며, 옥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버티며 이관술이 달아날 시간을 충분히 벌어주었다.

안재성에 따르면 1930년대부터 해방 직후까지 대중에게는 오히려 박헌영보다는 일제 경찰로부터의 신출귀몰한 탈출로 일제강점기 신문에 항상 보도되었던 이관술이 더 유명했다고 한다. 이관술은 이재유에게서 변장법을 배워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을 터득, 해방이 되기까지 왜경을 농락한다. 잠행 시기의 이관술의 행적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

홀현했던 이관술 미궁에 잠영. <동아일보> 1937.7.23.
1937.7.23. <조선일보> ‘이재유 일당 이관술 돌연 경성에 출현, 여의도서 발견…’
이재유 사건의 거두 이관술 출현설. <매일신보> 1937.7.23.

다음은 이관술의 동생인 이순금이 이관술의 행적에 대해 쓴 글이다.[10]

그는 항상 말하였다. "정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음은 가장 옳은 죽음이며 죽음을 각오한 때에는 고난도 쓰라림도 무서운 총칼도 다 극복되는 것이며 용감한 행동을 행할 수 있다." 과연 그렇게 투쟁하였으며 그 행동은 말과 조금치도 틀림없이 일치하였다.

1941년 정월에 오빠는 드디어 놈들의 손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야만과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주지 않은 것은 그와의 관계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감옥 투쟁 속에서 거의 죽게 되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되었다.

그의 건강은 참으로 위독하였다. 누가 보든지 절망적이었다. 그는 결심하였다. 어떻게든지 살려고, 조선민족해방 투쟁에 좀 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지금 죽는다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겠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는 또다시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이때는 전시 계엄령 상황으로서 지하생활이 가장 곤란한 어마어마한 때였다. 솥땜장이, 남의 잔심부름꾼! 이런 가지가지의 고생을 하면서 혁명운동을 여전히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투 속에서 8.15 해방이 닥쳐왔다.

— 이순금

이관술이 병보석으로 석방된 것은 1943년으로 3년 가까이 고문에 시달렸으며 고문실에서 물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폐병으로 피를 토해서 병보석되었다. 이관술은 장난기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관술 인터뷰를 보면 고문실에서 커피를 물고 있다 뱉었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했는데, 실제로는 피를 자주 토했고 피가 대량으로 쏟아져 수건을 붉게 적실 정도였다.[11]

독립운동가 권오직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권오직의 형은 6.10 만세 운동 지도자인 독립유공자 권오설이다.

권오직은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 적발되어 옥사하자 일제가 고문의 흔적을 남추기 위해 철체관으로 내보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권오설의 동생으로 본래 권오설과 같이 화요파 출신인데 일제 말기에는 다른 파벌인 이재유 그룹이관술이 이끄는 경성콤그룹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박낙종, 송언필은 김철수와 3차 조선공산당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신광범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 출신들은 파벌이 달랐는데 이관술, 권오직은 경성콤그룹계였고,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은 비경성콤그룹계였다. 박헌영은 독립운동을 더 치열하게 했다는 이유로 경성콤그룹계 위주로 요직에 등용했다. 이에 비경성콤그룹계는 박헌영과 마찰이 있었다.

나머지 피의자 김창선, 김상선, 김우용, 박상근, 정명환, 홍계훈은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인쇄소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부터 근택인쇄소 직원이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이 자신들이 일하던 근택빌딩에 입주하여 근택인쇄소를 정판사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들을 재고용하자 직장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해 1946년 2월 경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뚝섬 위폐 사건[편집]

일제 패망 시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은 불법 조선은행권 인쇄를 남발하였는데 근택인쇄소에 인쇄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조선은행권은 원래는 일본에서 제조하여 반입하다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했다. 그런데 일제 패망 시 조선총독부는 퇴각자금으로 사용하려고 엄청난 양의 조선은행권을 불법 인쇄하게 되는데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사설 인쇄소까지 동원한 것이다. 이 때 근택인쇄소 인쇄공 김창선은 위폐를 인쇄할 수 있는 징크판을 빼돌린다. 이후 징크판 일부를 배재룡, 랑승구, 랑승헌 등 뚝섬위폐단에게 팔아넘긴다. 김창선은 근택인쇄소 직원이었으니 조선공산당의 근택빌딩 입주 후 정판사 직원이 된다. 김창선은 징크판을 다시 한 번 팔아보려다가 경찰에 검거된다.[12][13]

뚝섬 위폐 사건의 피의자 중 이원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뚝섬지부 조직부장이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의 권유로 만들어진 우익단체였다.

1946년 5월 4일 경찰은 뚝섬 위폐 사건의 피의자 4인을 검거하였다. 피의자는 배재룡, 랑승구, 랑승헌, 이원재였다. 그런데 이 중 핵심인물은 이원재이며, 이 사실은 좌우중도지를 막론하고 『조선인민보』, 『중외신보』, 『대동신문』, 『서울신문』, 『자유신문』 모두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원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뚝섬지부 조직부장이었다. 이로 인해 뚝섬 위폐 사건의 배후에 우익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좌우 대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이는 우익에게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압수된 인쇄기가 7대이며 위폐 제조 액수가 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 파장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14]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정판사 위폐 사건으로의 전이[편집]

정판사 직원에 대한 고문 취조[편집]

독촉국민회 지역조직 간부 이원재가 벌인 뚝섬 사건에 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이 끼었던 데서 경찰 수사가 8일의 정판사 수색으로 이어졌다.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991

뚝섬 위폐 사건에 독촉이 연관되어 있어 미군정이 지원하던 우익단체인 독촉이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였기에 미군정은 우익을 보호하고 좌익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미군정경찰은 뚝섬 위폐 사건 피의자 중 김창선이 정판사 직원임을 알게 되자 1946년 5월 8일 정판사를 급습하여 정판자 직원 14명을 연행하여 취조한다. 정판사 직원들은 1946년 2월 경 일괄적으로 자신들을 고용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기에 1946년 5월 체포 당시 모두 공산당원이었다.[15] 조선공산당 간부인 박낙종, 송언필은 직공 구속 소식을 듣고 경찰서에 교섭하려 갔다가 구속되었다.

미군정은 뚝섬 위폐 사건 수사와 정판사 직원 취조를 비밀리에 할 것을 명한다.[16]

미군정기에는 고문이 만연해 있었다. 미군정이 일제강점기 고문가해자였던 친일 경찰을 미군정경찰로 재등용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기에 구타와 고문은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으나 미군들은 ‘세부적인 행정사항’에 대해 조선인 경찰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17] 미군 장교가 미군정경찰이 어떤 고문을 행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한 기록이 있다.

얼마 전에는 한국 경찰의 손이 모자라서 우리 부대가 경찰서를 지키도록 배치된 적이 있습니다. 이틀을 경찰서에서 보냈는데 놀랄 만한 일들이 있었지요. 나는 경찰이 각이 날카로운 나무 몽둥이로 사람들의 정강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들은 사람 손톱 밑에 뾰족한 나무 조각을 쑤셔 넣는 짓도 했지요.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고문을 받았어요. 그들은 한 친구의 입에다 고무 튜브로 계속 물을 퍼부어 거의 질식할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지요. 또한 경찰들이 쇠몽둥이로 한 사람의 어깨를 갈기고 쇠고리에 매달아놓는 것도 보았어요.[18]

정판사 사건 피의자들은 고문을 당하며 조선공산당 간부의 지시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는 진술을 강요받았다. 담당검사 조재천이 피고인들이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인정하였다.

조재천 : 경찰 고문을 제일 적게 받은 송언필이 공판정에서 제일 분개하는 것은 가장 우스운 일이다.
 
— 제11회 공판

조재천은 검찰 논고에서 경찰의 고문과 검사의 공소는 별문제라고 말했다.[19]

조재천 검사는 "완고한 범인을 자백시키기 위하여 경찰이 초기에 어느정도의 고문을 하였다 하더라도 고문행위가 별개의 형사문제가 될 뿐이지 범죄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고문문제를 정리한다.

검사의 논고문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고문사실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다.

고문에 대한 조재천 검사의 변명은 민주화 이전까지 거의 모든 고문논란에서 보여준 태도와 동일하다.

본정경찰서는 일제시대부터 사상범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본거지였다.[20]

— 김두식, 법률가들, 2018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들의 면면을 봐도 피의자들이 수사 및 취조의 과정에서 고문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건담당 경찰들은 이구범(본정경찰서장), 최난수(수사계장), 현을성, 이희남, 김원기, 조성기 등이었다. 이들 중 이구범과 최난수는 일제시기 경부보였다. 담당 수사관 중 최고위 간부 두 명이 친일경찰이었다.[21]

또한 당시 공판기록을 보면 1관구 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이 피고인들의 취조에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덕술을 포함한 사회주의자 담당 수사관들의 ‘악독한’ 행위는 해방 이후에도 이미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고춧가루 물고문, 전화기 고문으로 알려진 전기고문, 일명 비행기타기로 알려진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기 같은 고문 등이 행해졌다.[22]

악랄한 고문 수사를 벌인 노덕술(왼쪽)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경성콤그룹 독립운동가 김덕연(오른쪽)

인쇄공들은 경찰에게 취조받을 때는 위조지폐를 인쇄했다고 진술하고 검찰 혹은 재판정에서는 경찰 수사에서의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으며 위조지폐를 인쇄한 적이 없다고 진술한다.

피고인들의 진술은 피고인들 간은 물론 같은 피고인이라 할지라도 진술 일시별로 일관성이 없고 제각각 다 달랐다. 만약 실제로 이들이 위폐 인쇄를 했다면 위폐 인쇄 회수, 날짜, 금액, 범행자가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차이 나도록 진술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로 볼 때 피고인들이 고문에 의해 취조 때마다 되는 대로 진술을 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23]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피고인들의 고문에 대한 법정 진술은 다음과 같이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은 독립운동가였는데 박낙종, 신광범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당한 고문보다 정판사 사건으로 당한 고문이 더 혹독했다고 진술했다.

김창선 : 긴 널판의자에 눕힌 후 포승으로 포박하고 장시간에 걸쳐 약 두 되가량 드는 주전자에 채운 물을 코와 입으로 부어서 기절하게 했소. 몇 주전자나 먹었는지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물을 먹는 고문을 당했소.

김창선 : 포승줄로 두 어깨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묶어 약 30분 내지 한 시간 동안 매달아서 손끝의 혈액순환이 정지되어 시퍼렇게 된 적도 한 번 있었고, 네 사람이 함께 달려들어 한 사람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한 사람은 목검으로 마구 갈기고 두 사람은 구두 발로 함부로 차며 주먹으로 치기도 했소. 그리고 바른 말을 하면 때리고 그들의 말대로 허위 자백을 하면 그치고 했소. 그리고 가진 협박과 유도심문을 하며 “네가 만일 자백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위협을 받을 염려가 있다면 경찰에서 네 자신은 물론 네 가족까지도 절대 보호하겠다. 검사국에서 형벌을 받더라도 경찰에서 보호해 주겠다. 공산당은 전부 없애 버릴 터이니 절대로 안심하고 여기서 묻는 대로 대답하라”는 말까지 하며 고문을 계속하여 할 수 없이 허위 자백하였소.

홍계훈 : 경찰에서 3차 취조를 받았는데, “김창선이가 자백했는데 왜 자백 안하느냐?”고 위협을 하며 형사 8명이 팔다리를 묶고 둘러앉아, 걸레로 입을 틀어막고 주전자 물을 코에다 막 부었다. 또 2일 반 동안이나 의자를 들리고 시멘트 바닥에 꿇어 앉히기도 하였다. 나는 너무도 고문이 무서웠고 또 형사들이 강요해서 허위자백을 하고 지장을 찍었다.

김우용 : 정신이 없도록 몇 시간씩 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고문한 경관들 이름은 기억 못하나 그 중 몹시 때린 사람은 최난수 수사주임이다.

박낙종 : 본정서에서 당한 고문은 실로 40년 내에 보는 ‘진짜 고문’이었었다. 내가 지난 5월 말경 본정서장실에서 김 검사의 취조를 하루 종일 받고 유치장으로 들어갈 때 검사의 말이 “당신은 이로써 일단락을 지을 터이니 내일 다시 나오라.”라고 하였는데 그 후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하루는 본정서 수사주임이 “너희들의 사건은 일단락 지으려 하였으나 좌익은 모략이 심하므로 고문을 하여서라도 기어코 사건을 성립 시킬 것이며 너는 일제시대에도 꾸준히 투쟁을 하여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동정을 하나 공산주의 세상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못할 줄 알아라.”라고 하였으며 그 후부터는 고문이 심해졌다. (중략) 본정서에서는 내가 고문을 제일 안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를 들고 하루 밤 두 낮을 지내어 탈항이 된 채로 검사의 취조를 받았으므로 검사는 그 당시 나의 모양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을 알았을 것이며 또 다른 동지도 고문 받은 흔적이 가라앉기 전에 검사의 취조를 받았는데 일전 제2회 공판에는 경찰로부터 “뺨을 두어 번 때렸다.”는 보고 밖에 못 들었다 함은 적어도 사직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유감으로 생각한다.

박상근 : 참 기가 막히고 억울하오. 경찰서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이와 같이 살아 나온 것은 기적이며, 공판정에서 진술을 하게 된 것은 나로서 영광이다. 나는 무슨 영문으로 경찰에 왔는지도 몰랐다. 경찰의 고문은 입으로 말할 수 없다. 조성기, 최난수, 기타 취조 형사 5, 6명이 나를 무수히 난타한 후 옷을 벗기고 의자에다 팔, 다리를 꽉 묶어놓고 1인은 배 위에 타고 앉아 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자백하라며 몇 주전자나 물을 먹였소. 나는 물론 정신을 잃었다. 물을 먹인 뒤에 의자를 들렸는데 팔이 조금 내려가면 여러 경관들은 왼쪽, 오른쪽으로 나를 무수히 난타했다. 이 때 나는 오른쪽 턱 뼈가 탈골이 되었었고, 이를 김 검사에게도 보였으며, 이덕호 병원에서 치료까지 받았다. 이덕호 의사에게 왼편 옆구리가 간혹 결린다고 말하였다. 이 날 고문은 아침 6시부터 밤늦도록 밥 한 술 못 먹은 채 계속되었다. 아침에 물을 먹이고 또 저녁에도 물을 먹이고 나는 이로 인하여 전신이 뚱뚱 부은데다가 얼굴 상처로 인해 밥을 먹을 수가 없었소. 당시의 취조 경관은 “너희들은 죽여도 그대로 죽이지 않겠다. 말려서 죽여 버리겠다.” 라고 말했소.

김상선 : 압력을 받아 했소. 즉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다. 5월 7일에는 현 주임이 비행기를 태우고, 11일에는 조성기 경사가 널빤지에 뉘여 놓고 물을 먹이고, 20일경에는 최 수사주임이 하루 밤 동안 아무 것도 안 먹이고 의자를 들려 꿇어 앉혔고 그밖에 이희남 경사가 물을 먹였소.

신광범 : 취조 경관이 “공산당에서 위조지폐를 박았다.”라고 하는 말에 내가 “조선의 건국과 근로 대중을 위한다는 기관에서 그런 일을 하였겠습니까?”라고 말하니 양팔을 묶어 널빤지에 뉘여 놓고 배 위에 올라 앉아 걸레로 입과 코를 막고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 고문을 하였다. 조성기 형사는 머리를 끌어당기어 때리고 찼는데, 나는 일제시대에도 고문을 당해 본 경험이 있으나 이렇게 계속적으로 혹독한 고문은 못 보았다. 수차에 걸친 고문에 죽지 않으려면 도저히 허위 자백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장 : 조성기 형사부장이 뺨 두 차례밖에 안 때렸다고 하는데?) 신광범 :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한참동안 묵묵히 한숨을 내쉬며) 전부 거짓말이오.

송언필 : (일어서며) 분한 말은 일어나서 해야겠다. 5월 7일 검거 당한 이래 10일 밤까지 만 4일 동안 밥 한 술 안 먹고 계속적으로 고문당하였다. 최난수 수사주임을 비롯하여 조성기 형사부장 등 6, 7인의 평안도 사투리 쓰는 사람들이 형언할 수 없는 욕설과 난폭한 고문을 하여 나는 이곳에서 죽어버리자는 결심으로 고문에 대해 왔다. (중략) 경찰의 고문은 심하다. 고문한 경관인 최난수, 조성기 등 여러 경관들의 행동은 왜놈에게 배운 고문을 더 악질로 행사하고 있다. 참된 애국자의 코에 물을 부어 가며 허구의 죄를 꾸민 이런 자들이야말로 천 번 죽어 모자랄 것이다.

박낙종 : 본정서에서 김 주임 이하 여러 형사들에게 몇 번이고 졸도를 해 가며 고문을 받았으며, 결국 이러한 고문으로 인해 허위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고문 외에도 일제시대 고문으로 얻은 심장병으로 인해 도저히 장시일에 걸쳐 경찰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단 허위자백이라도 하여 고비를 면하고 공판정에서 사실을 밝히려 했소.

미군정청 공보부의 발표[편집]

당시 위폐 사건이 굉장히 많았는데 여타의 위폐 사건과는 달리 정판사 사건은 경찰이 아니라 군정청 공보부 명의로 발표되었다.[24]

실제로는 미군정이 수사에 직접 개입했다. 군정청 공보부 제1회 발표의 재료 출처가 CIC였던 것이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이를 숨기고 '경찰 보고'에 따랐음을 강조한다.[25]

발표문에는 ‘경찰 보고에 의하면’과 같은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군정 스스로도 5월 8일 이후 수사에 직접 개입한 사실이 있다.172) 그럼에도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경찰 보고’를 강조한 것은 미군정이 이 사건의 수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이 발표의 파장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미군정은 이 발표가 미군정이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행한 정치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주 172) 서울지방심리원, 「논고 요지」, 『위폐사건 공판기록』, 대건인쇄소, 1947, 26쪽.“증인 이철원의 공술에 의하여 본 건에 관한 군정청 공보부 제1회 발표의 재료 출처는 우익 정치단체가 아니고 CIC였던 것이 판명되었고”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정판사사건은 미군정이 꾸민 일이고, 경찰은 그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5월 4일 뚝섬 위폐사건을 적발한 것은 경찰의 일이었겠지만, 그 범인 중 하나가 정판사 직원이라 해서 5월 8일 근택빌딩의 정판사를 수색하는 데는 미군정의 의지가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5월 15일의 사건 발표는 장택상 제1관구(경기도) 경찰부장의 보고 내용이라면서도 군정청 공보과에서 발표했다.

— 김기협, 해방일기[26]

1946년 5월 15일 군정청 공보부는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에서 1945년 10월부터 위조 지폐를 찍어 유포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관련자들을 체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조선공산당의 활동 자금 마련과 남한 경제의 교란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미군정의 주장이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인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의 지시로 정판사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이 위조 지폐를 인쇄해 유통시켰다고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는 뚝섬 위폐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정판사 ‘위폐’ 사건이라는 것 자체가 뚝섬 위폐 사건에 연루된 김창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대 수사된 것이고, 5월 9일 이래 각종 신문 기사에서는 뚝섬 위폐 사건과 정판사 ‘위폐’ 사건이 혼재되어 보도되어 왔으므로 이에 대한 시민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뚝섬 위폐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따로 발표하거나 최소한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문 내에 뚝섬 위폐 사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군정청에서는 전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7]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그런데 정판사 직원들은 공산주의와는 관련없던 인쇄공들이었으며 조선공산당이 자신들을 재고용했기 때문에 1946년 2월 공산당에 가입했다. 즉 1946년 5월 검거시에는 모두 공산당원이었고 미군정이 위폐를 인쇄했다는 1945년 10월에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쇄공들과 달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송언필도 1946년 2월 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위폐가 인쇄되었다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공산당원이 아니었다.[28]

주범으로 지목된 이관술과 권오직은 월북 권유를 받았다. 권오직은 월북했으나, 이관술은 월북 권유를 거부하고 남았다.[29]

항상 가장 위험한 자리를 지키던 그가 개인의 안전을 위해 월북했을 리 없고, 실제로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되고도 월북을 거부했다.

— 안재성, 이관술 1905-1950, 2006

이관술은 수배령이 떨어지기 전 장택상에게 면담 신청을 할 만큼 본인이 누명을 썼다고 여겼다.[30]

5월 16일 박헌영은 군정청으로 찾아가 공산당의 결백을 주장했는데, 조병옥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바로 “이번 사건은 뚝섬 사건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조병옥의 발언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어떠한 맥락에서 말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이는 “정판사 ‘위폐’ 사건이 뚝섬 위폐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사건의 실체는 정판사 ‘위폐’ 사건이 아니라 뚝섬 위폐 사건이니 걱정 말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날인 5월 16일 이구범 본정경찰서장은 “이번 사건은 뚝섬 사건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표에서 빠진 것은 이번 발표가 사건의 전모가 아닌 것을 말한다.”라고 말했는데, 이 역시 조병옥과 유사한 취지의 발언인 것으로 보인다.[31]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조선공산당은 이관술, 권오직 등 조선공산당 간부는 결백하며 김창선에게 위폐발행을 지시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오히려 피의자 중 이원재 등은 다른 정치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 뚝섬지부 조직부장이었고, 피의자가 뚝섬 위폐단 피의자와 겹친다는 점을 들어 다른 정치단체가 연루된 범죄인데 조선공산당에게 누명을 씌운다고 발표했다.[32]

한편 미군정의 발표문에는 오류가 굉장히 많았다. 예를 들면 미군정은 발표문에서 위폐가 제조된 장소가 근택빌딩 지하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근택빌딩 지하실은 직원용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인쇄시설은 근택빌딩이 아니라 부지 내 별도의 인쇄공장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33]

미군정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발표한 내용에 그렇게 오류와 의혹이 많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그러한 의혹에 답하지 못했다.[34]

미군정의 함구령과 비밀회의[편집]

미군정은 경찰 관계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일체 함구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장택상은 5월 16일 기자단과 문답에서 “상부의 명령으로 일체 말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면서도 “위폐 제조가 정판사 지하실에 이루어졌다”는 미군정의 발표내용은 자신의 보고서에는 없는 사실이라고 발언함으로써 의혹을 짙어지게 했다.[35]

경찰 수사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판사 ‘위폐’ 사건에 대한 뚜렷한 증거물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피의자의 자백에 의존하여 범행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는데, 피의자들 간의 자백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6]

5월 25일에는 미국인 경무부장 매글린 대좌의 사무실로 피의자들을 데려다 놓고 조병옥, 장택상 등 경찰 책임자들이 총동원하여 직접 취조를 했다.[37]

5월 27일에는 매글린, 조병옥, 장택상, 노덕술 등이 모여 장시간에 걸쳐 비밀회의를 진행하였다.[38]

5월 28일에는 매글린, CIC 브루스 대위, 조병옥, 장택상, 노덕술, 이구범, 최란수, 김홍섭 등이 모두 입회한 가운데 비밀리에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 시험 인쇄를 하였다. 이는 피의자의 증언 외에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물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39]

이렇게 경찰에서 아직 검사국으로 사건을 송국도 하기 전에 검사국이 수사의 책임자 역할을 떠맡아 증거품을 넘겨 받고 경찰에 검사를 파견하여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경무부 및 경찰 당국의 최고 수뇌부가 총동원하여 직접 범인을 취조하고 사건에 대해 의논하는 것 역시도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40]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러취 군정장관까지 경찰 최고책임자와 한 자리에 모여 정판사 사건에 대해 장시간 비밀회의를 했다.

미군정은 5월 15일 공보부 발표 이래 계속되는 조공 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수사 결과를 스스로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경찰에 내린 함구령도 계속 유지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은 수사 과정이 진척 되는대로 곧 발표하겠다는 식으로 발표를 미루다가 결국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41]

기소와 공판기일[편집]

위폐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관술은 7월 6일 경찰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게 되었다. 이관술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혐의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고 한다.[42]

그런데 이관술이 7월 6일 체포되었음에도 주범이라는 이관술을 빼고 7월 19일 다른 피고인들을 기소해버렸다. 이관술은 주범으로 지목되었기에 취조에 시간이 걸린다면 취조가 끝나고 다른 피고인과 함께 기소하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이관술이 체포되었음에도 주범이라는 이관술을 빼고 다른 피고인들만 기소해버린다.

7월 19일 검사국에서 기소를 함에 따라 공판청구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이것이 미군정 공보부 발표 내용과 차이가 있었지만 미군정은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또한 미군정의 발표 내용이 경찰의 보고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했으므로 경찰의 수사 내용이 검사의 기소 내용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경찰 측은 끝내 함구했다.[43]

경찰은 다음과 같이 상부 지시가 있는 대로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발표하지 않았다.

기자: 위페 사건 내용에 대하야 검사국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발표는 경찰의 취조 결과와 동일한가?

장택상 : 그것은 말할 수 없다. 검사국은 검사국으로서의 견해가 있을 것이고, 경찰로서는 경찰로서의 독자적인 입장이 있다.

기자 : 경찰은 취조 결과를 발표 아니하는가?

장택상: 날마다 발표하겟다고 상부에 독촉을 하였으나 기다리라고 해서 못 하고 있는데 상부 지시가 있는 대로 금명일간 발표하겠다.

[44]

7월 19일 기소되고 다음 날인 7월 20일 제1회 공판과 관련된 사항이 발표되었다. 공판일은 1946년 7월 29일, 공판 장소는 경성지방법원 제4호 법정, 담당 판사는 주심 양원일, 배석 김정렬, 최영환, 담당 검사는 조재천, 김홍섭이었다.[45]

7월 20일 조선공산당이 이인 검사총장 및 김용찬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을 방문하여 면담했을 때 검사국 및 사법부가 ‘상부’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검사국의 7월 19일 기소는 수사 진행 과정에서 독자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발표를 독촉하는 데’로부터 압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검사국에게 기소를 독촉할 수 있는 곳은 사법부장 혹은 미군정의 수뇌부, 즉 러취 군정장관 혹은 하지 군정사령관 정도였다.[46]

조선공산당 : 발표에 의하면 이관술 씨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한데 이관술 씨 취조가 끝나기 전 발표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검사국 : 발표를 독촉하는 데가 있어 발표한 것이다.

'상부' 언급은 장택상을 비롯한 여러 경찰도 한 바 있다.

최난수: 상부의 지시에 의해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재판에 압력을 넣으려는 ‘상부’를 러취 군정장관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러치를 통제할 수 있는 군정사령관 존 하지에게 편지를 보낸다. 조공 측이 하지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어떻게든 하지의 마음을 끌기 위해 노력했음은 조공이 보낸 편지의 앞부분에 잘 드러난다. 이 앞부분은 8개조의 청원 내용이 나오는 뒷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길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성껏 씌어졌으며, 공산당은 미군정과 같은 편임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모략으로부터 구해달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러취는 존 하지의 거절 서한을 소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47]

7월 19일 기소되고, 다음날인 7월 20일 제1회 공판과 관련된 사항이 발표되고, 공판일은 1946년 7월 29일이었다. 정판사 위폐 사건의 담당 변호사의 선임은 7월 20일에 시작하여 7월 26일에서야 완료되었다. 공판기일을 너무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론 준비 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분노한 조선공산당은 7월 26일 ‘신전술’을 채택한다.[48]

재판 과정[편집]

양원일은 정판사 ‘위폐’ 사건의 제1회 공판일을 지나치게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호사들로 하여금 변론 준비는커녕 정판사 ‘위폐’ 사건과 관련된 수 천 페이지에 달하는 수사 기록을 제대로 읽어볼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또한 이에 변호사들이 공판 연기를 신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피고인들을 각각 분리 심리하려는 방침을 세웠으며, 피고인들의 반발로 결국 합석 심리를 허용하긴 했지만 이관술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분리 심리를 고수하였다.[49]

양원일의 공판정에서의 발언이나 재판 진행 태도를 보면 판사가 아니라 마치 또 한 명의 검사인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양원일은 제13회 공판에서 검사가 신청한 증인, 증거는 거의 다 채택하는 반면, 변호사들이 신청한 증인에 대해서는 1명을 제외한 모두를 보류시켰고,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인, 증거는 모두 기각시키는 등 편파적인 태도를 보였다.[50]

무엇보다 검사의 논리가 변호사들의 논리에 막혀 모순을 드러내자 조재천 검사와 함께 증거를 조사하겠다며 2 차례에 걸쳐 각각 개성 방면과 남부 지방으로 출장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검사의 공판청구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해당 부분을 판결문에서 수정하기도 했다.[51]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판검사의 비밀 출장[편집]

판사는 양원일이었다. 검사는 조재천과 김홍섭이었다. 양원일은 일제강점기 판사 출신, 조재천은 일제강점기 판사 및 검사 출신, 김홍섭은 변호사 출신이었다. 판사 양원일과 검사 조재천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반공 우익적 성향이었다. 반면 피고인들은 공산당원이며 일부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다. 따라서 재판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법관 기피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고인들이 걱정한 대로 판사 양원일은 직접 유죄 증거를 수집하려고 검사 조재천과 비밀리에 출장하는 등 재판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동을 한다.

정판사 위폐 사건의 제1심 재판이 최종 선고만을 남겨 놓고 있을 당시 10월 31일 개정된 제28회 공판을 전후하여 양원일 재판장과 조재천 검사가 피고인들의 유죄 증거를 수집할 목적으로 함께 비밀리에 출장을 다녀왔다.[52]

피고인 측과 검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공평무사한 판결을 내릴 의무가 있는 판사가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검사와 함께 장기간 출장한다는 것은 판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이는 이미 양원일 재판장이 재판 초기부터 사실상 검사와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해왔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53]

그리고 이미 검사의 구형과 변호인들의 최후 변론,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끝나고 판결만을 남겨 둔 상황에서 판사와 검사가 또 다시 피고인들의 유죄 증거(혹은 무죄 주장 반박 증거)를 수집했다. 당시 피고인 측은 검사 측의 유죄 입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강력한 근거, 즉 이관술과 박낙종의 부재증명(1945년 10월에 서울에 없었음)을 제시했는데, 검사 측에서는 이를 반박할 수 없었다. 기존의 방식처럼 각 지방 검사국 등의 협조를 통해 조사를 대행시키지 않고 굳이 재판장과 담당 검사가 몸소 장기간의 지방 출장을 다녀오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당시 상황에서 유죄 입증을 하는 것이 힘들었음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판사와 검사의 비밀 출장 때문에 공판은 무려 12일이나 휴정 상태가 지속되어야 했다.[54]

이관술의 단독 심리[편집]

이관술은 7월 6일 경찰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게 되었다. 다른 피고인들은 7월 19일 기소되어 7월 29일 첫 공판을 시작했다. 이관술이 체포되었음에도 주범이라는 이관술을 빼고 다른 피의자들만 기소했다.

이관술은 8월 12일 검사국으로 송국되어 8월 21일 기소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관술을 이미 진행 중인 나머지 피고인 9인의 재판과 병합하여 심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관술은 2개월 가까이 동안 계속 기소된 상태로 수감되어 있었다. 그 기간에 별도로 어떤 조사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55]

이관술은 10월 17일에야 재판정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여전히 나머지 피고인 9인이 없는 채로 제21회부터 제24회 공판에 이르기까지 총 4회에 걸쳐 이관술의 단독 심리를 진행했다.[56]

이관술 공판에는 기존에 발행한 가족 및 일반 방청권은 전부 무효로 해 재판정의 방청석에는 불과 10여 명의 방청객이 앉아 있었다.[57]

이관술 : 나와 정판사 사건이 일련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병합 심리를 하지 않고 분리 심리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른 피고인들과 병합 심리를 해 달라고 신청했는데 어찌하여 분리 심리를 하는가?

재판장 : 다른 피고인들의 재판이 진행되던 도중에 이관술 피고인 건이 기소가 된 까닭에 심리 개시 전에 기록을 읽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또 합석 심리하면 여러 가지로 난처한 점이 많으므로 분리 심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재판소에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판사가 주범으로 지목된 피고인의 기록을 2개월 동안이나 읽지 않고 종범을 재판했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합석 심리하면 여러 가지 난처한 점이 많다는 모호한 말도 했지만, 같은 사건의 피고인임에도 별도로 분리하여 단독 재판을 하는 것은 비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정판사 사건에서 분리 심리를 한 이유는 분리 심리가 피고인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위해서였다고 평가받는다.

이관술은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경찰 취조 단계부터 일관되게 결백을 주장했다. 알려진 것처럼 다른 피고인들은 경찰, 검찰, 재판정에서의 진술이 각기 다르고 특히 경찰 진술조서는 내용이 극심히 변했다. 그러나 이관술의 진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됐다.

이관술은 어차피 허위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 중 유일하게 재판 중 자신이 고문당했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는데, 임성욱은 "이관술은 부어오른 얼굴에 상당히 쇠약한 모습이었다"고만 한다. 안재성, 배문석, 박갑동 기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관술이 고문당했다고 한다.

배문석에 따르면 "이관술은 자신의 혐의사실을 모두 완강하게 부인했다. 경찰의 고문으로도 이관술의 진술을 바꿀 수 없었는데 이미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을 하며 모든 고문을 견뎠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판에 넘겨진 정판사 사건의 첫 공판이 7월 29일에 열렸지만 이관술에 관련한 부분은 결국 제외된 채 시작됐다. 검찰로 수사가 넘어간 것은 경찰이 수사를 개시한 후 2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58]

안재성에 따르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잔혹한 고문을 끝까지 이겨낸 이들에게 일제 경찰은 고문강자라는 ‘명예’를 붙여 주었는데 최고의 영예를 이관술이 안았다"고 한다.[59] 이관술은 노덕술과 악연이 있었다. 이관술은 독립운동할 때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처음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이후 경성콤그룹으로 1941년 검거되었을 때 1943년 물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폐병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3년 가까이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박갑동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중략)

(정판사 사건 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60][61]

— 박갑동

이관술은 이재유의 재건그룹(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인물이었고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로 다른 경성콤그룹 조직원이 모르는 정보도 이관술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때문에 긴 기간 여러 고문기술자로부터 고문을 당했다. 노덕술은 이관술을 유난히 괴롭혀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검거될 때마다 이관술까지 같이 고문했다. 노덕술은 일제 고문 기술의 70%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못상자 고문 등을 사용했다.[62] 노덕술은 독립운동 수배자 중 최상급에 속하는 이관술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했다.[63] 1943년 병보석으로 석방될 때 이관술은 감옥이 아니라 고문실에 있었으며 고문으로 얻은 폐병으로 피를 토해서 병보석되었다. 이 때 이관술은 만신창이가 되어 생명이 위태로웠으며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64]

항일혁명운동가 이관술이 지닌 위상은 매우 컸다. 이재유와 함께 지도부로 나섰던 경성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와 박헌영과 함께 활동한 경성콤그룹은 모두 일제 경찰의 검거대상 중 맨 첫머리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관술은 일제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조직도에서 맨 꼭대기에 놓였던 이 아닌가.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1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이들은 모두 살인적인 고문 수사를 겪었다.

따라서 이관술은 수년간의 고문의 경험이 있기에 정판사 사건 때 고문당했더라도 경찰부터 검찰, 재판정에서까지 일관된 진술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사는 사실상 검사 역할을 하며 피고인들을 심문한다. 형사사건은 검사가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정판사 사건에서 판사는 유죄를 전제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입증하라고 한다.[65]

재판장 : 피고인이 무죄라는 반증될 만한 것이 있거든 제시하여 보라.

이관술 : 오늘날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전부터 나의 일거일동에 대해 증인, 증거품 등을 만들어 놓고 두뇌에 기억도 단단히 하여 뒀을 텐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예측 못하였으니 반증으로서 확실한 것만 열거하겠다. (1) 10월 하순 위폐 인쇄를 하였다는데, 나는 1945년 10월 14일경에 평양으로 갔다가 동월 27, 28일경에 귀환하였다. (2) 10월 하순경에는 박낙종과 인사한 적도 없었고 정판사로 공산당 본부가 이전한 뒤에서야 비로소 박낙종을 알게 되었다. (3) 10월 하순경에는 당 본부가 정판사로 옮기지 않았었다.

재판장 : 반증될 만한 점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라.

이관술 : (1) 작년 10월 15, 16일경부터 27, 28일경까지 평양으로 안기성과 여행을 했으므로 서울에 있지 않았고, (2) 조선공산당이 근택빌딩으로 이사온 것은 10월 말일이 아니고 적어도 11월 말일경이었으며, 이 사실의 증인으로는 이전에 공산당 본부가 입주해 있던 안국동 정기섭 병원 원장 정기섭 씨와 효자동 77의 7 이창훈 씨다.

재판장 : 과연 피고인의 입장이 결백하다면 하등 피신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피고인이 피신한 이유는?

이관술 : 나는 정판사가 수색 당한 날 경찰부장을 만난 일도 있다. 피신한 것 때문에 나를 의심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 줄 알지만 유죄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내가 만일 위폐 인쇄 같은 것을 조종하였다면 38 이북으로 피신할 것이지 하필 서울 안에서 피신하다가 잡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는 없다.

이관술에게 유리한 증거는 뚜렷한 이유 없이 각하되었다.

이관술 : 나는 변호사의 변호를 거부하고 싶다. 우선 안순규에 대한 판결만을 가지고 보아도 이 사건이 어떻게 된 사건인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안순규의 위증죄는 이해할 수 없으며 내가 작년 10월 하순경 재경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각하되었다. 이렇게 이 사건은 벌써 유죄로 인정되어 있어 어떤 기정 방침대로 진행되는 것 같은 바에야 나로서는 변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둘째로, 그간 재판정의 공기를 보아서도 기정 방침을 가지고 공판을 진행시키는 것 같이 생각되니 장시간을 허비하여 가며 변호사 변론이니 피고인 최후 진술이니 형식적인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재판소에서는 바로 판결 언도를 해 주기 바란다.

다른 피고인 공판[편집]

정판사 사건 재판 사진. 일어서 있는 사람이 송언필.

송언필은 경찰, 검찰, 재판정에서 모두 결백하다고 진술했다. 송언필도 이관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라 이미 고문의 경험이 있기에 고문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송언필 : 8‧15 직후 친일파, 민족반역자 꼭 100명만 추려서 목을 매어 세종로에서 종로에 이르기까지 늘어놓았다면 무고한 사람을 60일씩 구금하여 고문으로 죄를 만든 정판사 사건은 생기지 않았을 줄 안다.

비록 공산당원이 과거에 지하 운동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이 왜놈들의 주구 노릇한 것보다는 얼마나 신성하고 위대한가?

나는 지금까지 경찰에서 고문당할 때나 지금 재판소에서 구형까지 받고 있을 때나 그간 조국을 위해 지하 투쟁을 한 데 대하여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들은 적이 없다.

왜놈들 앞에서 춤추고 날뛰던 놈들이 해방이 되자 가장 애국자인 것처럼 행세하며 이 같은 연극을 꾸며 정판사를 탄압하고 공산당을 부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다.

다른 피고인들은 경찰, 검찰, 재판정에서의 진술이 각기 다르고 특히 경찰 진술조서들은 시기에 따라 내용이 극심히 변했다.

피고인들은 경찰과 검찰에서 진술이 고문 때문이었다며 재판 과정에서 피의 사실을 번복했다.[66]

피고인들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상세히 진술했다. 송언필, 박낙종, 신광범은 독립운동가였는데 박낙종, 신광범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당한 고문보다 정판사 사건으로 당한 고문이 더 혹독했다고 진술했다.

피고인들은 모두 끝까지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했다.

김창선: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극히 흥분한 태도로 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울부짖으며) 정말 억울하오. 그것은 전부가 고문에 의한 것이오.

재판장: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가?

김창선: 물을 먹이는 고문을 했는데 무슨 증거가 있겠소? 또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4개월이 넘은 오늘에 무슨 흔적이 있겠소?

김우용: 형사들의 고문을 한시라도 모면하려고 허위자백을 했소. 나는 여하간 한 일이 없다. 그 증거로는 동료 직공들이 검속당할 때 만일 나에게 죄가 있다면 도망하였을 텐데 도리어 나는 결백하기 때문에 평시와 다름없이 태연히 먼저 잡혀간 동지의 일까지 하고 있었으며 징크판은 원판과 달라서 10월부터 2월까지 몇 달 동안을 두고 오래 보존하여 쓸 수 없으며 적색판의 도장판은 피고인 9명 중 그것을 할 수 있을만한 기술자가 하나도 없다.

김상선: 기술적으로 보아 석유로 닦은 징크판은 아라비아 고무를 발라도 쓸 수 없고 (중략) 사실이 무근한 일을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하여 억울할 따름이다.

정명환 : 그것은 모두 허위며 경찰 고문이 무서워서 거짓 자백한 것이오. (중략) 경찰 취조 내용과 다르면 또 검사가 고문할까 무서워서 그랬소. 2월에는 경비대가 주야 겸행하여 경비하였으니 많은사람이 있는 데서 위폐를 인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위폐 인쇄는 1류의 기술자라야만 되는데 김창선이나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박상근: 정판사에서는 10월에 철야 작업이 많이 있었으며 또한 12월에도 해방일보 특집 관계로 밤일을 많이 하였으니 출근 카드로 그것을 조사하면 잘 알 것이며 위폐 인쇄는 비밀하게 해야 할 터이니 한 공장에서 야간작업이 있으면 위폐 인쇄가 불가능할 것은 상식적으로 확실하니 철저하게 조사하여 주기 바라며 (중략) 아무것도 모르고 일하는 사람을 잡아다 물을 먹여 죄를 구성시킨 것이 그저 너무도 억울하다는 생각 뿐이오.

신광범: 고문에 죽지 않으려면 도저히 허위자백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략) 본 건 기소 사실과 같이 200만원을 하루 저녁 8시간에 인쇄하고 재단까지 하여 금고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낙종: 인민당, 신민당 등에 물어보아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좌익 정당에서는 공동 행사 때에 항상 경리 문제로 다투었으니 서로 경리 문제는 알 것이다.

만일 정판사 직원들이 위폐를 인쇄한 것이 사실이라면 김창선이 연행된 후 이틀의 여유 기간 동안 최소한 한두 명이라도 도피했을 텐데 단 한 명도 도피하지 않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판사는 인쇄공 홍계훈에게까지 이관술, 권오직의 도피에 대한 감상을 물어보면서 정작 홍계훈이 도피하지 않은 사실은 무시했다.

재판관 : 이관술 권오직 양인이 피신한 데 대해서 감상은?

홍계훈 : 생각이 아니 난다. 나는 관계치 않았다. 김창선만이 죄가 있다. 나는 억울하게 들어와서 고생하고 있다. 김창선이가 허위 진술을 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김창선이가 해결을 하여 줄 것이다. 내가 만약 범죄를 하였다면 김창선이 체포되었을 때 도망이라도 했을 것이지 집에 그대로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판관 : 고문한다고 해서 자백을 해도 엄벌을 받는다는 것을 몰랐는가?

고문에 대한 판사의 태도에 대해 고문당해본 경험이 있는 작가 안재성이 인쇄공들 입장에서 판사를 비판했다.

충실한 인쇄공으로 살았던 그들이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가혹한 고문 아래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고문의 경험도 없는 이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켜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허위 진술을 하게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제 때부터 안락한 권력을 유지해온 판사가 피의자들의 이런 심리를 이해할 리 없다.

고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두 번의 고문만으로도 경찰이 요구하는 대로 거짓 진술을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한번 진술한 내용을 번복할 경우 일어날 폭력에 대한 거부감은 더 심하다.

6월 7일 인쇄공 정명환은 김홍섭 검사에게 위폐 제조 사실을 부인하는데 같은 날 장창해 경관에게 재조사를 받을 때는 이를 시인한다. 경찰관들이 애초의 취조 내용을 부인했을 때 어떻게 보복하는가 짐작할 수 있다.

참고인으로 연행되었던 전사억 같은 경우 너무나 고문을 많이 당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폐인이 되어 나왔다. 그는 여러 차례 전기고문을 당했던 흔적을 보여주곤 했는데 얼마 못 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만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사건의 시발점이 된 뚝섬 사건의 피의자이기도 한 정판사 직원 김창선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했다.

김창선 : 이 사건은 내가 뚝섬 사건에 관계했기 때문에 정판사 사건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내가 검거된 이래 유치장이나 미결감에서 계속 생각했지만 동료들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무도한 경찰관에게 갖은 고초를 당한 나머지 허위 진술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나에게만 죄가 있으니 나만 빼 놓고 다른 사람은 모두 무죄 언도를 바란다.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한 정판사 직원들은 1946년 2월에 공산당에 가입하였기 때문에 위폐 인쇄되었다는 시기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공산당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폐 인쇄되었다는 시기에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정판사 직원 정명환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했다.

정명환 : 검사가 나 같은 노동자까지도 공산당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대하여 무한한 원망과 함께 동정하는 바다. 이 사건의 결과는 운명에 맡기지만 이 사건의 진상은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김용암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최후 변론했다.

김용암 변호사
김용암 : 후일의 역사가는 이 사건에 대하여 과연 변호인들이 자기의 사명을 다하였는지를 비판 증명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몇 항목으로 나누어 말하자면 첫째, 3‧1 운동 이후 오직 일제에 대한 단 하나의 투쟁기관으로 끝까지 투쟁하여 온 공산주의자가 그 위폐 인쇄로 말미암아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이 근로대중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자살적 행위를 할 리는 없으며 더구나 이관술, 권오직은 10여 년간 해방 투사로서 인도의 간디, 네루와 비견할 수 있는 투사로 이들의 투쟁과 그 지도 밑에 투쟁하여 온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고통과 피로서 비로소 일본의 식민정책이 세계에 소개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8‧15 해방도 맞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몽매간에도 이 두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피고인들이 송언필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경찰에서 혹은 검사에게 위폐 인쇄 사실을 진술하였으나 그 진술 내용에 있어서는 인쇄 시간, 액수, 인쇄 인원 등 외 중요한 골자가 전부 다르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사실 아닌 허구의 진술을 꾸미느라고 그리한 것이 틀림없으며, 또한 피고인 정명환은 한 날 한 경찰서 안에서 검사와 경찰의 취조를 받았는데 검사에게는 사실을 부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는 자백하였으니 정명환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고문 혹은 이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 다음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야 장시일 병행 취조를 한 데 대하여는 나로서는 그 진의가 나변에 있는지를 이해키 곤란하다.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여 취조한다는 것은 일제 시대 주로 사상범 취조에 있어 검사국에 고문 기구가 없는 만큼 출장 취조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또한 취조 서류를 보면 구구한 피고인의 진술을 통일하기 위하여 김창선의 진술 내용을 가지고 딴 피고인에게 이를 일러주어 너는 이런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심문한 데 대하여는 검사로서는 피고인의 잊었던 기억을 새롭게 할 방도라 할지 모르나 본 변호인은 그것은 진술을 통일시키기 위한 유도 심문으로 본다.

또한 피고인의 인적 구성을 볼 때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을 제외하고는 위페 인쇄하였다는 당시 다른 피고인은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 공산주의자의 장점이요, 또한 단점인 필요 이상 타인을 의심하는 그 성질을 가진 그들이 비당원인 피고인들과 손을 잡고 인쇄를 할 리가 없으며, 또한 당원이 아닌 피고인들이 공산당에 무슨 큰 애착심이 나서 자기 몸을 희생시켜가며 위폐 인쇄를 하겠다고 자청할까 나는 이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다음 정판사와 공산당의 재정 곤란으로 위폐 인쇄를 하였다 하나 정판사 장부에는 그런 흔적이 없으며, 더구나 공산당에서는 정판사에 대한 수십만 원의 채무조차 청산 못하였을 리가 있을까?

또 10월 하순에 인쇄하였다고 하나 박낙종이 김천, 진주에 갔었다는 것이 『민주중보』 기사로 명확하게 된 바 문제가 아니 되며 12월 하순에는 많은 경비대가 경비를 하였고 다른 일로 철야 작업을 하였는데 이 수많은 사람의 눈이 있는 가운데서 이 중대한 위폐 인쇄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2월 상순에는 안순규가 위폐 인쇄 현장을 보았다 하나 그에 대하여는 안순규 자신이 이 공판정에서 부인하였으니 문제 아니 되나 그의 최초의 목격담에 의하면 위폐를 인쇄하는 사람들이 공장문을 열어 놓고 위폐 인쇄를 하였다고 되었으니 상식 밖의 일이다.

기술상으로 보아도 제판과 화공의 기술자가 없는데 이 세밀한 기술을 요하는 위폐 인쇄를 하였다고 보는 것은 마치 운전수와 화부 업는 기선이 천 리 바다를 항해함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으로 재판장과 배석판사에 대하여 원함은 지금 국내는 좌우익이 분열되어 있고, 어떤 정계에서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어 담당 판사들로서는 입장이 곤란할지 모르며, 재판관도 인민의 1인인만큼 좌익이나 우익이나 자유로 인생관을 가질 수 있으나 재판관 개인의 인생관, 정치관을 떠나 불편부당, 엄정중립, 공명정대한 사법인으로서 허심탄회 명경지수의 심경을 가지고 이 사건을 취급하여 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안순규 언도로 말미암아 이 사건에 암영(暗影)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옛날 성삼문 등의 충신이 사형을 당하였을 때 세조 쪽에서는 박수갈채하였으나 그 후의 인민은 이를 어떻게 보았으며 소크라테스와 기독을 비록 권력으로 사형을 하고 그 재판장은 그 때의 박수갈채로 쾌감을 느꼈을지 모르나 그 후세의 인민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아무쪼록 정의에 비추어 판결을 하여주기 바란다.

끝으로 피고인에게 말하고자 함은 이번 사건에 있어서는 힘닿는 데까지는 노력하였으나 힘의 부족인지 아무리 하여도 피고인 측에 유리하게는 될 것 같지 않으나, 단 한 가지, 정의는 협소한 권력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민의 가슴에 있는 것이며, 역사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불행히 영어(囹圄)의 이슬이 될지라도 여러분은 안심하기 바라며, 정의는 끝까지 살아 후세에 위폐 인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판명될 것을 확신하여 주기 바란다.”

안순규 위증죄 공판[편집]

검사가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내세웠던 안순규가 입장을 바꿔 자신이 말했던 내용이 허위진술이라고 법정 폭로한다.[67]

9월 18일 안순규가 재판정에서 인쇄 현장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이 고문과 협박 때문에 거짓 진술한 것이라고 밝혔다. 검사국은 한 날 공판이 끝나자마자 재판정에서 안순규를 체포해 구금하고 위증죄로 기소했다.[68]

안순규는 위증공판에서도 “절대로 위조지폐 현장을 본 적이 없다”고 정확하게 진술했다. 안순규가 경찰에 검거됐던 날은 1946년 5월 9일이었다. 그에 따르면 경찰은 취조실에서 안순규의 팔을 묶고 물을 먹이면서 폭행하는 고문을 가했다. 안순규는 이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허위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69]

안순규 : 지난 5월 9일 본정서에 검거되어 팔을 묶어 놓고 물을 먹이고 때리는 등 고문을 하여 이를 이기지 못하고 목격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였고 검사가 경찰서에 와서 취조를 할 때에는 따귀를 때리고 구류장을 내보이며 군정재판에 회부한다고 하여 허위 진술을 하였다.

허위 진술을 한 양심의 가책으로 처자에게도 수차 그 이야기를 하였으며 신광범 피고인 자택에도 찾아 가서 신광범의 모친과 부인에게 뉘우치고 사과하였다. 이제 죄의 중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사실대로 양심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안승규 위증죄 공판 증인 배재룡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배재룡은 뚝섬 위폐 사건 피의자이기도 하다.

배재룡(안순규 위증죄 공판 증인, 뚝섬 위폐 사건 피의자) : 안순규와 같이 본정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을 때 안순규는 물을 먹는 고문을 당했다며 공연히 너희들이 뚝섬에서 지각 없는 짓을 하여 늙은 나까지 애매하게 잡혀와 고생을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이후 변호사는 10여 명의 증인을 신청했지만 재판장은 이를 모두 기각했다.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과 똑같이 언도했다. 배문석에 따르면 안승규가 "일방적으로 짜놓은 각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안순규의 법정 폭로를 위증이라고 하지 않으면 정판사 사건의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목격 증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70]

위폐 제조가 사실인가 여부에 대한 재판이 끝나야 안순규의 말 중 어느 부분이 거짓인가가 판가름 나게 되는데 곧바로 안순규를 체포하고 기소해버렸고 심지어 조선정판사 사건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파생된 위증죄 사건의 판결이 먼저 나왔다. 안순규 위증죄 판결이 나왔을 때 조선정판사 사건 피고인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71]

그 판결은 벌써 정판사 위폐 사건을 유죄로서 전제한 것이라고 밖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 이관술

변호사단 성명서[편집]

변호사단(강중인, 강혁선, 김용암, 백석황, 오승근, 윤학기, 이경용, 조평재, 한영욱)은 최후 변론 후 성명서를 냈다.

우리 변호사단으로서는 이 모든 잡음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희생을 내어 가면서 이 사건을 한 개의 형사 사건으로 그 진상을 구명한 결과 이 사건은 전연 허구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이 결론을 내기까지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이틀 동안의 변론에서 충분히 명시되었고 또 이 변론은 서면으로 작성되어 사건 기록에 편철되어 후세 역사가의 비판의 재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이 여하히 되든지 간에 후세 역사가의 비판의 대상이 될 이 사건에 있어 변호사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겠다.

변호사단은 <소위 '정판사위폐사건'의 해부>라는 책자를 발간하며 자신들이 구명한 사건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해방직후 일본인들이 근택빌딩에서 조선은행권을 인쇄할 때 김창선은 직공으로 일했다. 그는 인쇄가 끝난 후 징크판을 빼돌려 뚝섬에 사는 배재룡에게 판매했고, 이들은 뚝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하려다 실패했다. 1946년 5월 3일 본정경찰서에서 김창선과 배재룡을 검거해 김창선의 집을 수색한 결과 조선공산당 당원증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경찰은 근택빌딩, 조선공산당, 징크판을 연결하면 조선공산당을 공격할 수 있다고 보고, 김창선을 고문해 허위자백을 받아냈으며, 공장장 안순규를 고문하여 목격자도 만들어냈다. 이들 직공들이 구속되자 석방을 교섭하러 경찰서에 간 박낙종 등 공산당 간부들도 줄줄이 구속되고 말았다.

즉 이 사건은 미군정경찰이 단순한 뚝섬 위폐 범죄 사건을 조선공산당과 연결시켜 무리하게 조작해낸 사건이고 설령 김창선 등이 위폐를 실제로 찍어냈다고 하더라도 박낙종, 이관술, 권오직 등 조선공산당의 지도적 간부들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것이다.[72]

변호사단 변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경찰에 60일간 장기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구타, 물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 강요.

2. 위조지폐 인쇄날짜에 직공 20여명이 다른 일로 철야작업을 한 사실.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인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박낙종과 이관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인쇄소 인수 5개월이 지난 1946년 2월에야 공산당에 가입했고, 위폐를 인쇄했다고 주장하는 때에는 이들이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박낙종, 이관술 등 핵심당원들이 비당원과 함께 위폐를 인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실.

4. 피고인 중 화공기술, 제판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문가인 홍사겸이 수정, 제판한 뚝섬 사건의 징크판이 실패로 끝났는데도 비전문가인 김창선, 정명환이 수정, 제판한 정판사 사건의 징크판이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5. 조선정판사 사건과 짝을 이루는 뚝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김창선과 배재룡이 동일하게 범행을 완전히 자백한 사실.

6. 조선정판사가 재정난 때문에 위폐를 인쇄했다는 범죄동기가 현실성이 없다는 점.

7. 피고인은 물론이고 검찰 측에서 내세운 증인마저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을 주장하였다. 안순규가 공판정에서 진술을 번복하자 사법당국은 안순규를 위증죄로 처벌했다.

8. 증거물 중 증거능력이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9. 재판부는 1945년 하순에 제1차 위폐 인쇄가 있었다고 하는데 10월 24일 이후 박낙종은 부재증명을 입증하는 증거자료가 있다.[73]

김용암은 정판사 사건을 수임한 9인 변호인단 가운데 선두에 섰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그의 변론은 검찰의 유죄 소견 근거를 완전히 뒤엎었다. 순수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판사 사건은 무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변론의 대가는 컸다. 공산당의 위신을 추락시키려는 음모에 앞장서 맞선 까닭에 그는 합법적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미군정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6년 12월부터 지하생활로 숨어들었다.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74]

판결과 학살[편집]

공산당 핵심간부 몇 사람이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전쟁 발발 때 학살당한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사법살인’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 김기협, 해방일기,2012[75]

증거능력 있는 증거가 없었다.[76]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 11월 23일 선고공판에서 유죄가 인정되었다.[66]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 무기징역, 신광범·박상근·정명환 징역15년, 김상선·홍계훈·김우용 징역10년 등 관련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77] 증거능력 없는 증거를 채택한 위법한 판결이었다.

관련자들은 1심 결과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재판장 김용무 대법원장, 대법관 이상기·노진설·김찬영·양대경)은 1947년 4월 11일 상고를 기각했다.[78][79]

이관술, 송언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했다. 대전형무소 학살 당시 가장 먼저 살해당한 피해자가 이관술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대전형무소 학살 조사로 첫 피해자인 이관술 학살 당시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세로 1m80cm, 가로 50m 구덩이 앞에서 이관술이 마지막으로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한 뒤 "조선...."까지 외치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이 일제히 사격했다. 심용현 중위가 이관술의 후두부에 권총을 들이대고 확인 사살했다.[80]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구덩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이관술이 큰 목소리로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 심용현의 “사격 개시” 구호가 엇갈렸다. 이관술은 난사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바로 쓰려져 구덩이에 몸이 빠졌다.

이관술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담담했으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은 결국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맘을 먹고 민족혁명운동의 맨 앞에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제 경찰 대신 미군정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힌 채 보낸 4년. 이관술이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된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높은 감옥의 담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산골짜기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차디찬 주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야만 그 자체였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과거사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골령골에서 벌어진 모든 학살은 그 어떤 것도 적법한 과정을 밟은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사령관의 결정으로 짐작되는 ‘탑 레벨’에서 내려온 명령이 법적 명분의 전부였다.

이관술이 포함된 7월 3일의 첫 번째 총살이 집행된 후 심용현 중위는 직접 권총을 뽑아 뒤통수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81]

박낙종은 목포형무소 재소자 학살로 학살당했다.[82] 목포 인근 바다에 배로 실려 나가 바다에 빠뜨려지는 방식(수장학살)으로 학살당했다.[83]

"한국전쟁 발발 후 군인들이 목포형무소로 와서 사상범을 포박‧포승하여 넘겨주었는데, 군인들에게 실려나간 사상범들은 육지에서 사살되지는 않고 배로 실려나갔을 것이다. 사상범들은 처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154쪽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세 사람 외 다른 피고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연구자들은 다른 피고인도 형무소 학살 때 학살당했으리라고 추정한다.[84]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은 학살 이전 어떻게 수감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관술은 1947년에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증했다. 원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1947년이면 해방 후 혼란상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가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부한 건 이관술이 원래 서울 동덕여고보 교사 출신으로 독립운동도 제자들이 독립운동 하는 걸 보고 시작했고 내내 제자들과 같이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교사가 되기 전에도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고향 울산에서 동기들과 함께 강습소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85]

이관술은 건강이 좋지 못해 주사를 맞고 지냈다.[86] 연구자들은 이관술이 이전부터 물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폐병이 있었으니 폐병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관술이 옥사하면 정치적 파장이 클 것이기 때문에 옥사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리라고 추정한다.[87]

송언필, 박낙종은 단식투쟁을 했다. 송언필의 경우 면회가 일체 금지되었다. 반면 박낙종은 1948년 국제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다음과 같이 결백을 호소했다.[88]

그 하고 많은 범죄 가운데서 하필 통화위조라는 파렴치한 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자신의 불행을 뼈아프게 통감한다. 이 사건은 어떤 정치적 모략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정부가 섰다 하면 그 정부가 어떠한 성격의 정부이든 간에 우리 조선인의 정부라면 마땅히 우리에게 옥문이 열리어야 할 것이다. 심경변화가 있을 수 없고 참회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자기에게 죄가 없는 곳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박낙종은 아들 박우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도 보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고? 여기가 해방된 나의 조국 조선인지? 지옥인지? 분간 못할때가 많다. 밤이되면 괴롭다. 바다 물새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니 과거 생각이 구름같이 솟아 오르고 앞날 생각을 하면 캄캄한 어둠 뿐이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 명이 10년 남았는지 20년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 나의 생명이 끊어져 나간단 말이냐? 우리 조선에는 하느님이 정말 없을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내가 요사이는 간혹 하느님 생각을 하게 된다.

박낙종은 10년, 20년 뒤가 아니라 불과 4년 후에 목포형무소 학살로 죽는다.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증거[편집]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70년 넘게 계속되던 중, 2015년 임성욱이 박사 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로 사건이 확실히 조작되었음을 입증했다. 증거가 전혀 없었다는 것, 판결문을 조작했다는 것, 기술적으로 위폐 제조가 불가능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건이 확실히 조작임을 밝혀냈다.

이외에도 임성욱은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에서 위폐제조금액이 비현실적인 숫자라는 의혹, 배재룡과 홍사겸에 대한 의혹, 검사가 주장하는 인쇄 소요 시간이 비정상적이라는 점, 고문 때문에 허위 진술을 했다고 법정폭로한 안순규의 최초 목격담의 논리적인 모순 등을 설명한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한 인쇄소 직원들은 1946년 2월까지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송언필도 미군정이 위폐 인쇄되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기간에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박락종은 1945년 10월 경, 송언필은 1946년 2월 경, 신광범은 1946년 1월에 입당하였다.[89]

명백한 조작 증거[편집]

증거재판주의 원칙 위배[편집]

재판부가 피고인들의 유죄 증거로 채택한 증거물 중 실제로 증거능력을 지닌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90]

인쇄에 사용되었다는 징크판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피고인들이 정판사에서 인쇄 했다는 위조지폐 역시 단 한 장도 존재하지 않았다.[91]

재판부는 정판사에서 인쇄했다는 위폐 33매를 증거물로 채택했지만 이는 정판사에서 압수된 것이 아니라 조선은행에 있던 위폐를 진폐로부터 선별해 낸 것이며, 정판사 인쇄 시설을 이용하여 시험 인쇄를 해서 찍어낸 지폐와도 형태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즉, 증거물 위폐 33매는 정판사에서 인쇄된 것으로 볼 수 없다.[92]

이러한 점에서 재판부의 판결은 재판에서 사실의 인정은 반드시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증거재판주의 원칙’에 위배된다.[93]

이상과 같이 본 절에서는 위폐 인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실물 증거 자료들을 ①부터 ⑰까지 모두 검토해 보았다. ①부터 ⑦까지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증거물이 아니었고, ⑨, ⑩, ⑪, ⑫, ⑭는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으며, ⑰은 진권이므로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고, ⑮, ⑯은 시험 인쇄 때 시쇄한 것(시쇄권)이므로 단지 검증을 위한 자료일 뿐,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아니며, ⑬은 김창선이 조선은행에서 정판사에서 인쇄한 위폐라고 선별한 것(선별권)으로서 유일한 증거물의 후보이며, ⑧은 ⑬과 같은 종류의 위폐이므로 ⑬이 증거물로 인정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증거물로서의 효력이 좌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물들의 핵심은 ⑬이었다. ⑬의 선별권이 정판사에서 인쇄된 위폐로 증명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검증 도구이나마 ⑮와 ⑯의 시쇄권과의 비교를 통해 같은 것으로 드러날 경우뿐이었다. 그러나 선별권은 앞면 사람 얼굴의 폭, 앞면 좌상우의 흰 점, 앞면 좌하우 1자의 두부(頭部)의 형상, 재단면의 톱날 모양 등에 있어 시쇄권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므로 정판사에서 인쇄된 것으로 볼 수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감정인 오정환은 원판에 2종이 있었다는 불완전하고 억지스러운 논리와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을 포함한 감정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⑬ 증 제45호를 정판사에서 인쇄된 위폐로 결론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피고인들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은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94]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법리적으로 재판 당시 증거능력 있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피고인들은 무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95]

검찰이 제시한 위조지폐 제작의 물증은 열 가지였다.(증거 제1, 2, 3, 35, 40, 41, 42, 43, 45, 47호) 김용암 변호사는 그 증명효력을 낱낱이 분석했다. 이 중 네 가지(제41, 42, 43, 47호)는 종이와 잉크류인데, 어느 인쇄소에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서울 시내에만도 20여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판사가 인쇄소임을 증명하는 데만 유용했을 뿐이다. 다음으로 크고 작은 징크판이 문제였다. 징크판이란 화폐를 찍어내는 아연 재질의 인쇄기 부품을 가리키는데, 이 징크판 12개로 이뤄진 다섯 가지(제1, 2, 3, 35, 40호) 증거는 별건의 범죄사실인 ‘뚝섬 위폐 사건’의 증거품이지, 정판사와는 무관했다. 마지막으로 증거 제45호(백원권 위조지폐 33장)는 정판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쇄됐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당시 서울에서 유통되던 9개의 상이한 원판으로 찍은 40종류의 백원권 위조지폐 가운데 일부였다. 이 물증은 피고인들의 유죄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와 재판이 증거주의를 심각히 위배함을 보여줬다.[96]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판결문 조작[편집]

재판부는 판결문을 조작했으며, 범행 사실 기술에 있어 치명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검찰 및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에 걸쳐 매회 200만원 씩 총 1,200만원의 위폐를 인쇄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유독 제1회 위폐 인쇄만은 날짜를 명시하지 못한 채 ‘1945년 10월 하순’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다. 그 이유는 검찰의 피의자 심문조사 과정에서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이 1945년 10월 하순에 서울에 없었다고 부재증명을 주장하자 이를 일단 피해가면서 서둘러 기소를 하기 위한 꼼수였다.

그러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박낙종의 부재증명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제출되며 입장이 곤란해지자, 재판장 양원일은 박낙종의 부재증명을 반박하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조재천 검사와 함께 비밀 출장을 가는 등 ‘사법부의 중립 원칙’을 파괴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재판부는 검사의 논고에 나와 있는 ‘10월 하순’이라는 위폐 인쇄 공모 시기를 판결문에서 ‘10월 중순’이라고 교묘히 바꿨다. 이는 명백한 ‘판결문 조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검사 측은 공판 내내 조선공산당 본부가 조선정판사 건물인 근택빌딩에 입주한 시기가 ‘10월 하순’이라고 주장했으므로 위폐 인쇄 공모 시기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97]

— 임성욱의 민족문제연구소 기고문

재판장은 모의 날짜를 애초 검찰의 주장과 달리 10월 중순으로 바꿔버렸다. 검사가 공소장에서 제기하지도 않은 내용을 재판장이 임의적으로 판결문에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조선공산당이 근택빌딩으로 이전한 시기와 맞지 않는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다. 피고인측은 조공이 근택빌딩으로 이전한 시기가 11월 말이라고 주장했으나 검찰측은 10월 하순이라고 주장하며 우겼다. 그러나 이 또한 모의를 시작한 것이 10월 중순이라고 하는 재판부의 주장과 모순되었다.[98]

—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기술적 불가능성[편집]

한번 세사와 석유로 닦아서 희미해진 징크판은 홍사겸과 같은 제판 기술자가 모리까에 및 수정을 해도 실패율이 매우 높은데, 김창선, 정명환과 같은 비전문가가 완벽하게 100% 재생에 성공하여 1200만원이나 되는 다량의 고품질 위폐를 제조했다는 검사 및 재판부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허위임을 알 수 있다.[99]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박수환: 적색 징크판 제판에 대하야 설명하겠다. (중략) 그림 그리는 것을 제외하고도 그 이후의 기술 과정을 골자만이라도 설명하면 ‘코롬 페-파’로부터 ‘하리꼬미’, 소아연판, 모조지, 다시 모조지, 소아연판, 챠이나지 20면 ‘가다도리’, ‘와리다시’, 대아연판의 순서로 전사하고 최후로 징크판 보존 방법을 실시하는데 전사에는 반다시 제판기를 사용하여야 하고 최후 20면 징크판 제조에는 대 제판기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말노 할랴면 이렇게 간단한 것 같으나 실지에 20면 징크판을 제판하자면 ‘코롬 페-파-’ 에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제외하고 제판하는 데만 숙련된 제판 전문가로서 7, 8 시간이 걸이어야 되는 것이며, 소징크판에 제판 잉크를 올니는 농후 정도라든가 20면 ‘가다도리’, 각 면의 위치를 측량하는 ‘와리다시’ 작업 같은 것은 가장 어려운 작업인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숙련된 전문 기술을 요한다. 만약 20면 제판에 있어서 ‘와리다시’ 즉 위치를 조곰이라도 잘못 측량하면 ‘총재지인’이라는 도장이 ‘조선은행’이라는 글 줄 밑에 있지 않고 좌우상하로 변동하는 것이다.

판결문에서는 김창선과 정명환이 세사와 석유로 닦은 흑청자색 징크판을 재생시키고, 적색 징크판을 제작하여 위폐를 제조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징크판 재생 및 제작에는 화공 기술과 제판 기술이 필요한데, 김창선과 정명환은 그러한 기술이 없었다. 또한 제판 전문가인 홍사겸이 재생시킨 징크판도 불완전하나마 성공한 것이 흑색, 청색, 자색 각 20면 중 5면, 2면, 2면에 불과했는데, 비전문가인 김창선과 정명환은 각 20면을 100% 완벽하게 성공시켜 위폐를 제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100]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각종 의혹 및 미소군정 문서와 증언[편집]

진술조서의 고문 흔적[편집]

진술조서 내용에 전형적인 고문 조작 흔적이 나타난다.

정판사 위폐 사건 피의자들의 경찰서에서의 진술 내용 일부 요약:

피의자 차수 인쇄날짜 인쇄 실행자(입회자) 위조금액
김상선 1 1945.10.하순 김영관, 전병철, 김상선, 김창선, 정명환, 홍계훈(안순규,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 박상근) 200
2 1945.10.초순 야간 김영관, 전병철, 김상선, 김창선, 정명환, 홍계훈(안순규,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 박상근) 200
3 1945.12.하순 야간 김영관, 전병철, 김상선, 김창선, 정명환, 홍계훈(안순규,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 박상근) 200
4 1946.1.하순 야간 김영관, 전병철, 김상선, 김창선, 정명환, 홍계훈(안순규,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 박상근) 200
홍계훈 1 1945.10.중순 야간 김영관, 김우용, 김상선, 홍계훈(박낙종, 김창선) 200
2 1945.11.20 야간 김영관, 김우용, 김상선, 홍계훈(박낙종, 김창선) 60
3 1945.12.25 야간 김영관, 김우용, 김상선, 홍계훈(박낙종, 김창선) 40
4 1946.1.7 야간 김영관, 김우용, 김상선, 홍계훈(박낙종, 김창선) 100

인쇄 날짜, 인쇄 참여자, 인쇄 금액 모두 피의자들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 피의자들의 진술이 중구난방으로 엇갈리는 것은 조작 사건에서 고문을 가하며 진술을 맞춰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흔적이다.

또한 피의자 진술조서 전체를 보면 피의자들이 공범이라고 진술한 인물 중 김영관, 안순규, 이정환, 이필상, 전병철이 있다. 김영관, 안순규, 이정환, 이필상 4인은 미군정이 피의자로 발표한 14인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고 피의자들이 공범이라고 진술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피의자 혐의를 벗게 된 것인지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전병철이라는 인물은 피의자들이 공범이라고 진술했는데 피의자로 체포된 적도 없다. 경찰이 전병철을 체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경찰 스스로도 피의자들의 진술이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고 위폐 인쇄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의 엇갈림은 두 달 내내 계속되어 결국 검사는 다음과 같은 유도신문으로 피의자들의 진술을 맞춘다.[101]

<1946년 6월 29일 김상선에 대한 신문 조서 중>

검사: 김창선의 말에 의하면 10월 하순 1야, 12월 하순 연 3야, 2월 초순 연2야 인쇄하였다고 하며 당신의 5월 20일 진술한 바도 창선의 말과 대동소이한데 어떠하오?

<1946년 6월 29일 김우용에 대한 검사의 신문 조서 중>

검사: 김창선이는 10월 1야, 12월 연3야, 2월 연 2야 하였다고 하며 당신은 5월 18일 진술 시 10월, 12월, 2월을 진술하였는데 어떠하오?

<1946년 6월 30일 정명환에 대한 검사의 신문 조서 중>

검사: 김창선의 말에 의하면 연 3야 한 것은 12월 27, 28, 29일 밤의 일인데 피곤하기는 하지만 연말연시 4일이나 휴업하니 인쇄하자는 말까지 있었다는데 잘 생각하여 보시오.

<1946년 6월 30일 홍계훈에 대한 검사의 신문 조서 중>

검사: 조선은행권 인쇄 회수에 대하야 다른 피의자는 10월 하순 1회, 12월 27, 28, 29일 연3야, 금년 2월 8, 9일의 연2야 하였다고 말하는 데 어떠하오?

발표문의 오류[편집]

미군정은 발표문에서 위폐가 제조된 장소가 근택빌딩 지하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근택빌딩 지하실은 직원용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인쇄시설은 근택빌딩이 아니라 부지 내 별도의 인쇄공장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102]

또한 다음과 같이 정판사 위폐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건의 징크판을 정판사 위폐 사건의 증거로 둔갑시켜 발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는 위 근택빌딩 구조와는 달리 고의적 오류로 추정된다.

증거 제1호(흑색판 1매)는 5월 3일 윤경옥의 집에서 발견된 것으로 김창선이 판매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고, 증거 제2호(흑색판 2매, 청색판 1매, 자색판 1매)는 5월 4일 랑승헌의 집에서 발견된 것으로 뚝섬 위폐 사건에 사용된 것이며, 증거 제3호(흑색판 2매, 청색판 1매, 자색판 1매)는 5월 4일 김창선의 집에서 발견된 것으로 위폐 제조에 사용된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이 징크판 9매는 100원권 1매를 인쇄하는 데 사용되는 소징크판이었고, 검사의 주장에 따르면 정판사 ‘위폐’ 사건에 사용되었다는 징크판은 총 3매로서 100원 20매를 인쇄할 수 있는 대징크판이었다. 즉,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는 징크판 총 9매를 정판사 ‘위폐’ 사건의 증거물로 둔갑시켜 발표한 것이다. 따라서 공보부 발표에 등장한 징크판 9매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증거물로서의 효력이 전혀 없다.[103]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 정보보고서, 미국무성 자료 공개[편집]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물증이 없다.[104] 미군정은 발표는 증거가 많다고 하고 정보보고서에는 증거가 없다고 써놓은 것이다.

또한 미군정이 재판에 개입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재판과정에서 법원 연락장교와 한국인 직원들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처리했다.

— 비밀 해제된 1947년 8월 13일자 미군정 사령관 문서

미국무성 자료를 검토한 안재성에 따르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훗날에 발결된 미국무성 자료까지 아무리 검토해 봐도 미군정 경찰에 의한 철저한 조작, 누명이었다."[105]

소련군정 문서 공개[편집]

소련군정 문서 자료가 공개되어 러취 군정장관과 경찰청장 장택상이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청장 장택상에 따르면 사건의 진실은 판결과 다르다.

미군정 군정장관 러취에 따르면 사건의 진실은 판결과 다르다.

또한 만약 소련에 종속적이었던 박헌영이 위폐 제작을 지시했다면 소련군정이 몰랐을 리 없는데 소련군정은 진실이 판결과 다르다는 식으로 기록했다. 소련군정 문서 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규식은 수도경찰서장 장택상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러치는 장택상을 경질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장택상은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진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기 때문이다.[106]

— 소련군정 문서

뚝섬 사건의 존재[편집]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번 사건은 뚝섬 사건이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107]

이번 사건은 뚝섬 사건이다.
 
— 조병옥

본정경찰서장 이구범은 "이번 사건이 뚝섬 사건과 관련이 있음에도 빠진 것은 이번 발표가 사건의 전모가 아닌 것을 말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108]

이번 사건이 뚝섬 사건과 관련이 있음에도 빠진 것은 이번 발표가 사건의 전모가 아닌 것을 말한다
 
— 이구범

수도경찰청 청장 장택상은 위폐 사건에 대해 공보부 발표는 내 이름으로 나간 것이지만 내가 한 것은 아니며 나의 보고와는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미군청정 경무부장, 본정경찰서장, 수도경찰청 청장 등이 모두 뚝섬 사건이 진짜 위폐 사건이며 조선공산당은 위폐와 관련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다.

뚝섬 위폐 사건은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뚝섬지부 조직부장 이원재가 연루된 사건인데 피의자가 김창선, 배재룡 등으로 정판사 사건 피의자와 겹친다. 홍사겸은 처음에는 뚝섬 사건 피의자로 검거됐다가 정판사 사건 피의자로 변경됐다가 다시 뚝섬 사건 피의자로만 기소된다.[109]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의 권유로 만들어진 단체이다.[110]

뚝섬 사건은 물증이 있는 반면 정판사 사건은 물증이 없었다. 조선공산당은 뚝섬 위폐 사건과 정판사 사건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진짜 위폐 사건은 뚝섬 사건이며 이는 공모부 발표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뚝섬 사건이란 독촉 인사들이 거액의 위폐를 제조한 사건이며, 공보부 발표는 뚝섬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정판사 직공 김창선이 공산당원임을 알고 이를 공산당원에게 덮어 씌운 것이다. 구체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지폐 인쇄기 7대는 뚝섬에서 압수한 것이다.

2. 이시영과 안미생이 뚝섬 사건 증거물을 비밀히 관람했다.

3. 김창선의 범행은 조선공산당 입당 전에 있었던 것이다.

4. 뚝섬에서 압수된 증거물에 적기, 레닌 사진 등을 일부러 첨부했다.


조선공산당 2차 성명

이시영은 독촉 위원장이었고 안미생은 중경임정 요인이다. 왜 그들에게 증거물을 보게 해줬냐는 항의에 수사 당국은 해명하지 못했다.

뚝섬 위폐 사건의 용의자인 독촉 출신의 이원재, 뚝섬 위폐 사건의 증거물을 비밀리에 참관하고 돌아간 독촉 위원장 이시영 및 안미생, 그리고 이 사실을 해명하지 않고 조용히 덮으려는 경찰‧검찰 등 수사 당국, 증인 출두를 거부한 이시영의 태도는 뚝섬 위폐 사건이 우익 측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덮기 위해 정판사 ‘위폐’ 사건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더욱 강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111]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수사당국은 뚝섬 사건은 축소시키고 대신 정판사 사건을 부각시키려 한다.

1946년 5월 4일 경찰이 뚝섬 위폐 사건 피의자들을 체포할 때 징크판, 잉크 재료 등 각종 증거물을 압수했는데, 여기에는 석판 인쇄기 7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위폐 인쇄에 인쇄기 7대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한번에 7매의 징크판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인쇄하려 했다는 정황 증거에 해당하며, 사건에 참여한 인원도 상당히 대규모였음을 방증한다.[112] 그런데 공판 기록에는 뚝섬 위폐 사건의 증거물로서 석판 인쇄기 1대(증 제4호)만이 등장한다. 인쇄기 7대 중 6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수사 당국은 압수한 인쇄기 7대 중에서 6대를 증거물로 채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이를 통해 수사 당국 및 사법 당국이 뚝섬 위폐 사건을 축소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될 수 있다.[113]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뚝섬 사건 재판은 너무나도 신속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뚝섬 위폐 사건의 공판은 단 2회 만에 끝났는데, 제1회 공판은 기소 내용 확인, 사실심리, 증거품 확인, 검사 논고 및 구형, 변호사 변론에 이르기까지 불과 4시간 30분 만에 끝이 났고, 제2회 공판이자 마지막 공판은 언도, 판결 주문 이유서 낭독, 피고 상고 방법, 훈유에 이르기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재판에 걸린 총소요시간은 불과 5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강거복 변호사 외 다른 2인의 변호사는 공판정에서 전혀 발언하지도 않았고,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도 없었다.[114]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한편 김상구는 저서『김구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뚝섬위폐사건은 경찰이 최초로 사건을 인지했을 때 참고인으로 김구를 출두시키려고 했을 정도로 비중이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만 놓고 보면 한편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어이없을 정도다.

신속하게 봉합된 뚝섬위폐사건과 달리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은 언제 재판이 끝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수많은 공판 끝에 1946년 11월 28일 언도 공판이 개정되었다. 재판장 양원일은 검사의 구형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언도했다.

뚝섬사건은 수많은 증거품에도 불구하고 위폐제조 미수극으로 끝난 반면, 정판사 사건은 피의자들의 자백 외엔 증거가 거의 없는 가운데 극형에 가까운 형이 언도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두 사건이야말로 전형적인 정치재판이었다는 뜻이다.[115]

— 김상구, 김구 청문회, 2014

장택상의 발언[편집]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이 사건에서 나는 결정권이 없으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
 
— 장택상
공보부 발표는 내 이름으로 나간 것이지만 내가 한 것은 아니며 나의 보고와는 다른 점이 있다. 사건과 관련해서는 상부로부터 함구령이 내려 말할 수 없다.
 
— 장택상

미군정은 경찰 측에 이 사건이 유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힘과 동시에 별도의 지시 사항이 있을 때까지 함부로 사건에 관해 입을 열거나 독자적으로 사건에 대해 발표하지 말 것을 명령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찰 수뇌부는 이러한 미군정의 뜻에 따라 사건을 유죄로 성립시키기 위해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116]

김철수의 증언[편집]

김철수의 회고에서 장택상은 정판사 위폐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출세를 위해 비밀을 묻어둔 채 미군정의 뜻에 따라 사건을 처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117]

그런게 장택상이는 저 정판사 사건, 위조지폐 사건도 지가 말을 혀. 위조지폐를 헐라면 그 기계를 어떻게 하루밤에 옮겨 놨다가 또 하루 밤에 거기다 놓냐. 안 될 말이다. 아 그러면 네가 그렇게 발표해라. 그건 내가 못하겠다. 나도 시방 수도청장에서 조까 더 올라가고 싶은디 미국놈 내가 맞어들이야 된다. 그런 놈이여. 위조지폐 사건이. 아 사실 어떻게 기계를 갖다 하루밤에 올라갔다 하루 밤에 내려놔. 그게 헛소리여. 그런 사람인게 술 먹고 기집 좋아허고. 그게 모두 그 전에 양반 장가 아니여? 아 그런게 지가 그런가 보다 그러네. 거짓말 잘허네.

— 김철수

[118]

김철수는 조선공산당원이었으며 피고인 박낙종, 송언필이 박헌영 파벌이 아니라 김철수 파벌이고 김철수와 절친했기 때문에 박헌영이 공산당에 위폐 제조 지시를 내렸다면 몰랐을 수가 없다. 박낙종과 송언필은 박헌영을 적대하고 김철수 중심으로 공산당을 만들려고 한 사람들이라 박헌영이 위폐 제조 같은 엄청난 지시를 내렸다면 김철수에게 먼저 알렸을 것이다. 김철수는 독립운동할 때부터 소련을 경계하고 스탈린을 비판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전혀 협조한 바 없고 대한민국을 선택한 사람이라 경제를 교란하는 위폐 인쇄를 내버려둘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박헌영이 위조지폐 인쇄를 지시했다면 자기 파벌만 이끌고 비밀리에 했을 텐데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은 반박헌영파이다. 이들은 박헌영의 정적이어서 김철수가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에도 송언필은 한참 동안 입당하지 않을 정도였다.

검사 김홍섭의 구형 논고[편집]

검사 김홍섭은 10월 21일의 구형 공판에서 박낙종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하며 박낙종을 끌어들이는 진술을 한 인쇄공 김창선을 배반자 가롯 유다로 비유했다.

소감을 간단히 말하면 유감스럽다고 하겠다. 내가 취조한 중 특히 박낙종은 50 평생 중 30년의 투쟁사를 가진 혁명 투사였으므로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한편 많은 감회를 느꼈으며 사회 여론은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좌우익이 한층 소원하여지는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족 구성의 일인으로 매우 유감히 생각한다. 법률가 입장으로는 형사사건이나 돌이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볼 때에는 조선의 기근(饑饉)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나는 김창선이 공판정에서 죽고 싶다 말할 적에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를 은 30량에 잡아준 가롯 유다의 비극을 상기했다.

공산당 자체가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

 
— 검사 김홍섭의 구형 논고

검사 김홍섭은 구형 논고에서 "공산당 자체가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며 사실상 사실상 박낙종과 이관술 등의 형사책임을 부정했다.

검사가 형사책임을 부정했는데도 피고인들이 무기징역에 처해진 것은 비정상적이다.

재판에까지 간섭하려 하다니 재판에까지!
 
— 검사 김홍섭의 사석 발언

김홍섭은 이 사건으로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임했다.

증거물 중에는 기소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없었고, 판결은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거해서 이뤄졌다. 그런데 여러 피고인들은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이 고문에 의한 허위였다고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고, 공장장 안순규는 진술을 번복했다 해서 위증죄로 추가기소를 당하기까지 했다. 정판사 사장 박낙종은 위폐를 인쇄했다는 시기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홍섭 검사가 돌연히 사표를 제출한 것도 무리한 진행에 대한 반발로 널리 해석되었다.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991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의 회고[편집]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는 당시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아나똘리 이바노비치 샤브신의 아내다.

우익계 신문에 마치 해방일보의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만든 것처럼 보도되었고 (중략)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죄목을 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새로운 반공 캠페인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안재성의 자료조사[편집]

2006년 출판된 <이관술 1902-1950>에서 안재성은 최승우의 '소위 정판사 사건의 기소 이유서를 박함'이라는 현대일보 기고문, 정판사 당직일지, 조선공산당 장부 등에 주목했다.

최승우는 인쇄기술자로서 인쇄에 걸리는 시간과 철야 인쇄노동에 대한 발표의 허점을 지적한다. 입주 시기가 12월에서 1월까지란 증언은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행림서원 주인 정기섭의 장남 정영기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1. 최승우는 출판사의 사무실을 구하려고 9월 중순경 근택빌딩으로 박락종을 찾아가 교섭했다. 박락종이 빌딩 4층을 빌려주었으므로 최승우는 그때부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빌딩 4층에 출근하였다. 최승우에 따르면 1945년 10월 경 근택빌딩 1층은 조선정판사 사무실, 3층은 해방일보사, 4층이 동무사, 5층에는 산업노동조사서가 있어서 2층만이 비어 있었다. 2층은 각종 인쇄물 창고로 사용하다가 11월 중순 이후에야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 선전부가 들어왔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일부가 옮겨온 것은 1945년 12월 말 경이었다. 특히 이관술이 옮겨온 것은 1946년 1월 상순이 지나서였다. 10월 하순 경 박낙종이 근택빌딩 2층에 있던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위폐 발행을 제안하여 승낙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무렵 공산당 본부는 안국동 행림서원 2층에 있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반드시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인 이관술이 홀로 근택빌딩 2층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2. 설사 우연히 이관술이 건물 2층의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있다가 박락종에게 제안을 들었다고 가정해도 해방된 지 2개월밖에 안 되어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자금지원이 충분한 상황에서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파렴치범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을 이관술이 단 몇 마디 대화 끝에 결정해버렸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3. 거액의 위폐를 인쇄할 물리적인 시간과 인력의 문제다. 경찰은 2, 3, 4차 인쇄는 12월 27, 28, 29일 연 3일간 야간 9시부터 매일 밤새 이뤄졌고 5, 6차 인쇄는 2월 8, 9일 연속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뤄졌다고 발표한다. 이대로라면 5명의 정판사 직원들은 낮 동안 해방일보를 인쇄하고 밤을 꼬박 세워 위폐를 인쇄하느라 며칠씩 한 잠도 자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또한 매회 2백만 원을 인쇄했다고 했으니 매번 백원권으로 2만 장을 인쇄했다는 뜻인데 불과 5명의 직원이 옵셋 인쇄기 한 대를 사용해 9시간 만에 그만한 거액을 인쇄하여 재단까지 해 반출했다는 주장은 인쇄기술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기계도 아닌 인간이 연달아 3일간 철야 인쇄노동을 감당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거니와 기술적으로도 2백만 원이라는 거액을 인쇄, 재단, 반출하기에는 야간 시간이 너무 짧다.[119]

"2, 3, 4차 인쇄는 12월 27, 28, 29일 연 3일간 야간 9시부터 매일 밤새 이뤄졌고 5, 6차 인쇄는 2월 8, 9일 연속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뤄졌다고 발표한다. 이대로라면 5명의 정판사 직원들은 낮 동안 해방일보를 인쇄하고 밤을 꼬박 세워 위폐를 인쇄하느라 며칠씩 한 잠도 자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는 부분은 실제로, 정판사는 1946년 1월 1일 외에는 휴업한 적도 없고 줄곧 야간 연장 근무를 했으며 공판청구서에도 피고인들이 낮에 쉬었다는 기록은 없다. 낮에도 잘 시간이 없었다. 발표에 따르면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연이어 인쇄노동을 했다는 말이 된다.[120]

행림서원 주인 정기섭의 장남 정영기의 법정 증언은 다음과 같다.

정영기(증인) : (행림서원 건물을) 9월 상순과 중순부터 어느 단체가 사용하고 간판에는 우리 서원이라고 붙어 있었다. 12월 15일에 일부가 이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부가 이전한 것은 1월 중이라고 생각한다.

정판사 당직일지에는 12월 27, 28, 29일 및 2월 8, 9일 야간 작업조 20명이 근무했다고 적혀 있다. 위폐가 제작되었다고 지목된 장소는 많은 직원들이 수시로 지나치는 곳에 위치했다. 해당 날짜에 몰래 야간 인쇄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21]

조선공산당 장부에는 1200만원이나 된다는 거액의 돈이 사용된 흔적이 없었다.[122]

미군정은 최승우 기고문을 실은 현대일보를 비롯해 위폐사건 공판 내용을 가감없이 보도해온 조선인민보, 중앙신문을 폐간했다. 중앙신문 직원 10여 명이 헌병에 체포되기도 했다.[123]

고준석의 증언[편집]

고준석은 정판사 사건 당시 근택빌딩 5층에 들어 있던 조선산업노동조사소(산노)의 설립자이자 대표였다.

미군정철의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후에 총리가 됨)은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위조지폐 사건'을 날조했다.


이들은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을 했고, 이것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꾸며졌던 것이다.

— 고준석

[124]

박갑동 및 전향자들의 증언[편집]

해방일보 기자 출신 박갑동은 우익으로 전향한 뒤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일보에 <박헌영>을 연재했는데, 정판사 사건에 대한 부분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삭제된 바 있다. 그 뒤 박갑동은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에서 다시 한 번 조작이라고 증언했다.

박갑동의 증언은 인플레이션과 미군정기 위폐 실태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와도 일치하는 증언이다.

1946년 5월 15일, 당시 나는 오전 10시가 되면 항상 미군정청에 나가 있었습니다. 미군정 공보부에 뉴먼 대령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기자회견이 있어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로서 매일 참석했던 겁니다. 그날 참석하고 나서 해방일보사로 돌아오니까 MP가 와서 『해방일보』 사옥을 쭉 포위하여 못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해방일보사 지하 식당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는 겁니다. (중략) 그래서 내 책과 서류, 세면도구도 다 뺐겼어요. 그것은 우리로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뚝섬에서 위폐가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공판을 받게 됐는데, 나는 그 재판 과정을 날마다 참관하면서 연구했습니다.

지폐 원판인 징크판(아연판)으로 인쇄하는 과정까지 조사해 보니까 해방 전에 용산에 있던 조선교과서인쇄소와 소공동에 있는 근택인쇄소에서 조선은행권을 인쇄했던 겁니다. 거기서 8월 15일까지 조선은행권을 남발해 해방 직후 엄청난 인플레가 발생했던 겁니다.

해방이 되자 근택인쇄소에서 일하던 김창선이라는 노동자가 지폐 원판을 숨겨서 자기 집에 갖다 놓았어요. 공산당은 근택인쇄소를 인수해 '정판사'라는 이름으로 바꾼 겁니다. 정판사는 지금 조선호텔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가 근 1백 명이나 됐는데, 공산당에서는 이들을 2주일 동안 단기 훈련을 시켜서 무조건 공산당에 입당시켰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당장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던 중에 김창선이란 자가 브로커한테 그 징크판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위조단들이 뚝섬에다 조그만 인쇄기를 갖다 놓고 위조지폐를 찍은 겁니다. 그런데 경찰이 징크판의 출처를 추적해 보니까 공산당 본부에 있는 김창선한테서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이것을 놓고 공산당에서 위조지폐를 발행했다고 뒤집어 씌운 겁니다. (중략) 이것은 완전히 공산당을 모략하기 위한 조작이었습니다.

— 박갑동,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1998

한편 박갑동은 이관술 수사 상황에 대한 증언도 한다.

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중략) 그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관술은)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 박갑동

[125][126]

일제강점기에 노덕술이 유독 이관술을 심하게 고문했다는 증언이 많다. 이관술과의 악연 때문에 노덕술은 이관술이 권력을 잡고 친일파 처단을 하기라도 하면 자기부터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노덕술 입장에서는 이관술을 필사적으로 체포하고 취조하고 누명을 씌워야 했다.

박갑동은 박낙종이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 마음이 아파 박낙종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외우고 있다는 말도 했다.[127]

한편 소설가 이병주는 남로당 전향자들의 증언을 모아 반공 소설인 <남로당>을 썼다. 그런데 정판사 사건 담당 경찰 노덕술과 피고인 중 한 명인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일제강점기부터의 악연이 증언된다.

당시 독립운동을 편 인물 중 일본 경찰이 가장 나쁘게 본 사람이 공산주의자인 박헌영과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몇 번 체포되고 어떤 혹독한 고문을 받아도 전향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고문왕으로 알려진 노덕술이란 경찰관이 있었는데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어떤 애국지사도 배겨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관술은 노덕술의 손에 세 번 걸려 세 번 죽었다가 네 번 되살아나는데도 전향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잡혀 그들의 고문을 못 이겨 전향한 사람들에게 이관술은 눈부신 존재였다.

이병주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이관술과 박낙종의 관련 사실은 김창선의 자백에 의한 것일 뿐 다른 아무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 김창선은 재판정에서 경찰에서의 자백을 번복했고 박낙종, 이관술 양인은 위조지폐와 전혀 관련된 적이 없다고 극구 부인했는데도 심증만으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과연 그것이 정당한 판결인가?

<남로당>은 반공 소설로 공산당을 옹호할 이유가 전혀 없다. 반공주의자 이병주도 남로당 전향자들의 증언을 들어 본 결과 판결이 억지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군정기 인플레이션 및 위폐 실태[편집]

역사학자 김기협에 따르면 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며 인플레이션과 위폐 유통 문제는 조선총독부가 과거에 만든 위폐의 효력을 미군정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판사 사건은 가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할 일이었다. 위폐 범죄에서 제작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유통이다. 널리 유통시킬 길이 없으면 아무리 잘 만든 위폐라도 고작 유흥비로밖에 쓸 수 없다. 조선 총독부가 찍은 30억 원은 불법으로 찍은 위조지폐였다. 황급하게 찍느라고 품질도 나쁜 것이 많아 당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잘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 위조지폐의 유통 능력을 미군정이 보장해주었다. 30억 원 위폐사건의 핵심 공범인 미군정이 1천수백만 원의 공산당 위폐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미군 진주 당시 30억 원의 "붉은 돈"이 누구 손에 있었을까? 밝혀진 것은 극히 일부뿐이다. 예컨대 대표적 친일 사업가 박흥식이 조선비행기회사 투자에 대한 보상 등으로 5000만 원을 받고 유흥 사업가 김계조가 댄스홀 만드는 등의 용도로 1000만 원을 받은 일이 그들의 다른 범죄를 수사하던 중에 불거져 나왔다. 30억 원 위폐의 대부분은 좁은 범위의 친일파가 목돈으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위폐에 대한 미군정의 효력 인정은 친일파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면서 조선 경제를 파탄시킨 엄청난 범죄였다.[128]

— 김기협, 해방일기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해방 이후 화폐 위조 사건들이 꾸준히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129]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군 진주 이후에도 군표 대신 종전대로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광복 이후 불법적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진주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지폐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합법적인 것으로 사후 승인해 줌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인쇄한 불법 지폐를 유통시켰다.[130]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던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재정 적자를 조선은행권을 찍는 것으로 해결하라고 미군정 재무국장 찰스 고든 중령에게 권유했다. 이때부터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통화팽창이 주된 원인이 되어 물가는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131]

조선총독부의 불법 화폐 남발과 미군정의 통화정책으로 1945년 9월 총 통화액은 130억 정도였다. 통화발행고 90억에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음성 자금 40~45억을 합친 것이다.[132]

이에 역사학자 김기협은 <해방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30억짜리 위폐단이 겨우 1천만 원짜리 위폐 사건을 짜 맞춰 '경제 교란' 책임을 따지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 김기협, 해방일기

유가족에 대한 연좌제와 진실규명 노력[편집]

사건 당시부터 계속 미군정에 의한 조작이라는 증언이 있었으나 민주화 이전에는 이러한 주장은 탄압받았다.

피고인의 유족은 '빨갱이'에 더해 '파렴치한 위폐범'의 가족이라는 연좌제에 시달렸다.

학살 당한 것은 이관술만이 아니었다. 이관술의 사위와 이복동생도 총성에 사라졌다. 1960년 4.19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 여름이었다. 경남 울산군 태화초등학교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였다. 10년 전인 1950년 8월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된 이들의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 위해서다.

울산지구 CIC와 울산경찰서 경찰들은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최소 870명을 위 두 곳에서 학살했다. 유가족들은 4.19 후인 1960년 여름 두 곳에서 상당수의 유해를 발굴했다. 가마니 위에 부위별 유해와 보도연맹원들을 묶었던 철사 줄이 대량 발굴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태화국민학교로 간 박경희는 발굴된 유해를 보자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 이정환 역시 목 놓아 울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어떤 것이 누구의 유해인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태화국민학교에서 위령제를 치른 후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후 약 30명의 유족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봉분을 세운 지 1년도 채 안 되어 묘가 파헤쳐졌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동토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울산경찰서는 비석을 깨부수고 유족들을 호출했다.

"빨갱이들이 묘를 만들었으니, 네놈들이 묘를 파헤쳐"라고 했다. 유가족들에게 파묘를 지시한 것이다. 인륜에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조치였다. 더군다나 경찰들은 파헤친 묘에서 나온 유해를 유족들에게 화장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경남북지역과 제주도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파묘를 시키고, 유해를 불태워 버리라고 지시한 곳은 울산이 유일하다. 박경희의 부친 박동철은 이관술의 큰 사위다. 또한 울산에서 학살된 이중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학술도 포함되었다.

— 박만순,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133]

파렴치한 위조지폐 범으로 처형된 이의 후손들의 삶은 신산했다. 이관술의 남동생과 사위도 개전 직후 끌려가 총살되었고, 두 명이던 아내와 네 딸도 전쟁 중 행불되었다. 마산으로 시집 가 있던 큰딸과 고향 울산 집을 지키던 막내딸만 생존했는데, 누구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 우연히 <경성트로이카>를 읽고 출판사에 문의해 나를 찾아온 이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딸 이경환 씨와 그 자손들이었다. ‘광복20년’이니 하는 옛 방송극에 사악한 빨갱이 범죄자로만 등장하던 이관술을 좋게 그려준 데 대한 감사로, 멀리 경상도에서 올라온 것이다.

— 안재성

영하의 모진 바람이 불어대는 부평역 광장에 때 아닌 울음바다가 행인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경환(이관술 딸) 할머니와 이관술의 두 외손녀 손옥희 씨와 박경희 씨 또 이들을 태우고 온 손녀사위들까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단지 이관술을 그린 작가, 그의 생애의 일부분이나마 긍정적으로 복원한 작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통곡을 터뜨린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한이 깊은지 짐작 못했던 내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한 맺힌 삶을 살아왔는가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통한의 눈물바다는 이효정 할머니 댁으로 자리를 옮겨 또 한번 재현되었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하자, 이관술의 딸인 이경환은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상 조사를 신청했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고통 받았던 이관술의 가족들은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정판사 위폐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60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관술은 이미 처형당했지만 명예만이라도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갖은 고생을 하던 이관술, 일신을 조국과 조선 민중에 바쳤던 이관술이 캄캄한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을 당시 나이는 48세다. 그 후 역사는 그를 파렴치한 위조 지폐범으로 기록한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짐칸의 폐품과 솥단지 밑에 소작쟁의 소식이 담긴 기관지를 남으로는 마산에서 북으로는 함흥까지 페달을 밟으며 날랐던 이관술.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도 사진기 앞에서 엷은 미소 한 가닥 지을 줄 알았던 그에게 역사는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 박현주,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134]

1기 진실화해위원회 시기에는 이미 최초로 한국현대사를 다룬 국내 박사학위 논문을 쓴 역사학자 서중석이 "위폐를 찍어 사회 혼란을 조장하려 했다는 부분은 설득력이 없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에 당황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매우 온건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미소공위 휴회 후의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라고 유효한 증거가 없었고 피고인뿐만 아니라 증인까지 고문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음을 지적한 바 있었다.[135]

역사학자 신주백은 정판사 사건이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분석했다.[136] 또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훗날에 발결된 미국무성 자료까지 아무리 검토해 봐도 철저한 조작, 누명"이라는 결론을 내린 평전 작가 안재성이 2006년 <이관술 1902-1950>을 출판한 바 있었다.[137] 2008년에는 고지훈이 정판사 사건에 대한 최초의 학술지 논문인 <정판사사건 재심청구를 위한 석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신청 사건은 조사되지 않았다. 각하나 진실규명불능의 경우 이유 명시와 함께 통보를 해주어야 함에도 진실화해위원회는 해당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아무 통보 없이 조사하지 않았다.[138] 최종 조사 결과 보고서에도 언급되지 않았다.[139] 최종 조사 결과 보고서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이관술에 대한 학살은 조사되었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2010년 보고서> 5권, 손응교가 알려준 이관술 학살 날짜

이관술 유족은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 국가배상 판결로 이관술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정받으며 약간의 명예회복을 했다.

2012년 역사학자 김기협은 미군정기 위폐 실태 연구 결과 "공산당 핵심간부 몇 사람이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전쟁 발발 때 학살당한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사법살인’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140]

2015년 임성욱이 정판사 사건을 주제로 한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를 발표했다. 발표했다. 임성욱의 논문은 70년만에 나온 박사학위 논문인데다가 당대의 모든 신문기사를 비롯한 그 때까지 이용되지 않은 새로운 사료에 기반한 연구였다.[141]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총괄했던 임영태에 의하면 "임성욱이 사실상 이 사건이 미군정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작사건임을 드러내었다. 연구 결과 등을 놓고 볼 때 이 사건은 조작해낸 사건이었다는 점이 확실하다."[142] 신복룡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143]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에 따르면 "조선정판사 사건은 100% 조작"이다.

역사학자 임경석은 김용암 변호사에 대해 연구하며 "그의 변론은 검찰의 유죄 소견 근거를 완전히 뒤엎었다. 순수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판사 사건은 무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변론의 대가는 컸다. 공산당의 위신을 추락시키려는 음모에 앞장서 맞선 까닭에 그는 합법적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미군정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6년 12월부터 지하생활로 숨어들었다."라고 분석했다.[144]

국가기관과 별개로 학계의 조작 정황 발견에 힘입어 언론계와 시민사회에서는 피고인에 대한 명예회복이 진전되고 있다.

이관술은 1950년 대전형무소 사건으로 대전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실을 확인했으며, 사법부 역시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주었다. 다만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이 되지 않았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한다면 이관술 개인이 아닌 '조선정판사 사건' 진실규명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15년 동안 민족해방운동에 전심전력했고, 이로 인해 두 차례 5년간의 옥살이와 8년간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야 한다'라는 의견이 울산과 경주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사무소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과 진실' 등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통곡이 터졌다. 잠시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세미나 내내 울음이 그치지 못했다. 그 어느 토론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울음의 주인공은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85세)씨였다.

— 박만순,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145]

2019년 반병률, 최규진 등 역사학자와 박광주 교수, 이문웅 교수 등이 참여한 이관술 국회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반병률은 임성욱의 박사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의 지도교수였다. 2021년 8월 15일 MBC에서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을 방영하며 임성욱 박사 연구를 소개하는 등 연구 결과가 학계 뿐만 아니라 언론계와 시민사회에도 반영되고 있다.

영향[편집]

친일경찰 및 사상검찰 체제 확립[편집]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총괄자인 임영태는 강연에서 “가장 일차적인 우리 과거사 청산 문제는 식민지 잔재 청산 문제”라며 “그런데 친일파 청산은 사실 실패했다. 친일파 청산이 실패하면서 실은 그 이후에 다른 문제들이 생긴다. 민간인 학살 문제가 바로 나오는데 그 민간인학살 주역들이 결국은 다 친일파들이다"라고 말했다.[146]

임영태는 1949년 6월 발생한 반민특위 습격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을 ‘친일파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시발은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꼽았다. “사실은 하나의 사건이다. 친일경찰들이 한 거다. 친일파들이 한 거다”라고 말했다.[147]

임영태는 친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조작 사건의 시초로 흔히 국회 프락치 사건을 들지만 사실 진짜 시초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라고 분석했다.

거물 독립운동가 이관술이 맥없이 탄압당한 정판사 사건을 목격한 친일경찰이 좌익 계열이라면 독립운동가라도 탄압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고 본격적으로 활개 치게 되었음은 당대 정치단체도 지적했고 현대에도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바 있는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이 사건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친일파의 승리라는 점에 동의한다. 사건에서 피고인은 절반이 독립운동가이고 경찰, 검사, 판사는 친일파이다.[148]

당대 정치단체의 경우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대표적으로 7월 22일 독립운동가인 이관술을 이구범, 최난수, 노덕술 등 친일경찰이 검거한 것은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모독임을 지적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철수의 동생 김광수도 글을 발표했다.

구적 일본과 가장 과감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싸워 온 애국투사에게 해방 조선의 영예가 주어져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최대의 영예를 보내야 할 애국투사에게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가하며 그도 다름 아닌 구적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들 손에서 가해지고 있다.

— 김광수(김철수의 동생)

이관술 씨는 1929년 이래 20년간을 반일제투쟁으로 일관해왔다. 혹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일본의 만주 출병을 반대하다가, 혹은 비밀 문서를 간행하여 반일 반전 사상을 고취하다가, 혹은 빨치산 반일군대를 획책하다가, 혹은 공장 또는 가두에서 노동자 및 근로대중을 지하에서 조직하다가 발각하여 오랫동안 무서운 악형 밑에서 영오생활도 하였고 일경 추적을 받으면서 엄동에 23개월씩 산중 은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솥땜장이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해 가면서 가장 무서운 백색테러에 누구보다도 가장 맹렬히 싸워 온 우리 민족해방운동사가 가진 위대한 혁명투사이다.
이러한 혁명투사를 하등 적확한 증거도 없이 검거하여 취조한다는 것은 혁명가와 조선민족해방사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민주주의민족전선
일본 제국 경찰이 그린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정판사 ‘위폐’ 사건을 통해 조병옥-장택상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경찰 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되고 미군정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됨으로써 향후 반공 체제 형성의 중요한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된다. 또한 법적 한도를 넘어선 피의자에 대한 장기 구금 및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강압 수사 방식이라는 일제 경찰의 유산도 정판사 ‘위폐’ 사건을 거쳐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위폐 공판 소요 사건에서의 비무장 대중에게 총을 쏘는 과잉 진압 방식 역시도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 1946년 가을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한 과잉 진압 및 이후 제주 4·3 항쟁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149]

정판사 ‘위폐’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조병옥-장택상-친일 경찰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으며, 미군정과 우익의 좌익 탄압을 위한 중요한 물리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미군정기 내내 큰 변화 없이 탄탄하게 지속되었다. 한편, 정판사 ‘위폐’ 사건을 통해 재야법조계와 재조법조계간의 대립 구도는 좌우대립 구도로 변모해갔으며, 정판사 ‘위폐’ 사건 이후 검찰은 더욱 우경화되어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을 계기로 1949년경에는 일제의 사상검찰이 부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검찰 조직은 향후 대한민국 반공 사상 통제 체제의 중요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은 일제 강점기 친일 경찰 및 사법 조직이 친미반공 우익적 경찰 및 사법 조직으로 재조직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150]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미군정의 경제정책 실패 책임 회피[편집]

미군은 남한에 주둔한 이래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였고, 친일파를 미군정 관리로 재등용하였다. 특히 미군정의 친일경찰 재등용은 민중의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이유가 되었고, 이에 대한 반감은 미군정경찰의 더욱 강한 탄압으로 되돌아오는 악순환이 연출되었다. 정치적으로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분단정부가 세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미군정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졌다. 더욱이 미군정의 미곡자유화조치로 인한 식량부족사태, 통화남발과 생산 부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폭등 등의 경제정책 실패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익이 관련된 뚝섬 위조지폐사건이 터지자 미군정경찰은 고문을 통해 공산당이 개입한 위폐사건으로 조작하였고, 사법부는 각본에 충실하게 정치재판을 진행, 법적으로 유죄를 확정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사건을 조작함으로써 미군정으로 향하는 불만의 목소리를 공산당으로 돌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미군정은 특히 이 사건을 통해 공산당을 ‘위조지폐’를 찍어내어 경제 질서를 교란하는 ‘경제 파괴범’, ‘민생 파괴범’으로 선전하였고, 향후 공산당을 파렴치한 질서의 파괴자로 낙인찍어 그러한 이미지를 대중에 심어주려 하였다. 이 같은 낙인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혁명의 대의를 위해 활동한다는 공산당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었다. 미군정은 이러한 낙인찍기를 통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고 대중의 반공정서를 강화하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미군정 시기에 형성된 ‘조선정판사 사건’과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 조작은 미군정뿐만 아니라 한국정부 수립 후에도 남한의 반공체제 강화에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151]

미군정은 위폐 제조 범죄로 인해 민심이 불안해지고, 매점매석, 낭비 풍토가 조장되어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는 일제의 화폐 남발, 미군정의 일제 화폐 정책 승계, 각종 경제 실책 등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 모든 경제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폐위조범, 즉 정판사 ‘위폐’ 사건 관계자 및 공산당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152]

그리고 미군정 측이 이러한 공산당의 경제 교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5월 20일 미군정 당국은 백원짜리 신지폐, 즉 조선은행권 100원권 정(丁)권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으며, 7월 1일 신권을 발행하였다. 결국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 사건 발표를 통해 경제 혼란의 책임을 공산당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 져야 책임과 감수해야 할 비난을 모면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153]

합법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의 사실상 불법화[편집]

조선공산당은 이 사건 이전에는 합법정당이자 최대 정당이며 좌파 계열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수많은 당원과 조직이 가입했었다. 박헌영파 뿐만 아니라 반박헌영파 사회주의자도 가입해 다양한 파벌이 있었다. 반박헌영파 조선공산당원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김철수가 대표적이다. 김철수는 이승만과 친분이 있기도 했고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노선처럼 투철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좌우합작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피고인 박낙종, 송언필은 김철수 파벌이었다. 한편 사료에 따르면 이관술은 대중적 인기가 대단했던 조선공산당 지도자로서 박헌영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154]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 이전에는 미군정에 협력하여 합법정당이자 최대 정당 지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경성콤그룹 출신이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서열 12위였던 이관술의 동생 이순금이 "회의 분위기가 너무 극좌로 흐른 것은 앞으로 극복이 되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라며 극좌 노선을 피하자고 건의한 기록도 있다[155] 그러나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체포령이 내려진다.

근택빌딩은 김철수파가 정당하게 구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정판사는 좌우이념대립당시 우파 노선을 걷던 천주교회에 불하되어 이름을 바꾸고 《경향신문》을 인쇄하게 되었다. 《해방일보》는 무기정간 조치로 폐간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으며 조선공산당은 당사 압수 수색을 받은 뒤 입주해 있던 건물에서 쫓겨났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과 관계 없는 근택빌딩 5층 산업노동조사소나 4층의 출판사 동우사까지 퇴거시켰다. 동우사나 산업노동조사소는 건물 소유주에게 정당히 비용을 지불하고 입주한 것인데 자신들과 직접 상관도 없는 일로 불합리한 경제적 피해를 보게 된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편집]

조선공산당으로서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이후 미군정의 탄압과 대중의 지지기반 상실이라는 악재를 동시에 겪게 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해방 후 견지해오던 대미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신전술이라고 하는 강경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156] 이에 따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철도노동자들이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일으킨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선언서의 첫 항목에는 ‘쌀을 달라. 노동,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는 요구가 들어갔다. 물가등귀에 따른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절대 반대, 반동테러 배격,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 즉각 석방 등도 요구했다. 이관술 등 정판사 사건 피고인에 대한 석방 요구가 포함되었다.[157]

이 파업을 경찰, 반공단체가 과격하게 진압하는 도중 사상자가 나오자 대구 시민이 반발하여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대구 10.1 사건 관련자 검거로 좌익의 입지는 더 좁아진다.

미군정과 공산주의 세력의 정면 충돌[편집]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은 정판사 사건 전 소련과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부르며 당연히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등 냉전이 시작되는 상황을 분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낙관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박헌형은 자신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자 '신전술'을 채택하고 월북한다. 정판사 사건 이후 박헌영은 급격히 태도를 바꿔 미군정에 강경한 공세를 펴 정치적 갈등 고조에 일조한다. 박헌영과 여운형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이 정판사 사건 때문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진다. 박헌영은 내부적으로도 비타협적 노선을 채택하는데 이에 중도파와 타협하자는 입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과도 충돌하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세력이 약화되자 박헌영은 다른 좌파 계열 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남조선로동당을 만들게 된다.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던 공산주의자 김철수는 박헌영과 갈등하기도 했고 친분있던 이승만으로부터 정계를 은퇴하면 좌익 탄압으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 등을 듣고 정계를 은퇴한다. 박헌영은 강경 노선을 취하면서도 트루먼 독트린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등 모순적 정세 판단을 한다. 그리고 우익인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좌우대립이 격화되자 좌익은 궤멸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2. 김기협, 해방일기, 2012
  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연구, 1991
  4.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5.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6.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7.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8.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11.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와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을 종합해서 서술했다. <이관술 1902-1950>에 나오는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피를 자주 토했고 사촌여동생 이차선의 증언에 따르면 피가 쏟아져 수건을 붉게 적셨다.
  12. 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8_05_0020
  13. 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7_06_0050
  14.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5.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6.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7. 박창희, 고문조작 의혹사건
  18. 임성욱
  19. 박창희, 고문조작 의혹사건
  20. 김, 두식 (2018년 11월). 《법률가들》. 창비. 
  21. 박창희, 고문조작 의혹사건
  22. 박창희, 고문조작 의혹사건
  23.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24.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25.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26. 김기협, 해방일기
  27.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28.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29. 안재성
  30. 배문석
  3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2. 조공, 공보부의 정판사위조지폐사건발표에 대해 성명 발표 중앙신문 1946년 5월 17일
  33.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4.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5.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6.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7.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8.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3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0.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2. 배문석
  43.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4. 이하 모든 검경 대화와 법정진술의 출처는 임성욱 박사
  45.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6.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7.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8.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4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50.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5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52. 임성욱
  53. 임성욱
  54. 임성욱
  55. 임성욱
  56. 임성욱
  57. 임성욱
  58. 배문석
  59. 월간『좌파』 제5호 2013년 9월호/혁명가 열전/ 안재성
  60.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61.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62. 임종금, 고문조작의 달인 노덕술
  63.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64. 이관술 수기와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을 종합해서 서술했다. 이관술은 장난기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관술 수기를 보면 1943년에 고문실에서 커피를 물고 있다 뱉었다 등 믿기 어려운 농담을 써놨는데 <이관술 1902-1950>에 나오는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피를 자주 토했고 사촌여동생 이차선의 증언에 따르면 피가 쏟아져 수건을 붉게 적셨다.
  65.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66. 한상철,이영복 공저 (2011년 3월 25일). 〈p125〉. 《내가 쓰는 한국 근현대사》. 서울: 우리교육. ISBN 978-89-8040-940-2. 
  67. 배문석
  68. 배문석
  69. 배문석
  70. 배문석
  71.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72.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73.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74. [임경석의 역사극장‘위조지폐 사건’ 검찰의 유죄 소견을 뒤엎은 김용암 변호사, 변론 이후 합법적 생활 포기하고 러시아행]
  75. 김기협, 해방일기, 2012
  76.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77.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78.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79. 이 당시는 2심제였다.
  80.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81.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82.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83. 임영태의 ‘한국 현대사, 망각과의 투쟁
  84.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85.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86.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87. 임성욱
  88. 임성욱
  8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90. 임성욱
  91. 임성욱
  92. 임성욱
  93. 임성욱
  94.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95.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96. 임경석의 역사극장 냉전시대 명변론의 대가는 처절했네
  97. 임성욱
  98.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9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0.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2.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3.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4. 박창희, 고문조작 의혹사건
  105. 안재성
  106.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06_0080_0010
  107.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8.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0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10.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1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12.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13.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14.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15. 김상구, 『김구 청문회』 1~2, 매직하우스, 2014.
  116. 임성욱
  117. 임성욱
  118. 지운 김철수 구술자료
  119.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120.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121.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122.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123.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124. 고준석, <박헌영>
  125.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26.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27.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28. 김기협, 해방일기
  12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30.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3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32.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33.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134.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3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136. 신주백, 송언필
  137. 안재성
  138.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13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40. 김기협, 해방일기, 2012
  141.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42.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전후사 이야기
  143.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주간조선』, 2365호, 2015.7.13.
  144. 임경석, 냉전시대 명변론의 대가는 처절했네 - ‘위조지폐 사건’ 검찰의 유죄 소견을 뒤엎은 김용암 변호사, 변론 이후 합법적 생활 포기하고 러시아행
  145.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146. 임영태, 과거사 청산은 ‘기억 책임 미래'
  147. 임영태, 과거사 청산은 ‘기억 책임 미래'
  148. 김두식, 법률가들, 2018
  149.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50.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51.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152.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53.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154.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155. 안재성, 여성해방의 길을 찾던 혁명가 이순금
  156.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157.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참고 문헌[편집]

  • 임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 
  • 안재성 (2006년 8월 20일). 〈18. 조선정판사 사건〉. 《이관술 1902-1950》. 서울: 사회평론. ISBN 978-89-5602-651-0. 
  • 한상철,이영복 공저 (2011년 3월 25일). 〈p125〉. 《내가 쓰는 한국 근현대사》. 서울: 우리교육. ISBN 978-89-8040-940-2. 
  • 서중석 (1997년 3월 1일).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 한국정신문화원 현대사연구소 (1999). 〈p258〉.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원 현대사연구소. 
  • 김기협 (2015년 2월 24일). 《해방일기》. 너머북스. 
  • 박갑동 (1998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1996년 3월 1일). 《1945년 남한에서》. 한울. 
  • 고준석 (1992년 2월 20일). 《박헌영》. 도서출판 글. 
  • 임영태.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 
  • 김두식 (2018년 11월 16일). 《법률가들》. 창비. 
  • 박만순 (2020년 7월 1일). 《골령골의 기억전쟁》. 고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