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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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교전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장도영 불명
병력
대한민국 6보병사단 2연대, 7연대, 19연대 중화인민지원군 63군 예하 3개 187사단, 188사단, 189예비사단 약2~3만여명
피해 규모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나 한국의 전쟁 기념관에 의하면 5천 명 가량 사살 추측. 일부 사람들에 의하면 2만 명 가량 사살 및 포로에서 대다수 확인 사살

용문산 전투(龍門山 戰鬪)는 한국전쟁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가평군 설악면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편집]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지키고있었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으므로 중공군이 점령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5월 18일에는 중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당시 장도영 휘하 6사단 중 2연대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에 막강한 물량공세에 후퇴, 전초부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와 합류하였다. 그 후 2연대(1, 2, 3대대 합류)는 전투에 임하며 후퇴하는게 맞지만 후퇴는 하지않고 그대로 진지를 지키며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했다. 이 때 중공군은 착각을 했는데,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를주력부대로 알았던 것이다. 중중국 제 6공군 제, 188 2개 사단에다 군 예비 19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하기까지 이른다. 즉, 중공군 3개 사단이 2연대 1개연대에게격을 감행한것이다. 하지만 2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서 계속 몰려오는 중국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고립된 2연대는 겨우겨우 미군의 항공폭격과 함께 힘겹게 방어하고있었다.

사실 당시 중공군 입장에선 오판을 할만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군이 도하하던 상황에 전초로 올라와있던 6사단 2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도하하던 중공군을 기습 강타를 한 뒤 빠져나간 상태에서 2연대가 우주방어신공으로 저항을 하자 주저항선으로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

1대대와 2대대가 기습강타 후 치고 빠지는 방법을 쓴데다 빠저나오면서 원래 1대대와 2대대가 있던 곳에서 미친듯이 저항을 하기도 했고 야음을 틈타 기적적으로 빠져나와 3대대와 2연대 본부대와 합류를 한 상황이다.

변수[편집]

변수가 한가지 있었다.바로 중공군이 2연대를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6사단의 7, 19연대가 후방을 기습한것이다. 즉,포위하여 2연대를 섬멸할 계획이였던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명 주력군을 몰아넣고 승리하리라 장담했던 중국군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수가없었다.

이 전투의 변수는 중국군 자신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7, 19연대는 중공군이 2연대를 총공격을 하고 있었을 때 기습준비를 철저히 하고있었다.그리고 UN군과 국군의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국군은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추격[편집]

5월 21일 새벽 중공군은 서둘러 퇴각을 하였다. 하지만 공이 국군에게 있었으로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6사단은(2,7,19연대)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중국군은 화천호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그 결과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되거나 6사단에의해 격멸당했다.

전투 후[편집]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중국군은 3개사단 2만명의 병력이 궤멸 하였으며(간혹 용문산대첩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UN군 및 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실행한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전투현리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2차 춘계 대공세로 인해 벌어진 이 전투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중국인민지원군을 궤멸시키는 대한민국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편집]

이승만(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1]

각주[편집]

  1. “호국 영령 희생정신 기려 조국 수호” Archived 2014년 7월 14일 - 웨이백 머신《강원도민일보》2009년 05월 30일 (토)

용문산 전투의 패배로 인해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은 중공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어 휴전 협정을 제의 한게 된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