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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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콜롬비아의 기 콜롬비아
중화인민공화국의 기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임부택
대한민국 김용배
미국 맥스웰 테일러
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

미국 류번 젱킨스
중화인민공화국 펑더화이
병력
제11사단
제8사단
제6사단
제5사단
제3사단
수도 사단
L-20 경비행기 30대
제24군
제54군
제60군
제67군
제68군
산하 12개 사단
피해 규모

1,701명 전사
7,548명 부상
4,136명 실종/포로
총 1,4300 여명 사상
1,428점 적군무기노획


27,216명 전사
38,700명 부상
186명 포로
총 66,000여명 사상

금성 전투한국 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 때, 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중공군과 국군이 치른 전투이다. 7·13 공세라고도 한다.

배경[편집]

지지부진하던 정전 협상이 1953년 6월에 이르러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포로문제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며, 군사 분계선은 전선의 실제 접촉선에 근거하여 6월 16일 판문점에서 새로 그었다.

당시 베이징에서 사무를 주관하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더화이는 휴전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평양으로 출발하였으나 6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단독 결정으로 반공포로 석방이 일어나게 되며 이로인해 조인 직전에 있던 휴전회담은 중단되고 한반도는 다시 긴장 상태로 치달았다.

6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팽더화이는 이승만의 행동에 대한 대응으로 휴전 협정을 미루기로 하고 한국군을 1만 5천 명 정도 더 소멸하기로 판단, 군사 타격을 그 이전까지 양상과는 다르게 한국군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중공군 4개 군 산하 12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의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전투 과정[편집]

국군 5개 사단은 7월 13일에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금성 돌출부의 양견부가 돌파되었으며, 뒤이어 후방의 지휘소(수도사단)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는 등 대혼란이 야기된다. 중공군의 이같은 공세로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하여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6사단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저지한다.

폭우로 중공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다.

전투 결과[편집]

국군은 1,701 명의 전사자와 7,5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외에 4,136명이 사로잡히거나 실종되었다. 실종자의 대부분은 포로가 되어 휴전회담에서 논의된 포로와는 별도로 취급되어 포로 교환 당시에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측에서는 사상자와 부상자를 포함하여 한국군 5만 2783명을 섬멸했고 283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집계하였고 유엔측에서는 중공군이 27,216명이 전사하고 38,700명이 부상당했으며, 186명이 포로가 되었고 1,428점의 무기를 노획했다고 집계했다. 국군은 공세 초반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사로잡히고, 지원을 나온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의 손실을 입었고 아이슬랜드 선 전방의 전 전방의 전초선만을 확보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게 되었다.

중공군은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게 되었지만 군보다 2~3배가 우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가 국군에 비해 3~4배 발생하였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표인 화천 지역까지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정전 협정의 조인만 남겨둔 상태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 협정을 연기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며, 수천명의 귀환하지 못한 국군 포로를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