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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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金炯旭
5.16 군사정변 직후의 김형욱
5.16 군사정변 직후의 김형욱
생애 1925년 1월 16일 ~ 1979년 10월 7일 (55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신천군)
사망지 프랑스 파리(실종. 정확한 사망장소 불명)
본관 김해(金海)
별명 (號)는 봉산(鳳山)
종교 불교
배우자 신영순
자녀 김정한(아들)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49년 ~ 1963년
최종 계급 ROK army Junjang.svg 준장(准將)
근무 육군 제6관구사령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지휘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중앙정보부 부장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중앙정보부장
제6대 대한사격연맹 회장

김형욱(金炯旭, 1925년 1월 16일 ~ 1979년 10월 7일)은 대한민국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이력[편집]

그는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뒤 유신 후반에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며 마찰을 빚다가 1979년 10월 7일파리에서 실종되었고,[1]1984년 10월 8일에 정식으로 사망신고되었다. 1990년 서울지방법원에서도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2005년미국에서 김형욱의 가묘가 발견되기도 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김형욱은 1925년 1월 16일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에 8기생으로 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63년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4년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적극적이고 말없이 열심히 나서는 스타일이었는데 일찍이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박정희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 박정희보다는 육사 동기인 김종필과 친밀했지만 군 복무 시절 특정조직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소신을 지키다가 박정희를 만나면서 박정희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하였다.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육군 제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등을 지냈으나 진급이 늦었고 1960년 5월김종필, 길재호, 오치성 등 육사 8기생 중령 8명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선배 장교들을 타도하려는 하극상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겨우 위기를 넘기고 1961년부터 박정희와 군사 정변을 기획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전후[편집]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중령으로 참여한 후 1961년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 최고위원의 한사람이 된 뒤 내무분과 위원장과 운영기획 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5월 동지회 지도위원ㆍ부정축재 처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1963년 7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을 임명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치 활동[편집]

제3공화국 시절[편집]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일반 시민을 가장하여 야당 후보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퇴를 막았고, 이로써 야당을 분열시켜 야당후보의 난립으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는 10만여 표 차이의 근소한 차이로 이기는 바람에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를 시켜 인민혁명당 사건을 수사, 발표하게 하였으며 이때 도예종을 비롯한 혁신계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무더기 구속 외에도 이들의 구속, 처벌을 거절한 검사들에 대한 김형욱의 압력에 의한 공안검사의 사표 제출 문제와 고문 문제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6월부터 한일협정을 둘러싼 6·3사태와 국회비준 파동 때에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작용했다. 6·3사태를 전후하여 학생운동가들 및 재야인사들, 학원 동태를 수집, 파악하였으며 또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움직여서 김종필에게 2차 외유를 권고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인혁당 사건 조사의 정당성을 주장 '인민혁명당 사건은 바로 6·3사태 배후 인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또한 한일협정 국회비준과정에서도 야당 의원들을 내사, 회유, 협박을 하는 등의 압력을 행사하였다.

외부와의 갈등과 해임 과정[편집]

1965년 대한사격연맹 제6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7년 운동권 단체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를 적발하고 이적행위를 수사하였으며, 1967년 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일명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수사, 7월 8일에 발표하면서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운동가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이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한편 반정부운동에 대해 강하게 탄압하였다.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사건(統一革命黨事件)의 수사를 주관하였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대역으로서 나쁜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박정희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처리했고,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에도 활발히 활동하다가, 국회의원 이만섭이 해임건의안을 박정희에게 전달하고 박정희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야당과 주변의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1969년 10월 20일 박정희는 김형욱을 해임시킨다.

이후, 김형욱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17일유신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자, 그는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때까지 박정희의 정권 밑에서 허수아비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박정희에 대한 깊은 원망을 품었다. 1973년 4월 15일 김형욱은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과 같이 타이완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 뉴욕에 건너가 살았다.

박정희와의 갈등[편집]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정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였다. 1973년 4월 김형욱의 미국 망명 직후, 박정희는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한 바 있다.[2]

계속되는 고위층들의 설득에도 김형욱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7년 6월 2일에는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비리를 폭로했다.[2]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폭로에 나선 이유는 1969년 10월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19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했기 때문이다.[2]

김형욱은 이에 따라 미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한 각종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터뜨리는 나팔수가 됐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를 강력히 비난하고,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했다.[2]

생애 후반[편집]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김형욱은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이어 일본으로 가서 김경재가 쓴 회고록의 출판회를 가졌다. 이 책은 1980년대의 밀리언셀러가 된다.

이후 김형욱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인 윤일균을 만나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고 그해 10월 1일파리에 도착하였다. 7일파리에서 주프랑스 공사인 이상열을 잠시 만난 후 헤어졌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김형욱의 사망설이 나돌자 1984년 10월 8일에 그의 가족들은 사망신고를 하였다.

사후[편집]

2009년 5월 초순에 미국 뉴저지 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김형욱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재미 한국인 안치용이 2009년 9월 21일 밝혔다. 묘비의 내용에 따르면 김형욱의 사망 날짜는 10월 7일이다.[3]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신이 산산조각 났다는 진술이 있는 데다가, 묘비상의 사망일자는 실제로는 김형욱의 실종 일자로서 정확한 사망일자는 아니다. 더욱이 김경재 전 의원은 브레이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의 아들 김정한이 2002년 가을 사망한 후 아들의 묘지 앞에 가족묘를 조성하기 위해 김형욱의 추모비 성격을 지닌 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안다'고 전한 바 있다.[4]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김형욱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TV 드라마[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총선 8대 국회의원 전국구 5번 민주공화당 6,254,921표
48.8%
국회의원당선.png 초선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신동아》
  2. "김형욱 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 하달 오마이뉴스 2005.05.29
  3. ‘실종 미스터리’ 김형욱 중정부장…30년 만에 美 뉴저지 묘지 발견 - PTODAY
  4. 정도원 기자 (2009년 9월 22일). “실종 김형욱 전 중정부장 묘 미국서 발견”. 브레이크뉴스. 

외부 링크[편집]

전임
김재춘
제4대 중앙정보부장
1963년 7월 12일 ~ 1969년 10월 20일
후임
김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