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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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
金桂元
생애 1923년 6월 28일 ~ 2016년 12월 3일 (94세)
출생지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주군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나주
별명 호(號)는 안산(安山)
종교 개신교
배우자 서봉선
자녀 슬하 3남 1녀
친척 김계일(아우)
김계삼(아우)
김계정(아우)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46년 ~ 1969년
최종 계급 ROK army Daejang.svg 대장(大將)
근무 육군본부
지휘 육군참모총장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중앙정보부 부장
대통령 비서실 실장
원효실업 회장
원효실업 명예회장
자민련 특임위원(1999년)

김계원(金桂元, 1923년 6월 28일 ~ 2016년 12월 3일)은 대한민국군인, 정치가, 외교관, 기업가이다. 경상북도 영주 출생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생애[편집]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육군 소위 임관 하였으며, 1969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육군참모총장중앙정보부장을 맡았다. 그 후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하고 주자유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1971년 2월~ 1978년 11월) [1][2] 1978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는데 그 직위에서 재직하던 중 1979년 10.26 사건에 관련되어 육군 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군법회의재판에 회부되어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그는 예비역 육군대장으로 이미 예편한 상태였지만 신군부 세력에 의해 보충역 이등병으로 정정되었다.[3][4] 이후 무기징역형으로 형량이 감형되었고,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1988년 특별사면 복권되었다. 그해 12월 18일 예비역 장군 자격을 회복하였다.[3] 이후 정치에서 손을 뗐다. 그 후 원효실업 회장을 지냈다가 물러났다. 2016년 12월 3일 오후 11시에 숙환으로 타계했다.

가족 관계[편집]

학력[편집]

기타[편집]

12.12 이후 김계원은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의 죄 대신 단순살인죄가 적용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88년 말 예비역 대장 계급이 복권되는 등 완전한 복권이 이뤄졌으나 군인연금지급신청서류 제출을 '국가에 대한 재산권 행사기간(5년)'의 시효를 넘긴 1988년 7월 14일에 하게 된 까닭으로 이후 연금을 한푼도 지급받지 못했다.[5]

김계원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각주[편집]

  1. “駐中國 金桂元씨”. 매일경제신문. 1971년 2월 10일. 1면. 정부는 9일하오 국무회의에서 공석중인 자유중국주재대사에 金桂元(전중앙정보부장)씨를, ...임명하기로 의결했다. 
  2. 외교통상부. 《한국 외교 60년》 (PDF). 523쪽. 
  3. "김계원·윤자중씨 등 장성4명 계급 회복", 한겨레신문 1988년 12월 18일자 11면 사회면
  4. "정승화씨 계급 되찾아", 한겨레신문 1988년 11월 29일자 1면 정치면
  5. 정병진, 《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한국일보사, 1992) 269페이지
전임
김용배
제18대 육군참모총장
1966년 9월 2일 ~ 1969년 8월 31일
후임
서종철
전임
김형욱
제5대 중앙정보부장
1969년 10월 21일 ~ 1970년 12월 20일
후임
이후락
전임
김신
제7대 주 중화민국 대사
1971년 3월 ~ 1978년 11월
후임
옥만호
전임
김정렴
제5대 대통령비서실장
1978년 12월 22일 ~ 1979년 10월 30일
후임
최광수
(5대 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