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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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金弘壹
1961년 당시 김홍일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
1961년 당시 김홍일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
출생일 1898년 9월 23일
출생지 대한제국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리
사망일 1980년 8월 8일 (81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병사
별명 중국식 가명은 왕웅(王雄)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개신교
정당 무소속
부모 김진건(부)
친척 형 2명
복무 중화민국 육군 국민혁명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21년 ~ 1951년
최종 계급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중장
근무 육군사관학교
국방부 제병협동본부 보병학교
육군 경기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육군 제1군단
육군종합학교
육군기갑학교
지휘 육군사관학교 교장
국방부 제병협동본부 보병학교 교장
육군 경기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교장
육군기갑학교 교장
서훈 내역 건국훈장 국민장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기타 이력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신민당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민주통일당 고문

김홍일(金弘壹, 1898년 9월 23일 ~ 1980년 8월 8일)은 중화민국 육군 군인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운동가 출신 대한민국군인정치가이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본관은 법흥이다.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 산남(山南).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어 이름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중국군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를 도와 윤봉길, 이봉창의 거사를 지원하였고, 한국 광복군 참모장을 거쳐 국군 준장으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에는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생애[편집]

독립운동가[편집]

대한제국 평안북도 용천 출생에서 한때 대한제국 경상남도 김해대한제국 경상북도 경주대한제국 한성부에서 각각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1921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국민혁명군 활동[편집]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투신하여 1926년 중국국민혁명군 동로군 소령 참모로서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이후 연대장, 군단 및 집단군 참모장, 사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9년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중앙군 소장에 이르렀다. 1943년에는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32년 백범 김구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요청으로 폭탄을 제작하여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두율명 소장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고, 중장(중국 국부군의 중장은 2성 장군)으로 남경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국군 복무[편집]

장군으로 입대[편집]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었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와 막역한 사이이자 함께 광복군에 참여하였던 이범석 당시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그의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고 특별히 육군 준장으로 임관하였던 것인데 이는 국군에서 최초임관을 장군부터 시작한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가 이승만의 미주파가 아니라 중국에서 김구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범석과 개인적으로 막역한 사이였다는 점은 그의 군생활 내내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고 이승만은 그에게 제대로 된 보직을 주지않고 한직으로만 돌게 하는등 끊임없이 그를 견제했다. 6ᆞ25 당시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던 유재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홍일은 장교들에게 전술학을 강의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그를 주요보직에서 소외시켰고 심지어 전쟁중임에도 납득할 수 없는 보직만을 주다가 끝내는 신성모의 모략으로 강제예편시키는 등 푸대접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순신에게 했던 대우를 연상시키는데 그래도 선조는 이순신을 왕명을 어긴 죄로 체포하기 전까지는 가능한한 최고의 예우를 해주려고 애썼다. 이순신을 위해 3도수군통제사라는 없던 직책을 신설하여 임관시키고 정2품 정헌대부라는 일찍이 수군으로서는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최고의 품계를 주는 등(이때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이순신에게 1품의 품계를 하사하려 했고 대신들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그가 동인의 영수 유성룡의 친구임을 감안한 서인의 영수격인 송강 정철이 나서서 "일개 뱃사람에게 일약 1품의 품계를 하사하심은 너무 과한 처사"라며 제동을 걸자 선조도 이를 받아들여 정2품의 품계를 하사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최고의 대우를 해줬고 라이벌 원균을 육군으로 전보발령내는 등 마음껏 싸울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홍일의 보직을 제한하여 그에게 싸울수 있는 기회자체를 제공하지도 않았고 원균을 능가하는 간신인 국방장관 신성모로 하여금 그를 모함하도록 하여 강제예편시킴으로써 어찌보면 선조보다 더 악질적인 대우를 하였다고 볼 수있는 것이다. 흔히들 일본육사 출신들의 자질이 우수했다고 하는데 일제는 정치적 이유로 조선인들의 일본육사 입학을 극소수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조선인으로서 어지간한 수재가 아니면 일본육사에 들어가기가 불가했던 것은 맞지만 조선인이 일본육사를 졸업해도 절대로 보병지휘관으로 임관시키지 않았고 공병ᆞ보급ᆞ전사편찬 등 비전투병과로만 배치하였고 기껏해야 포병장교 정도로만 임명하였던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보병지휘관을 역임했던 인물은 1912년 입학자였던 김석원 정도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수많은 초급장교들이 소모품으로 죽어나가자 육사의 입학정원을 2000명까지 늘렸지만 그 와중에도 조선인 입학생을 3~4명 정도로만 제한하였고 무수히 많은 조선인 대학생들을 학병장교로 징발하였으나 역시 경리ᆞ행정ᆞ공병 등 비전투병과로만 발령을 내었던 것이다. 조선인은 어떤 이유로든 일본군의 보병 지휘관을 맡길수 없다는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육사 출신이든 학병장교 출신이든 간에 대부분의 조선인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소대조차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후일 결정적으로 한국군의 전력약화 요인이 되었다.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계급인 일본군 중장까지 올랐던 홍사익의 경우도 그가 맡은 보직은 군사편찬ᆞ첩보수집ᆞ군견훈련소장 등 비전투병과에만 있었으며 한번도 보병지휘관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가장 마지막에는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장으로 있다가 종전후 현지에서 미군에게 전범으로 체포되어 부하들의 미군포로학대행위에 대한 최종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 6ᆞ25 전쟁이 발발했을때 한국군의 실질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할수 있는 지휘관은 총참모장(참모총장) 채병덕 소장과 참모부장(참모차장) 김백일 대령 그리고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 단 세 사람이었는데,해방당시 채병덕은 일본군의 경기도 부평 병기창의 소좌(소령)이었고 김백일은 당시 만주군 대위였는데 일본군의 보조부대였던 만주군은 빨치산 토벌임무에만 투입된 전투경찰 규모정도의 군대였다. 또 작전국장 장창국은 일본육사 1942학번으로 해방당시 일본육사 4학년으로 소위임관도 못한 상태였다. 특히 그는 전쟁발발 전날 미고문단과의 술자리에서 과음으로 늦잠을 자서 전쟁당일 새벽에 전군에 비상령이 걸린 상황에서 오전10시에야 허겁지겁 육군본부에 달려나왔던 인물이다. (국방부 발행 <한국전쟁사>에는 6.25 발발 당일 그의 출근시간이 오전10시였다고 되어있으나 일부 목격자에 따르면 당일 그가 육군본부에 허겁지겁 달려나온 시각은 오후2시가 넘어서였다는 증언도 있다.) 이런 인물들로 인민군의 남침을 당했으니 국군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대국민담화를 통해 "제갈공명이 참모총장으로 있고 장비가 총사령관을 한들 저 공산군의 탱크와 대포와 장총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면서 패전의 불가피성을 변명하였으나 과연 그가 평소 전쟁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정황상 인민군이 여러차례 남침의 징후를 보였는데도 군 지휘부에 의해 번번이 묵살된 점,6ᆞ25 초기 형편없는 작전능력으로 개전3일만에 전체병력의 4분의 3을 망실했던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이 애당초 2대총참모장 재임시 그의 친동생이 개입된 남북불법교역 사건으로 불명예퇴진했음에도 불과 몇 개월만에 그것도 전쟁발발 2개월을 앞둔 시점인 1950년 4월에 제4대 육군총참모장에 재임명됨으로써 전쟁초기 국군의 도미노붕괴를 자초한점 그리고 전쟁발발후 아직 미군참전이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이 소육린 주한대사를 통해 이승만에게 중국국부군 33,000명의 파견제의를 했음에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점 등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승만이 군통수권자로서 최선을 다하였는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드는것이 사실이다. 이때 이승만이 장개석의 국부군 참전제의를 왜 거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것이 없으나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일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만일 국부군이 참전하게 되면 중공군의 참전을 유도할 것을 우려하여 장개석의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후일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할 무렵 중공측이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면 중공군이 참전할 것"임을 거듭 경고했음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승만이 국군 지휘부에 단독북진을 명령한 것을 상기한다면 앞뒤가 맞지않는 처사인 것이다. 아마도 이승만은 이때 국부군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 장개석과 가까운 김구추종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부활할것을 우려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이때 국부군이 참전했다면 이들이 중공군의 전술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의 중공군 참전은 불가했을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승만의 정치적 고려에 의한 이러한 결정들은 어쩌면 초반에 쉽게 끝낼수 있었던 전쟁을 너무 장기적으로 어렵게 끌고간 측면이 있었다. 특히 전쟁발발을 불과 9일 앞둔 1950년 6월 16일 용산의 육군참모학교에서 신성모 국방장관 참석하에 육군의 주요지휘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김홍일을 비롯한 대부분 장성들이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므로 대책을 세워야한다"고 강력히 건의를 했음에도 신성모와 채병덕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군은 일당백이다. 만일 적이 남침한다면 천배 만배로 복수하여 북진통일을 이루고야 말것이다"면서 황당한 발언과 지나친 낙관론으로 제기된 문제점들을 덮어버렸음에도 이승만은 계속해서 이들을 중용하려 했다. 결국 채병덕은 전쟁초기 전선시찰차 나왔던 맥아더가 너무나 한심함을 느껴 이대통령에게 해임건의를 하여 정일권으로 교체되었고 신성모는 그이듬해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해 국민여론이 들끓자 인책사임하여 이기붕으로 교체되었는데 이승만은 물러난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수석대표로 임명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런데 신성모는 국방장관을 사임하기 전에도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한 김백일 장군의 추도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면서 "만일 늙은이들에게 군의 지휘권을 맡겼다면 우리들은 벌써 부산 앞바다로 들어갔을것"이란 망발을 하여 현직 국방장관임에도 김홍일ᆞ이응준ᆞ신태영등 원로장성들로부터 연서로 된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전쟁초기 이승만은 어쩔수없이 김홍일을 1군단장에 잠시 임명하여 한강방어전을 지휘하도록 하였고 이 기간동안 김홍일은 인민군의 한강도하를 7월3일까지 저지하여 유엔군이 투입되어 전선에 배치될때까지 시간을 벌어준다. 당시 김홍일은 외국군에서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국군 내의 유일한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위기를 넘기자 김홍일은 재빨리 해임하여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전쟁초기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육사학생들까지도 모조리 총알받이로 전장에 내보내 소모시키는 바람에 육사는 사실상 폐교상태여서 우선 급한대로 부산 동래에 육군종합학교를 만들어 단기교육으로 군 장교들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무렵 집권 자유당의 2인자로 떠오른 이범석은 이승만의 위치를 크게 위협하고 있었고 이승만에게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마침내 자유당 내에서 대대적인 이범석계(족청계)숙청작업이 벌어졌고 군내에서도 이범석을 따르는 장교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족청계 쿠데타설에 연루되어 김홍일 또한 강제예편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1개월 후 이승만은 아무래도 너무 했다 싶었던지 김홍일을 임시경무대로 불러 사과한 후 소장계급으로 예편한 그에게 날짜를 소급하여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군인사법 위반이었다. 당시 군인사법은 예편한 군인을 현역으로 다시 복귀시킬수는 있어도 이미 예비역으로 물러난 민간인에게 군의 계급을 진급시킬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승만이 김홍일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기 위해서는 이미 예비역이 된 김홍일을 다시 현역에 편입시킨후 진급을 시켜야 함에도 그것이 찝찝하니까 예비역에 있는 인물에게 진급날짜만을 군복무 당시로 당겨 계급만 올려준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실제로 육군은 공식적으로 이날의 김홍일의 진급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공식인사기록에는 김홍일이 소장으로 전역한것으로 되어있으며 국군의 최초 중장진급자를 김홍일이 아닌 1952년 진급된 이종찬으로 인정하고 있다.

6.25 전쟁[편집]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 그는 국방부에서 개최된 군원로회의에서 서울 포기 및 한강이남에서 방어선 구축안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1] 이후 그에게 주어진 직책이 없었기에 참모학교로 내려가 있었다. 이후 전황은 점점 심각해졌고, 결국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국군 5개사단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강교를 폭파시켰다. 이로써 국군의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고, 이로인해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전황이 심각해지자 채 참모총장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후 김홍일 소장은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김홍일 소장의 덕분에 서부지역의 육군은 병력을 수습하고 편제를 재편할 수 있었고, 시흥사는 곧바로 제1군단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견제덕분에 1950년 개교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났고 이듬해 3월에는 국방장관 신성모의 모략으로 족청계 쿠데타설에 연루되어 강제예편당했으나 이승만의 배려로 주중화민국(대만)대사에 임명되어 10년간 근무했다.

정치 활동[편집]

중국 대사[편집]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주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하였다.[2] 중화민국 대사로 있던 1960년 4월 4·19 혁명이 발생하자, 김홍일은 그 원인으로 최고조에 달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악용한 기인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번 사태가 극히 불행한 사건임을 시인하면서 중화민국에서 교육받은 대사는 기자들에 대하여 이번 사태는 6개 도시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진정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적색음모를 방지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김 대사는 본국 정부를 옹호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김 대사는 그가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현재의 이 폭동이 어느 정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조작에 의한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부언하였다.[3], 1960년 무렵 모종의 정변계획을 세우고 강원룡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4]

5.16 군사 정변[편집]

그 뒤 5.16 군사정변 이후 5월 20일 군사혁명위원회[5] 가 구성되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고 혁명내각의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가 아니라 김홍일과 같은 평안도 출신이었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6] 그러나 그덕분에 혁명세력의 내분이 일어나 박정희 세력이 장도영 세력을 거세시키자 김홍일 또한 밀려나게 되었다. 그후 박정희 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여 야당 정치인의 대열에 섰다.

야당 정치인[편집]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면서 정계에 투신하여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으나 당권이 김학규 등에게 넘어가고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한국독립당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1966년 12월 24일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추진위원으로 위촉되었다.[7]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만년[편집]

서독을 방문중인 한국의 국회의원 6인 중(오른쪽에서 두번째) - 1970년 11월 10일

1971년 5월 10일에는 운영위원회를 열고 유진산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8] 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내분을 겪은 뒤 1972년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광복회 회장을 거쳐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79년 양력 1월 중순부터 노환을 앓다가 1년 7개월 후인 1980년 8월 8일 향년 83세로 타계하였다.

수상 경력[편집]

연보[편집]

일화[편집]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으며 이때부터 그를 오성 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얘기가 1985년 KBS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5성장군 김홍일>(전세권 연출)에 나오는데 정작 이 드라마의 원작자인 《5성장군 김홍일》의 저자인 박경석 장군(작가,한국군사평론가협회장,예비역 준장,육사 생도2기생으로 김홍일의 육사교장 시절 제자)에 따르면 정작 자신은 그런 내용을 쓴 사실이 없음에도 드라마제작과정에서 그런 내용이 추가돼 나갔다는데 알고 보니 당시 정호용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박경석 장군과의 전화인터뷰에서 확인:010ㅡ2435 ㅡ35xx) 그렇지만 이는 완벽한 허위사실일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는 이승만의 이범석에 대한 증오와 견제가 극에 달할때였는데 김홍일은 바로 그 이범석의 죽마고우이자 함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생각은 여야를 막론하고 자기의 대통령직 수행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은 이범석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집권 자유당에서 이범석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들을 동원했는데 그 일환으로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선출하자 관권을 총동원하여 이범석 낙선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 이범석과 견원지간이었던 국무총리 장택상이 회고한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 따르면 자신이 이범석의 낙선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만 대통령 이승만이 선거관계자들 앞에서 "함태영 목사 참 양심적이지"정도의 말만 했었는데 그것이 먹혀들여 무소속 함태영의 부통령 당선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회고했으나 실제로는 국무총리 장택상과 내무장관 김태선이 나서서 전국의 도지사 ᆞ 시장ᆞ군수ᆞ경찰서장들에게 함태영 당선을 위해 관권을 총동원할 것을 지시하였던것이다. 단 이 과정에서 이범석의 측근이었던 진헌식 충남지사만은 제외되었는데 그결과 전국적으로 함태영이 이범석을 크게 이긴 상황에서 충남에서만은 오히려 도지사 진헌식의 독려로 이범석이 함태영을 크게 앞섰는데 그러나 이또한 관권이 선거에 개입되었음을 입증하는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인 이범석은 자신의 부통령 당선을 확신하고 오히려 표차가 너무 벌어지면 역풍이 불것을 우려해 스스로 선거운동을 자제했다고 하니 정말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이로써 일단 이범석의 기세를 꺾은 이승만은 그 후 1953년 9월에는 자신이 직접 "자유당 내에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족청계를 축출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이범석계의 축출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런 정서를 가진 이승만이었기에 그런 그가 이범석의 절친이자 죽마고우였던 김홍일에게 비록 빈말일 망정 그런 따뜻한 말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특히 유례가 없는 10년씩이나 긴 외국대사 생활을 하게 한것도 어쩌면 김홍일이 국내에 있을 경우 비록 예비역이라 해도 군내에 어떤 영향을 끼쳐 이범석을 옹립하는 쿠데타기도 가능성을 사전차단하기 위한 의도였을수 있다.(이명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 논문 《이승만의 군부장악책 연구》)

학력[편집]

저서 및 논문[편집]

저서[편집]

  • 《대륙의 분노》

논문[편집]

  • 《국방개론》
  • 《군대정신교육》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7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마포구) 7대 신민당 43.79% 44,506표 1위 마포구 국회의원 당선
제8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8대 신민당 44.4% 4,969,050표 전국구 4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9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중구) 9대 민주통일당 21.38% 28,447표 3위 낙선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p 67-68
  2. 외교통상부. 《한국 외교 60년》 (PDF). 523쪽. 2016년 3월 3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 “共産主義者들惡用”. 동아일보. 1960년 4월 22일. 
  4.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5. 나중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변경
  6. “革命內閣構成을發表”. 동아일보. 1961년 5월 21일. 
  7.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6) 347페이지
  8.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111페이지

참고 문헌[편집]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국방부, 1997)
  •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대한민국 국방부, 1955)
  •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법정, 1986)
  •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육군본부, 1992)
  •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병학사, 1987)
  •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국방부, 1975)

외부 링크[편집]

전임
최덕신
제7대 육군사관학교장
1949년 1월 15일 ~ 1950년 6월 10일
후임
이준식
전임
이범석
제3대 주 중화민국 대사
1951년 10월 ~ 1960년 6월
후임
백선엽
전임
정일형
제7대 외무부 장관
1961년 5월 21일 ~ 1961년 7월 21일
후임
송요찬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박순천
제7대 국회의원(서울 마포구)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무소속신민당
후 임
노승환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임
유진산
신민당 대표 권한대행
1971년 5월 12일 ~ 1971년 10월 16일
후임
김홍일
전임
김홍일
(대표 권한대행)
신민당 대표
1971년 10월 16일 ~ 1972년 9월 28일
후임
유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