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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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 사건( - 特使 事件)은 1907년 고종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였던 사건이다.

배경[편집]

1907년 고종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 하고자했다. 헤이그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을사늑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경과[편집]

고종1907년 4월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평화회의(정식 명칭은 헤이그 회담)에 나가 자주권을 침해받는 대한제국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조처했다. 이에 따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나 차석보의 아들과 함께 5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다.

6월 4일, 그들은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과 합류한다.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막되었다. 6월 19일 그들은 베를린에서 각국의 수석 대표에게 보내는 주장문(항고사라고 불렀음)을 인쇄한다. 6월 25일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에 도착했다.

또한 고종호머 헐버트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에 적극 지원하도록 밀사활동을 밀명을 통해 부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제국의 감시망에서 헤이그 특사가 무사히 헤이그에 도착하도록 하였으며, 일본제국의 한국 대표의 만국 평화 회의 참석을 방해 할 것을 직감한 호머 헐버트스위스 프랑스를 경유하면서 한국 대표들이 회의 참석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방 언론사들과 접촉하도록 지원했다.

6월 28일, 밀사는 "항고사"와 함께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회의 참가국위원회에 보낸다. 같은 날짜의 비공식 회의보 《Courrier de la Conférence》 지에 "항고사"가 게재된다. 다음 날인 6월 29일 밀사는 회의를 주재한 러시아 제국 수석 대표 넬리도프 백작(Aleksandr I.Nelidov)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6월 30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를 찾아 가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7월 1일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 장관에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이 시점에서 밀사의 존재는 그들이 접촉한 열강 측에서 일본 측에 통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제국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같은 제국들인 서구의 방관으로 대한제국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러일 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특사 파견을 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에서 미국 언론윌리엄 T. 스테드와 처음 접촉하였다. 7월 8일 그의 주선으로 한국 대표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주의재단>(Foundation for Internationalism) 집회에서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실력으로 대한제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대한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이위종의 프랑스어 강연 외에 역시 스테드의 알선으로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윤용구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영어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강연을 했다. 이들의 연설 내용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대한제국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뿐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7월 9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면에 《대한 조치 단행할 시기-헤이그 한인의 괴운동》이란 제목으로 일본 정부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엄격한 대응을 촉구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7월 12일, 이위종이 상트페테부르크로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7월 13일, 이 날 타카이시 기자가 타전한 기사에서 이준이 악성 종기가 안면에 나와 중태에 빠졌다고 보도를 했다.[1] 7월 14일 저녁, 투숙해 있던 드 용 호텔에서 이준이 사망했다. 이틀 뒤인 7월 16일 이준을 가매장에 동반했던 이상설과 호텔의 주인이 참례를 했다. 7월 18일 이위종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헤이그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 19일, 이상설과 이위종이 런던으로 출발하기 위해 헤이그를 떠났다. 그후 뉴욕으로 향했고, 이날 헐버트가 뉴욕에 도착했다.

9월 6일, 이준의 장례식이 열렸고, 이준의 동생과 대한제국의 외교관, 친구, 헤이그 YMCA 회장 등이 참석을 했다. 10월 18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폐회되었다.

이준의 죽음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홧병에 의한 분사설’, ‘단독 감염설’(일본 정보문서 기록), ‘자살설’, ‘독살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은 만국평화회의 수석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쓰즈키 케이로쿠(都筑馨六) 특명 전권 대사가 이 사건에 대응했다. 또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에서 파견된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真五郎)는 연일 특파원 전기로 현지의 정세를 전했다. 이때 타카이시는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밀사와 면담을 했다.

결과[편집]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어 순종이 즉위하고 4일 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59쪽. ISBN 978-89-86072-03-7. 

바깥 고리[편집]

  1. 「密使の一人李儁は重病」大阪毎日新聞、明治40年7月1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