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 평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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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 평화 회의(萬國平和會議)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이다. 네덜란드는 17, 18세기에 해양 진출이 활발해져서 신흥 해양강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때에,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로티우스를 배출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네덜란드에서 국제 평화 회담이 열리게 된다.

제1차 만국평화회의[편집]

1898년 8월 29일, 러시아의 차르인 니콜라스 2세가 평화 회의를 제안했다. 니콜라이 황제와 외무장관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는 이 회의가 성사되는데 기여했다. 회의는 황제의 생일인 1899년 8월 29일 개최되었다. 협약은 같은 해 7월 29일 서명되었고, 1900년 9월 4일 발표되었다.

네덜란드의 법학자 토비아스 아세르1899년에 열린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상설중재재판소의 결성에 기여한 공로로 191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13년 사망 전까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의 설립을 도왔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편집]

헤이그 특사 사건[편집]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동의를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객사했는데, 만국평화회의 불참으로 인한 울분을 못 이겨 앓다가 사망한 병사가 사인이었다. 그 증거로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등을 쓰고 1907년 7월 15일자 기사에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 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등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이준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