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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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관계의 역사는 매우 깊은데, 과거부터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양나라, 당나라 등과 문화, 무역 교류를 하였다. 고려는 정치적으로 송나라와 밀접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 민족을 견제했다. 또한 양국은 빈번한 교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명나라·청나라에 대해서 사대 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청나라가 청일 전쟁에 져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에 이르자 이러한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게 되었다.

1949년대한민국중화민국과 수교하였으나, 중화민국국공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대한민국의 대중국 외교는 타이완 일원으로 제한되었다. 1980년대 말에 돼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은 기존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외교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도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상호 간의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으며, 그 결과로 대한민국은 1992년 8월부터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 이전[편집]

기원전 3세기 말, 부여는 현재의 지린 성 창춘 시를 중심으로 랴오닝 성, 헤이룽장 성 일대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부여는 서쪽으로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는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선비(鮮卑)과 접하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한반도 남서부에 있던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1] 전한 무제고조선을 멸망(기원전 108년)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낙랑군 · 진번군 · 임둔군 · 현도군의 4군과 그 속현을 설치하였다.(→한사군)

삼국 시대[편집]

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으로부터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2]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전진에서 건너와[3]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여[4]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전진, 고구려) 중국에서 비롯한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었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원리가 되었다. (→한국의 유교)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의 교역은 주로 상업이나 외교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676년의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며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당나라는 신라의 주 교역 상대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단, 마포, 금, 은, 인삼, 약재, 말, 모피, 공예를 수출했고, 비단, 약재, 공예, 서적을 수입했다.

고려와 송나라[편집]

고려는 정치적으로 송나라와 밀접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 민족을 견제했다. 또한 양국은 빈번한 교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고려가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귀족들의 애호품인 능견(綾絹)·자기·약재·악기·향료·문방구(종이·붓·먹) 등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자기·서적은 각각 고려의 청자와 목판인쇄술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밖에 다른 물품 수입은 귀족의 사치풍조를 더욱 조장시켰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금·은·구리·인삼·송자(松子)·모피 등의 원산품과 능라(綾羅)·저마포·백지(닥나무 종이)·금은동기·부채·금은장도, 그밖에 종이·붓·먹 등 가공품이 많았다.

조선과 명나라, 청나라[편집]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寧)·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5]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이 행해졌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청이 청일 전쟁에 져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에 이르자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게 되었다.

조공과 사무역[편집]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金銀)·마필(馬匹)·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등이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宦官)의 요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의 세공은 커다란 부담이 되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의 사용을 제한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때문에 금은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약재·서적·문방구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으로서 그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

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5]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편집]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주었는데 이는 현재에 와서 밝혀진바 중국의 원병은 조선을 도와주지 않고 일본, 조선 두나라의 전쟁상황을 중국이 개입하여 일본에 대한 견제를 하기 위함이였고 중국의 군대는 원병의 업적을 조작하기 위해 조선 민간인을 학살하고 수급을 걷어 들였다 .그당시 명나라는 내부갈등으로 인한 혼란과 국려의 약화로 인해 만주 지방에서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냈으나 명나라의 주력부대와 함께 싸움에 지고 말았다. 이때도 도원수(都元帥) 강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부득이 원병을 보내게 된 사실을 말하여 두 나라 사이에 별 일은 없었다.

그 뒤 후금은 더욱더 세력을 떨치게 되었는데도 국내에선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쓰자, 후금은 명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에 조선에서는 마지못해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 뒤 후금의 태종은 더욱 국력을 확장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淸)으로 고쳤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강화도를 함락시키니,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여 군신의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며 청에 대해서 해마다 막대한 세공을 보내기로 하니, 이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일컫는다. [5]

청일 전쟁 이전[편집]

조선병자호란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서 국론(國論)이 일치하지 않다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상으로는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명을 추모(追慕)한 반면, 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군신 간에 여러 차례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이 논의되었을 정도로 깊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사신의 내왕은 빈번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고도로 발달한 청나라의 문화와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 문물이 한국에도 전래되어 실학사상을 일으키게 하였고, 두 나라 학자들 사이에는 활발한 문화적 교류도 있게 되었다. [5]

임오군란이 일어나(1886년 7월(음력 6월)) 일본을 배후에 두고 있던 민씨 일족이 몰락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청나라는, 마침 임오군란 당일인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월 19일)을 핑계로, 음력 6월 27일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월 20일(음력 7월 7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吳長慶)이 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음력 7월 12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음력 7월 16일) 왕십리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임오군란)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대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곧,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조선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6]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청일 전쟁 이후[편집]

한편 청이 청일 전쟁에 져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에 이르자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게 되었다. [5] 1897년 10월 12일, 고종의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1898년 8월 13일 청은 쉬서우펑(徐壽朋)을 대한제국 주재 공사로 파견했고, 4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대한제국도 이에 맞추어 1902년 10월 31일 박제순을 청국 주재 공사 즉,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로 파견했다. [7]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공식적으로 단교하였다. 1907년 일본 제국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간도 협약으로 한중 간의 영토 분쟁 지역이던 간도가 공식적으로 청나라로 편입되었다.

한국의 독립 운동과 중국[편집]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중화민국한국의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장제스상하이 시에 거점을 두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 및 단체를 지원하였다. 화북의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45년 이후[편집]

1948년 대한민국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서로 수교하였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민국과 수교하지 않고 있다가 국공 내전 이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1992년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1989년 5월소비에트 연방미하일 고르바초프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1989년 12월냉전의 종식이 선언되자, 1992년 8월 24일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것을 발표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년대 이래로 곧줄,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맺지 않은 채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김부식 (1145) 혁거세 거서간 조(條) "[...]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 ([..]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2.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二年 夏六月 秦王苻堅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3.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四年 僧阿道來 
  4.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五年 春二月...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중국과의 관계
  6. 박상순, 〈在韓中國人의 法的地位에 관한 硏究 : 臺灣系中國人을 中心으로인천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1) v쪽. “재한중국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국인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후의 일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당시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이 일본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청국군인을 파견하였다. 이때 청국군인을 따라온 청국상인이 국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7.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1~12쪽. ISBN 978-89-91965-12-6. 한․중 수교 95년 전인 1897년 10월 12일, 19세기가 저물어가던 당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종의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그 다음 해인 8월 13일 청(淸)은 쉬서우펑(徐壽朋)을 대한제국 주재 공사로 파견했고, 4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대한제국도 이에 맞추어 1902년 10월 31일 박제순(朴齊純)을 청국 주재 공사로 파견했다.  및 이 책의 주석 楊軍 王秋彬, 《中國與朝鮮半島關係史論》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6, 197쪽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