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럼 스티븐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더럼 스티븐스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 2월 1일 ~1908년 3월 25일)는 미국의 외교관으로 한국식 이름은 수지분(須知芬)이다.

생애[편집]

1851년 미국 오하이오 주 태생으로 19세 때 오버린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법리과·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처음 미 국무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주일 미국공사관에서 1년간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됐다.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외무성 고문에 촉탁으로 고용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일제의 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일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한성조약’체결 때 이다. 일본측 전권대사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따라 내한한 그는 이노우에를 뒤에서 자문한 공로로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초빙에 관한 협정서를 강제 체결 할 것을 기인하여 12월 27일 대한제국 외부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티븐스는 이후에도 제2차 영·일동맹과 뒤이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을사조약대한제국 합병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친일 발언들을 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때도 그는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살해[편집]

1908년 3월 스티븐슨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한제국을 비하하고, 일본의 보호통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친일 발언으로 미국 내 수많은 재미 한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이때 의병대장 이인용이 재외국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스티븐슨이 탄 배와 함께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동포들이여, 우리는 일치단결해서 조국에 우리를 바치고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그대들은 야만스러운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고해야한다'고 호소하고 있으며, 일본인들, 그들의 첩자들, 동조자들, 야만적인 군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이민단체인 공립회와 태동회 회원들은 일요일 저녁에 모여 일본과 일본의 통치를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며 격렬한 어조로 성토하였고,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의논하였다.

1908년 3월 22일 저녁 페어몬트 호텔 로비에서 이민사회 대표인 이학연, 문양목, 정채관, 최유섭은 스티븐스에게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 정확한 것이지 물었다. 스티븐슨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그에게 커다란 등나무 의자 여러개를 던졌고 그들은 호텔에서 쫓겨났고 스티븐슨은 얼굴 몇 군데를 베였다. 다음날인 23일 오전 9시 30분경 워싱턴으로 가려고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에 왔다가 재미교포 전명운의 저격과 폭행을 받았고 뒤이어 도착한 재미교포 장인환의 저격, 처단으로 2발의 총을 맞고 2일 뒤 샌프란시스코 성프란시스 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했다. 사망 이후 그의 사체는 4월 2일 이 병원을 출발, 6일 워싱턴에 도착됐다. 장례는 8일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으며 워싱턴 온비루묘지에 묻혔다. 이튿날 거행된 추도식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조화와 메이지 일왕의 조전 및 조화,그리고 200여명의 조문객이 참여한 가운데 거행됐다.

일본 제국 정부는 장례식에서 스티븐스에게 훈1등 훈장을 추서했으며, 유족에게 조의금으로 15만원을 전달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