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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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사적, 다자이후 정청 유적

다자이후(일본어: 大宰府 (だざいふ) 다자이후[*], 대재부)는 7세기 후반, 규슈 지방의 지쿠젠 국(筑前国)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기관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한자 표기가 太宰府로 되어 있다. 설치 당시에는 오호미코토모치노츠카사(おほみこともちのつかさ)라는 일본식 훈독법으로 불렸다. 「다자이후(だざいふ)」라는 음독은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남아 쓰이고 있다.

명칭[편집]

「다자이」 즉 「오호미코토모치(大宰)」란, 고대 일본에서 지방 행정상의 중요한 지역에 설치되어 몇 개의 구니(国)에 걸치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던 일종의 지방행정장관이다.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이전까지 기비노 오호미코토모치(吉備大宰, 덴무 천황 8년 즉 679년) · 스오노쇼료(周防總令, 덴무 14년 즉 685년) · 이요노쇼료(伊予総領, 지토 천황 3년 즉 689년) 등의 여러 곳이 있었다. 후대의 《속일본기》의 몬무 천황 4년(700년) 10월조 기사에 「지키다이이치(直大壱)인 이소노카미노아손 마로(石上朝臣麻呂)를 지쿠젠소료(筑紫総領), 지키코산(直広参)인 오노노아손 모노(小野朝臣毛野)를 다이니(大弐, 차관次官)로, 지키코산인 하타노아손 무고베(波多朝臣牟後閇)을 스오노소료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소료」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701년다이호 율령(大宝律令)에 의해 다른 오호미코토모치는 폐지되고 규슈의 다자이노소치(大宰帥)만 정부 기관으로서 확립되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자이후」라고 하면 규슈의 그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그 관할 영역은 오늘날의 다자이후 시쓰쿠시노 시(筑紫野市)에 달한다. 유적은 일본의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헤이조쿄(平城京) 및 나가오카쿄(長岡京) 유적에서 발굴된 목간에는 筑紫大宰, 大宰府라는 표기가 확인되고 있으며 역사적 용어로서는 기관명인 「大宰府」라는 표기를 자주 쓰지만, 현존하는 도시명이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시는 신사(다자이후 천만궁)에서는 중세 이후에 등장한 「太宰府」라는 표기를 이용한다. 앞글자만 떼고 '宰府'로 쓰기도 한다.

또한 일본 현지의 사적은 '도후로 아토(都府楼跡)' 또는 '도토쿠후 코시(都督府古址)'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개요[편집]

다자이후가 위치한 기타규슈는 예로부터 중국 대륙 및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일본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받을 시에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의해 외교면에서는 해외의 사절을 영접할 고로칸(鴻臚館)이 지금의 하카타(博多) 연안에 설치되었고 다자이후의 통괄을 받았다. 군사적인 면에서 사키비토(防人)를 통괄하는 사키비토 쓰카사(防人司) · 주선사(主船司)를 두어, 일본 서부 지역의 방비를 맡았다.

다자이후는 외교 및 일본 서부 지역의 군사 방위를 주된 임무로 하면서, 사이카이도(西海道) 9개 쿠니(지쿠젠 · 지쿠고 · 부젠 · 분고 · 히젠 · 히고 · 사쓰마 · 휴가 · 오스미)와 3개 섬(이키·쓰시마·다네[1])에 대한 죠(掾) 이하의 인사 및 4도사의 감사와 같은 행정 · 사법 업무도 맡았다. 그 주어진 권한의 크기는 한때 「도노 미카도(먼 곳의 조정)」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북부 규슈 6개 구니에서 징발된 사이카이도의 사정(仕丁)들은 모두 다자이후로 소집되었는데, 그 가운데 4백 명 정도는 다자이후 관인들의 지리키(事力)가 되거나 주선사 등에 배치되었다.[2] 이밖에 간제온사(觀世音寺) 축조에 투입되기도 했다.[3] 또한 이 무렵부터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오는 상선들과의 사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자이후의 중심 치소였던 관청의 총면적은 약 25만 4000평방미터이다. 주된 건물로는 정청·학교, 세금을 보관하는 장사(藏司)·세사(稅司), 의료를 맡은 약사(藥司), 장인들이 모인 장사(匠司)·수리기장소(修理器仗所), 손님 접대를 맡은 객관(客館), 군사를 맡아보는 병마소(兵馬所), 주주사(主厨司), 선박을 맡은 주선소(主船所), 치안을 맡은 경고소(警固所), 다자이후를 방어하는 오노(大野) 성의 관리를 맡은 대야성사(大野城司), 직물 염색을 맡은 공상염물소(貢上染物所), 종이를 만드는 작지(作紙)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 확인된 유적은 적다.

1921년 3월 3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53년 3월 31일에 특별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1970년 9월 21일과 1974년 6월 29일에 추가 지정이 이루어졌다.

직원[편집]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 불리며, 종3위에 해당하는 다이나곤(大納言) · 주나곤(中納言)급의 정부 고관이 겸하고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에는 주로 친왕(親王)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실제로는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석인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帥)가 실무를 맡았다(다만 조정의 대신이었던 자가 다자이곤노소치로 좌천되었을 시에는 실무 권한은 없었다). 소치나 곤노소치의 임기는 5년이었다. 소치 및 곤노소치 아래에는

  • 스케(貳): 다이니(大貳)·쇼니(少貳)가 있었다.
  • 죠(監): 다이겐(大監)·쇼겐(少監)이 있었다.[4]
  • 사칸(典): 다이텐(大典)·쇼텐(少典)이 있었다.[5]

등이 있었고, 이밖에 주신(主神)·대판사(大判事)·대령사(大令史)·대공(大工)·사생(史生)·의사(醫師)·산사(算師) 등의 50인의 관인이 배치되어 실무를 맡았다.

역사[편집]

특히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나 고분 시대(古墳時代)를 통틀어 대한해협(현해탄) 연안은 대륙(특히 한반도)과 열도를 잇는 창구로써 교통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기나이(畿内)에 터를 잡고 있던 야마토 왕권은 한반도 및 중국 왕조와의 외교 및 군사행동의 요충지로써 일찍이 이곳을 주목했다. 중국의 기록인 위지 왜인전(魏志倭人伝)에 등장하는 일대솔(一大率)이 훗날의 다자이후와 흡사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는 지적도 존재하고 있다.

「다자이」(大宰)라는 문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17년(609년, 536년센카 천황(宣化天皇) 때의 기사에도 보인다)에 후쿠오카 현(福岡県) 하카타(博多)에 미야케(官家)를 세웠다는 기사 등으로 이를 통해 볼 때 다자이후의 기원은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에는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되었던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수나라의 답사(答使) 배세청(裴世清)과 함께 나쓰(那津)에 도착했을 때 미야케는 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오는 사신의 접대 등을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쓰쿠시다자이(筑紫大宰)는 규슈 전체의 통치와 외교사절 접대 등을 맡으며 이후 다자이후로 이어진다.

사이메이 천황(斉明天皇) 6년(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사이메이 천황에 이어 덴지 천황(天智天皇)도 재위 2년(663년) 백제 부흥군에게 2만 7천 명에 달하는 왜병 및 군사물자를 지원했지만, 이들은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함께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궤멸당했다. 덴지 천황은 당이 왜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이듬해 8월에 쓰쿠시(筑紫)에 대규모 방죽을 겸한 방어시설인 미즈키(水城) ・ 오미즈키(小水城)를 쌓았고, 또한 그 이듬해인 665년에 다자이후 북쪽에 오노 성(大野城), 남쪽에 기이 성(基肄城) 등의 성채를 축조했다.

「쓰쿠시다자이노소치(筑紫大宰帥)」라는 이름도 다이카(大化) 5년(649년)의 기록에 등장하는데, 덴지 천황에서 덴무 천황(天武天皇)에 걸치는 시기에 「쓰쿠시 소쓰(筑紫率)」, 「쓰쿠시 소료(筑紫総領)」 등의 용어도 확인되며, 중앙에서 왕족이나 유력귀족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기관으로써 다자이후는 덴지 천황 6년(667년)에 「쓰쿠시 도독부(筑紫都督府)」라 하던 것이 덴지 천황 10년(671년)에 처음 「쓰쿠시 다자이후(筑紫大宰府)」라는 기관명이 등장한다.

이후 수도가 있던 야마토 국(大和国)[6]에서 실각한 귀족들이 주로 다자이후로 좌천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이고 천황(醍醐天皇) 시대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이다. 또한 쇼무 천황(聖武天皇) 시대 다자이후로 전임되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쓰구(藤原広嗣)는 수도에서 내쳐지다시피 한 것에 앙심을 품고 740년에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며, 때문에 덴표(天平) 17년(745년) 6월까지 다자이후가 폐지되기도 했다. 다자이후가 폐지된 기간 동안에는 기존의 다자이후의 행정기능을 지쿠젠(筑前)에서, 군사기능을 덴표 15년(743년) 12월에 새로 설치한 진제이부(鎮西府)에서 맡았다.

그 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들어 다자이후의 권한이 강화되어 다이토(大同) 원년(806년) 2월에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의 관위 등급은 정5위상에서 종4위하로 격상되었고(일본후기) 고닌(弘仁) 원년(810년)에는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덴교(天慶) 4년(941년)에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에게 공격받았는데, 이때에도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頼)가 다자이노곤노소치로써 스미토모에 맞섰다고 한다.

헤이안 후기에 들면 「다이후(大府)」, 「사이후(宰府)」로 불리기도 했다. 다만 12세기에 들어서는 이름뿐인 존재가 되어버린 다자이노소치(大宰帥) 대신 다자이후의 책임자로써의 지위를 갖게 되고 실제로는 요임(遥任)이라는 형태로 교토에서 정무를 맡아보던 다자이노곤노소치나 다자이노다이니를 「다이후」, 다자이후 현지에서 기구를 감독 지휘하는 것을 「사이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자이노곤노소치나 다자이노다이니가 현지기구에 대해 내리는 명령을 대부선(大府宣), 다자이후 현지에서 보고 및 건의하는 상주문을 재부해(宰府解, 다자이후케大宰府解 ・ 사이후 신장宰府申状)이라고 불렀다.

호겐(保元) 3년(1158년)에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다자이노다이니를 맡게 되고 헤이시 정권의 기반이기도 했던 (宋)과의 무역 진흥으로 기타큐슈(北九州)의 정치적 중심지는 다자이후에서 20km 떨어진 하카타로 옮겨졌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들어서도 다자이노곤노소치나 다자이노다이니 소유의 다자이후령(大宰府領)이나 대외교역으로부터 얻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은 다자이후의 인기 요인이었다. 원구(元寇)로 불리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3년 전인 분에이(文永) 8년(1271년) 2월에 다자이노곤노소치 지위를 놓고 요시다 쓰네토시(吉田経俊)와 그 분가인 나카미카도 쓰네토(中御門経任)가 다투었는데, 최종적으로는 고사가 천황(後嵯峨上皇)의 측근이기도 했던 쓰네토가 다자이노곤노소치 지위를 맡게 되어, 요시다 쓰네나가(吉田経長)는 자신의 《길속기》(吉続記)에서 쓰네토가 고대 중국의 부호였던 도주(陶朱)처럼 되었다고 비난했다.[7] 애초에 이러한 임명의 이면에는 천황이나 상황의 측근이라는 점도 한몫했으며, 다자이노곤노소치는 퇴임 후에는 수리직(修理職) 등의 지위를 맡고 대궐 축조나 대상제(大嘗祭)같은 거액의 경비가 필요한 행사에 비용 부담을 명받았다(당연히 다자이노곤노소치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은 그 부담을 상회하는 것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중세에 들어 조정 권력의 쇠퇴나 몽골 침공 등 사이카이도(西海道)의 동향으로 다자이후의 실권은 점차 줄어들었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에는 남조(南朝)의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자신의 황자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을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파견했고, 기쿠치 씨(菊池氏)의 지지를 받은 친왕을 위시한 남조측은 쇼헤이(正平) 14년/엔몬(延文) 4년(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筑後川の戦い)에서 쇼니 씨(少弐氏)[8]를 총대장으로 하는 북조측을 격파하고 다자이후를 점령했다. 남조측의 정서부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파견된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에 의해 다시 패하고 쇼니 씨는 다자이후를 회복하지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다시 오우치 씨(大内氏)가 다자이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설과 속설[편집]

규슈왕조설(九州王朝説)에서는 다자이후가 고대 북규슈 왕조의 수도(倭京)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술잡지 등에서 규슈왕조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며, 일반적으로 규슈왕조설 및 관련 주장은 과학적인 학설로 간주되지 못하고 있다.

축제[편집]

관련 항목[편집]

관련 인물[편집]

각주[편집]

  1. 오늘날의 일본 오스미(大隅) 제도로 824년에 구니가 폐지되어 오스미에 편입되었다.
  2. 《엔기시키》민부(民部) 하(下)
  3. 《속일본기》와도 2년(709년) 2월 무자조
  4. 다이겐·쇼겐은 다이죠·쇼죠로도 읽었다.
  5. 다이텐·쇼텐은 오오사칸·쇼사칸으로도 읽었다.
  6. 지금의 나라 현(奈良県). 794년간무 천황이 헤이안쿄(지금의 일본 교토 시)로 천도한 뒤에는 야마시로 국(山城国)으로 옮겨갔다.
  7. 『吉続記』 분에이(文永) 8년 2월 2일조 기사.
  8. 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고케닌이었던 무토 스케요리(武藤資頼)는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그 아들들은 쇼니 씨를 사용하게 되었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