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 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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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목수비(顯穆綏妃, 사후 대한제국 추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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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 박씨''' 또는 '''유빈 박씨<ref>[http://blog.daum.net/aroma-may/10054797 <유빈 박씨 진향문 한글본>]</ref>'''(綏嬪 朴氏, [[1770년]]~[[1822년]] [[12월 26일]])는 [[조선]]의 제 22대 왕 [[조선 정조|정조]]의 네 번째 |
'''수빈 박씨''' 또는 '''유빈 박씨<ref>[http://blog.daum.net/aroma-may/10054797 <유빈 박씨 진향문 한글본>]</ref>'''(綏嬪 朴氏, [[1770년]]~[[1822년]] [[12월 26일]])는 [[조선]]의 제 22대 왕 [[조선 정조|정조]]의 네 번째 후궁이자 마지막 간택[[후궁]]이고, 제 23대 왕 [[조선 순조|순조]]의 생모이다.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고 빈으로 책봉된 뒤에 가례를 행하였다. 원자(순조)를 낳은 후에도 왕비인 효의왕후를 신중히 섬기고 같은 반열을 더욱 온화하게 대하니, 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정조 사후에 궁중 어른인 [[정순왕후 (영조)|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왕대비 효의왕후 김씨]]에게 하루 세 차례 문안 드렸고, 아랫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과 기용(器用, 그릇)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 말이 적었다고 한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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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좌찬성 [[박준원]]의 6남 5녀 중에 3녀이다. 훗날 왕에 등극하는 순조의 외가이므로 [[세도 정치|세도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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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궁 간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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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정조10년) 5월에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훙서하고 9월에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가 임신 만삭에 졸하였다. 정조는 35세로 나이가 많았는데, 정조의 |
1786년(정조10년) 5월에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훙서하고 9월에 정조의 세 번째 후궁 [[의빈 성씨]]가 임신 만삭에 졸하였다. 정조는 35세로 나이가 많았는데,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와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에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왕실의 후사를 매우 걱정하여 [[1787년]](정조 11년) 다시 명문가 규수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책봉된 간택후궁이 수빈 박씨이다. 참고로 수빈 박씨는 간택 때 차점을 차지하였다가 삼간 때에 드디어 명원으로 뽑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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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궁 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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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정조 11년) [[음력 2월 11일|2월 11일]] 18세의 나이에 책봉되어 수빈(綏嬪) |
[[1787년]](정조 11년) [[음력 2월 11일|2월 11일]], 18세의 나이에 후궁 책봉되어 빈호를 수빈(綏嬪)이라고 정하였다, 이때 정조는 36세였다. 수빈을 후궁으로 책봉하는 교명문에서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약한 날을 맞아 정순왕후가 친히 가려서 후궁이 되게 하였으니 자손을 많이 두라고 하였다. [[1787년]](정조 11년) [[음력 2월 12일|2월 12일]], 수빈의 가례를 행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음력 6월 18일]], 정조의 차남 원자([[조선 순조|순조]])를 낳았다. [[1793년]](정조 17년) [[음력 3월 1일]], 정조의 차녀 [[숙선옹주]]를 낳아 1남 1녀를 보았다. 7년후인 [[1800년]](정조 24년) [[음력 1월|1월]], 원자([[조선 순조|순조]])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800년 [[음력 6월|6월]], 정조가 승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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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순조 23년) 순조가 자궁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해 별도로 두신 은자를 호조에 내어주다라는 기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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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 |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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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순조실록]]》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 |
하였다.|《[[순조실록]]》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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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개창된 후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가 정조를 |
[[대한제국]]이 개창된 후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가 정조를 선황제로 추존함에 따라 [[1901년]](고종 38년·광무 5년) 10월 11일 수빈 박씨도 수비(綏妃)로 추존되어 '''현목수비'''(顯穆綏妃)이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810011_002|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다음 해 [[1902년]](고종 39년·광무 6년), 특진관 [[이주영 (1837년)|이주영]] 등이 황후 추존을 청하였으나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가 거절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910024_002|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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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4일 (월) 02:10 판
수빈 박씨(유빈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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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추존비 | |
이름 | |
별호 | 수빈(綏嬪, 1787~사후) 가순궁(嘉順宮 1787~사후) |
신상정보 | |
출생일 | 영조46년(1770년) 5월 8일 |
사망일 | 순조22년(1822년) 12월 26일 |
왕조 | 조선 |
부친 | 좌찬성 박준원 |
모친 | 증 정경부인 원주 원씨 |
배우자 | 정조 |
자녀 | 1남 1녀 순조 숙선옹주 |
능묘 | 휘경원(徽慶園) |
수빈 박씨 또는 유빈 박씨[1](綏嬪 朴氏, 1770년~1822년 12월 26일)는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의 네 번째 후궁이자 마지막 간택후궁이고, 제 23대 왕 순조의 생모이다.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고 빈으로 책봉된 뒤에 가례를 행하였다. 원자(순조)를 낳은 후에도 왕비인 효의왕후를 신중히 섬기고 같은 반열을 더욱 온화하게 대하니, 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정조 사후에 궁중 어른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와 왕대비 효의왕후 김씨에게 하루 세 차례 문안 드렸고, 아랫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과 기용(器用, 그릇)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 말이 적었다고 한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생애
출생과 배경
본관은 반남(潘南). 좌찬성 박준원의 6남 5녀 중에 3녀이다. 훗날 왕에 등극하는 순조의 외가이므로 세도가였다.
후궁 간택
1786년(정조10년) 5월에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훙서하고 9월에 정조의 세 번째 후궁 의빈 성씨가 임신 만삭에 졸하였다. 정조는 35세로 나이가 많았는데,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와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에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왕실의 후사를 매우 걱정하여 1787년(정조 11년) 다시 명문가 규수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책봉된 간택후궁이 수빈 박씨이다. 참고로 수빈 박씨는 간택 때 차점을 차지하였다가 삼간 때에 드디어 명원으로 뽑혔다고 한다.
후궁 시절
1787년(정조 11년) 2월 11일, 18세의 나이에 후궁 책봉되어 빈호를 수빈(綏嬪)이라고 정하였다, 이때 정조는 36세였다. 수빈을 후궁으로 책봉하는 교명문에서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약한 날을 맞아 정순왕후가 친히 가려서 후궁이 되게 하였으니 자손을 많이 두라고 하였다. 1787년(정조 11년) 2월 12일, 수빈의 가례를 행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음력 6월 18일, 정조의 차남 원자(순조)를 낳았다. 1793년(정조 17년) 음력 3월 1일, 정조의 차녀 숙선옹주를 낳아 1남 1녀를 보았다. 7년후인 1800년(정조 24년) 1월, 원자(순조)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였다.
순조 즉위
1800년 7월, 아들 순조가 11세에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대왕대비 김씨와 혜경궁 홍씨와 왕대비 효의왕후 김씨에게 하루 세 차례 문안 드렸다.
사망
사망하기 전년도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風痰) 증세가 생겼는데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러나 병환이 차츰차츰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다. 1822년(순조 22년) 음력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53세에 졸하였다.[2] 1822년(순조 22년) 12월 29일, 빈청에서 원호는 원호는 휘경(徽慶)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의논해 정하였다. 시호 현목의 뜻은 '행실이 중외에 드러남'을 현이라 하고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간직함'을 목이라 한다.[3] 그래서 현목수빈(顯穆綏嬪)이다. 1823년(순조 23년) 신위를 봉안한 사당을 현사궁(顯思宮)으로 불렀다가,[4] 1824년(순조 24년) 사당을 옮겨 경우궁(景祐宮)이 되었고, 이후 신위는 궁정동 칠궁에 있다. 1823년(순조 23년) 순조가 자궁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해 별도로 두신 은자를 호조에 내어주다라는 순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
하였다.
— 《순조실록》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
대한제국이 개창된 후 고종황제가 정조를 선황제로 추존함에 따라 1901년(고종 38년·광무 5년) 10월 11일 수빈 박씨도 수비(綏妃)로 추존되어 현목수비(顯穆綏妃)이다.[5] 다음 해 1902년(고종 39년·광무 6년), 특진관 이주영 등이 황후 추존을 청하였으나 고종황제가 거절하였다.[6]
이재난고
又聞 朴嬪旣有娠 而上以前兩度虛胎 爲懲不以頒告 外朝有以微稟者 上微哂曰 姑勿明言可也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예전에 유빈 박씨가 회임 했을 때, 임금이 이르기를 “예전에 두 번 자궁 외 임신을 했었으나 벌을 내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했었다. 외조(왕이 국정을 듣는 곳)에서 이를 가지고 임금에게 작게 여쭈었다. 이에 임금이 빙그레 웃으며 “유빈이 근심 하다가 분명히 말한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했다.[7]
이재난고 45권의 1790년(정조14년) 음력 4월 7일 기록에 유빈 박씨에 대한 일화가 나와 있다.
가족 관계
본가 (반남 박씨 : 潘南 朴氏)
- 큰아버지 : 박윤원(朴胤源, 1734~1799)[8]
- 큰어머니 : 신 안동 김씨
- 아버지 : 박준원(朴準源, 1739~1807)
- 어머니 : 원주 원씨(原州元氏, 1740~1783)[9] - 인조반정 공신 원두표의 자손이다. 정순왕후와 친척 관계이다.
- 서어머니 : 미상
- 이복남동생 : 박종염(朴宗琰, 1797~1857)
- 이복남동생 : 박종영(朴宗永, 1804~?)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남편 :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1752~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