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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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2세
Martin Luther King Jr.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출생 1929년 1월 15일
미국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사망 1968년 4월 4일 (39세)
미국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 모텔
사인 암살 (화기에 의한 사망)
별칭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직업 목사,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흑인운동가, 인권운동가
종교 침례교
배우자 코레타 스콧 킹
자녀 욜란다 데니사 킹
아들 마틴 루터 킹 3세, 덱스터 스콧 킹, 버니스 킹
부모 마틴 루터 킹 1세(부)
앨버타 윌리엄스 킹(모)
친척 크리스틴 킹 패리스(누나), 알프레드 다니엘 윌리엄스 킹(남동생)
서명
Martin Luther King Jr Signature2.svg

마틴 루터 킹 2세(영어: 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서 킹 주니어[*], 1929년 1월 15일 ~ 1968년 4월 4일)는 미국침례교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흑인 해방 운동가, 권리 신장 운동가로, 미국흑인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교회에 부임하였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 시립 공영 버스의 흑인 좌석차별 사건 이후,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끌어 1년 만에 범국민적 지지를 얻어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흑인 해방 운동 및 흑인 인권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을 비롯한 많은 흑인 관련 운동과 인권 운동을 이끌어 법률과 제도의 수정, 공민권법, 투표권법의 개정과 흑인의 권리를 증진시켰다.

1960년대에 흑인 권리 운동과 인권 운동을 통해 일정의 법률적인 결과를 획득하였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맬컴 엑스의 폭력주의 노선에 반대하고 비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주도하다. 1968년 4월 테네시 주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멤피스에서 흉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경찰은 북부 출신의 백인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2011년 재클린 케네디가 루터 킹의 성추문 사실을 녹음한 것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1] 유난히 여자를 밝혔던 그는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한 날 밤에도 워싱턴의 호텔에서 섹스 행각을 벌인 사실이 FBI에 도청당했다.[2] 1964년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에는 아버지 마이클 목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버지가 1935년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틴이 이름이 된다.[3] 할아버지 제임스 킹 역시 침례교회 목사였다.

그의 아버지쪽 선조들은 아일랜드인과 아프리카인의 혈통이 섞인 아이리시-아프리카 계열 흑인이었다.[4] 증조부 나댠 번햄(Nathan Brannum)은 침례교 목사가 되었고, 증조부 나댠 번햄이 성씨를 킹(King)으로 하면서 그의 집안 성씨는 킹이 되었다. 한편 어머니 쪽으로는 부분적으로 백인의 혈통을 타고났는데, 어머니의 할아버지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1804 ~ 1863)와 어머니의 증조부 윌리엄 윌리엄스(1772 ~ 1835)와 레이첼 넬슨 (c.1774 ~ 1851)는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 백인이었다.

아버지 마이클 루터 킹침례교회 목사로, 증조부 때부터 침례교 목사였고 3대째 교회 목사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백인들에게 멸시와 폭행을 당했고, 어릴적부터 그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장, 인종차별을 없애야 된다는 신념을 어릴적부터 품게 되었다.

유년기 - 청년기[편집]

경찰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부친의 모습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정당하게 항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5]

소년 시절에 그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회의적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13세 되던 해 부활절에 교회의 주일 학교에서 그는 "의심을 버리고 가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성경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그뒤 모어하우스 대학 신학과에 입학, 모어하우스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주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수료하였다. 대학 재학 중 넉넉한 가정 환경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았지만 흑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신학교를 마친 뒤 다시 매사추세츠 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인권, 사회 활동[편집]

사회 부조리 해결에 참여[편집]

1955년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
 
— 마틴 루터 킹 2세

[6]

박사학위 재학 중 그는 주일학교때 학력이 낮은 교사들에게 배운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앙으로 신앙성격이 바뀌게 된다. 한편 주일학교에 나가 흑인 및 빈민가의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후 보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권 운동[편집]

마틴 루터 킹 2세의 초상화

1954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게 된다. 당시 마틴 루터 킹 2세는 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는 받았지만,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회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1955년 백인들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고 하였고,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던 중 1955년 12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팍스라는 흑인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 경찰서에 체포,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펼쳐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도하고, 다른 흑인 및 양심적인 백인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여 5만의 시민이 동참했다. 흑인 해방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56년 12월에는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판결을 얻어낸다. 이후 애틀랜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마틴 루터 킹 2세와 같이 인종차별반대운동에 참여한 동역자로는 장로교 목사인 윌리엄 슬로언 코핀(1924년-2006년), 침례교 목사인 랠프 애버내시(1926년-1990년) 등이 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활동에 대해 그는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년)이라는 책을 통해 보고서 형식으로 남기기도 했다. 1957년 미국 남부의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목사 및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의 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는 비폭력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러나 맬컴 엑스 등은 그의 운동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비토했다. 일부의 흑인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엑스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 인권 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투옥과 석방[편집]

마틴 루터 킹 2세는 1963년 4월 12일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열린 항의 데모 때, 스스로 버밍험 시 경찰에 찾아가 체포되었으며, 4월 19일까지 구치소의 독방에 투옥되었다. 이 해 워싱턴 대행진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 연설문 I Have a Dream 중에서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하다. 이후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비흑인 지식인들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킹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계급투쟁 곧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멤피스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자,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
 
— 마틴 루터 킹 2세

킹은 흑인 차별 철폐운동 외에도 인종차별 철폐, 노동 운동, 시민 권익 운동에도 참여, 이를 후원하였다. 1963년 8월 워싱턴 시에서 열린 인종 차별 반대의 집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이를 주관, 20만 명의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를 계기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법안과 차별금지 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자 외에도 미국의 우파와 정부 인사들까지 자극하여, 당시 FBI 국장이자 우파인사였던 에드거 후버는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킹을 위험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내역을 감시하였다. 한편 1963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 중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꿇고 관의 중간 부분에 키스를 하는 부분을 본 뒤 그는 '음, 이 부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지'라고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이 재클린의 귀에 들어가게 됐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한 말실수가 재클린 케네디의 귀에 들어가면서 재클린은 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와 위선자라는 기록과 녹음을 남기게 된다.

생애 후반[편집]

반전 운동[편집]

그는 1963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의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동참했다. 그는 무의미한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서 희생시킨다는 점과 베트남 국민들을 학살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 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 마틴 루터 킹 2세

1964년 10월 14일, 미국의 인종 차별을 끝내기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된다. 그 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또한 베트남인들의 운명은 베트남인들에게 맡겨야 된다며 미국의 개입은 부당하고, 죄없는 미국 청년들의 피를 헛되이 쏟는 것이라며 전쟁을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전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킹은 흑인 민권 운동 외에도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반전운동 등도 함께 추진해 나갔다. 그는 1963년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에 지정되기도 했다. 1964년예일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 인종협력회의로부터 존 F.케네디 상을 수상받았다.

노벨상 수상 전후[편집]

1964년 10월 14일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50년 동안 FBI 국장으로 8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정보 정치와 공작 정치로 벌벌 떨게 만들었던 에드거 후버에게, 급성장한 킹은 위험인물이자 제거 대상이었다.[7] 에드가 후버는 64년 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하였다.[7] 한편 후버는 사람들을 고용, 그가 여러 여성들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녹화, 사진 촬영하여 각 미국의 각 신문사에 보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 오히려 후버에게 치졸하게 남의 뒤를 캔다는 야유가 돌아왔고, 후버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1964년 11월 18일 후버는 기자들을 FBI 사무실로 초청, '욕을했다.인터뷰 도중 "킹은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이며 가장 비열한 사람 중 하나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1963년 8월 28일 연설을 전후하여 킹 목사는 위싱턴 윌러드 호텔(Willard Hotel)에 투숙하였다. 이 때에도 호텔에는 FBI의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후버는 킹 목사가 친구와 함께 창녀들을 불러 난잡한 파티를 즐기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64년 11월 20일 윌리엄 설리번 FBI 국장보가 익명으로 써 킹 목사 부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8]

킹, 당신의 천한 계급을 생각해 미스터나 목사, 박사 따위의 호칭은 붙이지 않겠다. 당신은 완전한 사기꾼이며 우리 흑인 모두에게 큰 짐이 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나라의 백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협잡꾼이 많지만 지금 어디에도 당신과 맞설 협잡꾼은 없다고 확신한다. 다른 모든 사기꾼들과 마찬가지로 너도 끝장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9]
 
— 윌리엄 설리번 FBI 국장보가 익명으로 써서 보낸 편지 전문

이때 다른 여성과 정사중인 킹 목사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가 함께 전달됐다.[8] 후일 설리번은 회고에서 "조사 결과, 킹은 창녀 두 명과 함께 밤을 보낼 때가 많았고, 술과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파티를 수시로 벌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12월 10일에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노벨 상을 전달받고 동시에 미화 5만 3천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한편 흑인인권 운동을 비롯한 여성운동, 인권 운동을 적색분자가 정치적으로 이용, 선동한다는 에드가 후버의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반박하는 동시에 흑인의 분리 독립 운동과 폭력적인 시위에 반대하면서 맬컴 엑스 등과도 갈등하게 된다. 맬컴 엑스와의 갈등은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미화원 파업지도와 암살[편집]

그는 맬컴 엑스 등의 활동은 극단적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양심을 죽이느니 차라리 앨라배마의 고속도로에서 죽겠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1968년 테네시 주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원하러 그해 4월 멤피스로 내려와 모텔에서 생활하며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하였다.

한편 그를 암살하기 위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사람을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그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고 답했다. 4월 3일 열린 흑인 청소노동자 모임에서도 이 소문을 접한 흑인 청소노동자들은 그에게 피신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킹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역시 오래 살고 싶다. 나라고 왜 오래 살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고 답했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어가는 시기인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모텔 2층 발코니에서 미리 잠입해 있던 테네시 출신의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가 쏜 권총에 머리를 맞고 암살되었다. 옆방에 있던 친구들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왔을 때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근처 다른 방에서 침구와 지혈제를 가져와 조치했지만, 그는 과다 출혈로 병원 이송 도중 구급차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는 킹 목사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선포하였다.

사후[편집]

워싱턴 D.C.와 다른 도시들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건물, 차량 파괴, 약탈 등 폭력시위를 했지만 그의 뜻이 아니라는 일부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요청과, 수천명의 군인, 경찰이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저절로 해산되었다. 제임스 얼 레이는 바로 배편으로 영국으로 도망쳤으나 런던 시내에서 그를 본 목격자의 제보로 체포되어 다시 테네시 주 멤피스로 송환되었다. 1968년 레이는 멤피스 법원에 회부, 1969년 징역 99년형을 최종 선고 받은 뒤 199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폭력 노선과 흑인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달리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흑인도 인간이라는 시각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1986년부터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 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비폭력 사상[편집]

마틴 루터 킹 2세는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 사상가였다. 그는 민주주의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던 베트남 전쟁을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6]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 외에도 근대 약소국의 식민지 해방 운동 등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인권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 오래도록 연구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사상에 적극 공감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와 동의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맬컴 엑스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 때 부모님으로부터 대학교 입학선물로 자동차를 선물받을만큼 부유한 집에서 자란 킹 목사의 성장환경과 그의 온건민권운동은 일부 흑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10]

논란과 의혹[편집]

성추문 의혹[편집]

재클린 케네디는 그가 여성들과 섹스 파티를 즐긴 위선자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명연설을 하기 전날 밤, 여성들을 섹스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호텔방에서 전화를 걸어댔다는 연방수사국(FBI)의 도청 정보를 언급하기도 했다.[11] 2011년 9월 언론에 공개된 내용에 대해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따르면 재클린은 "마틴 루터 킹의 사진을 볼 때마다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12]

재클린 오나시스는 킹 목사를 위선자(phoney)라고 평가했다.[11] 1964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M. 슐레진저(Schlesinger)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였다.[11] 이는 보스턴의 케네디도서관 소장고에 다른 자료들과 함께 보관되다가 2011년 9월 공개되었다.

불륜 사건[편집]

1968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치과의사의 부인과 간통, 성관계를 맺어오다가 FBI에 발각되었다. 1968년 FBI가 도청한 킹 목사의 한 전화통화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흑인 치과의사의 아내였다.[13] 그의 불륜을 눈치챈 것은 로스엔젤레스 다저스 야구팀의 스타 선수인 이먼 돈 뉴컴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13] 돈 뉴컴 등 야구선수들의 제보를 받은 에드거 후버는 바로 킹의 전화를 도감청하고 사람을 붙였다.

후버는 보고서를 작성, 1968년 2월 20일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킹 목사는 1962년부터 로스엔젤레스에 사는 유명한 흑인 치과 의사의 아내와 불의의 성관계를 맺고 있음. 킹 목사는 전기의 여인을 매주 수요일 장거리 전화로 불러내며 전국내 각 도시를 전전, 밀회하고 있음.
 
에드거 후버의 보고서[13]

후버의 보고서에는 "한번은 뉴욕 시 뉴욕시티호텔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고 술이 약간 취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안하면 13층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했고 성관계를 하자고 위협했다.[13]"이라는 보고도 들어 있다.

논문 표절 의혹[편집]

1950년대의 그의 논문 중의 일부는 다른 박사학위 논문이나 자료의 내용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FBI의 도청 논란[편집]

재클린 케네디가 그의 사생활을 폭로, 비판한 것과 관련하여 FBI가 그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11] 재클린 케네디가 입수한 마틴 루터 킹의 섹스파티는 연방수사국(FBI)의 도청 정보를 통해 입수됐다.[11] 연방 정부의 도감청 행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또다른 논란거리가 되었다.

후버는 64년 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예의 그 정사 장면이 녹음된 테이프를 언론사에 보냈다.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7] 그러자 후버는 녹음 테이프를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 앞으로 보냈지만 그 무렵 킹은 ‘공작 정치’가 아닌 암살자의 총탄에 의해 39세의 생애를 마감했으며, 정작 후버 자신이 공작 정치가 탄로나 파멸의 길을 걸었다.[7]

기타[편집]

재클린 케네디는 녹취록에서 "그가 남편(존 F. 케네디)의 장례식 날 킹 목사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도 했다[14]

저서[편집]

  •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
  •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1964)
  • 《흑인이 가는 길》(1967)

한국어 번역서[편집]

가족[편집]

부인 코레타 스콧은 작가이면서 역시 흑인 운동,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딸 욜란다 데니사 킹 역시 인권운동가였다.

  • 증조부 : 네이선 번햄(Nathan Brannum or Branham, 1829년 1월 - 1900년)
  • 증조모 : 멀린다(Malinda, 1845년 9월 - 1900년)
  • 조부 : 제임스 앨버트 킹(James Albert King, 1863 12월 - 1933년 11월 17일)
  • 조모 : 딜리아 린지 킹(Delia Linsey King, 1875년 7월 - 1924년 5월 27일)
  • 아버지 : 마틴 루터 킹 1세(Martin Luther King, Sr, 1899년 12월 19일 - 1984년 11월 11일)
  • 어머니 : 앨버타 윌리엄스 킹(Alberta Williams King, 시집 오기전 본명은 앨버타 크리스틴 윌리엄스(Alberta Christine Williams), 1904년 9월 13일 - 1974년 6월 30일)
  • 부인 : 코레타 스콧 킹(Coretta Scott King, 1927년 4월 27일 - 2006년 1월 30일)
  • 외할아버지 : 애덤 대니얼 윌리엄스(Adam Daniel Williams, 1861년 - 1931년 3월 21일)
  • 외할머니 : 제니 설레스트 윌리엄스(Jenny Celeste Williams,시집 오기 전 본명은 제니 설레스트 파크스(Jenny Celeste Parks), 1873년 4월 - 1941년 5월 18일)
    • 외증조부 : 윌스 윌리엄스(Willis Williams, ? - 1874년)
    • 외증조모 : 루크레시아 대니얼스(Lucrecia Daniels)
      • 외고조부 :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William Nelson Williams, 1804년 - 1863년)
  • 진외증조부 : 짐 롱(Jim Long, 1844년 - ?), 할머니 다니엘라 린시 킹의 친정아버지
  • 진외증조모 : 제인 린지(Jane Linsey, 1853년 - ?)
  • 외외증조부 : 윌리엄 파크스(William Parks, 1825년 - 1900년(?)), 외할머니 제니 설레스트 윌리엄스의 친정아버지
  • 외외증조모 : 패니(Fannie)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죽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재클린, 쿠바 위기때 케네디와 통화 국민일보 2011.09.13
  2. [북월드] 숙적이 있었기에 그들은 더 빛났다 세계일보 2008.01.19
  3.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호적상의 기록의 오류였다. 그가 여권을 만들려 할 때까지 잘못된 이름을 사용하다가, 여권 발행시 원래 이름인 마틴 루터 킹 2세로 호적상 오류를 법적으로 정정한 것이다.
  4. King, James Albert (1864-1933)
  5.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클레이본 카슨 지음/이순희 옮김/바다
  6. 인종ㆍ경제적 평등 사회 지향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세계의 사회주의자 ⑭ 마틴 루터 킹 목사 레디앙 2008년 6월 26일자
  7. 킹 목사와 ‘경악할 폭로’ 문화일보 2006.04.18
  8. 美서 ‘세기의 편지들’ 출간 서울신문 1999년 11월 23일자, 11면
  9. "美 20세기 역사 편지로 읽는다", 동아일보 1999년 11월 23일자 14면, 생활/문화면
  10. 월간 말
  11. "마틴 루터 킹 목사, 섹스파티에 여성들 초대… 위선자였다" 조선일보 2011.09.13
  12. “세계적 명연설 ‘나에겐 꿈이 있다’ 전날 밤 킹목사 섹스파티 했다” Focus 2011.09.23
  13. "워싱톤 政界夜話 테드 事件 계기의 섹스스캔들", 동아일보 1969년 09월 01일자 4면, 정치면
  14. 정치란 바르게 함을 뜻하는데… 한국경제 2011.09.20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