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암스트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닐 올던 암스트롱
Neil Alden Armstrong
미국 우주비행사(Astronaut)
국적 미국 미국
출생 1930년 8월 5일
미국 미국 오하이오 주 와파코네타
사망 2012년 8월 25일
다른 직업 해군 비행사, 시험 비행사(테스트 파일럿)
계급 대령
선발 1962년 NASA 우주비행사 그룹 2
임무 제미니 8호, 아폴로 11호
1999년 연설하는 닐 암스트롱

닐 올던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년 8월 5일 ~ 2012년 8월 25일)은 미국우주비행사, 시험 비행사, 대학 교수, 해군 비행사로, 인류 최초로 에 발을 디딘 사람이다.

생애[편집]

닐 암스트롱은 1930년 8월5일 미국 오하이오 주 와파코네타 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유난히 비행기와 전투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가졌었다. 이러한 목표는 청년시절에도 이어져 1948년 퍼듀대학교의 항공기관학을 전공한 후 곧바로 해군 항공대에 지원을위해 해군 비행학교에 진학하였다.

우주 비행사 되기까지[편집]

그러나 전투비행사 훈련중인 1950년 6·25전쟁 때 제트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되어 휴학을 하게된다 암스트롱은 이 전쟁에서 78차례 전투기를 출격해 활약을 보였다. 1953년에 정전협정뒤 조국으로 복귀한 암스트롱은 1955년에 비행학교에 졸업한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고속 비행 기지에서 900회 이상 시험 비행사로 활약했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경력과 경험에 주목한 미국은 미항공우주국(NASA)를 창설한 4년뒤인 1962년 미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제2기 항공우주사로 스카웃이되어 우주비행 적응 훈련에 돌입한다. 이때부터 암스트롱은 일개 시험비행사에서 전문비행사 조차 들어가기 어렵다는 NASA의 소속이 된 것이다.

우주경쟁[편집]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국력을 과시하기위해 미사일, 군사, 정치, 행정 등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 시대가 차가운전쟁인 냉전시대로 이제 이 두나라는 국력면에서는 서로 팽팽해 좀처럼 결론이 나질않자 이번엔 과학적 기술력으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우주경쟁이 그것이다. 두 나라는 자국의 과학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기위해 인공위성, 우주왕복선 등의 개발에 만전을 기하였고 먼저 선수를 친건 소련이었다.

19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를 발사하자 미국은 5개월뒤인 1958년 3월 익스플로러 1호 를 발사하는 한편, 미국 대통령인 아이젠하워의 우주개발에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미국항공우주국 NASA를 창설한다. 이 조직은 우주탐사만을 목적을둔 최초의 정부기관이다. 그 이후 미국과 소련은 뒤이어 인공위성에서 이번에는 생명체를 우주로 보내는 계획을 착수했고 강아지, 원숭이, 새 등 생명체를 우주로 보낸다. 이후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계획에 착수했으며 이번에도 선수를 친건 소련이었다 1961년 소련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최초로 지구궤도를 돌아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이에 미국은 한달뒤 우주비행사 앨런 쉐퍼드를 지구궤도로 보내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소련이 이듬해에 여성을 우주로 보낸다. 이처럼 두 나라는 끊임없는 우주경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체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제 두나라의 남은목표는 인류를 달로 보내는 일이었다.

최초의 우주비행[편집]

닐 암스트롱은 4년간의 우주비행적응 훈련을 마치고 1966년 3월 제미니 8호의 선장으로 D.R.스콧과 함께 첫 우주비행을 하여 아제나 위성과 최초의 도킹에 성공한다.

이어 3년뒤 아폴로 11호의 선장이 되어 1969년 7월 16일, 버즈 올드린마이클 콜린스 비행사와 함께 플로리다 주의 케네디 우주 기지를 출발하였다. 그로부터 5일 후에 달 주위를 도는 궤도 위에서 모선에 남은 마이클 콜린스와 헤어져서, 올드린과 함께 달 착륙선으로 '고요한 바다'에 착륙하였고 여기서 암스트롱은 휴스턴의 나사본부에 교신에 성공한다 그는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 첫걸음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게 있어서 커다란 첫 도약입니다”

"인류의 커다란 한 걸음"을 버즈 올드린과 함께 달 표면을 2시간 반 동안 탐사했고 이 시간동안 달 표면에 모래와 암석을 모으는한편 지진계 등을 설치해 놓은 다음 5일뒤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편집]

닐 암스트롱은 1975년 NASA를 은퇴한 후에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지내다가 1979년에 퇴직했다. 닐 암스트롱은 NASA의 사고조사위원으로도 2번 활약했는데, 첫 번째는 1970년의 아폴로 13호 사고였고, 1986년에는 두 번째로 챌린저 우주왕복선의 폭발 사고를 조사하는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위원회를 이끌었다.

1971년NASA를 물러난 뒤 기업들로부터의 유혹들도 있었지만 계속 거절하다가 크라이슬러를 통해 1979년 1월부터 선전에 출연했다. 그 외 전미은행협회 등 주로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CM에 출현했다.

그 외에 Thiokol(ATK Launch Systems Group) 등의 기업들의 경영에도 참가했었고, 2002년을 마지막으로 기업 경영에서도 은퇴했다.

이후 2012년 8월 25일 심혈관계 수술 뒤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바깥 고리[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닐 암스트롱"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