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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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in 1988.jpg
기본 정보
본명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 1958년 8월 29일(1958-08-29)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사망 2009년 6월 25일 (50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직업 가수, 프로듀서
장르 알앤비, , 댄스 팝, 펑크, 뉴 잭 스윙
활동 시기

1963년 ~ 2009년(잭슨 파이브)

1971년 ~ 2009년 (솔로)
가족 조셉 잭슨
캐서린 잭슨
레비 잭슨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라토야 잭슨
말런 잭슨
랜디 잭슨
자넷 잭슨
프린스 마이클 (아들)
패리스 잭슨 (딸)
프린스 마이클 2세 (블랭킷) (아들)
레이블 모타운, 에픽, MJJ Music
관련 활동 잭슨 파이브
웹사이트 www.michaeljackson.com

마이클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은 미국의 가수이다.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불린다.[1][2] 그의 음악, 댄스, 패션은 40년이 넘도록 세계 대중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그의 음악은 방송국들의 인종차별 정책을 부숴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고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비틀즈를 연상케 한다고 평가받았다. [3]

그는 문워크 를 포함하여 다양한 춤을 대중화 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4] 음악 평론가인 임진모씨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앨범 사운드는 시대를 앞서가 옛날 스튜디오 엔지니어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있었다고 한다. [5]

1982년 발매된《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1위 앨범이다. 그 외에 4개의 정규앨범도 모두 세계에서 가장 팔린 앨범 100위 안에 들었으며 《Bad》(1987) 는 세계에서 10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중성을 보여줬다. [6] 잭슨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된 몇 안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가수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으며 그의 작사/작곡 능력이 인정받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잭슨은 여러 개의 기네스 세계 기록을 포함해 수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13번의 그래미 상, 그래미 공로상과 그래미 레전드상, "세기의 음악가"와 "1980년대 아티스트"를 포함한 26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은 그 어떤 음악가보다 많은 기록이다. 뉴스위크는 잭슨의 추모 특집글에서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엘비스, 비틀스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커트 코베인도, 머라이어 캐리도, 셀린 디온도, 비욘세도, 마돈나도 잭슨의 위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솔로 경력 동안 13장의 빌보드 핫 100 1위 싱글을 남겼는데, 남자 가수 중에서는 최고이다. 또한 잭슨은 세계적으로 4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추측되고 있다.[7][8][9][Note 1] 박애주의자이던 잭슨은 39개 자선 단체를 후원한 것으로 2000년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10]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 에 이어 20세기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VH1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2위 마이클 잭슨 [11]

롤링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 25위 마이클 잭슨 [12]

NME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 1위 마이클 잭슨 [13]

마이클 잭슨은 죽은 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음악과 초상권 등으로 막대한 수입을 얻었는데 이는 생존 가수 중 가장 높은 수입을 거둔 마돈나 보다 더 높은 것으로 그는 죽었어도 여전히 그의 대중성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4]

생애[편집]

1958-1975 : 초기 삶과 잭슨 파이브[편집]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개리의 방 3개 달린 집에서 살고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집안 가족 중 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15]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여호와의 증인의 독실한 신자였고,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제강공장에서 일했으며 더 팔콘스라고 부르는 R&B 밴드에서 공연을 하기도했다. 잭슨은 세 명의 여자형제 레비 잭슨, 라토야 잭슨, 자넷 잭슨이 있었고, 다섯 명의 남자 형제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말론 잭슨, 랜디 잭슨이 있었다.[16] 여섯 번째 형제인 브랜든 잭슨은 출생 직후 사망했다.[17]

1972년 잭슨 파이브. 가운데가 마이클이다.

잭슨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18][19] 2003년 아버지가 소년이었던 잭슨에게 정기적으로 채찍질을 한 것이 드러났다.[20] 또한 수 차례나 "fat nose"라고 말하는 등 자식들에게 폭언을 일삼았다.[21] 잭슨은 자신의 성공에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이 큰 역할이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끊임없이 학대 당해 왔다고 말했다. 1993년 2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적 외로움 속에서 자주 울었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을 무서워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친척들이 자신의 외모를 놀려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악몽으로 만성 수면 부족을 앓고 있었다.[22]

1965년 마이클과 말론은 아버지에 의해 형제 잭키, 티토, 저메인이 결성했던 잭슨 브라더스에 합류했고, 콩가탬버린 백업 포지션을 맡았다. 1966년 형 저메인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그룹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꿨다.[23]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 (I Feel Good)〉를 불러 우승했다.[24] 이후 1967년 아폴로 극장 등을 포함한 각종 탤런트 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중서부동부의 "chitlin' circuit"라고 불리는 스트립쇼, 기타 성 행위가 열리는 흑인 클럽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1969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 지역 레코드사 스틸타운에서 〈Big Boy〉 등을 포함한 몇몇 노래를 녹음하면서 1968년부터 전문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23] 《롤링 스톤》은 어렸을 적 마이클을 "신동이다",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가장 이목을 끌면서 빨리 알려진 리드 싱어"라고 묘사했다.[25] 처음으로 발매했던 네 장의 싱글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는 빌보드 핫 100 차트 진입과 함께 모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 잭슨은 1972년부터 1975년 사이 모타운 레코드에서 잭슨 파이브 활동 당시 발표했던 《Got to Be There》와 《Ben》을 포함해 네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그리고 〈Got to Be There〉, 〈Ben〉, 바비 데이의 리메이크곡 〈Rockin' Robin〉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후 잭슨 파이브는 "가장 발전한 크로스오버 흑인 음악가의 본보기"라고 불렸다.[26]

1973년부터 그룹의 판매량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모타운 사장은 그룹 멤버의 창의적 창작 또는 제작 참여를 일제히 거부했다. 잭슨 파이브는 5위권 싱글 〈Dancing Machine〉, 20위권 〈I Am Love〉를 포함한 40여 곡의 노래를 차트에 진입시켰고, 1975년 모타운을 떠났다.[27]

1975-1981 : 에픽 레코드와 Off The Wall[편집]

1975년 6월 잭슨 파이브는 CBS 레코드의 자회사 에픽 레코드와 계약했고,[27] 그룹 이름을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꿨다. 저메인은 솔로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모타운에 남는다고 결정했고, 대신 동생 랜디가 합류했다.[28] 잭슨스는 국제적인 투어를 계속했고, 1976년과 1984년 사이 여섯 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다. 이 시기 마이클은 그룹의 리드 싱어송라이터를 맡았고,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 (1979), 〈This Place Hotel〉 (1980), 〈Can You Feel It〉 (1980)과 같은 노래들을 썼다.[24] 1978년에는 영화 활동을 시작했는데, 다이애나 로스, 닙시 러셀과 함께 감독 시드니 루멧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으로 출연했다.[29]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적은 처참했다.[30]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영화에서 연주될 악보를 편집한 퀸시 존스와 만났고, 잭슨의 다음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31] 1979년 복잡한 안무 도중 코가 깨졌다. 이로인해 코 성형수술을 했지만, 성공적인 수술은 아니였고 후유증으로 자신의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호흡 곤란을 앓는다. 이후 의사 스티븐 호플린을 찾아 코 성형수술을 다시 받았다.[32]

마이클 잭슨이 제작 퀸스 존스가 프로듀서한 《Off the Wall》(1979)을 통해 솔로 가수로서의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이 앨범은 어린 시절의 "버블검 팝"에서 성인으로서 만든 훨씬 더 복잡한 사운드로 이행하는데 도왔다.[33] 앨범의 작곡, 작사에는 잭슨을 포함한 로드 템퍼튼, 스티브 원더, 폴 매카트니가 참여했다. 《Off the Wall》은 빌보드 200 3위까지 올라갔고,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34] 또한 미국에서 1위에 오른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를 포함해 〈Off the Wall〉, 〈She’s Out of My Life〉와 같은 네 장의 싱글을 10위권에 진입시켰다.[35][36] 1980년 잭슨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앨범, 가장 좋아하는 소울 알앤비 남자 아티스트,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싱글 부문에서 수상하며 총 3관왕에 올랐다.[37][38] 또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탑 블랙 아티스트와 탑 블랙 앨범상을 받았고, 1979년 그래미상에서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를 받았다.[35] 1981년 또 다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앨범과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남자 아티스트상을 받았다.[39] 이런 상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Off the Wall》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고 다음 앨범은 기대를 뛰어넘는 것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40] 1980년 앨범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는데,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41]

1982-1985 : Thriller[편집]

백악관 남쪽 현관인 사우스 포티코에서 로날드 레이건,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과 함께 (1984년 5월 14일)

1982년 그는 대히트 앨범인《Thriller》를 발매한다. 이 앨범 또한 퀸시 존스가 참여했고, R&B, , 펑크, 댄스를 주요 장르로 하는 앨범이었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할 당시에 인종 이나 음악적 장르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 앨범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며, 기네스 북에 잭슨을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악인으로 등록시켜준다. 일주일 만에 100만 장을 돌파한 앨범이며, 37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또한 9곡중 7곡인 '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 'Human Nature', 'P.Y.T.(Pretty Young Thing)'은 빌보드 탑 100의 10위 안에 올라 이전의 잭슨 본인이 "Off the Wall"에서 세웠던, 한 앨범에서의 탑 10 안의 4곡 안착의 기록을 무색하게 만든다. 빌보드 블랙, 락, R&B, 댄스 차트를 따로 기록하자면 앨범 중 총 7곡이 1위를 기록한다. 롤링스톤즈에서 선정한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에는 20위에 올라 평론가들에게도 인정받은 앨범이다.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높은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 12개 부분 후보에 올라 8개의 상을 휩쓸어 최다 부문 노미네이트/최다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앨범 자체는 65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2006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은 정치, 경제의 잡지 주요 인물들을 고집해왔던 그간의 표지 제작의 방침을 깨고 발간 이후 최초로 연예인인 잭슨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썼으며, 표지 제작은 잭슨의 개인적 친구이기도 했으며 그 스스로도 최고의 실력자인 현대 미술가 "앤디 워홀"에 의해 이루어진다.

수록곡 중 Billie Jean은 싱글, 댄스, 알엔비, 블랙 차트에서 모두 동시에 1위를 차지한 유일한 곡이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7주동안 1위를 했다. 이 곡의 비디오는 이전에는 흑인 음악의 비디오를 틀기를 거부했던 MTV의 장벽을 무너뜨린 최초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흑인들의 음악을 잘 트지 않았던 라디오 방송들 또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결국 틀 수 밖에 없었고 인종의 경계를 무너뜨린 큰 변화를 불러왔다고 평가하고 있다.[42]또다른 1위 히트곡인 'Beat It'은 최초로 집단 댄스를 보여준 뮤직비디오이며, 이는 현재까지도 뮤직 비디오 제작의 큰 틀로 쓰이는 포맷이다. 극장 상영용 영화 필름에 쓰인 '35mm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곡 Thriller의 뮤직 비디오는 14분짜리 대작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며 근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최고의 뮤직 비디오로 지목되는 데 일반인, 평론가를 막론하고 별 이론이 없는 작품이다.

1983년 'Motown 25: Yesterday, Today, Forever'에서의 잭슨 5의 공연에 이은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의 단독 공연은 음악사상 뿐 아니라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순간 중 하나로 문화 평론가들로 인해 평가된다.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 춤 중 하나인 Moon Walk가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인 공연이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성공시킨 Justified의 작곡가/프로듀서인 페럴는 이 순간을 "the moment if you weren't a michael Jackson fan, you became a michael Jackson fan"으로 단정지었고, 유명 R&B 가수 브라이언 맥나잇은 누군가가 그렇게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공연을 본 후 자신은 울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잭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인기를 많이 누린 인류라 칭송받는다.

빌보드 1위의 자작 히트곡 Beat It의 반폭력 메시지와 당시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인 "Just say no" 캠페인에 대한 협조, 오랜 기간에 걸쳐 펼쳐온 자선활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5월 14일에는 백악관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에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받는다. 또한 같은해 영국에서 콘서트를 개최해 이 투어로 약 5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1984년에는 'Victory Tour' 를 열었다. 형제들과 함께한 공연으로 미국/캐나다에서 55회의 공연으로 7천5백만 달러를 얻는 큰 흥행을 이루게 됐다. 한편 이 투어를 마지막으로 잭슨과 형제들간의 공연은 열리지 않게 됐다. 잭슨은 여기서 번 500만 달러를 3개의 자선단체와 백혈병 재단에게 기부하였다.

1985년에 그는 'We Are The World'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는 당시 오랜 기아로 인한 아프리카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구제 활동을 목적으로 이익금 전액이 아프리카의 구호 활동에 쓰여지도록 전해졌다. 미국에서 약 2000만 장 이상이 팔리고, 이는 아직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남아있다. 'We Are The World'는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40여명의 가수들을 "USA for AFRICA"라는 단체 이름 아래 참여시킨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1986-1990 : Bad[편집]

백반증으로 인해 얼굴이 하얘진 잭슨의 초기 모습(1988)

잭슨의 피부는 급격하게 하얘지게 시작했다. 잭슨이 스스로 피부를 표백하고 있다는 루머와 함께 그의 피부색은 광범위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피부색은 표백을 한 것이 아니다. 백반증에 걸린 것을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말하였고 잭슨이 죽은 후 부검 결과에도 백반증에 걸렸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또한 잭슨은 전신성 홍반증인 루푸스병까지 앓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이클 잭슨은 1984년에 펩시콜라 광고 촬영 도중 심한 화상을 입게 됐는데 백반증은 화상 후에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블랙 화장으로 백반증을 가렸으나 점차 증세가 악화되자 화이트 화장으로 가려야만 했다. 코 수술은 1979년 무대 사고 이후로 한번, 호홉의 문제로 한번 더 성형수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마이클 잭슨이 성형중독 이라는 등,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를 박피했다는 등의 악성 루머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잭슨은 언론들에게 점점 더 선정적인 보도의 대상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언론에게 매출을 올리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됐고 1986년 마이클 잭슨이 노화 과정을 늦추기 위해 산소통에서 잔다거나 잭슨의 피부가 코끼리로 만들었다던가 심지어는 마이클 잭슨이 외계인을 만났거나 그의 친여동생인 자넷 잭슨과 동일 인물이라는 매우 황당한 기사까지 언론들은 끊임없이 근거없는 기사로 그를 공격했다.

1987년 5년 만에 Bad를 발매한다. 역시 이 앨범도 퀸시 존스와 작업했으며, 전작인 'Thriller'보다는 앨범판매율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인기나 실력 면에서는 더욱더 좋아졌다. 5개의 싱글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는 모두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하여 한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를 배출한 앨범이 됐다. 앨범 차트는 폴란드를 제외하고는(4위), 전 세계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3500만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이 앨범은 그 해의 그래미 어워드 에서 4개 부문 후보에 올라 1개의 수상을 하였다.

1987년 'Bad Tour' 가 일본을 시작으로 열렸다. 총 123회 공연 440만명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이루게 됐으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인 웸블리 구장에서 8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2009년 '1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of the MTV Generation'에 올랐다. 또한 롤링스톤지에서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에서 202위를 차지했다. 또한 뉴욕 타임즈에도 이 앨범에 대해 소개했다.

잭슨은 영화감독 'Francis Ford Coppola'와 3D 영상으로 찍어낸 'Captain EO'를 제작, 출연했다. 이 영화는 디즈니와 계약하여 만든 영화이며,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내용이 짜여 있다. 같은 해 9월부터 그는 'Bad World Tour'를 한다. 이 투어는 1987년 9월 12일 부터 1989년 1월 27일까지 이어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5만 7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The Way You Make Me Feel"을 공연하는 마이클

1988년 그는 첫 자서전 'Moon Walk'를 출판한다. 이 책은 4년동안 모두 200만권 넘게 팔렸고,두 번째 자서전인 'Jackson 5'는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쓴 책이었다. 이 책들은 모두 뉴욕 타임즈에 베스트 셀러로 등극했다.

같은 해 3월, 그는 캘리포니아 주 'Santa Ynez'에 17억을 들여,약 330만 5340평에 달하는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를 건립한다. 그의 친한 친구인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마이클은 'King Of Pop'이라고 칭했으며, 미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그의 취임식때 그를 백악관에 초대한다. 그는 또한 펀드로 200만 달러의 이익을 본다.

잭슨이 'Bad'로 활동할 때 입었던 황금 군복 옷

1989년 마이클 잭슨의 친한 친구 엘리자베스 테일러 는 시상식에서 마이클 잭슨을 'King of Pop Rock Soul' 로 칭하였는데 이는 곧 대중화 되어 잭슨의 별명이 'King of Pop' 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 조지 HW 부시 대통령 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대하여 아티스트 상을 수여했고 1985년-1990년 그는 흑인 대학에게 45만 5천 달러를 기부하였으며 그의 싱글인 'Man in the Mirror' 의 이익 모두를 자선 단체에 기부하였다.

1991-1994 : Dangerous[편집]

1991년 1월 잭슨은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6500만 달러에 새 계약을 한다. 이는 매우 기록적인 계약이었다. 그는 8번째 앨범인 Dangerous(1991)을 발매한다. 2008년까지 약 700만 장 넘게 더 팔린다. 약 3200만 장이 팔렸고, 빌보드 200에서 4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에서 1위를 했다. 이 앨범은 뉴잭 스윙의 장르가 첨가되었다. 첫 싱글인 'Black Or White'는 7주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두 번째 싱글인 'Remember The Time'은 8주 동안 5위권 안에 들었으며, 빌보드 100에서 3위를 했다. 그래미 어워드 에서는 3개의 부문에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을 하지는 못 했다.

1992년 그는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한다.그는 자선기부,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불치병에 걸린 사람치료로 목적을 두었다. 1992년 6월 27일 'Dangerous Tour'를 1993년 12월 3일까지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했는데 불미스러운 일로 1993년 11월 11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한국에서도 'Dangerous Tour'를 진행하려 했는데 정부가 근검절약의 이유로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다며 거절하는 일이 있기도 하였다. [43] 잭슨은 67개의 콘서트로 3700만 달러의 이익을 얻었다. 특히 마이클 잭슨 공연 중 가장 완성도 높다는 1992년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부쿠레슈티)공연은 HBO가 사들여 방송하여 케이블 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그는 이집트, 가봉을 방문해 기아의 걸린 아이들 찾아가기 등을 했다.

1993년 1월 31일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많은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결승전 하프타임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미식축구협회인 NFL은 시청률 하락으로 많은 고심을 했는데 1993년 경기 중간에 여는 하프타임에 마이클 잭슨을 투입했다. 하프타임쇼의 시청률은 1992년 보다 8.6% 보다 높아졌으며 이후로 하프타임때는 그해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문화가 자리잡게 됐다.

1993년 2월 10일에는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인터뷰를 했는데 시청률이 47.9%로 미국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았던 TV프로그램 8위로 기록됐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미국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파악할 수 있다. [44]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35살의 나이에 '살아있는 전설상'을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여받아 살아있는 전설상 최연소 수상이라는 기록을 냈으며, 베스트 R&B 상을 받는다. 또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베토벤을 제치고 지난 천년동안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 뽑혔으며 레코딩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 등재되었다.

1993년 잭슨의 인생에서 가장 곤혹스럽고 힘든 일이었던 성추행 사건이 터진다. 당시 잭슨은 월드투어 중이었고,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그는 이런 사건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명예와 인생의 금이 가는 사건이었다.

1992년 잭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주에서 한 자동차 정비소의 도움으로 도로 주행 중 고장이 난 밴을 수리할 수 있었다. 정비소 주인의 아내는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잭슨에게 소개시켰고 소년과 잭슨은 절친한 사이가 됐다.

잭슨과 소년(조단 챈들러), 소년의 어머니, 양아버지 그리고 친아버지인 에반 챈들러는 친밀한 사이로 발전했으나 그 과정에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제적 문제로 허덕이던 소년의 친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잭슨을 민사소송 했다. 에반 챈들러는 에반 챈들러의 통화 내용이 유출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엄청난 망신을 당할 것이며 그의 커리어에서 최악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더 이상 단 한 장의 앨범도 팔지 못할 것이며 이런 순간들이 지나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다"[45] 에반 챈들러의 목적이 무엇인 지 분명하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에반 챈들러의 전 아내이자 조단 챈들러의 친어머니에 증언에 의하면 "에반 챈들러는 돈을 잘 갚지도 않으며, 그는 친아들(조단) 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매우 적었고 폭력적이며 학대적인 기질이 있다" 고 증언했다. 1994년 조단 챈들러의 의붓 아버지인 데이비드 슈워츠는 에반 챈들러가 자신의 의붓 아들인 조단을 악용하고 있어 에반에 대해 무척이나 분개했다고 한다.[46]

마이클 잭슨은 결백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2000만 달러로 합의를 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5년 ABC에 나와 재판에 들어갈 경우 7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고 재판을 관할하는 산타바바라주가 백인 중상류층 보수 지역이기에 흑인인 잭슨이 결백함에도 질 수 있다는 변호사들의 권유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명했다. 마이클 잭슨의 합의에도 검찰에선 잭슨을 기소하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려 했지만 기소에 충분한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발표한다. 조단 챈들러는 아버지인 에반 챈들러가 자기를 질식시키려고 하며 머리를 강타하고 스프레이로 눈을 뿌리는 등의 고통올 가하였다고 아버지의 접근을 차단하는 소송까지 하였다. 에반 챈들러는 뉴욕 법원에서 2급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뉴저지로 법정을 옮겨 계속 재판을 진행하던 중 2009년 11월 권총으로 자살을 하여 생을 끝마쳤다. 훗날 공개된 LA DCFS 보고서에 의하면 1993년 잭슨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 했다고 한다.

1994년 5월 26일 잭슨은 첫 번째 아내인 리사프레슬리와 결혼했다.

잭슨이 아동성추행자로 몰리게 된 것은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이끌려 음악활동을 하느라 어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왕국 '네버랜드'에서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고, 잭슨의 이러한 취향을 아는 지인들은 그의 어린이 같은 버릇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으로서는 약점을 잡혔던 것이다.

1994년 5월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며, 배우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다. 둘은 1975년부터 만나왔으며,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둘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결혼식을 치뤘다. 둘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고 한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 는 잭슨이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힘들어 할 때 "나는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고, 그는 결코 잘못이 없다" 고 잭슨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둘은 모종의 이유로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1995-2003 : HIStory, Invincible, 세 번째 아이[편집]

1995년 첫 더블앨범인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995)를 발매한다.

유럽에 있는 마이클 잭슨의 동상.

Disc 1에는 그의 베스트 곡들이 수록돼 있고,Disc 2에는 그의 신곡이 수록돼 있었다. 히트싱글이었던 'Scream'은 동생인 자넷 잭슨이 참여했고, 당시 700만 달러짜리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돈을 들여 만든 뮤직비디오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이 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 5위를 기록했고, 또 하나의 히트 싱글인 'You Are Not Alone'은 R&B싱어송라이터인 알 켈리가 작곡하여 싱글 차트 입성 1주째에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 곡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차트에서 1위를 거두고, 싱글 앨범만 100만 장이 팔리는 등 미국내에서만 700만 장 넘게 팔렸다. 이 앨범으로 1996년1997년에 그래미 어워드에서 5번 후보에 지명되었으며, 그 중 Scream이 Best Music Video-Short Form 부분에서 수상하였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HIStory World Tour'을 개최한다.(한국에서도 2번의 공연을 함.) 총 82번의 콘서트를 했으며, 450만명의 팬들이 모였다. 1996년 두 번째 아내인 데비 로우와 11월 14일 결혼한다.그리하여 두아들 딸인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을 낳는다. 같은 해 한국에도 방문했다. 1997년 무주리조트 투자를 위해 한국을 2번째 방문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3번째 방문했다.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독일에서 투어 콘서트가 열렸다. 콘서트게스트는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 투 멘 등과 투어를 한다.

그는 자신의 소속사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계약 문제가 발생하였다. 소니 뮤직 측은 80년대 후반에 마이클 잭슨과 15년간 앨범 6장을 내는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Invincible 제작을 시작한 마이클 잭슨이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이클 잭슨은 토미 모톨라를 악마라고 표현하며 그는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이고 불공정한 경영을 하며 흑인 뮤지션들을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의적으로 홍보를 늦추는 등 뮤지션을 무시하는 소니의 횡포에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하였다. 이에 격분한 토미 모톨라 전 소니 뮤직 사장은 라디오 방송 횟수만으로 싱글 차트에 각각 10위, 14위에 오른 'You Rock My World'와 'Buterflies'의 싱글 발매 시기를 늦췄다. 이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14번째, 15번째 싱글 차트 1위 곡이 될 수 있던 두 곡은 금세 차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001년 마지막 정규앨범인 Invincible(2001)을 발매한다. 6년 만에 내는 정규앨범이며,최종적으로 약 700만장이 팔렸다. 앨범의 판매량이 전작에 비해 급감하여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시 소니와의 불화로 인해 프로모션이 취소됐고 앨범 홍보 콘서트 다음 날 9.11 테러가 발생한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게 팔린 것은 아니다. 앨범에는 Notorious B.I.G, 알 켈리, 베이비페이스 등이 참여했다. 이 앨범에는 제작할때 힙합프로듀서인 닥터 드레가 프로듀싱에 참여여부를 물어봤다가 거절당한 사연이 있다.싱글인 'You Rock My world'는 3주동안 빌보드 차트 10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 잭슨 솔로 데뷔 30주년 공연'을 열어, 어셔, 휘트니 휴스턴, 엔싱크, 마야, 98 디그리즈, 루더 벤드로스 등이 참여한다. 잭슨의 셋째 자녀인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잭슨은 셋째 아들을 블랭킷이라고 부름)는 2002년에 태어난다.

2004-2005 : 두 번째 성추행 소송 그리고 무죄[편집]

2004년 13살짜리 아이인 개빈이 성추행을 당했다며 마이클 잭슨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기 전과범 재닛 아르비조는 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들 개빈을 도와달라고 잭슨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는 흔쾌히 병원비를 지불하고 치료를 도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년과 친구가 됐다. 그러나 재닛은 잭슨을 아동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사기전과만 10범이 넘는 전과 사기범이었던 재닛은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했고 만장일치 무죄로 잭슨이 승소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잭슨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기관들의 긴급 여론조사 결과 백인의 다수는 잭슨의 무죄가 말이 안 된다며 응답했으며 흑인의 경우는 무죄 판결에 다수가 동의하는 인종적 대립양상도 보였다.

마이클 잭슨이 죽고나서 2009년 잭슨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 조사 결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개빈 아르비조는 REM 테스트 (수면 중 눈동자의 움직임) 조사와 심리동요 반응 검사에서 신뢰할 수 없는 검사가 나왔으며 그리하여 개빈 아르비조는 아동 싸이코 쎄라피스트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첨부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당시 FBI는 마이클 잭슨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어 재판을 진행할 필요가 없으니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FBI는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 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 지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갖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타블로이드들의 주장이 개연성과 구체적인 정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사실 또한 밝혀졌다. 그와 함께 개빈 아르비조의 부모인 재닛 아르비조가 돈을 많이 받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절도 행위를 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사실 또한 밝혀졌다 [47]

2005-2009 : 마지막[편집]

2006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디즈니랜드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가는 잭슨

마이클 잭슨은 그가 생전에 죽도록 저주하던 영미 타블로이드 일간지들에 의해 '많은 빚을 진 비참한 말년의 한 때 잘 나가던 슈퍼스타'로 그려졌지만, 마이클 잭슨의 전 재산은 빚을 모두 제외하고도(2010년 3월 기준으로 빚은 없다) 1조 5천억원 정도가 남을 액수라고 밝혀졌다. 게다가 그 액수는 디스이즈잇 DVD, 블루레이 수입과 비틀즈 판권, 엘비스 프레슬리 판권, 네버랜드 등을 뺀 순수한 현금으로만이다. 그가 파산 위기에 있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2008년 그는 《Thriller 25》라는 기념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에는 기존의 《Thriller》 곡들이 수록됐고,새롭게 리믹스 시킨 곡과 미공개 곡이 함께 추가됐다. 앨범에는 힙합&알엔비 프로듀서이자 유명랩퍼인 카니예 웨스트에이콘, 퍼기, 윌 아이 엠이 참여했다. 또한 일본판에는 그의 라이브곡을 여러개 수록했다. 전 세계에서 300만장이 팔렸고, 벨기에, 콜롬비아, 유럽, 인도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또한 같은 해 전 세계에서 King of Pop이라는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어 전 세계에서 다시 1위를 차지한다. 마이클 잭슨은 2009년 3월 영국 런던에서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는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처음 10회의 공연이 계획됐는데 표가 빠르게 매진되자 40회의 공연이 더 추가됐다. 공연은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O2 아레나에서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 6일까지 열릴 것으로 계획되었고, 200만 개의 티켓은 판매 개시 5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2009-2015 : 죽음/사후[편집]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언론에서는 또 다시 잭슨의 죽음에 대해 근거없는 추측을 했다. 타블로이드지의 주사바늘,자살,슈퍼 박테리아,피부암,성형 후유증 보도 등이 이어졌지만 부검 결과 마이클 잭슨은 사망 당시 50세 미국인의 건강에 비춰봤을 때 건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48]

200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콘레드 머레이에 의한 정맥 주사 투입으로 인한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시 22분 911을 부르고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3분 만에 잭슨의 맨션으로 출동했다. 주치의는 마이클 잭슨에게 법정에서 2.5ml의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집에서 다쓴 프로포폴 100ml 병이 발견되었다.

그는 당시 숨을 쉬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이러한 효과가 통하지 않자 1시 13분 인근 병원인 Ronald Reagan UCLA Medical Center로 이송된다. 2시 26분 병원관계자는 그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여자친구와 지인에게 약 40분가량 통화한 뒤 911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49] 7월 7일 로스앤젤레스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자넷 잭슨, 스티비 원더, 스모키 로빈슨, 어셔, 라이오넬 리치, 제니퍼 허드슨, 저메인 잭슨 등이 참석했으며,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비욘세는 자신의 콘서트를 하던 중 "황제여 영원하라"라고 발언했으며, 그의 동료인 마돈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그를 추모했다.

2011년 1월 25일 LA지방검사보 데이비드 월그렌은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과실치사죄로 기소했다. 2011년 11월 7일 콘레드 머레이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의 죽음에 전 세계인들은 슬픔에 빠졌고, 많은 이들이 애도했다.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6월 26일 외신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며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50]

2009년 7월, 그의 소속사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가 그의 라이브와 마지막 리허설 장면을 바탕으로 총 3부로 이루어진 영화인 디스 이즈 잇을 제작할 것이며, 잭슨의 계약회사인 'AEG 라이브'와 협상 중이라고 한다. 또한 잭슨은 그의 어머니인 캐서린에게 생활비를 매달 지급하게 했다. 2009년 7월 28일 AP 통신은 그의 주치의인 '콘레드 머리'가 강력한 마취제 성분인 '프로포폴'을 주사하여,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현재 경찰과 수사당국은 머리의 과실치사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휴스턴 병원'과 창고를 압수수색 하였다. 2009년 9월 3일, 사망 70일 만에 글렌데일포리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51]

2009년 10월 28일 그의 영화인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2주동안 개봉되었고, 동명의 앨범인 This Is It이 같은 해 10월 26일에 발매되었다. 또, 이 앨범에 실린 싱글인 'This Is It'이 발매됐으며, 빌보드차트에서 앨범은 1위, 싱글은 43위에 머물렀다.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52] 2010년 1월 11일, LA카운티 검시소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한 검시기록의 일부를 공개하였다. 이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사인이 타인에 의해 주사 된 정맥내의 과량의 프로포폴 및 약물에 의한 살인 (Homicide) 으로 명시되어 있다.

2010년 2월 52번째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아들과 딸이 대리수상받았다. 같은해 2월, 잭슨이 주치의로부터 살해됐다고 법원으로부터 공식으로 밝혀졌다. 2010년 11월, 에픽 레코드와 마이클 잭슨 재단은 그의 첫 사후앨범인 앨범《Michael》를 발매한다. 첫 싱글은 지난 2007년과 2008년에 R&B 가수인 에이콘과 작업했으나, 유출됐던《Hold My Hand》가 첫 싱글이다. 앨범은 총 120만장이 팔리었다. 또한 빌보드 앨범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수록된 몇몇 곡은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는 지에 대한 논란 또한 벌어졌다.

그의 사후에도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끊임없이 근거없는 기사를 통해 마이클 잭슨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 측은 '당신들이 본 타블로이드 기사는 사실이 아니며 마이클로 이익을 얻기 위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매우 혐오한다. 팬들이 우리와 함께 마이클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고 성명을 발표하였다.[53] 또한,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반박하기도 하였다. [54]

2014년 5월 사후 잭슨의 미발표곡을 모은 앨범 《Xscape》가 발매된다. 잭슨의 미공개 작업물에 자유 열람 권한을 가진 에픽 레코드의 대표이자 CEO인 엘 에이 리드(L.A. Reid)를 통해 198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녹음된 총 8곡이 수록된다. 그 중 5월 2일 아이튠즈를 통해 선공개된 첫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공개 24시간만에 차트 5위권에 올랐을 뿐 아니라, 17개국에서 1위를 석권하고 67개국에서 5위권 안에 진입했다. 이로써 이 싱글은 잭슨의 통산 49번째 HOT 100 차트 진입곡이 됐다.[55] 또한《Xscape》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했다. 《Love Never Felt So Good》는 빌보드 10위에 올라 마이클 잭슨은 50년대에 걸쳐 빌보드 TOP 10에 진입한 유일한 가수가 됐다. 2015년 1월 11일 기준으로 이 앨범은 1,523,000장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2014년 판매된 음반 중에서 14위에 해당되는 판매량이다.

2014년 5월 19일 열린 2014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홀로그램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돌아온 마이클 잭슨은 16명의 댄서들과 춤을 선보였으며 문워크를 선보였다. 1년이 넘는 준비기간과 100여 명의 스태프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가 콜로니 캐피털에 의해 매각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마이클 잭슨의 유산 관리원은 이같은 소식에 매우 낙담스럽고 슬프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은 2008년 콜로니 캐피털과 네버랜드 합작투자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콜로니 캐피털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콜로니 캐피털이 소유하는 지분은 늘어난 것이었다. 지난 6년 동안 콜로니는 네버랜드의 500억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버랜드를 매각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56]

마이클 잭슨의 사후 소득이 1억 달러 이상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는 생존 가수들보다 훨 높은 것으로 그의 인기와 상업성이 죽어서도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57]

예술가적 기교[편집]

음악 스타일과 메시지[편집]

그는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솔로 마지막 정규앨범까지의 음악적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모타운 시절에는 댄스, 소프트 락, 재즈, 발라드를 주 장르로 했지만,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펑크, 팝 발라드, 재즈, 소울 등의 성숙한 음악을 장르로 했다.80 ~ 90년대에는 거기에다 R&B, 뉴 잭스 윙 적인 음악을 했으며, 2001년에 발매한 Invincible에서는 마이클 잭슨 스타일로 알려진 독특한 어번 R&B 음악에에 그가 지향하던 미래적인 사운드를 첨가했다. 이런 그의 시도들은 그가 매우 혁신적인 뮤지션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장르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음악에 여러 메시지를 두고 제작했다. 'Heal the World', 'We Are The World', 'They Don't Care About Us', 'Smooth Criminal' 등의 음악은 전쟁으로 변하는 세계와 전쟁 반대, 인종차별, 학대, 범죄의 위험성 등을 강조한 음악이다. Gone Too Soon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Earth Song'은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 'Childhood'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만든 곡이다.

또한 그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그가 데뷔했던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무하마드 알리, 말콤 엑스의 뒤를 잇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인식 향상에 마이클 조던 과 함께 동시대에 많은 인종적 장벽을 깨는 데 기여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보컬 스타일[편집]

잭슨 파이브 시절 그의 목소리는 보이 소프라노에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솔로 데뷔 후부터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스타일로 변했으며, 당시 대중, 롤링 스톤지, 뉴욕 타임즈 등은 그의 목소리를 신이 내린 목소리이며 완벽한 목소리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절친 라이오넬 리치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평소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했는데 그 이유는 목소리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최상의 노래를 대중에게 들려주기 위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작사/작곡 능력[편집]

잭슨의 빌보드 1위곡 13개중 8개를 잭슨이 작사/작곡하였으며 프로듀스에도 모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한 능력을 인정을 받아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에 헌액됐다.[58] 주위 증언에 의하면 잭슨은 노래의 기본틀을 완성시킨 채 녹음해 왔다고 한다. 이는 바로 출시해도 될 정도였다고 말한다.

성과 및 영향[편집]

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른 잭슨

잭슨은 활동하던 동안 뮤직비디오 예술 형태의 변형, 현대 팝 음악의 길을 닦아 놓는 등의 성과로 미디어에서 흔히 "팝의 황제"로 불린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작가 톰 유틀리는 2003년 잭슨을 "극도로 중요한 인물", "천재"라고 묘사했다.[59] 잭슨의 음악과 인도주의적인 공헌은 신세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수준이다.[60] 《Thriller》와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 당시 비교적 새로운 채널이었던 MTV의 대중적 인식을 높였고, 직원의 다양한 인종 조성, 채널의 중심을 록에서 팝 음악과 알앤비로 이동시키며 형태를 마련했다. 잭슨의 작품은 수 많은 힙합, 록, 팝, 알앤비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BET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또한 "뮤직비디오의 대변혁을 일으켰고 세계에 문워크같은 춤을 가져다줬다. 잭슨의 사운드, 스타일, 움직임, 유산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61]

《올뮤직》의 스티브 휴이는 잭슨을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라고 묘사했다.[62] 1980년대 중반 《타임》지의 음악 평론가 제이 콕스는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단일 현상이다. 정확히 가장 인기가 많은 흑인 가수이다"라고 썼다.[63] 마이클 잭슨은 스키니 진 페도라 썬글라스 장갑과 재킷 팔찌 암밴드 한쪽을 자른 티셔츠 등 다양한 패션을 유행시켰다. 그 영향력은 어떤 톱스타도 따라올 수 없었다.[64] 동-서방 냉전기였던 80년대, 공산권에서 음반이 판매(유고와 체코, 중국 등)됐던 유일한 미국 가수였다. 동서 경계까지 허문 그 모습이, 1984년 American Music Awards에서 멀티비전으로 5분 여 동안 소개되기도. 같은 공산권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도, 마이클의 음반이 암시장에서 몰래 거래되었다. 그 현상은 홍콩의 액션영화 <동방독응(1987)>에 현지 암시장에 원표가 등장하는 순간, Beat It이 들리면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 미국의 FBI, 구 소련/ 러시아의 KGB 등, 첩보기관들마저 주목한 팝 가수였다. Bad World Tour 서베를린 공연 때(6월 19일), 당국으로부터 절대 금기시된 그 공연 관람으로 월담을 시도한 동독인들로, 베를린 장벽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동독에서 마이클 잭슨이란 이름은 "미 제국주의가 낳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규정되었다. 소련의 경우는 마이클 잭슨을 강력히 비난했는데 공산주의 국가에도 잭슨은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65] 한편 잭슨의 유명세는 한국에서도 막강하게 떨쳤다. 초등학교5,6학년-중학교1,2학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4위로 뽑힌 것이다. [66] 1990년 《배너티 페어》에서는 연예 공연업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로 잭슨을 꼽았다.[67] 2007년 잭슨은 "음악은 나의 발산 수단이며, 세계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내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란걸 안다"고 말했다.[68]

유니버설시티 하드 록 카페에 전시되어 있는 《Thriller》 플래티넘 레코드

잭슨이 죽고나서 얼마 후 2009년 6월 25일 MTV는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하기 위해 원래 뮤직비디오 형식을 간략하게 돌아봤다.[69] 또한 MTV 유명인과 기타 유명 인사들의 반응을 포함한 실시간 뉴스 특별 방송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에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MTV 프로그램 방송 시간도 임시적으로 변경되었고, 잭슨의 추도식 생중계가 끝난 다음 주 원래대로 돌아왔다.[70] 2009년 7월 7일 열린 추도식에서 모타운 레코드 설립자 베리 고디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라고 말했다.[71][72][73] 2009년 12월 29일 AFI는 "6월 50세이던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사후 콘서트 리허설 영화 《This Is It》는 전례없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고 말하며 잭슨의 죽음을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했다.[74] 마이클 잭슨은 미국흑인대학펀드로부터 인문학박사와[75] 피스크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76]

마이클 잭슨은 1980년 더 잭슨스의 멤버로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올랐고, 1984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잭슨은 경력 동안 월드 뮤직 어워드의 베스트 셀링 팝 남자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아티스트 오브 더 센트리 어워드, 밤비상의 팝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어워드를 포함해 수 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77][78]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입성했는데,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2001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이 외에 1999년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2002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등 여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77] 2010년에는 팝과 락앤롤을 겸하는 댄서로는 최초로(현재까지도) 댄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79] 잭슨은 13번의 그래미상(뿐만 아니라 그래미 레전드상그래미 평생 업적상도 수상) 수상, 26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세기의 아티스트"와 "1980년대 아티스트" 포함) 수상, 13장의 빌보드 핫 100 1위 싱글을 만들어내며 그 어떤 남성 음악가보다도 많은 기록이다.[80] 또한 세계적으로 7억 5천만장정도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7][8][9] 을 기록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중 한 명이 되었다.[81][82][83][84][85]

음반 목록[편집]

투어[편집]

한국과의 인연[편집]

잭슨은 1996년 서울에서 첫 내한공연을 개최했다. 그는 1993년 한국에서 공연을 열기 위해 김영삼 정부에게 허가 신청을 했지만 근검절약 등의 이유로 거절된 바 있다. 1996년 내한공연의 경우도 많은 진통을 겪었는데 기독교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비난을 쏟자 자칫하면 취소될 뻔한 것이다. 무산위기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공연이 성사됐다.

1999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생전 마지막 해외 투어가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다.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열렸고 이는 SBS에서 생중계를 해줬으며 시청률이 45%를 기록하는 큰 성과를 이뤄냈다.

잭슨은 공연 중 통일이 되면 반드시 또 다시 와서 공연을 개최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사망함으로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 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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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e wears the crown as the King Of Pop because no artist has broken his record of selling nearly 60 million copies of a single Album (Thriller)", in Lewis Jones, Jel D. (2005). 《Michael Jackson, the King of Pop: The Big Picture: the Music! the Man! the Legend! the Interviews: an Anthology》. Amber Books Publishing. 3쪽. ISBN 978-0-974977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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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