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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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in 1988.jpg
기본 정보
본명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 1958년 8월 29일(1958-08-29)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사망 2009년 6월 25일 (50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직업 가수, 프로듀서
장르 알앤비, , 댄스 팝, 펑크, 뉴 잭 스윙
활동 시기

1963년 ~ 2009년(잭슨 파이브)

1971년 ~ 2009년 (솔로)
가족 조셉 잭슨
캐서린 잭슨
레비 잭슨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라토야 잭슨
말런 잭슨
랜디 잭슨
자넷 잭슨
프린스 마이클 (아들)
패리스 잭슨 (딸)
프린스 마이클 2세 (블랭킷) (아들)
레이블 모타운, 에픽, MJJ Music
관련 활동 잭슨 파이브
웹사이트 www.michaeljackson.com

마이클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은 팝의 황제(King of Pop) 라고 불리는 미국의 가수 이다. [1][2]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 와 《Thriller》를 통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 등 총 31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다.[3][4][5][6]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 동안 빌보드 TOP 10 안에 든 유일한 가수이다.[7] 또한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하였다.[8]

음반판매량은 3억-4억장을 판매한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가수인 것이다.[9] 그의 활동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10] 그의 작사/작곡 능력이 인정받아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으며[11] 가수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12]

AP통신은 잭슨은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항상 센세이션을 불러온 팝스타였다고 평가했으며[13] 타임 (잡지)는 잭슨을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최대의 가수라고 소개했다.[14] 뉴스위크는 잭슨 이전에는 비틀즈와 엘비스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에는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보도하였다.[15]

뉴욕타임즈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사람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즈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이다. 그는 방송국들의 인종 차별 정책을 돌파하여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평가하였다.[16]

생애[편집]

1958-1978 : 잭슨 파이브[편집]

1958년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개리의 방 3개 달린 집에서 살고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집안 가족 중 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17]

1972년 잭슨 파이브. 가운데가 마이클이다.

1963년 마이클과 말론은 아버지에 의해 형제 잭키, 티토, 저메인이 결성했던 잭슨 브라더스에 합류했고, 콩가탬버린 백업 포지션을 맡았다.

1966년 형 저메인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그룹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꿨다.[18]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 (I Feel Good)〉를 불러 우승했다.[19]

1967년 아폴로 극장 등을 포함한 각종 탤런트 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중서부동부의 "chitlin' circuit"라고 불리는 스트립쇼, 기타 성 행위가 열리는 흑인 클럽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1969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 지역 레코드사 스틸타운에서 〈Big Boy〉 등을 포함한 몇몇 노래를 녹음하면서 전문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18] 《롤링 스톤》은 어렸을 적 마이클을 "신동이다",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가장 이목을 끌면서 빨리 알려진 리드 싱어"라고 묘사했다.[20] 처음으로 발매했던 네 장의 싱글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는 빌보드 핫 100 차트 진입과 함께 모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 잭슨 파이브는 "가장 발전한 크로스오버 흑인 음악가의 본보기"라고 불렸다.[21]

1972년 ~ 1975년 사이 잭슨은 《Got to Be There》와 《Ben》을 포함해 네 장의 솔로 음반을 발매했다. 그리고 〈Got to Be There〉, 〈Ben〉, 바비 데이의 리메이크곡 〈Rockin' Robin〉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Ben〉은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한다.

1973년 부터 잭슨 파이브와 모타운 레코드는 갈등을 겪게 된다. 잭슨 형제들은 모타운 사운드에 벗어나 다채로운 사운드를 제작하여 음악을 하기 바랬으며 작사/작곡의 자유가 부여되길 원했지만 모타운은 이를 거부했다.[22]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1975년 모타운을 떠났다.[23] 이후 CBS 레코드의 자회사 에픽 레코드와 계약했다.[23] 그룹 이름을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꿨다.

1978년 감독 시드니 루멧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으로 출연했다.[24]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영화에서 연주될 악보를 편집한 퀸시 존스와 만났고, 잭슨의 다음 솔로 음반 《Off the Wall》을 같이 제작하기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25]

퀸시는 훗날 처음 잭슨을 만났을 때 "그는 지나치게 내향적이고 수줍어 하는 사람, 그가 대성공을 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 회고했다. 그러나 Off The Wall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잭슨의 재능을 보게 되었고 "그는 아티스트로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나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가는 데 익숙한 훈련교관인데 사실 마이클에게는 나같은 역할이 그닥 필요하지 않다. 그는 두 곡의 리드 보컬 부분과 세 곡의 백 보컬 부분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 잭슨은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대부분의 가수들은 이용료가 비싼 스튜디오에서 모든 것 (작사/작곡 등)을 해결하려 하였는데 그것들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같은 프로듀서들이 잭슨을 원했던 이유이다. 그는 준비된 상태였으며 단 한 번의 세션에서 아주 많은 것을 마무리 하였다. 내게 충격을 줄 만큼 감동적이었다." 고 회고했다.[26]

한편 유년 시절 아버지 조지프 잭슨학대 사실이 논란을 불러왔다. 조지프 잭슨은 자신의 아들 마이클을 정기적으로 학대했음을 인정하였다.[27] 마이클 잭슨은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유년 시절 고독을 느꼈다고 말하였고 2003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살아보기에 나와 아버지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여 이에 대해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였다.

1979-1981 : Off The Wall[편집]

1979년Off the Wall》이 발매된다. 빌보드 200 3위까지 올라갔고,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의 판매량을 올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8] 또한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른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를 포함해 〈Off the Wall〉, 〈She’s Out of My Life〉와 같은 네 장의 싱글을 10위권에 진입시켰다.[29][30]Off the Wall》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호평과 인정을 받았다. 롤링 스톤은 명확한 디스코와 세련된 R&B로 구성됐다며 칭찬했으며 평론 매체 'Robert Christgau'는 A를 'Melody Maker','Yahoo! Music','Sounds','Smash Hits','Blender' 등의 평론 매체에서는 (favorable) 를 줬다.[31][32][33]2003년에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위에서 68위를 차지하였다.[34] 2008년Off the Wall》은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 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35]

1980년 잭슨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음반, 가장 좋아하는 소울 알앤비 남자 아티스트,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싱글 부문에서 수상하며 총 3관왕에 올랐다.[36][37] 또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탑 블랙 아티스트와 탑 블랙 음반상을 받았고, 음악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그래미상에서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를 받았다.[29]그러나, 잭슨은 그래미에서 상을 얻었지만 무척이나 실망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는데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에다 평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한 개의 상을 얻었다는 점에서 동업자로부터 무시당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업계에서도 그래미의 잭슨에 대한 대우에 놀랐다고 한다. 1981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음반과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남자 아티스트상을 받았다.[38] 이런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Off the Wall》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고 다음 음반은 기대를 뛰어넘는 것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39] 1980년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는데,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40]

1982-1985 : Thriller[편집]

백악관 남쪽 현관인 사우스 포티코에서 로날드 레이건,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과 함께 (1984년 5월 14일)

1982년Thriller》를 발매한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할 당시에 인종이나 음악적 장르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 음반은 65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다. 기네스북에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등재됐다.[41] 빌보드 200에서 37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또한 9곡중 7곡인 '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 'Human Nature', 'P.Y.T.(Pretty Young Thing)'은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올랐으며 그가 작사/작곡한 'Billie jean' 은 7주 연속 'Beat it' 은 2주 연속 1위를 차지한다. 이 곡의 비디오는 이전에는 흑인 음악의 비디오를 틀기를 거부했던 MTV의 장벽을 무너뜨린 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42] 또한 흑인들의 음악을 잘 트지 않았던 라디오 방송들 또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결국 틀 수 밖에 없었고 인종의 경계를 무너뜨린 큰 변화를 불러왔다고 평가하고 있다.[43] 《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3위를 차지하였다. 《Thriller》음반은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국립 음반 기록소에 등재됐다. 2008년에는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44][45][46][47]

1983년 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은 'Billie jean'을 댄스로 선보인다.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 춤 중 하나인 Moon Walk가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인 공연이다. 이 공연은 지난 50년간 미국인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순간 7위로 뽑혔다.[48]

잭슨의 뛰어난 음악과 뮤직비디오들은 MTV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MTV는 1981년 8월 개국하였는데 당시만 해도 인지도와 대중성이 적었으며 MTV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밥 피트먼은 방송의 구성을 로큰롤에만 제한했고, 당시만 해도 로큰롤은 백인들의 음악으로 결국 대부분의 흑인 가수들이 배제되는 상황이 초래됐다. MTV 개국 직후 뮤직비디오 750개 중 흑인 가수들의 노래는 40개도 되지 않는다. 흑인들은 이러한 MTV에 대해 인종차별 주의자라고 비난했었다. 잭슨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고 CBSBillie Jean 뮤직비디오를 MTV에게 제공하였는데 MTV는 거절하였다. 그러자 CBS는 Beat it 뮤직비디오 영상을 제공하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다른 가수들의 모든 뮤직비디오를 빼버리겠다고 통지했다. MTV에서 방영되는 가수들의 대다수는 CBS 소속이었고 CBS가 빼버리면 MTV가 위험해지는 상황인 것이다. 잭슨 한명을 위해 CBS가 직접 나서 압박하였고 마침내 MTV에서 잭슨의 뮤직비디오가 방영됐고 아이러니 하게도 MTV의 대중적 인기를 올려준 것은 잭슨의 노래와 뮤직비디오였던 것이다. 이후 흑인 가수들의 돌파구가 생겨났다. [49]

Thriller (노래)의 뮤직비디오도 공개된다. 14분짜리 대작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다.[50]

11월 그의 대중적 인기와 매력은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펩시콜라는 유명인과 관련된 업계의 기록을 깨고 500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체결한다. 펩시는 잭슨의 투어를 후원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노래를 활용해 광고를 만들기도 하였다.[51]

잭슨의 영향력은 MTV에서만 통한 것이 아니다. 1984년 1월 14일자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그는 MTV 말고도 많은 라디오들과 방송국들의 인종차별적 프로그램 정책을 돌파해냈다. 《Thriller》는 젊은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록 비디오 방송국들과 흑인 청취자들에게 어필하는 어반 댄스 음악 방송국에서도 틀어졌는데 《Thriller》전에는 매우 소수의 뮤지션들만이 이 미묘한 인종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케이블 텔레비젼에도 일어났는데 흑인 가수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데서도 잭슨의 영상들은 계속해서 방영되는 것이다.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거의 안 튼다고 봐도 될 정도였던 Album Oriented Rock 계열의 라디오 방송국들에서도 잭슨의 노래와 영상은 방영됐다. 잭슨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냈다.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변화를 일으킨 것이다.[16]

이 음반의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미쳤다. 70년대 후반 등장한 카세터 테이프 레코더 등의 이유로 음반업계는 장기간 불황이었고 레코드 가게는 계속해서 망해갔다. 근데 잭슨의 음반만큼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의 《Thriller》는 이러한 음반업계의 불황을 막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사람들이 잭슨의 음반을 사기 위해 가게로 몰리고 다른 가수들의 음반까지 사간 것이었다. 얼마나 대단했냐면 레코드 판매 최호황인 78년의 총 판매수입이 41억 달러였는데 잭슨은 3천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78년 한 해의 모든 레코드의 판매수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거둔 것이다.[14] A&M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은 당시 "전체 음반산업은 잭슨의 성공으로 한 몫을 봤다" 고 말하였다.[52]

1984년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높으며 음악계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8개의 상을 휩쓸어 최다 부문 노미네이트/최다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53]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은 정치, 경제의 잡지 주요 인물들을 고집해왔던 그간의 표지 제작의 방침을 깨고 발간 이후 최초로 연예인인 잭슨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썼다.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까지도 잭슨의 유명세가 떨쳤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잭슨 따라하기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 [14]

빌보드 1위의 자작 히트곡 Beat It의 반폭력 메시지와 당시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인 "Just say no" 캠페인에 대한 협조, 오랜 기간에 걸쳐 펼쳐온 자선활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5월 14일에는 백악관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에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받는다.

1월 27일 그는 펩시의 CF 광고를 촬영했다. 그런데 리허설 도중 불꽃이 떨어져 잭슨의 두피는 2도 이상의 화상에 걸리게 된다. 백피화상을 입게 되면 급격히 악화된다. 이로 인해 잭슨의 피부색이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잭슨은 펩시와 합의를 보았고 화상 치료센터에 150만 달러를 기부한다.[54]

1985년 그는 'We Are The World'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는 당시 오랜 기아로 인한 아프리카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구제 활동을 목적으로 이익금 전액이 아프리카의 구호 활동에 쓰여지도록 전해졌다. 세계적으로 약 1400만 장 이상이 팔리고,'We Are The World'는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40여명의 가수들을 "USA for AFRICA"라는 단체 이름 아래 참여시킨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1986-1990 : Media/Bad[편집]

백반증으로 인해 얼굴이 하얘진 잭슨의 초기 모습(1988)

1986년 타블로이드 언론은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하여 고압 산소 체임버에 자고 있다며 산소 체임버에 누워 있는 잭슨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함께 보도한다. 이같은 소식은 미국의 주요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으며 빠르게 퍼져나간다. 이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잭슨은 당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캡틴 EO》성공을 위한 홍보와 그동안 자신을 동성애자라며 근거없는 정보를 퍼뜨린 타블로이드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지 과시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또한 잭슨이 침팬지를 키우기 위해 구매한 것도 언론에게는 기이한 행동으로 보였으며 그는 점점 일반인들에게 현실과 분리된 존재로 보였다. 또한, 잭슨이 영화에 출연한 한 남자의 시체를 사려한다는 소문도 퍼졌는데 이 또한 《캡틴 EO》처럼 잭슨 측이 홍보를 위하여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라고 한다. 잭슨은 진실이 아닌 거짓 내용을 흘려 홍보를 하는 행위를 중단했지만 언론은 기이한 잭슨의 행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고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정적이고 거짓 이야기를 보도하여 잭슨을 괴롭혔다. 이후 'Wacko Jacko'라는 별명이 생기는데 이는 기괴한 잭슨/괴짜 잭슨/미친 잭슨이라는 뜻이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을 'Jackson' 으로 칭하지 않으며 'Jacko'로 칭하기 시작한다. 잭슨은 'Wacko Jacko'라는 별명을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그러한 말을 쓰지 말고 'Jackson'이라 불러달라고 말하였다.[55][56][57][58][59][60]

잭슨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잭슨)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믿어요. 사람들에게 당신이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말해보지 그래요? 아니면 살아 있는 치킨을 먹는다거나 매일 밤 주문을 외우며 춤을 춘다고 말해보는 건? 아마 사람들은 당신 말을 믿어줄 거예요. 기자니까요. 그런데 만약 나, 마이클 잭슨이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해봐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세상에 마이클 잭슨은 완전히도 미쳤어. 저런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믿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해요."

—Taraborelli, J.Randy, 《Michael Jackson – The Magic, the Madness, the Whole Story》

또한 잭슨의 피부색은 급격하기 바뀌기 시작한다. 본래의 흑인들의 검정색 피부색이 사라지고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거다. 이러한 피부색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백피라는 질병 때문이다. 그러나, 잭슨은 백인이 되기 위해 피부색을 수술하고 있다는 언론들의 근거없는 비난에 당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후 잭슨은 대중적 이미지에 크나 큰 상처를 입게 됐다. 타임은 잭슨이 미국 내에서 음악적인 평가를 받지 못 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잭슨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은 여전했지만 인기의 중심이 미국이 아닌 유럽과 아시아 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1987년Bad》를 발매한다.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5개의 싱글이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한 음반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을 달성한 음반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총 판매량은 3500만장 이상으로 추정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 10위를 기록했다.[61] 전작 《Thriller》에는 미치지는 못 했지만 다수의 평론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 중 올 뮤직 가이드에서는 4.5점을 《큐 매거진》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며 롤링 스톤에서는 4점을 줬다.뉴욕타임즈에서는 'favorable'로 평가받았다.[62][63][64][65]

Bad》의 대성공으로 인해 잭슨은 단 2개의 음반으로 80년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으며 80년대 가장 성공한 가수로서의 입지를 공고화 했다. 전작들과는 달리 모든 노래의 프로듀서에 참여하였으며 11곡 중 9개의 곡을 혼자서 만들어 아티스트로의 면모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팝의 황제라는 칭호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잭슨의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일본을 시작으로 시작됐다. 총 123회 공연 440만명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이루게 됐으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인 웸블리 구장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워 50만 4천명의 관객들을 불러왔다.[66][67][68] 공연 도중 관객들이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보고되어 안전상의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69][70]

"The Way You Make Me Feel"을 공연하는 마이클

1988년 그는 첫 자서전 'Moon Walk'를 출판한다. 이 책은 4년동안 모두 200만권 넘게 팔렸고,두 번째 자서전인 'Jackson 5'는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쓴 책이었다. 이 책들은 모두 뉴욕 타임즈에 베스트 셀러로 등극했다. 같은 해 3월, 그는 캘리포니아 주 'Santa Ynez'에 17억을 들여,약 330만 5340평에 달하는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를 건립한다.

1989년 그의 친한 친구인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마이클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대중화 되어 잭슨의 별명이 '팝의 황제' 가 되는 계기가 된다. 미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그에게 세기의 아티스트상을 수여한다.[71]

잭슨이 'Bad'로 활동할 때 입었던 황금 군복 옷

1991-1994 : Dangerous[편집]

1991년Dangerous》 를 발매한다. 30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많이 팔린 음반 16위라는 기록을 세운다.[61] 빌보드 200에서 4주 동안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인종 화합 메세지를 담은 첫 싱글인 'Black Or White'는 7주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대다수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에서 올 뮤직 가이드는 3.5점을 큐 매거진은 4점을 롤링 스톤과 《Virgin Encyclopedia》4점을 줬다. Robert Christgau는 Off the wall 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음반이라며 A-를 줬고 롤링 스톤은 Bad 보다 훨씬 선명하다고 평가했다.[72][73][74][75][76][77]Dangerous》는 다시 잭슨 붐을 일으킨다. 1993년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으로 1위에 뽑혔다.[78]

1992년 그는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한다.그는 자선기부,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불치병에 걸린 사람치료로 목적을 두었다. 6월 27일부터는 'Dangerous World Tour'를 진행한다. 이 투어는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로 동구권 국가에서도 진행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도 공연을 개최하였는데 러시아의 라디오 PD인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CNN에 나와 이렇게 말하였다.

"공연은 서너 시간 늦어졌습니다. 야외 공연이었는데 그날 저녁 하필이면 모스크바에 비가 거세게 쏟아졌거든요. 빗줄기가 너무 강해 스태프들이 공연을 하는 내내 물을 쓸어내야 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그날 공연이 정말 특별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러시아에 왔다는 사실에 다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열광했어요. 공연의 질과 사운드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공연은 굉장했어요. 이제까지 보아온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미국은 다른 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그 별의 제왕이었죠. 그는 열광적인 미국 생활의 표상 그 자체였습니다.", Chas Newkey-Burden, 《Michael Jackson: Legend: 1958–2009》

마이클 잭슨은 미국 그 자체였다. 20세기 미국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79], 그의 동구권 국가 공연은 서방이 몇 십년동안 못 했던 일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투어는 총 390만명의 관객들을 불러왔다. Dangerous World Tour의 라이브 동영상인 1992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 동영상은 'HBO'라는 미국의 케이블 채널에서 사 방영하였는데 무려 시청률이 21.4%로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다.[80]

1993년 1월 31일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많은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결승전 하프타임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미식축구협회인 NFL은 시청률 하락으로 많은 고심을 했는데 1993년 경기 중간에 여는 하프타임에 마이클 잭슨을 투입했다. 하프타임쇼의 시청률은 1992년 보다 8.6% 보다 높아졌으며 이후로 하프타임때는 그해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문화가 자리잡게 됐다.[81]

2월 10일에는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인터뷰를 했는데 시청률이 47.9%로 미국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았던 TV프로그램 8위로 기록됐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미국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파악할 수 있다. [82]

로스앤젤레스에서'살아있는 전설상'을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여받아 살아있는 전설상 최연소 수상이라는 기록을 냈으며[8], 베스트 R&B 상을 받는다. 또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베토벤을 제치고 지난 천년동안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 뽑혔으며 레코딩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 등재되었다.

그 해 여름에는 잭슨의 인생에서 가장 곤혹스럽고 힘든 일이었던 성추행 사건이 터진다. 그의 명예와 인생의 금이 가는 사건이었다.

1993년 여름. 최절정의 인기를 구사하던 잭슨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이 터지게 된다. 마이클 잭슨이 성추행을 했다며 이반 챈들러가 기자회견을 연 것인데 이들의 연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잭슨은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고장이 나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우연히 잭슨이 차 고장으로 인해 쩔쩔매는 모습을 본 근처 카센터의 직원은 그것을 사장 데이비 슈워츠에게 알렸다. 데이비 슈워츠는 훗날 잭슨이 자신을 성추행 했다며 주장한 조단 챈들러의 의붓 아버지이자 조단 챈들러의 친어머니인 준과 재혼한 사람이다. 슈워츠는 당시 아내 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조단 챈들러는 열렬한 잭슨의 팬이였다.조단은 잭슨이 펩시 CF 광고를 촬영하던 도중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편지를 써서 빠른 쾌유를 빌기도 하였다. 이를 이용하면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잭슨에게 접근했고, 잭슨에게 차를 렌트해주는 조건으로 자기 아들과 놀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잭슨은 OK를 했고 조단과 그리고 조단의 어머니인 준 그리고 조단의 동생인 릴리까지 네버랜드를 포함하여 호텔 등에서 함께 놀았다. 이들의 사이는 급격하게 좋아졌는데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마이클 잭슨의 새 가족이라는 특종을 보도하기 까지 하였다. 한편 이혼한 남편 이반 챈들러는 이러한 잭슨과 소년의 우정에 질투를 느끼게 되고 잭슨을 직접 대면하기 까지 한다. 이반 챈들러는 잭슨을 대면하고 나고선 그에 대한 악감정이 풀렸고 이반과 잭슨의 사이 또한 가깝게 된다. 잭슨은 이반을 최고의 아버지라고 칭찬까지 하기도 하였으며 이반의 경우는 잭슨에게 아예 우리 옆 집에 집을 지어 조단과 가까이 지내는 게 어떠냐고 제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건 조단이 잭슨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학교 친구들과 놀지도 않으며 잭슨에게만 함께 있으려 한 시점부터이다. 이반의 재정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반은 치과 의사였지만 이혼으로 인해 위자료 6억원을 주며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야망 때문에 거액이 필요했던 시점이다. 이반은 준에게 조단의 양육비를 줘야 하지만 이반은 그것을 줄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반 챈들러는 당시 악덕 변호사로 유명한 베리 로스에게 찾아가 의뢰한 뒤 베리 로스 측은 잭슨에게 찾아가 2000만 달러의 합의를 제시했다. 당시 그들이 증거로 내세운 것은 조단의 녹음이었는데 참고로 조단은 처음에는 잭슨을 열렬히 좋아했으며 따랐으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 적이 없다. 이는 잭슨의 사립 탐정이었던 앤서니 펠리카노에 조사에서도 추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반이 한 정신과 의사에게 조단을 데려가고 마취 전문의가 있어야만 투입할 수 있는 최면 진정제를 투입한 뒤부터는 조단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잭슨과 자신이 성관계를 나눴다는 것. 문제는 이때 사용된 최면 진정제는 'AMYTAL SODIUM'은 상당한 부작용으로 인해 비판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이 약을 투여하게 되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상대방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또한 이 약을 사용하여 거짓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지 미국 워싱턴 대학 등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입증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때는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으며, 이반 측과 잭슨 측 두 사이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잭슨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태였고 이반 측은 200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잭슨 측은 결코 안 된다며 35만 달러를 제시했고 결국 둘은 합의를 이루지 못 하게 된다. 1993년 7월 2일 조단의 의붓 아버지인 데이비 슈워츠는 도대체 이반이 왜 이러는 지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자 전화를 시도했고 그 녹음본이 공개됐는데 당시 이반은 데이비 슈워츠에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다" 말하였다.

이후 이반은 잭슨을 민사소송 하였고, 아동복지국은 자체적으로 형사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네버랜드가 압수수색 되자 언론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처음 알게됐고 잭슨을 향해 끊임없는 비난을 쏟았다. 준은 형사 조사에서 잭슨은 성추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말하였다. 잭슨은 자신은 결코 죄가 없다며 결백을 호소했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진통제 중독 그리고 변호사들이 잭슨이 결백하더라고 하더라도 백인 중상류층 보수 지역인 산타바바라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며 끊임없이 합의를 권유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2000만 달러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일부는 합의를 유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합의안에서는 잭슨이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명시됐다. 말 그대로 합의일 뿐이다. 민사 소송 문제는 해결됐지만, 형사 수사 부분이 남았는데 증거 부족으로 인해 불기소 처분됐다.

당시 잭슨을 고소한 이반 챈들러는 잭슨이 죽은 지 5개월 후인 2009년 11월 17일 권총으로 자살을 하며 생을 끝마쳤다.

이 사건은 잭슨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줬으며 이후 불면증을 겪고 약물에 의존하게 된다.

1994년 5월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며, 배우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다. 둘은 1975년부터 만나왔으며,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둘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결혼식을 치뤘다. 이 둘의 결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미국의 전설적 가수이자 많은 사랑을 받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 현재 미국의 전설적 가수인 마이클 잭슨과 결혼한다는 것은 엄청난 이야깃거리 였고 일각에서는 잭슨이 자신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그렇지 않다며 둘은 아주 사랑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같이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였으며 여러 시상식에도 동행하였다.

1995-2000 : HIStory[편집]

1995년 잭슨이 재기에 성공할까 냐는 궁금 속에 첫 더블 음반인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를 발매한다.

유럽에 있는 마이클 잭슨의 동상.

Disc 1에는 그의 히트 곡들이 수록돼 있고,Disc 2에는 그의 신곡이 수록돼 있다. 수록 곡 'You are not alone'은 빌보드 데뷔 첫주 만에 1위라는 신기록을 세웠다.[83] 음반판매량은 2000만장 이상이 판매됐다.[61] 평론가들에게는 대체로 평균적인 수준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 중에서 올 뮤직 가이드큐 매거진은 3점을 롤링 스톤에게는 4점을 Robert Christgau 에게는 2점을 받았다. The Daily Collegian 와 Michigan Chronicle 에서는 favorable 을 New York Daily News는 Mixed라는 평가를 내놓았다.[84][85][86][87][88]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이 음반으로 1개의 상을 수상했으며 올해의 음반 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하였다.[89] 성공적인 재기를 이룬 것이다.

1996년 1월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이혼한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200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난 사람들이 당신(마이클 잭슨)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보게 된다면 나(당시 마이클 잭슨과의 결혼으로 리사 마리에게 대중들은 비난을 쏟았다)에게 미쳤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냥 보통사람들처럼 앉아서 술마시고 욕도 하고 굉장히 재밌고 거친 소리도 하는 그런 사람인데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항상 고음으로 말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매우 이상하다. 그(잭슨)가 자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거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생각(잭슨에 대한 편견)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동안 부부 생활은 원만했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은 나빠지고 끔찍해져 버렸다. 난 정말 그와 사랑에 빠졌었다. 난 정말 그에게 푹 빠졌었고 난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그를 구원하고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내 머릿 속에 있었다.", Lisa Marie Presley, 《Rolling Stone 2003 Interview》

비록 이혼을 했지만 사이가 쭉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혼 후 잭슨과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으며 잭슨의 월드 투어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보기도 하였다. 9월에는 HIStory World Tour를 개최하는데 5개 대륙 35개국에서 총 82회 공연으로 450만명의 관객들을 불러 온다. 관객 수치로 판단하면 잭슨의 투어 중 가장 성공적인 투어인 셈이다.[90] 11월에는 '데비 로우' 라는 간호사와 재혼한다. 데비 로우는 1980년대 초반부터 마이클 잭슨과 아는 사이였다. 잭슨은 백피로 인해 피부과를 방문했는데 당시 잭슨을 돌 본 간호사가 데비이다. 데비는 잭슨의 열렬한 팬이었고 잭슨에게 싸인을 받기도 했으며 자주 통화를 하며 둘은 가까워 졌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도 데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91][92][93][94]

1997년 리믹스 음반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다. 2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Blood on the Dance Floor (노래)는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는 42위에 그쳤지만 영국 등에서는 1위를 유럽의 지역에선 대부분 10위 안에 드는 히트를 쳤다. 미국과 유럽 간 차트의 괴리가 발생한 이유는 잭슨이 Wacko Jackco 와 성추행 논란으로 미국 본토에서 큰 이미지 피해를 입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차트의 괴리 현상은 이 음반만 그런 것이 아니다.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때부터 서서히 이런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사람들이 잭슨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어느 사람보다 높은 관심을 보냈지만 위에 서술한 'Wacko Jacko' 논란 그리고 아동 성추행 논란 거기에다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전설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이혼한 것은 잭슨의 이미지에 결정적 타격을 줬다. 당시만 해도 잭슨이 이미지 회복을 위해 리사를 이용하고 있다는 여론이 팽배했었다.

1998년 잭슨의 두번 째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태어난다.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공연을 한국 서울독일 뮌헨에서 개최한다. 10월 8일에는 '데비 로우'와 이혼을 한다.

2001-2009 : Invincible[편집]

2001년 9월에는 1984년 이후 형제들과 다시 모여 공연을 뉴욕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 공연을 열였다. 10월 잭슨의 6번째 음반 《Invincible》이 발매된다. 굴욕적이게도 유일하게 잭슨의 성인 음반 중에서 빌보드 핫 100 1위곡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9.11 테러로 인하여 판매량에서도 큰 피해를 입게 됐다. 소니와 불화를 겪어 재판까지 하게 된다.

2002년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태어난다. 어머니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잭슨은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살아보기에서 대리모에게 자신의 정자를 인공 주입하여 낳은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11월 20일 잭슨은 독일 베를린호텔에서 아기를 보고 싶다며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창가에서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를 보여줬는데 이는 매우 아찔한 모습으로 위험하게 비춰졌다. 언론에서는 이런 잭슨을 향해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잭슨은 이에 대해 끔찍한 실수였다며 인정했고 팬들이 아기를 보고 싶어하길래 손으로 꽉 잡고 보여준 것이라며 결코 흔든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95]

10월 27일에는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해 잭슨이 주도하여 미국에서 잘 나가는 가수들을 모아 노래를 만들고 자선 공연을 열었다. 수익금은 모두 자선 단체로 갔다. 발매된 싱글은 'What More Can I Give'로 영어 버전과 스페인어 버전 2개로 나누어저 있다.

11월 18일에는 잭슨의 히트곡을 모은 'Number ones' 음반이 발매된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13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1월 20일에는 'One more chance' 라는 잭슨의 새 싱글이 발매된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잭슨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당시 경찰의 수사로 인해 뮤직비디오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 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는 83위지만 영국 차트에선 5위를 기록하는 등 유럽 내에서는 썩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2003년 2월에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살아보기라는 방송이 방영된다. 이는 논란을 불러왔다.

2004년 13살짜리 아이인 개빈이 성추행을 당했다며 마이클 잭슨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기 전과범 재닛 아르비조는 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들 개빈을 도와달라고 잭슨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는 흔쾌히 병원비를 지불하고 치료를 도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년과 친구가 됐다. 그러나 재닛은 잭슨을 아동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사기전과만 10범이 넘는 전과 사기범이었던 재닛은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했고 만장일치 무죄로 잭슨이 승소했다.

마이클 잭슨이 죽고나서 2009년 잭슨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마이클 잭슨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어 재판을 진행할 필요가 없으니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FBI는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 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 지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갖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타블로이드들의 주장이 개연성과 구체적인 정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사실 또한 밝혀졌다. 그와 함께 개빈 아르비조의 부모인 재닛 아르비조가 돈을 많이 받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절도 행위를 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사실이 밝혀졌다. [96]

2006년 MTV 재팬과 런던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 위해 모습을 등장한 것 이 외에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6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디즈니랜드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가는 잭슨

2008년 그는 《Thriller 25》라는 기념 음반을 발매한다. 음반에는 기존의 《Thriller》 곡들이 수록됐고,새롭게 리믹스 시킨 곡과 미공개 곡이 함께 추가됐다. 발매 작업을 위해 힙합&알엔비 프로듀서이자 유명랩퍼인 카니예 웨스트에이콘, 퍼기, 윌 아이 엠이 참여했다. 또한 일본판에는 그의 라이브곡을 여러개 수록했다. 전 세계에서 300만장이 팔렸고, 벨기에, 콜롬비아, 유럽, 인도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또한 같은 해 전 세계에서 King of Pop이라는 베스트 음반이 발매되어 전 세계에서 다시 1위를 차지한다. 마이클 잭슨은 2009년 3월 영국 런던에서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는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처음 10회의 공연이 계획됐는데 표가 빠르게 매진되자 40회의 공연이 더 추가됐다. 공연은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O2 아레나에서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 6일까지 열릴 것으로 계획되었고, 75만 개의 티켓은 판매 개시 5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죽음/사후[편집]

2009.06.25 : 사망[편집]

200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콘레드 머레이에 의한 정맥 주사 투입으로 인한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시 22분 911을 부르고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3분 만에 잭슨의 맨션으로 출동했다. 주치의는 마이클 잭슨에게 법정에서 2.5ml의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집에서 다쓴 프로포폴 100ml 병이 발견되었다.

1시 13분 인근 병원인 Ronald Reagan UCLA Medical Center로 이송된다. 2시 26분 병원관계자는 그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여자친구와 지인에게 약 40분가량 통화한 뒤 911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97]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6월 26일 외신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며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98] 한국의 민주당은 26일 한국의 통일을 기원한 잭슨의 사망을 애도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99]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언론에서는 잭슨의 죽음에 대해 근거없는 추측을 했다. 타블로이드지의 주사바늘,자살,슈퍼 박테리아,피부암,성형 후유증 보도 등이 이어졌지만 부검 결과 마이클 잭슨은 사망 당시 50세 미국인의 건강에 비춰봤을 때 건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100]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리게 됐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 조사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21세기 인터넷에서 역대 2번째로 많이 다루어진 소식으로 조사됐다.

공개된 잭슨의 유서 내용을 보면 매달 수입의 40%는 어머니 캐서린 잭슨에게 40%는 3명의 자녀들에게 20%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후 형제들 간의 유산 분쟁의 원인이 된다.[101]

7월 7일 로스앤젤레스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자넷 잭슨, 스티비 원더, 스모키 로빈슨, 어셔, 라이오넬 리치, 제니퍼 허드슨, 저메인 잭슨 등이 참석했으며,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비욘세는 자신의 콘서트를 하던 중 "황제여 영원하라"라고 발언했으며, 그의 동료인 브리트니 스피어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그를 추모했다. 미국 내에서 실시간 중계됐는데 총 시청자 수는 3110만명으로 로널드 레이건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영결식이 됐다. 9월 13일에는 마돈나가 'VMA'에서 " 다시 그와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는 황제였다 " 고 잭슨을 추모했다.[102]

2009년 9월 3일, 사망 70일 만에 글렌데일의 포리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103]

사후[편집]

10월 28일 그의 영화인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2주동안 개봉되었고, 동명의 음반인 This Is It이 같은 해 10월 26일에 발매되었다. 또, 이 음반에 실린 싱글인 'This Is It'이 발매됐으며, 빌보드차트에서 음반은 1위, 싱글은 43위에 머물렀다.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104] 2010년 1월 11일, LA카운티 검시소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한 검시기록의 일부를 공개하였다. 이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사인이 타인에 의해 주사 된 정맥내의 과량의 프로포폴 및 약물에 의한 살인 (Homicide) 으로 명시되어 있다.

2010년 2월 52번째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아들과 딸이 대리수상받았다. 같은해 2월, 잭슨이 주치의로부터 살해됐다고 법원으로부터 공식으로 밝혀졌다. 2010년 11월, 에픽 레코드와 마이클 잭슨 재단은 그의 첫 사후음반인 《Michael》를 발매한다. 첫 싱글은 지난 2007년과 2008년에 R&B 가수인 에이콘과 작업했으나, 유출됐던《Hold My Hand》가 첫 싱글이다. 빌보드 200 3위를 기록했다. 수록된 몇몇 곡은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는 지에 대한 논란 또한 벌어졌다.

2011년 1월 25일 LA지방검사보 데이비드 월그렌은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과실치사죄로 기소했다. 2011년 11월 7일 콘레드 머레이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의 사후에도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끊임없이 근거없는 기사를 통해 마이클 잭슨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 측은 '당신들이 본 타블로이드 기사는 사실이 아니며 마이클로 이익을 얻기 위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매우 혐오한다. 팬들이 우리와 함께 마이클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고 성명을 발표하였다.[105] 또한,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반박하기도 하였다. [106]

2014년 5월 사후 잭슨의 미발표곡을 모은 음반《Xscape》가 발매된다. 잭슨의 미공개 작업물에 자유 열람 권한을 가진 에픽 레코드의 대표이자 CEO인 엘 에이 리드(L.A. Reid)를 통해 198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녹음된 총 8곡이 수록된다. 그 중 5월 2일 아이튠즈를 통해 선공개된 첫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공개 24시간만에 차트 5위권에 올랐을 뿐 아니라, 17개국에서 1위를 석권하고 67개국에서 5위권 안에 진입했다. 이로써 이 싱글은 잭슨의 통산 49번째 HOT 100 차트 진입곡이 됐다.[107] 또한《Xscape》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음반 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음반 차트인 빌보드 200에서 2위를 기록했다. 《Love Never Felt So Good》는 빌보드 10위에 올라 마이클 잭슨은 50년대에 걸쳐 빌보드 TOP 10에 진입한 유일한 가수가 됐다. 2015년 1월 11일 기준으로 이 음반은 1,523,000장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2014년 판매된 음반 중에서 14위에 해당되는 판매량이다.

5월 19일 열린 2014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홀로그램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돌아온 마이클 잭슨은 16명의 댄서들과 춤을 선보였으며 문워크를 선보였다. 1년이 넘는 준비기간과 100여 명의 스태프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가 콜로니 캐피털에 의해 매각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마이클 잭슨의 유산 관리원은 이같은 소식에 매우 낙담스럽고 슬프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은 2008년 콜로니 캐피털과 네버랜드 합작투자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콜로니 캐피털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콜로니 캐피털이 소유하는 지분은 늘어난 것이었다. 지난 6년 동안 콜로니는 네버랜드의 500억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버랜드를 매각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108]

마이클 잭슨의 사후 소득이 1억 달러 이상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는 생존 가수들보다 훨 높은 것으로 그의 인기와 상업성이 죽어서도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09]

성과와 기록[편집]

평가[편집]

유명 음악평론가 임진모에 의하면 잭슨의 앨범은 사운드가 뛰어나 옛날 스튜디오 엔지니어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있었다고 한다. [110] 또한 "비트 감각이 없으면 댄스음악을 소화하기 어렵다. 타고난 비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고 소리에 대한 민감성이 사상 최고라고 할 정도로 사운드에 완벽성을 추구한 가수였다" 고 평가했다.[111]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 라고 평가하였다.[112]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다.[43]

유명 음악매체《VH1》에서는 잭슨을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선정하였다.[113]《NME》에서는 독자 대상 조사 결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 1위로 선정됐으며[114]《롤링 스톤》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잭슨을 35위에 선정한다. 이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폴 매카트니보다 더 높은 순위로 현대 솔로 남자 아티스트 중에서는 최고의 반열로 평가받고 있다.[34]

많은 사람들이 그의 댄스 가수로의 모습만 보고 작곡 능력을 과소 평가하는데 그의 빌보드 1위곡 상당 수를 그가 직접 만들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작곡가 명예의 전당 그리고 가수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11][12]

최고의 댄서로 평가받는 프레드 아스테어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 당시 잭슨의 춤을 보고 감격하여 후계자를 찾았다며 잭슨의 전화번호를 조사하여 직접 전화까지 걸었다. 당시 잭슨의 보컬 트레이너였던 세스 릭스는 아침 식사 도중 프레드 아스테어가 전화를 했는데 마이클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115] 퀸시 존스는 자신이 필요없을 정도로 잭슨은 재능이 많았으며 8090년대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고 한다.[116]

영향력[편집]

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른 잭슨

잭슨은 활동하던 동안 뮤직비디오 예술 형태의 변형, 현대 팝 음악의 길을 닦아 놓는 등의 성과로 미디어에서 흔히 팝의 황제(King Of Pop) 로 불린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작가 톰 유틀리는 2003년 잭슨을 "극도로 중요한 인물", "천재"라고 묘사했다.[117] 잭슨의 음악과 인도주의적인 공헌은 신세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수준이다.[118] 《Thriller》와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 당시 비교적 새로운 채널이었던 MTV의 대중적 인식을 높였고, 직원의 다양한 인종 조성, 채널의 중심을 록에서 팝 음악과 알앤비로 이동시키며 형태를 마련했다. 잭슨의 작품은 수 많은 힙합, 록, 팝, 알앤비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BET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또한 "뮤직비디오의 대변혁을 일으켰고 세계에 문워크같은 춤을 가져다줬다. 잭슨의 사운드, 스타일, 움직임, 유산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119]

《올뮤직》의 스티브 휴이는 잭슨을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라고 묘사했다.[120] 1980년대 중반 《타임》지의 음악 평론가 제이 콕스는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단일 현상이다. 정확히 가장 인기가 많은 흑인 가수이다"라고 썼다.[121] 또한,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14] 마이클 잭슨은 스키니 진 페도라 썬글라스 장갑과 재킷 팔찌 암밴드 한쪽을 자른 티셔츠 등 다양한 패션을 유행시켰다. 그 영향력은 어떤 톱스타도 따라올 수 없었다.[122] 1990년 《배너티 페어》에서는 연예 공연업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로 잭슨을 꼽았다.[123] 2007년 잭슨은 "음악은 나의 발산 수단이며, 세계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내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란걸 안다"고 말했다.[124]

유니버설시티 하드 록 카페에 전시되어 있는 《Thriller》 플래티넘 레코드

잭슨이 죽고나서 얼마 후 2009년 6월 25일 MTV는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하기 위해 원래 뮤직비디오 형식을 간략하게 돌아봤다.[125] 또한 MTV 유명인과 기타 유명 인사들의 반응을 포함한 실시간 뉴스 특별 방송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에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MTV 프로그램 방송 시간도 임시적으로 변경되었고, 잭슨의 추도식 생중계가 끝난 다음 주 원래대로 돌아왔다.[126] 2009년 7월 7일 열린 추도식에서 모타운 레코드 설립자 베리 고디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라고 말했다.[127][128][129] 2009년 12월 29일 AFI는 "6월 50세이던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사후 콘서트 리허설 영화 《This Is It》는 전례없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고 말하며 잭슨의 죽음을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했다.[130] 마이클 잭슨은 미국흑인대학펀드로부터 인문학박사와[131] 피스크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32]

세계적 인기[편집]

마이클 잭슨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고 보도했으며[133]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뽑힌 것이다.[134]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레이건,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히기도 했다.[135]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부른다고 할 정도.[136] 한편 현재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137]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하기도 했다.[138]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 였다.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14]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한 것이다.[139]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140] 독일의 통일 현장을 경험했던 탈북자 김영일 씨에 의하면 당시 동독의 한 중학생이 서독에 마이클 잭슨이 공연을 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독이 동독보다 잘 산다는 글을 썼는데 이게 슈타지에 적발되기도 했단다. 잭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위협한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141] 소련의 경우는 엄청난 인기를 몰고 오는 마이클 잭슨을 악마라며 강력히 비난했다.[142] 러시아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에 빠지기도 하였다.[143]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공화국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 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144]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쉬몹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145]

그는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사람이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그는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경호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수상 경력[편집]

마이클 잭슨은 1980년 더 잭슨스의 멤버로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올랐고, 1984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잭슨은 경력 동안 월드 뮤직 어워드의 베스트 셀링 팝 남자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아티스트 오브 더 센트리 어워드, 밤비상의 팝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어워드를 포함해 수 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146][147]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입성했는데,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2001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이 외에 1999년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46] 잭슨은 13번의 그래미상(뿐만 아니라 그래미 레전드상과 그래미 평생 공로상도 수상) 수상, 26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세기의 아티스트"와 "1980년대 아티스트" 포함) 수상하였는데 이는 그 어떤 남성 음악가보다도 많은 기록이다.[148] 또한 세계적으로 3억-4억장으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149][150][151] 을 기록하면서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중 한 명이 되었다.[152][153][154][155][156]

빌보드 차트[편집]

마이클 잭슨이 13번이나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남성 솔로 아티스트로는 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두번 째로 많은 수치이며, 전체로 파악할 경우에는 1위 비틀즈 2위 머라이어 캐리 3위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4위이다.

1위에 오른 년도 빌보드 차트 1위 곡의 이름 1위 곡이 수록된 음반
1972 Ben Ben[157]
1979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Off the Wall[157]
1979 Rock with You Off the Wall[157]
1983 Billie Jean Thriller[157]
1983 Beat It Thriller[157]
1983 Say Say Say (폴 매카트니의 음반에 수록된 듀엣 곡) 'Pipes of Peace'[157]
1987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157]
1987 Bad Bad[157]
1987 The Way You Make Me Feel Bad[157]
1988 Man in the Mirror Bad[157]
1988 Dirty Diana Bad[157]
1991 Black or White Dangerous[157]
1995 You Are Not Alone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57]
2위에 오른 년도 빌보드 차트 2위 곡의 이름 곡이 수록된 음반
1972 Rockin' Robin Ben[157]
1982 The Girl Is Mine Thriller[157]
오른 년도 빌보드 차트 3위~10위 곡의 이름 곡이 수록된 음반
1971 Got to Be There Got to Be There[157]
1980 Off the Wall Off the Wall[157]
1980 She's Out of My Life Off the Wall[157]
1983 Wanna Be Startin' Somethin' Thriller[157]
1983 Human Nature Thriller[157]
1983 P.Y.T. (Pretty Young Thing) Thriller[157]
1984 Thriller Thriller[157]
1988 Smooth Criminal Bad[157]
1992 Remember the Time Bad[157]
1992 In the Closet Dangerous[157]
1993 Will You Be There Dangerous[157]
1995 Scream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57]
2001 You Rock My World Invincible[157]
2014 Love Never Felt So Good Xscape[157]

음악 스타일[편집]

그는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솔로 마지막 정규 음반까지의 음악적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모타운 시절에는 댄스, 소프트 락, 재즈, 발라드를 주 장르로 했지만,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펑크, 팝 발라드, 재즈, 소울 등의 성숙한 음악을 장르로 했다.80 ~ 90년대에는 거기에다 R&B, 뉴 잭스 윙 적인 음악을 했으며, 2001년에 발매한 Invincible에서는 마이클 잭슨 스타일로 알려진 독특한 어번 R&B 음악에에 그가 지향하던 미래적인 사운드를 첨가했다. 이런 그의 시도들은 그가 매우 혁신적인 뮤지션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장르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음악에 여러 메시지를 두고 제작했다. 'Heal the World', 'We Are The World', 'They Don't Care About Us', 'Smooth Criminal' 등의 음악은 전쟁으로 변하는 세계와 전쟁 반대, 인종차별, 학대, 범죄의 위험성 등을 강조한 음악이다. Gone Too Soon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Earth Song'은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 'Childhood'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만든 곡이다.

사생활[편집]

부와 재정 상황[편집]

잭슨은 인생에서 약 7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뮤직비디오콘서트 등으로 4억 달러를 더 벌어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잭슨의 순자산에 대한 추정은 긍정적인 3억 5천만 달러에서 부채로 인한 마이너스 2억 8500만 달러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지난 몇년 동안의 마이클 잭슨의 순 자산 추정

년도 자산 순 가치 출처
2002 1억 3000만 달러 4억 1500만 달러 - 2억 8500만 달러 Forensic accountant in 2005 recalling Jackson's 2002 balance sheet under oath[158]
2003 5억 5000만 달러 2억 달러 3억 5000만 달러 Forbes magazine 2003년 11월 21일[159]
2007 5억 6760만 달러 3억 3100만 달러 2억 3600만 달러 Michael Jackson's March 2007 statement of financial condition prepared by Washington-based accounting firm Thompson, Cobb, Bazilio & Associates; described by CBS News as the clearest account yet of Jackson's finances.[160]

2014년 2월 12일 미국 국세청은 마이클 잭슨의 재산을 11억 2500만 달러 이상 (대한민국 기준으로 1조 20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으며, 잭슨의 유가족들에게 7억 200만달러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명령했다.[161]

성격[편집]

무대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한다.[162] "마이클은 너무 수줍음을 타서 등을 돌리고 노래를 불렀다" 고 시드니 루멧이 증언했었으며 퀸시 존스도 잭슨의 내성적인 성격을 보고 처음에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외모[편집]

1979년 복잡한 안무 도중 코가 깨졌다. 이로인해 코 성형수술을 했지만, 성공적인 수술은 아니였고 후유증으로 자신의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호흡 곤란을 앓는다. 이후 의사 스티븐 호플린을 찾아 코 성형수술을 다시 받았다.[163]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Moonwalk' 에서 2번의 코 수술과 턱에 홈을 팠다고 인정했으며 2003년 인터뷰에서도 이같은 입장을 고수했는데 2번의 코 성형 수술을 더 했다는 주위 증언도 있다.

피부색의 변화는 백피라 불리는 백반증 때문이다. 잭슨은 1984년 화상 이후 백반증 증세가 심해지자 화이트 메이크업으로 얼굴을 하얗게 하고 다녔다. 그가 백반증에 걸렸다는 사실은 죽음 이후 검시 보고서에도 증명되었다. [164]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Moonwalk'에서 밝히 바에 의하면 젊은 시절 많은 여드름으로 인해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사람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 했다고 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식단을 채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마이클 잭슨의 외모 참조.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인 조지프 잭슨에게 가혹한 학대를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대는 신체에만 머물지 않았고 마이클의 외모를 놀렸는데 이는 잭슨에게 큰 상처가 된다.[165] 조지프 잭슨은 2010년 그의 아내인 캐서린 잭슨과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 이유는 조지프 잭슨이 마이클 잭산의 유산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166] 총 3명의 자식을 낳았다.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 이중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는 아버지 처럼 백피에 걸린 사실이 확인되어 친부 논란을 종결하게 된다. 형제들과도 문제가 많았는데 친형 저메인 잭슨1991년 발표한 음반 'You Said'에 수록된 곡 'Word To Badd'는 마이클 잭슨의 변화하는 외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큰 충격과 논쟁을 불러 왔다.[167] 친누나 라토야 잭슨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기 위하여 잭슨의 스릴러 분장을 한 뒤 누드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큰 파장을 몰고왔으며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힘들어 할 때 거짓 증언을 함으로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성추행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발언도 하였다. [168][169] 당시 이 거짓 증언으로 잭슨은 엄청난 분노를 토로했다고 'The Life of an Icon' 에서 그의 측근이 말하였다. 후 라토야 잭슨은 자신의 남편이었던 '잭 고든'의 협박으로 인해 자신은 노예같은 삶을 살았으며 어쩔 수 없이 누드 사진을 찍었고 돈을 얻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며 뉘우쳤다. 잭슨의 팬들에게 잭슨의 형제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크게 비난당하고 있다.

마이클과 형제들끼리의 문제는 마이클이 죽고나서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유산과 마이클 잭슨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향후 수입 때문이다. 2002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 내용은 잭슨의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같았다. 유서에는 자신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없기 때문. 형제들은 잭슨의 유산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비난하며 유서가 조작됐으니 유산집행 변호사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70][101] 이런 분쟁은 미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잭슨의 명예가 가족들로 인해 더렵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칼로 손목을 베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잭슨의 유가족들이 그의 소속사였던 'AGE라이브'를 상대로 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증언을 하기로 한 데 따른 중압감이라고 언론들은 추측하였다.[171]

기부[편집]

39개의 자선단체를 도와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172] 노숙자들을 보면 내버려 둘 수 없어 차를 멈추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173] 'Heal The World' 재단을 통해 전쟁 난민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다. 그 외에 많은 자선콘서트에 참가하여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했다.

음반 목록[편집]

투어[편집]

한국과의 인연[편집]

1988년 대한민국의 특정 종교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열기 위해 그와 그의 가족들과 접촉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 종교는 서울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4차례 공연을 갖는 조건으로 잭슨의 형제와 부모들에게 750만 달러를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형제들과 부모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제안에는 잭슨이 한국에서 한복을 입고 애국가를 불르며 한국어 노래를 몇 곡 부르는 것도 포함됐다. 잭슨은 형제들과 부모의 끈질긴 회유 끝에 결국 서울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심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애국가와 한국 가요는 부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1988년 그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현재 공개되어 인터넷 등에 많이 퍼져있다. 그러나 잭슨에게 지급해야 할 출연료 부족으로 결국 공연은 무산되고 만다. 이 사실을 밝힌 그의 전기 작가 'J 랜디 타라보렐리'는 이로 인해 잭슨이 한국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생긴 것 같다며 분석했다. 실제로 잭슨의 마지막 세계투어를 했던 곳은 한국 서울과 독일 뮌헨이었다.[174][175] 실제로 당시 일로 고소까지 했던 것이 80년대 한국 언론의 보도에도 드러나 있다.[176]

잭슨은 1996년 서울에서 첫 내한공연을 개최했다. 그는 1993년 한국에서 공연을 열기 위해 김영삼 정부에게 허가 신청을 했지만 근검절약 등의 이유로 거절된 바 있다.[177] 1996년 내한공연의 경우도 많은 진통을 겪었는데 기독교 단체들이 중심으로 뭉쳐 시민단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 반대공동대책위'를 조직하여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비난을 쏟자 자칫하면 취소될 뻔한 것이다.[178] 무산위기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공연이 성사됐다.[179]

1999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생전 마지막 해외 투어가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다.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열렸고 이는 SBS에서 생중계를 해줬으며 최고 42.3%의 시청률을 기록했다.[180]

잭슨은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 중 통일이 되면 반드시 또 다시 와서 공연을 개최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사망함으로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 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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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