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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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
成龍
Jackie Chan
본명 방사룡(房仕龍, 팡 스룽)
출생 1954년 4월 7일(1954-04-07) (60세)
홍콩 홍콩
국적 홍콩 홍콩
다른 이름 Jackie Chan(재키 챈)
진항생(陳港生, 천 강성)
원루(元樓, 위안 러우)
진원룡(陳元龍, 천 위안룽)
직업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연출가
영화 무술감독
영화 무용감독
영화 각본가
가수
무술가
활동 기간 1962년 ~ 현재
학력 전문대졸
부모 아버지 방도룡(진지평)
어머니 진리리(진월영)
배우자 임봉교(린 펑차오)
자녀 아들 방조명(팡 쭈밍)
오탁림(우 줘린)
웹사이트 재키 챈

성룡(중국어 정체: 成龍, 간체: 成龙, 병음: Chéng Lóng 청 룽[*] 광둥어: Sing4 Lung4 싱 룽, 1954년 4월 7일 ~ ), 영어권 활동 이름으로 재키 챈(Jackie Chan)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 출신의 영화배우이자 각본가, 감독, 제작자, 무술가이며 음반을 발표한 바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본명은 진항생(천 강성, 중국어 간체: 陈港生, 정체: 陳港生, 병음: Chén Gǎngshēng 광둥어: Chan4 Gong5 Sang1 찬 공상)이었으나 개인적 사정으로 다른 이름으로 살았던 그의 아버지가 본명을 회복함에 따라 성룡 역시 방사룡(팡 스룽, 중국어 간체: 房仕龍, 정체: 房仕龍, 병음: Fǎng shìlóng) 으로 본명을 바꾸었다.[1] 부인은 중화민국 타이완 출신의 영화배우 임봉교(린 펑차오)이며 아들은 영화배우 방조명(팡 쭈밍)이고, 혼외정사로 낳은 딸 오탁림(우 줘린)이 있다.

경력[편집]

경극학원[편집]

1954년 4월 7일 영국령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극심한 가난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요리사와 가정부로 해외 취업을 해야 했기에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우점원(于占元)경극학원'에 맡겨져 10년 간의 수련 생활이 시작된다. 경극학원 생활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무술과 연기를 배워야 했기 때문에 늘 고단했지만, 그는 훗날 홍콩 영화계에서 함께 맹활약할 선후배인 홍금보(洪金寶), 원표(元彪), 원규(元奎), 원화(元華) 등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사부 우점원에게 최고의 실력을 인정 받은 생도들이었다. 학원을 졸업한 뒤 단역배우와 스턴트맨, 무술감독 등을 거쳐 결국 주연배우까지 맡게 된다.[2]

영화[편집]

하지만 그 시기가 절대적 인기를 누리던 이소룡(李小龍)이 1973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직후여서 그의 스타일을 표절하여 만든 저급한 아류작들이 넘쳐났기에 관객들이 액션영화를 외면했던, 그야말로 홍콩 영화의 침체기였다. 성룡 역시 주연 초기에는 이소룡 스타일의 심각하고 어두운 연기를 강요받았기에 자신만의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액션코미디를 접목시키면 또다른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1978년 무술감독 출신의 연출가 원화평(袁和平)과 뜻을 같이 하여 만든 코미디풍 무협 《사형도수》, 《취권》 연작이 범아시아적으로 큰 붐을 일으키며 약관의 나이에 스타덤에 올라선다. 특히 《취권》은 성룡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관계된 배우들[편집]

이소룡(李小龍)[편집]

영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은 많은 적들을 차례로 때려눕히게 되어 있었다. 이 영화에서 성룡은 엑스트라스턴트맨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이소룡에게 마지막으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역할이었는데, 이소룡의 실수로 성룡이 크게 다친다. 미안한 마음의 이소룡은 성룡에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소룡은 크고 작은 스턴트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성룡에게 맡겼다는 후문이다. 훗날 성룡은 이런 일련의 일화를 두고 이소룡에게 큰 은혜를 입었노라고 회고했다.[3]

유승준[편집]

성룡은 병역 파동으로 2002년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퇴출당한 한국계 미국인 가수 유승준을 자신이 제작-주연한 영화 대병소장에 조연으로 출연시키는 등, 유승준에게 중화권에서 입지를 마련해 줬다.

출연작[편집]

홍콩, 스타의 거리에 있는 청룽의 프린트.

평가[편집]

스턴트맨과 엑스트라로 시작해서 수퍼스타가 된 성룡은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폭력성이 심하던 홍콩 무술영화에 코미디를 첨가하여 모든 연령의 관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취권》으로 스타덤에 오르기 직전 다수의 한-홍 합작 영화 촬영으로 2년 동안인 1970년대에 대한민국 서울 명동에 머무른 적이 있으며, 동아수출공사 이우석 사장의 신세를 많이 졌다고 회고한다. 또 당시 한국 여성과의 8년간의 연애 경험 덕에 한국어를 꽤 잘한다. 이후 어린이들을 위한 자전거 기증 등으로 대한민국과의 친분을 이어 왔다. 몇 해 전 그는 사후 자신의 전재산 약4,000억 원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명절 때마다 성룡의 영화는 항상 단골 메뉴였다.

동물 보호 활동[편집]

멸종위기에 처한 중국 남쪽 지방의 호랑이를 구하기 위한 캠페인에 참가했다. 1990년대 초반 PETA에 의해 진행된 중화민국 타이완의 유기견 보호소의 열악한 환경을 바꾸기 위한 대정부 설득 활동도 했다.

주석[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