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 이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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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이름=영빈 이씨<br><small>暎嬪 李氏</small>|사망일={{사망일과 나이|1764|7|26|1696|7|18}} {{font color|gray|(음력)}}|출생일={{출생일|1696|7|18}} {{font color|gray|(음력)}}|사망지=[[조선]] [[한성부]] [[경희궁]] 양덕당|부친=이유번|모친=[[한양 김씨]]|가문=[[전의 이씨]]|배우자=[[조선 영조|영조]]|자녀='''1남 6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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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조|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br>조졸 옹주 3명|능묘=[[수경원]](綏慶園, [[서오릉]] 내 위치)
|이름 = 영빈 이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작위=조선 영조의 후궁|시호=소유(昭裕)|별칭=선희궁(宣禧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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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1.jpg|섬네일|200px|영빈 이씨 은인 (1899년 제작)<ref>{{서적 인용|저자=국립고궁박물관|제목=왕의 상징 어보|연도=2012-07-27|출판사=국립고궁박물관|id=ISBN 978896325901703600|쪽=238}}</ref>]]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2.jpg|섬네일|200px|영빈 이씨 은인의 인면]]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8월 15일]]([[음력 7월 18일]]) ~ [[1764년]] [[8월 23일]]([[음력 7월 26일]]))는 [[조선]]의 제21대 왕 [[조선 영조|영조]]의 총관후궁이다. 본관은 [[전의 이씨|전의]](全義)로,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1.jpg|섬네일|220x220px|영빈 이씨 은인 (1899년 제작)<ref>{{서적 인용|저자=국립고궁박물관|제목=왕의 상징 어보|연도=2012-07-27|출판사=국립고궁박물관|id=ISBN 978896325901703600|쪽=238}}</ref>]]
보통 그의 처소를 선희궁(宣禧宮)이라 부른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친할머니로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다. 첫 시호는 의열(義烈)로 이후 의열궁(義烈宮)으로 불렸다가 다시 소유(昭裕)로 시호가 바뀌었다.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2.jpg|섬네일|220x220px|영빈 이씨 은인의 인면]]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8월 15일]]([[음력 7월 18일]]) ~ [[1764년]] [[8월 23일]]([[음력 7월 26일]]))는 [[조선]] [[조선 영조|영조]]의 후궁이며, [[조선 장조|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할머니이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낳았다.


==생애==
==생애==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1726년]] 11월 16일 영조의 승은을 입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내명부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 탄생과 후궁 책봉 ===
슬하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및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1남 6녀, 모두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화완옹주를 제외한 6명의 자식들이 살아 생전에 요절했으며 그 중 한 명인 사도세자는 비참한 죽음을 겪었다.
본관은 [[전의 이씨|전의]](全義)이며 [[1696년]](숙종 22년) 7월 18일, 아버지 이유번(李楡蕃)과 어머니 한양 김씨(김우종의 딸)의 딸로 태어났다.
[[파일:Portrait of King Yeongjo.jpg|섬네일|[[조선 영조|영조]] 어진]]
[[1701년]](숙종 27년), 6세의 나이로 대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으며, [[1726년]](영조 2년) 11월 16일,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31세에 영조의 승은을 입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ref>《[[승정원일기]]》 627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년 청 옹정(雍正) 4년) 11월 16일 (갑진)
----○ {{Font color|gray|傳曰, 李氏爲淑儀。}}
----이씨(李氏)를 숙의(淑儀)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ref>


[[1727년]](영조 3년) 4월, [[화평옹주]]를 낳았는데, 화평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대단히 각별하였다.
[[인원왕후]]는 영빈 이씨가 거처를 옮기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보고 창경궁 집복헌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을 내렸다.


[[1728년]](영조 4년) 8월, 둘째 옹주를 낳고 그해 10월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ref>《[[승정원일기]]》 672책 (탈초본 37책) 영조 4년(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10월 8일 (을유)
영빈 이씨는 마침내 [[1735년]] 왕자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출산하였고 사도세자 출생 당시 영조 역시 그녀의 곁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 {{Font color|gray|傳曰, 淑儀李氏爲貴人。}}
----숙의 이씨를 귀인(貴人)으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ref>


[[1729년]](영조 5년) 12월, 셋째 옹주를 낳았으며 다음해인 [[1730년]](영조 6년) 내명부 정1품 '''영빈'''(映嬪)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조선 진종|효장세자]]의 3년상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조선 경종|경종]] 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의 국상중에 길례를 치러 조정과 민간에서 탄식하였다.<ref>《[[영조실록]]》 28권, 영조 6년(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11월 27일 (임진)
[[파일:사도세자.jpg|섬네일|left|180px|아들 [[조선 장조|사도세자]]<br/>(작자 미상의 무속화, 19세기 작)]]
----'''귀인 이씨를 봉하여 영빈으로 삼다'''</ref>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협옹주는 병을 얻어 숨졌다.


[[1732년]](영조 8년) 2월에 넷째 옹주를 낳았고, 다음해에 다섯째 옹주인 [[화협옹주]]를 낳았는데, 영빈 이씨가 다섯 옹주를 연이어 낳자, 효장세자 사후 후사를 바라던 영조는 크게 근심하였다.<ref>《[[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3월 8일 (기축)
고명아들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성격,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갈등했다. 이로 인한 정신병과 우울증을 얻어 살인과 비행을 일삼았다.
----'''영상·우상 등이 영빈 이씨가 남아를 출산하도록 기도하는 일을 앙주하다'''
----약방(藥房)과 영상(領相)·우상(右相)이 청대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영빈 이씨(暎嬪 李氏)가 연달아 네 명의 옹주를 출산했고 또 임신했으므로 남아(男兒)를 출산하는 경사가 있기를 상하가 기축(企祝)하였으나, 어제 또 옹주([[화협옹주]])를 출산하였다.


대신들이 임금께서 실망하여 지나치게 염려할까 두려워하여 각기 위로와 면려의 말을 진달하였다.
한편 사도세자에게 아들 다섯이 태어나면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 대신 손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택하려 했다.


송인명(宋寅明)이 고매(高禖, {{Font color|gray|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신의 이름}})에게 빌고 명산(名山)에 기도하는 등의 일을 앙주(仰奏)하니,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상태에서 자신의 후궁을 살해하고, 영조의 시해까지 운운하자 며느리와 세손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간하고 결국 세자는 쌀 담는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영조는 자신의 꿈에 [[정성왕후]]가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예지해 준 적이 있다며, 사도세자를 처분하기로 결심했을 때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의 계시와 생모 영빈이씨의 밀고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내가 어찌 이 일 때문에 침식(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다만 삼종(三宗, [[조선 효종|효종]] · [[조선 현종|현종]] · [[조선 숙종|숙종]])의 혈맥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평상시와 같지 못한 것뿐이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 [[정치달]]을 잃고, 말년에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서인(평민)으로 강등된 뒤, 유배에 처해져 정처(鄭妻)로 격하되는 등 질곡을 겪었다.


하였다.</ref>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태어난 세명의 옹주는 모두 다섯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사후==
자식들과 손주들([[의소세손]], 화완의 딸 등)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1735년]](영조 11년), 아들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출산하였다.<ref>《[[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
뒷날, [[대한제국 고종|고종]]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며, [[수경원]](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 [[칠궁]]에 올랐다.
----'''영빈 이씨가 원자를 집복헌에서 탄생하다'''</ref> 영조는 기뻐하며 다음해에 세자로 책봉하였다.<ref>《[[영조실록]]》 41권, 영조 12년(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3월 15일 (기유)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ref>
{{인용문|영빈 이씨가 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br>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br>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br>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br>


<center>(중략)</center>
처음 [[양주군]] 연희궁 대야동 미향(楊州 延禧宮 大野洞 未向, 미향은 남남서) 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1969년에 영빈이씨의 묘를 서오릉에 이장하였다.<ref>[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372386 연세대 영빈 이씨 수경원 터의 봄] {{웨이백|url=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372386 |date=20151208134324 }} 중앙일보</ref>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br>


"삼종(三宗, [[조선 효종|효종]] · [[조선 현종|현종]] · [[조선 숙종|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br>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br>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br>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그녀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은 그녀가 죽은 [[1764년]]에 건립되어 의열묘(義烈廟) 또는 의열궁이라 불리다가 [[1788년]] (정조 12년)에 비로소 선희궁이 되었다.
<br><br>|《[[영조실록]]》 40권,<br>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align=center}}
사도세자를 낳았으나, 사도세자 또한 여느 후궁 소생의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생후 100일만에 영빈과 떨어져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처소의 궁인들에게 양육되었다.


[[1738년]](영조 14년) 여섯째 딸인 [[화완옹주]]를 낳았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는데, 화완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 모두 영빈 이씨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으나, [[1870년]] (고종 7년)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 (순종 2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기는 등 변동이 잦았다.


=== 임오화변 ===
현재는 모든 칠궁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존재하고 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고|임오화변}}
[[파일:사도세자.jpg|섬네일|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무속화 (작자미상)]]
[[조선 영조|영조]]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갈등이 심화되고, 영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사도세자의 울화병과 정신병이 심해지는 가운데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영빈 또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ref>《[[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ref>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였다.
{{인용문|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조선 장조|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br>안에다 엄히 가두었다.<br>

처음에 [[조선 진종|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br>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br>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br>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br>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br>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br>
<center>(중략)</center>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br>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br>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br>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center>(중략)</center>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br>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br>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center>(중략)</center>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br>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font color||#fff242|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br>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br>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br>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br>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조선 정조|정조]])이 황급히 들어왔다.<br>임금이 빈궁(嬪宮,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br>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br><br>|《[[영조실록]]》 99권,<br>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align=center}}
이후 영조의 명으로 세손([[조선 정조|정조]])이 사도세자가 아닌 [[조선 진종|효장세자]]의 승통을 이을것을 명하자 충격을 받고 슬퍼하였다.

=== 사망 ===
[[1764년]](영조 40년) 7월 26일, [[경희궁]]의 양덕당에서 사망하였다.<ref>《[[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7월 26일 (병자)
----'''영빈 이씨가 연서하다'''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연서(捐逝)하였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혜빈궁(惠嬪宮)이 《의례(儀禮)》 경전에

‘서자(庶子)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글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다.

영빈이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ref> [[조선 영조|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직접 영빈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국왕이 후궁의 지문을 지은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빈 이씨의 청화백자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사위인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글씨를 썼다. 또한 영빈의 일을 기록한 《표의록(表義錄)》을 직접 작성하였다.

영빈 이씨의 묘소는 의열묘(義烈墓)로 양주 연희궁 대야동 언덕에 묻혔는데 오늘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이다. 의열묘는 [[대한제국 고종|고종]] 대에 사도세자가 [[조선 장조|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수경원(綏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일대에 있었으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으로 이전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영빈의 묘인 의열묘를 [[칠궁|선희궁]](宣禧宮)으로 칭하였으며<ref>《[[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2월 26일(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계축)
----'''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확정하다'''</ref>, 후에 선희궁은 임금을 낳은 후궁들을 배향하는 [[칠궁]](七宮)을 구성하는 사당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 소유(昭裕)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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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 영화 ===
* [[2014년]] 영화 《[[사도 (영화)|사도]]》 배우:[[전혜진]]
* [[2014년]] 영화 《[[사도 (영화)|사도]]》 (배우:[[전혜진 (1976년)|전혜진]])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정빈 이씨]]
* [[조선 영조|영조]]
* [[조선 장조]]
*[[정빈 이씨]]
* [[조선 정조]]
* [[조선 장조|사도세자]]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 [[조선 정조|정조]]
*[[한중록]]
*[[임오화변]]
*[[화완옹주]]
* [[선희궁터]]
* [[선희궁터]]
*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
*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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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 각주 ==
<references/>{{조선의 후비와 대한제국의 후비}}{{전거 통제}}
<references/>

{{전거 통제}}
[[분류:1696년 태어남]]
[[분류:1696년 태어남]]
[[분류:1764년 죽음]]
[[분류:1764년 죽음]]
161번째 줄: 165번째 줄:
[[분류:조선 영조]]
[[분류:조선 영조]]
[[분류:조선 정조]]
[[분류:조선 정조]]
[[분류:조선 장조]]

2021년 4월 12일 (월) 00:54 판

영빈 이씨
暎嬪 李氏
조선 영조의 후궁
이름
별호 선희궁(宣禧宮)
시호 소유(昭裕)
신상정보
출생일 1696년 7월 18일(1696-07-18) (음력)
사망일 1764년 7월 26일(1764-07-26)(68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경희궁 양덕당
가문 전의 이씨
부친 이유번
모친 한양 김씨
배우자 영조
자녀 1남 6녀
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조졸 옹주 3명
능묘 수경원(綏慶園, 서오릉 내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영빈 이씨 은인 (1899년 제작)[1]
영빈 이씨 은인의 인면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8월 15일(음력 7월 18일) ~ 1764년 8월 23일(음력 7월 26일))는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할머니이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낳았다.

생애

탄생과 후궁 책봉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1696년(숙종 22년) 7월 18일, 아버지 이유번(李楡蕃)과 어머니 한양 김씨(김우종의 딸)의 딸로 태어났다.

영조 어진

1701년(숙종 27년), 6세의 나이로 대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으며, 1726년(영조 2년) 11월 16일,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31세에 영조의 승은을 입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2]

1727년(영조 3년) 4월, 화평옹주를 낳았는데, 화평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대단히 각별하였다.

1728년(영조 4년) 8월, 둘째 옹주를 낳고 그해 10월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3]

1729년(영조 5년) 12월, 셋째 옹주를 낳았으며 다음해인 1730년(영조 6년) 내명부 정1품 영빈(映嬪)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효장세자의 3년상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경종선의왕후의 국상중에 길례를 치러 조정과 민간에서 탄식하였다.[4]

1732년(영조 8년) 2월에 넷째 옹주를 낳았고, 다음해에 다섯째 옹주인 화협옹주를 낳았는데, 영빈 이씨가 다섯 옹주를 연이어 낳자, 효장세자 사후 후사를 바라던 영조는 크게 근심하였다.[5]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태어난 세명의 옹주는 모두 다섯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아들 사도세자를 출산하였다.[6] 영조는 기뻐하며 다음해에 세자로 책봉하였다.[7]

영빈 이씨가 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중략)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종(三宗, 효종 · 현종 · 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

사도세자를 낳았으나, 사도세자 또한 여느 후궁 소생의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생후 100일만에 영빈과 떨어져 선의왕후 처소의 궁인들에게 양육되었다.

1738년(영조 14년) 여섯째 딸인 화완옹주를 낳았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는데, 화완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 모두 영빈 이씨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임오화변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도세자의 무속화 (작자미상)

영조사도세자의 갈등이 심화되고, 영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사도세자의 울화병과 정신병이 심해지는 가운데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영빈 또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8]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중략)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중략)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중략)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정조)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 혜경궁 홍씨)·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이후 영조의 명으로 세손(정조)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승통을 이을것을 명하자 충격을 받고 슬퍼하였다.

사망

1764년(영조 40년) 7월 26일, 경희궁의 양덕당에서 사망하였다.[9] 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직접 영빈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국왕이 후궁의 지문을 지은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빈 이씨의 청화백자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사위인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글씨를 썼다. 또한 영빈의 일을 기록한 《표의록(表義錄)》을 직접 작성하였다.

영빈 이씨의 묘소는 의열묘(義烈墓)로 양주 연희궁 대야동 언덕에 묻혔는데 오늘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이다. 의열묘는 고종 대에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수경원(綏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일대에 있었으나 경기도 고양시서오릉으로 이전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영빈의 묘인 의열묘를 선희궁(宣禧宮)으로 칭하였으며[10], 후에 선희궁은 임금을 낳은 후궁들을 배향하는 칠궁(七宮)을 구성하는 사당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 소유(昭裕)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본가 전의 이씨(全義李氏)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시아버지 : 제19대 숙종대왕(肅宗大王, 1661~1720, 재위:1674~1720)
  • 시어머니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 시어머니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 친시어머니 :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1718)
    • 남편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재위:1724~1776)
      • 장녀 : 화평옹주(1727 04 27~1748 06 24) 출산 중 사망, 소생 없음.
        • 사위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 차녀 : 옹주(1728 08 03~1731 02 18) 승정원일기에 이옹주(二翁主)로 기록
      • 삼녀 : 옹주(1729 12 12~1731 03 21) 승정원일기에 삼옹주(三翁主)로 기록
      • 사녀 : 옹주(1732 01 01~1736 04 12) 승정원일기에 사옹주(四翁主)로 기록
      • 오녀 : 화협옹주(1733 03 07~1752 11 27) 홍역으로 사망, 소생 없음.
        • 사위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洙)
      • 아들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사도세자, 1735~1762)
      • 며느리 :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혜경궁, 1735~1815)
      • 육녀 : 화완옹주(1738 01 19~1808 05 17) 1녀(1756 08 03~1757 01 23) 외 소생 없음.
        • 사위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관련 문화재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白磁靑華暎嬪李氏 墓誌․明器 及 石函)은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던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을 1970년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으로 옮길 때 실시한 발굴조사 시 출토된 유물이다. 2010년 10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영빈 이씨가 등장하는 작품

드라마

영화

같이 보기

참고 자료

각주

  1. 국립고궁박물관 (2012년 7월 27일). 《왕의 상징 어보》. 국립고궁박물관. 238쪽. ISBN 978896325901703600. 
  2. 승정원일기》 627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년 청 옹정(雍正) 4년) 11월 16일 (갑진)
    傳曰, 李氏爲淑儀。
    이씨(李氏)를 숙의(淑儀)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
  3. 승정원일기》 672책 (탈초본 37책) 영조 4년(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10월 8일 (을유)
    傳曰, 淑儀李氏爲貴人。
    숙의 이씨를 귀인(貴人)으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
  4. 영조실록》 28권, 영조 6년(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11월 27일 (임진)
    귀인 이씨를 봉하여 영빈으로 삼다
  5. 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3월 8일 (기축)
    영상·우상 등이 영빈 이씨가 남아를 출산하도록 기도하는 일을 앙주하다
    약방(藥房)과 영상(領相)·우상(右相)이 청대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영빈 이씨(暎嬪 李氏)가 연달아 네 명의 옹주를 출산했고 또 임신했으므로 남아(男兒)를 출산하는 경사가 있기를 상하가 기축(企祝)하였으나, 어제 또 옹주(화협옹주)를 출산하였다.

    대신들이 임금께서 실망하여 지나치게 염려할까 두려워하여 각기 위로와 면려의 말을 진달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고매(高禖,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신의 이름)에게 빌고 명산(名山)에 기도하는 등의 일을 앙주(仰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 일 때문에 침식(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다만 삼종(三宗, 효종 · 현종 · 숙종)의 혈맥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평상시와 같지 못한 것뿐이다."

    하였다.

  6.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
    영빈 이씨가 원자를 집복헌에서 탄생하다
  7. 영조실록》 41권, 영조 12년(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3월 15일 (기유)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
  8.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9.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7월 26일 (병자)
    영빈 이씨가 연서하다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연서(捐逝)하였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혜빈궁(惠嬪宮)이 《의례(儀禮)》 경전에

    ‘서자(庶子)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글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다.

    영빈이 사도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10.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2월 26일(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계축)
    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확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