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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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근본주의(영어: Christian fundamentalism)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부터 영국미국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주창한 기독교 신학사조를 말한다. 최근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처럼 신학이나 종교에서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며 다른 종교는 물론 개혁적인 변화에 반대하는 사조를 나타내는 말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말 자체로 근본주의로서 종교 뿐만이 아닌 각국의 문화 내지 관습 및 인간의 기본 존엄성 또한 포함하고 있으며. 19세기에 생겨난 단어인 만큼 

동성결혼 합법화 등의 현재 신세계 운동가들이 그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성경(성서)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근대 미국 기독교계에서는 유럽에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자,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서무오설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원리주의 신학이 등장한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15년사이에 자신들의 교리를 담은 10여 권의 작은 책 《근본》(the Fundamentals)을 무료로 배포했기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미국 남부의 이른바 성서 지대에서 특히 세력이 강한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짓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정치에 무관심하던 모습에서 탈피, 신복음주의, 오순절교회 등과 더불어 국수주의, 반공주의 등이 특징인 기독교 우파라는 이름으로 정치세력화되고 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진화론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서 1925년 테네시 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면서 스콥스라는 생물교사에게 벌금 100달러를 물린 원숭이 재판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창조과학으로 불리면서 기독교계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과학적 사실로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근본주의자들의 성서관인 축자영감설의 특징중 하나가 성서는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므로, 성서의 기록은 역사적이나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1] 하지만 모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진화론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니어서, 성서무오설을 확신한 벤저민 워필드의 경우 '진화론이 비성서적이라는 근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2]

기독교 근본주의의 주요교리

  • 예수의 신성-예수는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예수의 대인속죄[3]
  • 예수의 육체적 부활
  • 예수의 동정녀 탄생
  • 축자영감설에 기반한 성서무오설
  • 전천년주의[4]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

미군정 시대

일본인들의 퇴각으로 통치행정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자, 개신교가 대부분인 미군정은 행정상의 공백을 메꾸면서 친미적 인사를 등용했다. 당시 미군정에 한국인을 고용하도록 권하는 임무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의 아들인 윌리엄스(G. Z. Williams) 해군 대령이 맡았는데 그는 주로 개신교 신자들을 천거하였다.

이승만 초대대통령 시대

그 결과 제1공화국의 주요 국가기관과 고위직에는 개신교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진출했다.[5]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감리교 장로였으며, 이기붕 부통령감리교회의 집사였다.

이승만 정권의 개신교 편향정책

해방 직후 당시 개신교계의 지도급 인사이자 장로교 성직자들이었던 김재준한경직 목사는 미군정의 도움으로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세운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였다. 천리교 본부가 있던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와 성남교회가 창설되었고, 가장 큰 천리교 종교행사장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천리교 종교행사장소가 있던 동사헌정에는 경동교회(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창설되었다. 이 시기의 개신교는 선교활동 및 교세확장에 유리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미군정하에서 크리스마스가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국영방송의 성격을 지니고 있던 서울방송을 통하여 기독교 교리가 일요일마다 전파되었다. 1951년에는 대통령령으로 군종제도가 시행되면서 개신교가 최초로 참여하였고, 이후 1957년에 이르러 불교천주교도 군종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현재는 원불교도 군종제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발생한 한국전쟁당시 개신교천주교, 정교회, 성공회와 더불어 인민군들과 공산당원에 의해 성직자들과 교인들이 살해당하거나 납북당한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일부 극우파 목사들이 매카시즘을 주장할정도로 유신론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대하여 뿌리깊은 반공주의를 갖고 있다.

군사 정권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보호와 교세 확장을 위해 1962년부터 1987년까지 군인들이 정치를 한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당시 경제논리와 성장주의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6] 이 시기에 한국 개신교회는 Explo '74와 같은 대형 집회와 한민족의 개신교 신자화를 위한 대대적인 전도 운동을 벌였으며, 군사독재정권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회는 반공주의 정권이라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미화하며 지지를 보내었다.[7][8] 이에 대해 한국 기독교 장로회 창시자이자 신학자인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한국 교회는 정치종교의 분리를 내세워서 무조건 국가권력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라고 비평하고 있다.[9]

반공주의

한국 개신교회의 반공주의한국전쟁 이전부터 존재한, 뿌리깊은 이념이기도 하다. 한국 보수 기독교계의 반공주의는 1920년대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10] 1920년대 조선에는 사회주의가 새로운 이념으로 들어오는데,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은 미신에 빠져 있으며, 항일의식을 약화시킨다. 또한 자본주의제국주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라면서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비판했다.[11] 이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사회주의자들을 '그리스도복음'으로 이끌고, 교회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는 교회개혁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배척하였다.[12]

심훈도 자신의 대표작 《상록수》에서 박동혁의 입을 빌려서, "조선 예수교회는 권세에 아첨을 허다 못해 무릎을 꿇구, 물질과 타협을 허다 못해 돈 있는 놈의 주구(走狗), 자본주의에 아부하는 타락한 종교"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했고, 한국교회에서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계를 배척하면서 한국교회에는 반공주의라는 뿌리가 싹트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해방후에도 계속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권을 적그리스도, 기독교도들을 억압하는 반 기독교세력이라고 비방하기에 이른다. 실례로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이북 감리교도에게 보내는 멧세이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철의 장막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잃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신음하고 있는 형제들을 생각할때에 우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짐은 금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반공주의는 보수 기독교계의 사회참여를 방해했다. 그 실례로 1970-80년대 진보 기독교계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등을 결성,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들을 도왔는데 이를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용공운동이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계의 반공주의는 1988년 기독교계 일부에서 반성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13] 이다. 당시 선언내용에서는 한국교회가 분단으로 인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마태 복음서 22:37-40)를 어기고, 남·북한 그리스도인 모두 체제에서 강요하는 이념우상화한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였다. 또한 반공주의로 인해 동포를 미워한 죄(요한 복음서 13:14-15, 4;20-21)를 고백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뛰어넘어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으나, 지금도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한국사회는 좌파가 만연해 있다"라는 식의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성향이 있다.

반 기독교 운동

1920-30년대 유물론적 사회주의자들은 유신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소위 반(反)기독교운동을 벌이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이들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계와 기독교의 화해는 사회주의자들이 유물론을 포기하고 유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문제를 현실에 대한 순응,미신,폭력등을 거론했으며(→박헌영 문서 참조),기독교계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배척하였다.

광복이후

광복이후 한국교회는 교회와 공산주의간의 이념대립, 한국전쟁당시 공산주의에 의한 수난을 통해 공산주의를 더욱 더 부정하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군사정권당시 한국교회 일부의 민주화운동사회선교를 종교를 빙자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민중신학해방신학사회주의공산주의 신학으로 매도하였다. 즉, 한국교회에서는 민주화운동, 사회선교,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종교를 빙자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공산주의사회주의로 매도하는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보신학에 대한 편견을 보이고 있다. 민주화운동과 남북대화시도라는 사회의 변화에 힘입어 1988년 한국교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당시 한국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으로 우상화 하면서 동포를 미워하는 죄(요한 복음서 13:14-15ㅡ4:20-21)를 저질렀다면서 반공주의성향에 대한 반성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지금도 소위 보수성향의 개신교 목사들이 친미·반공집회를 주도하거나 주일 예배시 매카시즘성향의 정치설교를 한다는 주장도 있다.[14]

같이 보기

참고 문헌

  1. 《깨어지는 한국교회》(원제:깨어지는 한국 개신교회)/이상성 지음/인물과 사상사
  2.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행복
  3.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인간의 죄를 대신한 수난으로 보는 교리
  4. 전천년주의는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범천년주의와 더불어 예수의 재림에 대한 신학(종말론)중의 하나이다. 전천년주의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수난이후를 은총의 시대, 교회가 들려지는 휴거이후를 대환란시대로 본다. 또한 그리스도가 재림한뒤에는 선과 악의 싸움인 아마게돈이 일어나며 천년왕국이 세워진다. 이후 모든 나라와 사탄의 배반, 백보좌(하얀 보좌)에서의 심판이 일어났다가 새하늘과 새땅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외 미국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무천년주의도 있다. 이스라엘을 구약교회, 이방인을 신약교회로 보는 것으로 환난과 적그리스도와 재림을 거쳐 새하늘과 새땅이 열린다고 본다.《5시간만에 읽는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 행복
  5.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에서 발간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100주년사를 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당시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이 국회위원으로 취임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승만 정권과 한국 개신교 교회가 정치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정경분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못한 잘못을 반성하는 내용이 있다.
  6. 언론인 홍세화 선생은 2002년 한겨레21에서 군사독재정권의 인원동원 모델을 한국교회가 차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으며, 총동원, 정탐, 영적전쟁 등 군사용어를 아무런 생각없이 쓰고 있다.
  7. 왜 한국 기독교는 참회하지 않나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8. 원로 교회사학자이자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인 김영재 교수는 과거 군사정권당시 진보교단들은 민주화 운동에 사회운동으로 참여한 것에 반해, 보수 교단들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군사독재정권에게 아론의 지팡이(권력의 정통성을 의미한다.)를 들려달라고 부르짖었다고 강력히 비판하였다.김영재, 《믿음 그리고 행함》,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출판부.
  9. 김은봉 지음, 《한국사 103장면》, 가람.
  10. 기독교사상》2006년 4월호, '한국교회와 과거사 고백-민주화시대이후의 한국교회', p.199
  11. 네이버 백과사전의 반기독교운동 설명
  12. 《기독교사상》2006년 4월호, '한국교회와 과거사 고백-민주화시대이후의 한국교회', p.199
  13. 이 선언은 한국교회가 반공주의를 극복하고,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상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에서는 2008년 88선언 기념예배를 성공회, 장로교, 구세군 등 회원교단들의 참여로 서울 경동교회와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집전하였다.
  14. 기독교사상 2006년 4월호, 민주화이후의 한국교회/대한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