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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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1897년~1910년
표어광명천지
光明天地
"온 세상을 밝히리라"
국가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의 영토(1903년 ~ 1905년). 분쟁이 있는 간도와 삼지연 지역은 연한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한제국의 영토(1903년 ~ 1905년). 분쟁이 있는 간도삼지연 지역은 연한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수도한성부
정치
정치체제전제군주제
황제
1897년~1907년
1907년~1910년

고종 태황제 (초대)
순종 효황제 (말대)
내각총리대신
1896년~1898년
1907년~1910년
한국통감
1905년~1909년
1909년~1910년

윤용선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말대)
입법부대한제국 중추원 (1907년까지)
없음 (법령에 의한 규칙) (1907년부터)
역사
역사적 시대신제국주의
 • 광무 건원
 • 제국 성립
 • 대한국국제 반포
 • 을사늑약
 • 국권피탈
1897년 8월 17일
1897년 10월 13일
1899년 8월 17일
1905년 11월 17일
1910년 8월 29일
인문
공용어근대 한국어
데모님한국인
민족한민족
인구
1900년 어림17,082,000[1]
경제
통화 (1897년 ~ 1902년)
(1902년 ~ 1910년)
종교
종교
기타
현재 국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혹은 1392년)에서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된 국가이다. 대한 제국의 공식 약칭은 대한(大韓), 한국(韓國)이다. 때때로 대한민국과 구별하고자 구한국(舊韓國)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대한 제국 시기 단발령이 시행되었으나 전 국민이 협조하지 않아 1902년에 강제성을 띤 단발령이 등장했고 나중에는 공직자 전원의 머리를 삭발하는 군수삭발령이 발표되었다. 광무 9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멸망하였다. 1907년(광무 11년)의 정미의병에서 한일 강제 병합 1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 1천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으로, 한일 강제 병합 무렵 전체 인구 중 독립운동 참가율은 1.1%[2]이었다.

국호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국명은 ‘대한’(大韓)이다. 이것은 ‘삼한’(三韓)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한인 고려(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아울렀으므로 대한이라 한다.[3][4] 여기에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하였기에 ‘제’(帝)가 더해져 ‘대한제국’이 되었다. [5]

또한, 조선에서도 이 무렵 국호 대조선국(大朝鮮國)이 보이기도 하므로, 이런 용례에서도 대한제국의 국호 원류를 상고할 수 있다. 일례로,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다운 법전 명은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였다. 한국이나 대한국을 대한제국이라고 한 표기에는, 민족다운 자긍심을 참작한 측면도 일부 있다. 왕국이었던 조선 시대와 달리 국격(國格)이 제국으로 높아진 ‘대한제국’이 되었기에 수도를 대상으로 한 관용스러운 별칭도 ‘황제가 임하는 제국의 수도’라는 뜻에서 ‘황성’(皇城)이라고도 하였다.[6]

제국의 성립

제국 수립 배경

을미사변아관파천을 위시한 외세로 말미암아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7]

제국 선포

1897년(광무 원년) 고종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제정 러시아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8]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에 사대하던 관계를 상징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서 입법기관인 교전소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더불어 박정양이완용, 서재필, 탁지부 고문 영국인 존 브라운, 법부 고문 샤를 르장드르를 위시한 외국인 고문관들을 교전소 부총재와 위원으로 배정했으나 교전소 위원이 친미개화파와 외국인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원로대신들이 꺼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9][10]

근대화 개혁 추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대한제국이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수구파정부 형태 문제로 대립하여 갈등했다.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데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의 참정권을 주장했고 국회의 설치로 국민 대표자를 뽑자고 요구했으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참정권 주장과 국회 설치 주장을 반역으로 규정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광무 2년) 11월 중추원 관제 개편을 공포했으나 수구파는 이에 익명서 사건을 명분 삼아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탄압하였으며 조병식을 중심으로 수구파 행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절파(折破)가 결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이 수구파 행정부에 가담하여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게끔 권고하자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고 곧이어 보부상들이 주축이 된 단체인 황국협회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여 독립협회는 1898년(광무 2년) 12월 해산되고 만민공동회1899년 12월 이후 불법화하였다.

광무개혁과 근대화 추진

이렇게 수립되어 집권한 수구파 행정부는 구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신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시정 방향을 제시하고 갑오개혁을미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면서 점진으로 하는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어서 법률과 칙령 개정안을 마련하려는 황제 직속 특별입법기구인 교전소를 설치하였다. 1899년(광무 3년) 오늘날의 헌법과 같은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황권의 절대성을 명시하였다. 이어서 광무황제는 국정의 주요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전제군주제 강화를 추구하였고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이어 토지개혁을 이루고자 양전 사업을 시행하고 지계(地契)를 발급하여 근대의 특징이 될 만한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였고 상공업 진흥책[11]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 하였다. 여러 상공업 진흥책으로써 근대의 특징이 될 만한 공장과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대한천일은행한성은행을 위시한 여러 은행을 설립하였고 교육 진흥책을 추진하여 기술학교와 사범학교와 관립학교 설립하였다. 이어서 교통, 통신, 전기, 의료를 위시한 근대 시설을 도입하였다.

군사 분야에서는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게끔 원수부를 설치하였고 서울의 제국군과 지방의 진위대를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한 여러 정책은 경제, 교육, 시설 면에서 근대화와 남에게 보호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끔 국력을 증강하려는 노력이었으나 이런 여러 개혁 정책은 복고주의 성향과 집권층의 보수 성향과 개혁의 미미한 성과와 열강 세력에 간섭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단발령 재개

단발령김홍집 내각 때인 고종 32년인 1895년 양력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 유길준정병하가 한 건의를 황제 고종이 받아들여 실시하였으나 전국에 걸쳐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발과 시위와 상소와 대중집회로 단발령은 결국 황제 고종이 직접 철회 성명을 발표하고서야 사태가 진정됐으나 고종광무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단발령을 재공표하나 국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단발하면서 단발령은 자연스럽게 보급되었다. 1897년 민영환영국공사로 갔을 때 '런던에 도착하여 각국 사자(使者)들을 보니 모두 하나같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지 않는가.[12] ' 하였다. 민영환은 유독 자기만 상투를 달고 한국식 의복을 입은 차림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도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바꿔 입었다.[12] 이것은 자발 하는 단발로 귀국 후 사대부들에게 비판받는다.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일찍부터 조선은 아직 상투를 자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 모습을 구경하고자 민영환을 불러들였다.[12] 그러나 여왕 빅토리아가 한 기대와 달리 런던에서 며칠간 체류하던 민영환은 단발하였다. 민영환윤치호 외에도 외국을 다녀온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단발령에 동참하자 고종1900년을 기해 단발령을 재공포한다.

일부 성리학자는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이라 하여 목이 잘리더라도 머리는 내놓을 수 없다고 맞섰다. 죽동궁(竹洞宮) 민영익(閔泳翊)의 첫 양자로 들어갔던 민정식(閔珽植)은 양어머니인 대방 마님의 노여움을 받고 파양 당해 쫓겨났다.[13] 민정식이 대방 마님에게 파양 당해 쫓겨난 이유의 하나도 '상투를 잘랐다'는 사건 때문이었다.[13] 단발을 최초로 권고한 것이 고종이 아닌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은 당시 사회상 반감의 이유였다.

신교육과 단발령의 확산

조선의 신교육은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본격화하였다.[14] 일설에는 '만약 그 신교육과 '머리털 수난'을 함께 실시하지 않았던들 신교육은 더 이른 시일에 적극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으리라.[14]'라는 견해도 있다. 고종이 단발을 결심한 배경에는 유길준정병하가 한 건의 이전에 서양인 선교사들이 위생에 편리하고 머리 감기가 쉬운 이유를 들어 고종에게 단발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단발령 시행에 협조하라고 주문한다.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선교사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신교육을 받을 수 없게 하겠다고 하여 백성의 단발을 유도하였다.

결국, 신교육의 보급 요람인 신식 학교에 가려면 먼저 머리를 깎아야 했으므로 신교육 자체가 국민에게 많이 저항받았다. 행세하는 가문에서는 그 머리털 자르는 일 때문에 자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14] 이런 일은 실제로 경상북도 대구의 일등 거부이던 장길상의 집안에서도 일어났다.[14] 장길상은 자기 아들 하나가 신교육을 받고자 대구에서 한성으로 올라와 상투를 자른 일을 두고 '불효'와 '난봉'으로 취급해 학비 조달을 중단해 버렸다.[13] 또 그 사람은 영남학회를 위시한 교육단체에 20원인지 30원인지 기부하겠다고 하고서 자기의 상투 머리가 잘리자, "이제는 상투까지 잘렸으니 그런 기부도 그만두겠다."고 상투 시위를 벌인 일도 있었다.[13]

박중양의 단발령 보급

관찰사를 지낸 박중양단발령이 시작될 무렵 일부 인사들과 함께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이것을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사람들은 단발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구한말에 경상북도관찰사가 된 박중양영해(寧海) 지방에 들어가 한 고을의 수천 백성의 상투를 꾀를 써서 잘라 버린 사건이 있었다. [13]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박중양영해군으로 초도순시를 가고서 그 잘하는 연설로 백성에게 감명을 주고서 선언했다.[13]

나에게 따로 인사하고 싶은 사람은 이 연설회가 끝나고서 군청 내아(內衙)로 들어오시오.[13]

도백(道伯)이 자기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 인사받겠다는데 감지덕지한 유지 기관장급들은 좋다고 하고 내아로 줄을 지어서 들어갔는데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이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상투가 잘려나갔으니 내아는 금세 통곡 바다를 이루었다.[13] 이후 박중양은 위생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단발령을 권고했고 호응이 적은 곳은 직접 찾아가 순사들을 매복시키고서 단발을 강행한 후 단발령은 전국 각지로 확산하였지만, 보수 경향이 있는 유학자와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은 격렬히 반발하였다.

군수 삭발령

단발령이 일시 중단, 자율화에 맡겼다가 1900년에 재실시되자 한성부와 각 아문, 경기도를 위시한 대다수 관리와 지방의 관찰사급 인사들도 머리를 깎아 이에 따랐으나 지방에서는 백성은 물론 당시 제주 군수 정교(鄭喬)를 위시한 많은 관리가 머리를 깎지 않자 1906년(광무 9년) 광무개혁을 추진하던 조정에서는 단발령을 재공포하면서 당시 관료들에게 강제로 머리를 깎으라고 지시했다. 1906년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은 각 도에 명령을 하달하여 군수, 참서관, 주사(主事), 서기를 위시한 관리들에게 삭발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정교는 관직을 사임하고 물러났고 1907년 곡산 군수로 부임한 정교는 끝내 머리 자르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1906년 이지용이 한 상주를 받아들여 군수 삭발령을 실시, 공직자들을 강제로 삭발시킨다.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 전개

배경

일본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무렵에 한일 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광무 8년) 8월에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와 재정을 위시한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고문정치).

이때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다(目賀田)는 소위 '화폐 정리사업'으로써 대한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하게 했다. 아울러 일본 제국에 따라 일본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위촉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은 일본 제국의 침략 의도 미화에 앞장섰다. 스티븐슨은 후일 장인환전명운 의사에게 미합중국 오클랜드 기차역에서 처단되었다.

1904년(광무 8년) 한반도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러일전쟁은 1905년(광무 9년) 일본 제국이 승리해 일본 제국과 러시아 간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로 매듭지었다. 이해 일본 제국은 1905년제2차 한일 협약 성립을 일방으로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 (통감정치).

국권 수호 운동

이에 양반과 지식인층 중심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영환은 자결로써 항거하였고 조병세는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 장지연은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에 논설인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일본 제국과 을사오적을 규탄하였다. 오적 암살단이 조직되어 을사오적의 저택을 불사르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으며, 민종식, 신돌석, 최익현은 의병을 조직해 무장 항전을 벌였다.

또한, 독립 협회가 해체되고서 헌정연구회 같은 개화 자강 계열 여러 단체가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립하고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 제국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입헌 군주제를 수립하고자 설립된 헌정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대한 협회, 신민회를 위시한 개화 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을 계승한 사회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에 영향받아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과 언론 활동을 이용한 실력 양성 운동을 꾀하고자 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융희 원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서상돈가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상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이 갚고자 전개한 운동이었으나 이런 애국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일본 제국 통감부가 방해하고 탄압하여 결국 실패한다.

이런 국권을 수호하려는 여러 운동은 민족 독립운동 이념과 전략을 제시, 장기에 걸친 민족운동 기반을 조성했다는 의의가 있으나 일본 제국의 침략과 지배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평가도 지적된다. 즉, 당시 일본 제국에 정치상으로나 군사상으로나 예속된 상황에서 전개되어 성과 면에서 한계성이 노출되었다.

구조상 문제

대한제국 정부가 국민에게 거두는 모든 조세는 공공 용도로만 사용해야 하는데 황실과 정부의 재정이 분리된 상황에서 황실이 수조권을 소유한 광활한 궁장토(宮庄土)와 역둔토(驛屯土)에서 수익과 광업·홍삼 사업 관리로써 수익이 국가 공공 용도가 아닌 황실의 재산을 축적하는 용도로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서 대한제국 시기에 황실과 정부 분리는 오히려 국가의 공공성을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황권의 강화가 국가의 강화로 직결되지는 않았다.[15] 그러나 정부의 행정권을 대상으로 한 일본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황실이 소유한 재산은 국민을 교육하려는 학교 건립이나 국권을 수호하려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비롯한 국가를 배려한 긍정 용도로 쓰이기도 하였다.

한일 병합 전후

민중의 반응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던 날 대도시인 경성부, 수원부, 개성부, 대구부, 동래부는 조용하였다. 1907년정미의병에서 한일 병합 1주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 1천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2] 한일 합방 무렵 전체 인구 대비 항일 전투 참전율은 1.1%였다.[2] 민영환이상설을 위시한 일부 양반과 지식인층들을 제외하고는 조용하였다.

역사가 신복룡은 이를 두고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대한제국처럼 무기력했고 침묵한 민족이 흔치 않았다.[16]'고 개탄하였다. 신복룡은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대한제국처럼 무기력하고 침묵한 민족이 흔치 않았다. 187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엽까지 일본 제국의 대륙론자들이 정한론을 구체화시키는 동안에 조선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묻지 않는다.[16]면서며 당시 대한제국의 지도자와 고위층 무능과 안이한 대응을 질타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 때 외교권을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다. 고종은 비밀리에 밀서를 작성해 열강 세력에 을사조약의 불법적 체결과 무효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이 7월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 로 정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8월 ~ 9월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1909년(융희 3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에 넘겨 주게 되고(기유각서), 이로써 대한제국의 명목상의 국권만 보유하게 된다. 일본은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조약 체결과 동시에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에서 약 4,000년간 지속하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으나 황제가 폐위된 것은 아니며 다만 왕공족 제도의 시행에 따라 황제는 왕(또는 이왕)으로 등급이 격하되었고 일본 황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군주제는 폐지되었지만, 한국에서 왕의 칭호를 가진 존재는 1945년까지 존재하였다. 이로써 일본 제국은 한국을 식민 통치 지역으로 편입하였다.


군사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 1893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을 강화도에 설립하였으며 영국 해군 대위 코렐과 부사관 허치슨이 강화도에 들어와 해군 생도들의 근대적 군사훈련을 맡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한국의 신식 군대가 편제, 계급과 군복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1894년 10월 4일 칙령 제10호가 반포되면서 군대 계급을 장교부사관, 병졸로 크게 나누고 장교는 대위, 부위, 참위의 위관급과 정령, 부령, 참령의 영관급, 그리고 대장(大將), 부장(副將), 참장(參將)의 장관급으로 다시 구분하고 부사관은 참교, 부교, 정교의 3등급, 병졸은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의 3등급으로 나누었으며 그 외에 무관생도가 있었다. 대장(大將)은 총리대신급과 같고, 부장(副將)은 대신급, 참장(參將)은 차관급이었다.

고종은 1899년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皇帝)였다. 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이며 대원수인 고종이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899년 6월 22일 반포된 원수부관제는 “대황제 폐하께서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시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하신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라고 규정했다.

대한제국 황제는 대원수로 군기(軍機)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統領)하며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옷이 바로 대원수 군복이다. 고종 32년(1895) 4월 한국에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에 따라 고종은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었고, 검은색 군복의 오얏꽃(자두꽃) 문양 단추는 대한제국 군복의 복제이며,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 조칙(詔勅)을 통해 옷깃의 별 5개는 대원수 군복에 부착하였다.

고종은 1903년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구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양무호는 길이 105m, 무게 3천 톤, 총 배수량이 3,432톤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이었으며, 1904년 또 다른 근대식 전함을 구매하는데, 그것은 바로 광제호(光濟號)였다. 광제호는 총 배수량 1,056톤으로 최신식 3인치 대포 3문을 3개 장착하고 있으며 태극기를 달고 운항했다.[17]

외교

대외 정책

대한제국은 해외교민보호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통상 사무기관을 설치하였다.

1899년에는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이 맺어졌는데, 청나라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이 청나라와 맺은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간도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토인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간도 관리사를 설치하여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독도는 대한제국 선포 이전 1884년울릉도 개척령을 내려 쇄환 정책을 폐기하고, 울도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대외 정책은 '자주적 중립외교'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친일파와 친러파 관료들의 대립과 열강 세력들의 압박 등으로 그 실효를 제대로 보이지 못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일본 제국은 이를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일본 제국은 이어서 1904년 11월에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였고, 1905년 2월에 일본 제국 시마네 현에 편입시킴으로써 일본 제국령으로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1905년 일본 제국제2차 한일 협약을 맺게 됨으로써 외교권한은 박탈당했고, 일본 제국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하였다.

수교한 국가

대한제국과 수교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이 박탈되어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 단교 되었다.

  1.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 1876년
  2. 미국 아메리카 합중국(미국) - 1882년
  3. 영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 - 1882년
  4. 독일 제국의 기 독일 제국 - 1883년
  5. 이탈리아 왕국의 기 이탈리아 왕국 - 1884년
  6.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 1884년
  7. 프랑스 프랑스(제3공화국) - 1886년
  8.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 오스트리아-헝가리 - 1892년
  9. 청나라 청국 - 1899년
  10. 벨기에 벨기에 왕국 - 1901년
  11. 덴마크 덴마크 왕국 - 1902년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제호 재위 기간 황자 시절 작위 외칭
(추존)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이단(李旦) 1392년~1398년
(추존) 진종(眞宗) 소황제(昭皇帝) 이행(李緈) (추존) 경의군(敬義君), 효장세자(孝章世子)
(추존) 장조(莊祖) 의황제(懿皇帝) 이선(李愃) (추존) 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
(추존) 정조(正祖) 선황제(宣皇帝) 이성(李祘) 1776년~1800년 왕세손
(추존) 순조(純祖) 숙황제(肅皇帝) 이공(李玜) 1800년~1834년
(추존)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 이영(李旲) (추존) 효명세자(孝明世子)
(추존) 헌종(憲宗) 성황제(成皇帝) 이환(李奐) 1834년~1849년 왕세손
(추존) 철종(哲宗) 장황제(章皇帝) 이변(李昪) 1849년~1863년 덕완군(德完君)
1 고종(高宗) 태황제(太皇帝) 이재황(李載晃)/이희(李熙) 1897년~1907년 익성군(翼城君) 광무황제(光武皇帝)
이태왕(李太王)
2 순종(純宗) 효황제(孝皇帝) 이척(李坧) 1907년~1910년 왕세자, 왕태자, 황태자 융희황제(隆熙皇帝)
이왕(李王)

훈장 제도

1900년(광무 4년) 4월 17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가 반포되면서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대훈위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 태극장(太極章), 자응장(紫鷹章)이 제정되었다.[18] 1901년(광무 5년) 4월 16일에 칙령 제10호로 조례를 개정하여 팔괘장(八卦章)이 추가되었다.[19] 1902년(광무 6년) 8월 12일대훈위서성대수장(大勳位瑞星大綬章)이 추가되었다.[20] 1907년(광무 11년) 3월 30일에 칙령 제20호로 조례가 개정되어 서봉장(瑞鳳章)이 제정되었다.[21]

같이 보기

주석

  1. 권태환 신용하 (1977). 《조선왕조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 
  2.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 216페이지
  3. “我邦乃三韓之地而國初受命統合爲一 今定有天下之號曰大韓未爲不可” (《고종실록》 제36권. 고종 34년 10월 11일.)
  4. “及高麗時呑竝馬韓辰韓弁韓 是謂統合三韓 … 定有天下之號曰大韓” (《고종실록》 제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5. 그런데 이런 표기는 서구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한 이후 일로, 일 자로 된 국호를 가졌던 이 국호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스스로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19세기 이전에도 외교상 수사에서 대당(大唐), 대명(大明)으로 왕왕 표기하기는 했었으나 19세기 중후반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6. 황실용어 제대로 쓰자 동아일보 2005-07-25
  7. 일본이나 타국의 학설이나 한국의 소수설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말미암아 조선이 독립하였기에 비로소 대한제국이 성립했다는 견해가 있다.
  8. 《한국의 황제》, 이민원 엮음, 대원사, 2002년, 24쪽.
  9. 《문화원형백과》, 대한제국, 한국콘텐츠진흥원(2004년판)
  10.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대한제국 황실문장, 이상희 저, 넥서스BOOKS(2004년, 75~79p)
  11. 식산흥업정책
  12.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293페이지
  13.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292페이지
  14. 이용선,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 (동서문화사, 2002) 291페이지
  15. 근대와 식민의 서곡. 김동노 저. 창작과비평사, 2009
  16.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 215페이지
  17. 문화재청 대한제국 군사제도 전시를
  18. 고종실록. “훈장 조례를 반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2년 4월 27일에 확인함. 
  19. 고종실록. “훈장 조례 중 태극장 아래에 팔괘장을 첨입하여 개정하는 일에 관한 안건을 반포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2년 4월 27일에 확인함. 
  20. 고종실록. “훈장 등급을 변통하도록 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2년 4월 24일에 확인함. 
  21. 고종실록. “훈장 조례를 개정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2년 4월 2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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