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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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조선 국왕
재위 1418년 9월 9일-1450년 4월 8일
전임 태종
후임 문종
섭정 상왕 태종 이방원 (1418년~1422년)
영의정 류정현 (1422년)
왕세자 이향 (1442년~1450년)
재상 의정부(議政府)

심온(沈溫) 류정현(柳廷顯) 이직(李稷) 황희(黃喜) 하연(河演)

이름
이도(李祹)
별호 초명은 막동(莫同), 자는 원정(元正)
묘호 세종(世宗)
시호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능호 영릉
신상정보
출생일 1397년 5월 7일(1397-05-07)
출생지 조선 한성부 준수방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사망일 1450년 4월 8일(1450-04-08)(52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동별궁
왕조 조선의 기 조선
가문 전주 이씨
부친 태종
모친 원경왕후
배우자 소헌왕후
자녀 적자녀 10명:
정소공주 (1412년 출생),
문종 (1414년 출생),
정의공주 (1415년 출생),
세조 (1417년 출생),
안평대군 (1418년 출생),
임영대군 (1419년 출생),
광평대군 (1425년 출생),
금성대군 (1426년 출생),
평원대군 (1427년 출생),
영응대군 (1434년 출생)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대승불교)
묘소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세종(世宗, 1397년 5월 7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국왕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그중 경복궁을가장사랑해서 근정전에서 훈민정음을반포했다

(李), 는 도(祹), 본관전주(全州), 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었다.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시호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었다. 존시를 합치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훙서한 최초의 왕이었다.[2][3]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퍼내었지만 글을 읽지 못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4]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당뇨, 성병 등을 이기지 못하고 1450년승하했다.

치세

1418년 9월에서 1450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이정준이 죽고 1418년 9월에서 1422년 5월까지 부왕인 태종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 5월에서 6월까지 한 달 동안 영의정 류정현이 한 달 간 2차 대리청정을 하였고 그 후 1422년 6월에서 1442년 1월까지 친정을 하였으며 1442년 1월에서 1450년 3월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봉작
둘째 형 효령대군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민제의 딸 원경왕후 민씨의 육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 누나 세 명이 있었다. 아명은 막동이고 뒤에 이름을 도(祹)로 개명하였다.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그 후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들을 찾아내어 독서를 계속하였다.

대군 진봉, 그리고 형들과의 경쟁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大匡輔國 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5]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5]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세자 책봉과 즉위

1418년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6]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7]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2]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재위 기간 업적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부왕 태종은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즉시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5]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다.[5] 1423년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고 민심을 얻었다. 세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과 비호를 받아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대외 정책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郡)을, 김종서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

  • 이종무의 실책: 정찰대 선발 때 제비뽑기를 선발 방법으로 채택해 사기를 떨어뜨렸고, 결국 의욕 없이 나간 정찰대 중 180명이 왜병의 기습에 죽고 말았다.

국방 정비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3포를 개항(1426년)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통해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 1433)과 함길도의 6진(六鎭, 1437)을 개척하게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훈민정음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2]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정창손,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는 문자 연구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려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 16세기 지방 하층민도 한글 사용, 암클, 언문 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언어학자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8]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하위지가 있었는데, 최만리는 청백리로 인정받았음에도 세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폄하되었다.

재상 등용과 국정 분담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9]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9]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9]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9]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9]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

소갈증 등을 앓던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10]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다. 여비(女婢)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10]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10]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년) 87세로서 은퇴하였다.

세종대의 또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또한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다.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 일시 중지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중국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보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부왕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태종 때의 처녀 조공은 40명이었지만 세종 12년까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는 74명이었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사정하여 조공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금은광산에서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고 국가의 부가 빠져나갔으며 세종 즉위 후 1430년(세종 12년)까지 74명의 공녀가 명나라에 바쳐졌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그러나 세종 사후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다시 부활했고,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중종 때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진다.

과학의 발전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8]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김담 등에 명해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3]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현대에 와서 청동 물통 부분만 재구성한 모형이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다.1431년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문물의 발전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3]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3]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법전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서민 복지 정책

세종은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을 한 명씩 내주어서 봉양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은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예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에게 1435년 벼슬을 준 일이 있다. 세종은 “지화가 국가의 미래를 점치는 일과 왕실 혼인에 자주 참여하여 점복을 잘 치니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고 정승 황희와 맹사성에게 물었다. 황희가 정4품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하여 시각장애인 점복가 지화와 이신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반대한 것을 세종은 사옹원의 벼슬은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정당하다고 신하들을 설득시킨 일이 있었다. 한편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명통시에서 활동했는데, 명통시는 시각장애인단체로 장애인에게 쌀, 황두를 지원했다.

생애 후반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 이맹종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눠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 의령군 이맹종 등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후 계속 의령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려져 결국 1423년(세종 5)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서거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2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446년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헌인릉 서쪽 구룡산에 안장했다. 뒤에 세종이 합장할 빈 관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세종은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소갈증 (당뇨병) 합병증과 중풍등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54세를 일기로 영응대군의 사택인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8] 죽기 전 급하게 우찬성 김종서고명대신으로 삼고 임종 시 그가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세종의 승하후 일주일 남짓이 지나서 왔다.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세종대왕릉(영릉).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대모산 근처인 구룡산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오늘날의 영릉이 위치한 경기도 여주시로 이장하였다.

사후

1450년 (문종 1) 4월 21일 (음력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여 묘호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세종의 세(世)는 '번성'을 의미한다. 6월 30일 (음력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天地)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마는,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美德)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 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聰明)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 를 높이고 종(宗) 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包容)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調和)되니, 문치(文治)는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수방(殊方) 에서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貞符]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일조(一朝)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追崇)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의령(懿靈)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玉冊)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홍명(鴻名)을 누리고,

순희(純禧)를 거듭 주셔서 무궁(無窮)한 보조(寶祚) 를 말없이 도와주소서.”

— 《문종실록》 1권, 즉위년 5월 21일(갑자)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인 1469년(예종 1년)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이때 비석과 석물은 구룡산의 것은 방치하고 새로이 조성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1981년 구룡산 기슭에서 농사짓던 한 농부에 의해 상석, 석물, 석수, 장명등 등이 발견되고 초장지 1km 지점인 내곡동 산 13번지에서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초장지의 비석과 석물 등은 1974년 5월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졌다.

일화

  • 세종이 충녕대군 이었던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태종이 “세자 방의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발견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기뻐하며 닳도록 읽는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 읽었다고 한다.

건강

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10]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金殷鎬)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비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 당뇨병)·풍질(風疾) 등을 평생동안 앓았다고 한다. 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 (1441, 세종 23년) 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훙서) 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기타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대왕은 이들과 이중 삼중의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 정실인 소헌왕후 심씨는 세종의 고모부인 심종의 조카딸이다. 심종은 세종의 고모 경선공주의 남편으로 심온의 동생이다.
  • 세종대왕의 세 번째 동서인 노물재는 세종의 이종 사촌 형제가 된다. 심온의 세 번째 사위 동지돈녕부사 노물재는 교하 노씨로 우의정 공숙공 노한의 아들이며 성종 때의 영의정 노사신의 아버지이다. 심온의 외손자 노사신은 그의 이종질이자, 처조카가 된다. 심온의 사돈이며 노물재의 아버지인 노한은 세종의 이모부로서, 태종의 장인인 여흥백 문도공 민제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 처남인 심준은 외사촌 매제가 된다. 심온의 장남 영중추원사 심준은 민제의 셋째 아들인 지돈녕부사 여원군 민무휼의 사위가 된다.

가계


 조선 제4대 국왕   세종 世宗  출생 사망
1397년 5월 7일[1] (음력 4월 10일)
조선 조선 한성부 준수방 사저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52세)
조선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부모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태종대왕 太宗大王 전주 1367년 - 1422년 태조대왕 太祖大王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제3대 국왕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후덕왕대비 厚德王大妃
  원경왕태후 元敬王太后[11]
여흥 1365년 - 1420년 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 三韓國大夫人 礪山 宋氏


왕비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청송 1395년 - 1446년 청천부원군 심온 靑川府院君 沈溫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 三韓國大夫人 順興 安氏

후궁

작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신빈 김씨 慎嬪 金氏 청주  1406년 - 1464년 김원 金元
삭녕 고씨 朔寧 高氏
혜빈 양씨 惠嬪 楊氏 청주    ?   - 1455년 양경 楊景
이씨 李氏
세조 1년(1455년) 교수형에 처해짐[12]
숙종 38년(1712년) 신원됨[13]
영빈 강씨 令嬪 姜氏 진주    ?   - 1483년[14]
귀인 귀인 박씨 貴人 朴氏 밀양   생몰년 미상 박강생 朴剛生
파평 윤씨 坡平 尹氏
귀인 최씨 貴人 崔氏 전주 최사의 崔士儀
순천 박씨 順天 朴氏
숙의 숙의 조씨 淑儀 曺氏 미상    미상
숙용 소용 홍씨 昭容 洪氏
숙용 숙용 홍씨 淑容 洪氏
숙원 숙원 이씨 淑媛 李氏  ? - 1490년 이후[15]
상침 상침 송씨 尚寢 宋氏  1396년 - 1463년
사기 사기 차씨 司記 車氏    ?   - 1444년[16]

왕자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문종대왕 文宗大王 향 珦 1414년 - 1452년 소헌왕후 심씨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 제5대 국왕
2 세조대왕 世祖大王
수양대군 首陽大君[17]
유 瑈 1417년 - 1468년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제7대 국왕
3 안평대군 安平大君 용 瑢 1418년 - 1453년  부부인 연일 정씨 府夫人 延日 鄭氏 육종영 중 한사람
단종 1년(1453년) 사사됨
4 임영대군 臨瀛大君 구 璆 1420년 - 1469년     의령 남씨 宜寧 南氏
 제안부부인 최씨 齊安府夫人 崔氏
 연산군폐비 신씨의 외조부 
5 광평대군 廣平大君 여 璵 1425년 - 1444년  영가부부인 신씨 永嘉府夫人 申氏
6  화의군 和義君 영 瓔 1425년 -   ?    영빈 강씨  군부인 밀양 박씨 郡夫人 密陽 朴氏 육종영 중 한사람
성종 20년(1489년) 이후 사망[18]
7 금성대군 錦城大君 유 瑜 1426년 - 1457년 소헌왕후 심씨  완산군부인 최씨 完山府夫人 崔氏 육종영 중 한사람
세조 3년(1457년) 사사됨[19]
8  계양군 桂陽君 증 璔 1427년 - 1464년  신빈 김씨 정선군부인 한씨 旌善郡夫人 韓氏[20]
9 평원대군 平原大君 임 琳 1427년 - 1445년 소헌왕후 심씨  강녕군부인 홍씨 江寧府夫人 洪氏
10  의창군 義昌君 공 玒 1428년 - 1460년  신빈 김씨  양원군부인 김씨 梁源郡夫人 金氏
11  한남군 漢南君 어 𤥽 1429년 - 1459년  혜빈 양씨  안동군부인 권씨 安東郡夫人 權氏 육종영 중 한사람
12  밀성군 密城君 침 琛 1430년 - 1479년  신빈 김씨  풍덕군부인 민씨 豊德郡夫人 閔氏
13  수춘군 壽春君 현 玹 1431년 - 1455년  혜빈 양씨  영천군부인 정씨 榮川郡夫人 鄭氏
14  익현군 翼峴君 련 璭 1431년 - 1463년  신빈 김씨  김제군부인 조씨 金堤郡夫人 趙氏
15 영응대군 永膺大君 염 琰 1434년 - 1467년 소헌왕후 심씨 대방부부인 송씨 帶方府夫人 宋氏[21]
 춘성부부인 정씨 春城府夫人 鄭氏
 연성부부인 김씨 延城府夫人 金氏
   영흥대군 永興大君
   역양대군 歷陽大君
16  영풍군 永豊君 전 瑔 1434년 - 1457년  혜빈 양씨 군부인 순천 박씨 郡夫人 順天 朴氏[22] 육종영 중 한사람
17  영해군 寧海君 당 瑭 1435년 - 1477년  신빈 김씨  임천군부인 신씨 林川郡夫人 申氏
18  담양군 潭陽君 거 璖 1439년 - 1450년        미혼       

왕녀

작호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정소공주 貞昭公主 1412년 - 1424년 소헌왕후 심씨      미혼     
2 정의공주 貞懿公主 1415년 - 1477년 연창위 延昌尉 안맹담 安孟聃
3 정현옹주 貞顯翁主 1424년 - 1480년  상침 송씨 영천위 鈴川尉 윤사로 尹師路
-   옹주[23]   ?   - 1426년  신빈 김씨[24]          
-   옹주[25]   ?   - 1429년
-   옹주[26] 1430년 - 1431년  사기 차씨
4 정안옹주 貞安翁主 1438년 - 1461년  숙원 이씨 청성위 靑城尉 심안의 沈安義


세종이 등장하는 작품

드라마

연도 방송사 제목 배우
1973년 KBS 세종대왕 남일우
1980년 KBS 파천무 유순철
1983년~1984년 MBC 뿌리깊은 나무 한인수
1990년 KBS2 파천무 남성우
1994년 KBS2 한명회 김원배
1996년~1998년 KBS1 용의 눈물 안재모
1998년~2000년 KBS1 왕과 비 송재호
2007년 KBS2 사육신 김준식
2008년 KBS2 대왕 세종 김상경, 이현우, 김도현
2011년 SBS 뿌리깊은 나무 한석규, 송중기, 강산
2011년~2012년 JTBC 인수대비 전무송
2015년~2016년 MBC 퐁당퐁당 Love 윤두준
2016년 KBS1 장영실 김상경
2016년 SBS 육룡이 나르샤 남다름
2016년 채널 A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 김경응

영화

연도 제목 배우
1962년 주유천하 김운하
1964년 세종대왕 최남현
1978년 세종대왕 신성일
2008년 신기전 안성기
2012년 나는 왕이로소이다 주지훈
2019년 나랏말싸미 송강호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석규

게임

관련 대상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만원권.

세종의 이름이 붙은 것

기타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사용하던 1000, 500환 지폐의 도안.
  •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사용하던 대한민국의 1백원권 지폐의 도안.[27]
  • 1973년부터 사용 중인 대한민국의 1만원권 지폐의 도안.
  • 대한민국의 기념일 한글날: 한글을 반포하였으리라 여겨지는 날을 한글 창제를 기리는 날로 삼음.
  •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을 기려 스승의 날로 삼음.[28]

같이 보기

참고 문헌

  • 《세종실록》
  • 서정민. 2008. 《세종, 부패 사건에 휘말리다 (조말생 뇌물 사건의 재구성)》. 살림. (ISBN 978-89-522-0812-5).

외부 링크

github.com/eomseongsoo

각주

  1. 세종대왕의 탄생일은 1397년 음력 4월 10일이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할 때, 1397년 당시 서양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5월 7일이 되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5월 15일이 된다.
  2.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세종 (世宗)"
  3. 두산 백과사전 "세종 世宗"[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고려 대제학을 역임한 백인관(白仁寬, 1341~1421)은 세종시대 정자 '선정' 지음. 임금의 부름 세 번이나 거부한 사람 오마이뉴스 2016년6월20일자
  5. 세종 "나도 임금감"… 황희는 매관매직? Archived 2013년 10월 29일 - 웨이백 머신 조선일보 2005년 04월 15일자
  6. "훈민정음" 검색 결과,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7. 한쪽에서는 이제가 일부러 비행을 해서 세종에게 왕위가 가게 했다고 주장하나, 다른 한쪽에서는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비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
  8.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세종대왕〉, 네이버캐스트 :: 인물과 역사
  9.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75페이지
  10. [이덕일 사랑] 영상(領相)과 총리(總理) Archived 2013년 10월 29일 - 웨이백 머신 조선일보 2006년 03월 20일자 기사
  11.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8월 24일 경신 2번째기사
  12.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11월 9일 경진 1번째기사
    양씨 등은 교수형에 처하고, 홍이로 등은 관노에 정속할 것을 명하다
  13.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1712년 청 강희(康熙) 51년) 4월 28일 경진 1번째기사
    혜빈 양씨 및 그 아들 영풍군 이전의 관작과 봉호를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
  14. 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1월 20일 계축 4번째기사
    의금부에서 이영이 외방 종편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전일 성상께서 이영(李瓔)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나이 많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이영이 이미 종편(從便)하였다 하여 특별히 이영에게 그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기한하여 서울에 살면서 효도를 다하게 하였는데, 이제 강씨가 죽어 장사를 이미 마쳤으니, 청컨대 영을 보내어 외방 종편(外方從便) 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명하여 상제(喪制)를 마친 뒤에 외방 종편하게 하였다."

  15. 성종실록》 241권, 성종 21년(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6월 7일 무자 4번째기사
    의금부에서 심언의 일에 연루된 윤호·봉보 부인 등에 대해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심언(沈漹)이 공초(供招)하기를, ‘외조모 숙원(淑瑗) 이씨(李氏)가 봉보 부인에게 편간을 청하여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에게 보내고 사복 판관(司僕判官)을 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중략)

  16.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7월 10일 정사 1번째기사
    연생전에 벼락이 떨어져 궁녀가 죽다
  17. 진평대군(晉平大君, 1428년)→수양대군(1445년)
  18. 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5월 9일 병인 1번째기사
    화의군 이영이 자기 서자를 종적에 편입시켜 줄 것을 상소하다
  19.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1일 신해 2번째기사
  20. 한확의 둘째 딸이자 인수대비의 언니
  21. 단종정순왕후의 고모
  22. 박팽년의 딸
  23.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3월 6일 경자 2번째기사
    왕녀가 졸하다
  24.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1월 27일 병오 2번째기사
    소의 김씨를 귀인으로 삼다
    소의(昭儀) 김씨(金氏)로 귀인(貴人)을 삼았다. (중략)

    "소의(昭儀)가 6남 2녀를 낳았으나 딸은 다 죽고 아들은 다 살았는데, 술수하는 자의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모두가 말하기를, ‘여섯 아들이 다 수(壽)할 것이다. ’고 하였다 하니, 내가 정궁에 아들이 많으니 소의의 자식을 자랑할 것은 없지만, 그러나 여섯 아들이 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요, 실로 하늘이 시키는 것이니 또한 소의의 명(命)은 귀한 것이다. 고금으로 궁인의 세계(世系)에 본래 귀천이 없는 것이었다.

    (중략)

    내가 빈(嬪)이나 귀인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니 어떻겠느냐."

    (중략)

  25. 세종실록》 43권, 세종 11년(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2월 21일 정유 1번째기사
    왕녀가 졸하니 상장의 예절을 의논하여 올리게 하다
    왕녀가 졸(卒)하므로 예조에 명하여 상장(喪葬)의 예절을 의논하여 올리게 하였다. 왕녀는 궁인(宮人)의 소생이었다.
  26.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7월 6일 무진 4번째기사
    사기 차씨의 소생인 왕녀가 죽다
    왕녀가 죽었다. 나이가 두 살인데 사기(司記) 차씨의 소생이다.
  27. 세종 도안 1백원권 지폐는 1980년 12월 1일부로 발행중지되었다.
  28.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제로, 충북일보, 2008.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