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 (신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의상 (신라)

의상대사 영정
법명 의상(義湘)
출생 625년
입적 702년 (78세)
종파 화엄종(해동 화엄종)
저작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화엄십문간법관(華嚴十門看法觀)》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제반청문(諸般請文)》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화엄일승발원문(華巖一乘發願文)》
《투사례(投師禮)》외
스승 지엄(智儼)
제자 오진(悟眞) · 지통(智通) · 표훈(表訓) · 진정(眞定) · 진장(眞藏) · 도융(道融) · 양원(良圓) · 상원(相源) · 능인(能仁) · 의적(義寂) 등
Dharma Wheel.svg

한국불교

역사
삼국 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고려 조선 현대
사상
이제합명 불국토 호국
일심 화쟁 무애 화엄
유식 정토 교관 정혜 무심
돈오점수 돈오돈수
인물
승랑 원광 자장 원효 의상
원측 제관 의천 지눌 나옹
휴정 경허 성철 숭산
종파 · 목록
5교9산 5교양종 선교양종
조계종 조동종 진각종
진언종 천태종 태고종
대장경 · 소의경전
고려대장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논서 · 주석서
간화결의 금강삼매
기신론소 직지심체
정혜결사 천태사교
해심밀경소 법계도
사찰
삼보사찰 오대총림
분황사 황룡사
v  d  e  h

의상(義湘, 625년 ~ 702년)은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고승이다.[1]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또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며, 속성은 김(金: 혹은 박(朴)씨라고 함)이다.[1]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이다.

생애[편집]

유학과 교육[편집]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여왕 4년)에 사형(師兄)인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동굴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그와 헤어진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종남 산(終南山) 지상 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 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현수(賢首: 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1] 현수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당나라에 체류 중 그의 설법에 참석하던 여성 중 그를 사모하는 선묘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던 날, 선묘의 집에 찾아갔지만, 선묘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접한 이 선묘는 자신이 죽어 그를 지켜주겠다며 황해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에 의상이 경주에 산사를 지을 때, 지역 주민들이 와서 집단으로 들고 일어서자 어느 날 사람 수백 명의 머리를 덮고도 남을 크기의 바위가 공중에 떠다니면서 주민들을 따라다녔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였고, 의상은 사찰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수행과 정진[편집]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 낙산사)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1]

692년(효소왕 1)에 현수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1]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나누어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전심하다 죽었다.[1] 사망 당시 향년 78세였다.

사후[편집]

후일 고려 숙종은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 시호하였다. 의상의 문인으로 뛰어난 10대덕과 전교(傳敎)의 10대찰이 있었다.[1]

인간관계[편집]

신라고승 원효(元曉)를 사형(師兄)으로 섬겨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일화[편집]

  •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당나라삼국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을 공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1]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이 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1]
  • 범어사의 전설에 따르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金井山)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1]

기타[편집]

의상은 많은 사찰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영주부석사가 유명하다. 토에 정통한 승려로서 신라고려에서는 국사로 추존되었으며[2], 민간 신앙에서도 무속의 신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무당들로부터 숭배되었다.

주석[편집]

  1.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일부 고려의 왕족과 귀족 중에는 고려는 도선의 풍수지리설 덕택에 건국, 후삼국을 재통일했다는 사고관이 있었다.

관련 항목[편집]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