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Dharma Wheel.svg

불교

교의 · 용어
사성제 팔정도 깨달음
삼법인 사법인
오온 윤회 열반 수행
연기 중도 선정 반야
마음 마음작용 진여 법성
유식 여래장
인물
석가 십대제자 용수
역사 · 종파
원시 부파 상좌부 대승
경전
경장 율장 논장
팔리어 한역 티베트
성지
팔대성지
지역별 불교
몽골 미얀마 스리랑카
인도 일본 중국
타이 티베트 한국
v  d  e  h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구(法句)에는 논리적 결함도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 마음이 저 뜰앞의 소나무를 만든 것은 아니잖는가. 하늘의 흰구름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분명히 우리들 마음이 이 세상의 객관대상을 만들어 낸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다. 유식(唯識)에서는 일수사견이라는 비유를 든다.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옥의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단다. 물고기는 그냥 사는 집일 따름이다. 즉 물이라는 객관적 형태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천차만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망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이다. 신문 사회면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저주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액센트를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끄럽고 말 많은 세상을 보면서,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불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우선 삶은 자신의 해석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실은 그 해석에 따라서 개인의 진실이 된다. 그 다음은 창조에 대한 의미이다. 개인의 자신이 마음, 믿음에 따라 외부 세계는 형성된다.

반론[편집]

개체가 사물을 인식할 때, 정말로 "그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가? 아니면 "형상(이미지)"를 인식하는가? 사실상 "내"가 인식하는 것은 "신호"이지 그 사물 자체는 아니다. 사물을 직접 만져도 우리는 '촉감'이라는 신호를 뇌신경 세포로 받아들여서 "내" 안에서 인식한다. 물론 공통의 인식이 있으나, 개체가 저마다 인식하는 것은 역시 그 개체 안에서만 인식된다. 즉, 각 개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상" 일 뿐이며, 어떤 사물이나 개체도 좋음과 나쁨으로 재단되지 않고 단지 "그것"으로 즉여 할 뿐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일체유심조는 이에 대한 설명이며, 위에 있는 '해석학적' 설명으로는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