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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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울로스
사도, 순교자
출생타르수스
선종AD 64-67
로마
축일1월 25일 (회심)[1]
6월 29일 (순교)
상징서한집, 칼
수호신학자, 인쇄업자, 밧줄 제작자, 바구니 제작자

파울로스(그리스어: Παυλος)는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며,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파울로스 서신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인물의 이름은 개신교가톨릭교회가 같이 옮긴 공동번역성서바울로를 공히 사용하려 했으나 양측의 입장차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공동번역성서를 따라 바울로라고 칭하며,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옮긴 성경에 따라 바오로, 개신교(Protestant Church) 대부분은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를 따라 바울로 칭한다. 성공회(聖公會,Episcopal Church,Anglican Church)에서는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에 따라 바울로라고 하는데, 바울, 바우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요

파울로스는 초대교회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중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었다는 것이다.[2]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은 지성이 없이 열정만 있는 맹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3] 파울로스는 후대 기독교의 교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름

파울로스는 그리스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히브리어: שאול 샤울)’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 해외파유대인(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과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몰라서 생긴 것이다.[4]

한국어 성서 번역본의 음역 차이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의 음역을 따르는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에 ‘바울’,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에서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바오로’라고 한다. 파울로스를 성공회에서는 ‘바우로’라고 음역하는데, 그 실례로 1965년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는 파울로스가 바우로로 음역되어 있으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에서는 바우로를 신명(信名)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여주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똑같은 6월 29일이며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세기 이후에 등장한 성화에서 발견된다.

생애

파울로스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5].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4],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파울로스는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으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파울로스가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6] 그러나 파울로스는 사도행전 21:39에서 자신이 타르소스(다소)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엇갈린 말을 하고 있으며[7], 또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바울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사도행전을 쓴 루가이기 때문에[8] 여기에 관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하튼 파울로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9], 더군다나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10]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11]. 로마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갖고 있다는 파울로스의 주장은 그의 집안이 실력있는 가문이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에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기독교인은 파울로스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사회적 성공(成功)에 대한 욕구를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정작 파울로스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오물에 빗댄다.[9]

파울로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5],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12]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파울로스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연대

R.Jewett의 연대기[13][14]

  • 34년 다마스쿠스 사건
  • 41년 제1차 예루살렘 방문
  • 51년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선교, 제2차 예루살렘 방문
  • 59년-60년 로마로의 송환
  • 62년 사망

성공회 사제 박태식 신부[15]의 연대기[16]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파울로스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개종이라는 단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는 독립종교가 아닌 예수메시아로 믿는 유대교의 소종파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선교활동

파울로스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19]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나바/바르나바가 자신의 사촌[20]인 마르코[21]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로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며칠 뒤에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며 교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언하였다. 그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는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렸다.

— 사도행전, 15:36-39/공동번역성서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파록쉬스모스(그리스어: παροξυσμὸς paroxusmos[*])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말이다. 파울로스와 바르나바간의 언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17] 이들의 분쟁에 대해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신학자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줄만큼 성격이 유순한 바르나바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바울이 서로 원만하게 지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파울로스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청교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던 조지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베드로와 파울로스-엘 그레코

사도권을 둘러 싼 갈등

사도(apostle)는 '그리스어: απόστολος'를 음역한 것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22]

사도로서 임명 될 자격 중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파울로스는 다마스커스에서의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관적 주장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믿을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 예수로부터 사도로 임명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1세기 교회에서는 파울로스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실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23]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신학갈등

김득중[24]은 고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단절을 주장하며,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른 복음을 전한다느니[25], 거짓 형제[26]라느니 하는 격렬한 말로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공동체였던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파울로스를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27]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랐지만 바울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존중하였으며, 모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십사 년 뒤에 나는 디도를 데리고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게파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10/공동번역성서

육체노동자 파울로스

사도행전에 의하면 파울로스는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노동자였다.

그 뒤 바울로는 아테네를 떠나 고린토로 왔는데 거기에서 그는 본도 출신인 아퀼라라는 유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퀼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자기 아내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온 사람이었다. 바울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신약성서학자인 정승우에 의하면 한글성서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로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포이오스는 가죽을 가공하는 모든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파울로스는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하던 대다수의 순회 설교자들과는 달리, 육체노동자로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복음전도의 통로가 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그리스도 신앙과 삶이 일치되게 하였다.[28] 장로교 신학자김회권목사도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한 귀신들을 쫓아낸 파울로스의 능력[29]노동자로서의 정직한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30]

파울로스의 사회 문화적 정황

바울 후 기독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31]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훈련된 레기온(신약성서마가복음서에서는 군대로 번역)의 정복전쟁으로 지중해 다른 민족들과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해간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32] 이를 그레코-로만문명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33]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파울로스의 신학

파울로스의 예수상과 교회

예수상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의 계시를 받았다. 성경은 이를 절 증거하고 있다.에베소서 3장3절에는, 곧 계시로 내게 그 신비를 알리셨나니..., 또 베드로후서 3장15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그리고 고린도전서7장25절에는, 그러나 처녀들에 관하여는 주께 받은 명령이 없으나 ...내 판단을 주노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의 신비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외에 자신의 견해를 말할때는 항상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히고 있다. 바울 서신과 공동서신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복음 , 하나님의 복음,나의(바울)복음, 그리스도의 교리, 하나님의 교리,나의(바울)교리라는 말이 모두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참조-로마서1:16,15:9,29 고린도전서9:12,18 고린도후서4:4,9:13,10:4 갈라디아서1:7 빌립보서1:27 데살로니카전서3:2 로마서1:1 15:16 고리도후서11:7 데살로니카후서2:2,8,9 베드로전서4:7 로마서2:16,16:25 디모데후서2:8,3:10 디도서2:10 히브리서6:1 요한이서9) 성경은 사사로운 해석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베드로후서1:20,3:16)로마 가톨릭에서 제1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의 증언이니 적어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경고 말씀에 겸허하게 순종함이 마땅하다.성경은 결코 읽고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오직 말씀을 읽고 그대로 믿어 행하는 책이어야 한다.(에베소서3:4) 공동번역과 개역성경에서는 교리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교리를 교훈으로 바꾸어 놓았다.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교리라는 매우 중요한 단어를 아애 없애버렸다. 그 때문에 현재의 허다한 교리적 혼돈과 거짓 교리들이 난무하는 현실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이것이 부패와 타락의 일로를 급속도로 걷고 있는 전 기독고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기도 하다. 바울 신학이란 말은 잘못된 용어이다.바울은 잡다한 인본주의에 찌든오늘날의 부패한 신학자들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신학쳬게를 세운 것이 결코 아니다.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받은 복음과 관련된 모든 신비의 계시를 진리 그대로 편지에 옮겨 적었을 뿐이다.바울 서신은 유일한 참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침사랑이 담긴 눈물로 쓴 편지이다. 셩경은 학자용이 아니라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깨닫는 자에게 성경 말씀은 그리 어렵지않다.믿음만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을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논리,사상,철학,학문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으며 믿음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 것, 그것만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다.(히브리서11:1,3,6)

<다른 견해>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파울로스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은 없으며,예수에게 복음을 전달받아서 전한다는 파울로스 서신서속의 언급들도[34]도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예수전승)을 전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파울로스 서신서도 예수 전승을 파울로스가 자신의 신학으로 해석한 신학문서인 것이다.[35] 물론 파울로스가 고린도전서 11:23에서 언급한 성만찬(Holy Communion)설명도 교회를 통해 전승되던 예수의 성만찬 제정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36]

교회관

파울로스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 해석했으며[37] ,파울로스의 제자들이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쓴 에페소서에서는 교회그리스도,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며(에페소 2:20), 민족의 구분이 없는 보편교회[38]로 해석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해석

구원론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를 주장했으며, 이러한 구원관은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와 갈등을 겪게 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파울로스의 칭의교리가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39]

성례전 해석

파울로스의 편지

편지의 작성자 문제

신약성서에서 실제 파울로스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오로 서간은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40]

  1. 확실히 파울로스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41],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2. 파울로스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3. 파울로스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42], 에베소서[43]
  4.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42], 디도서
  5.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

각주

  1. 바울로가 살던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유대교에서 아직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개종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2. 고린도후서 11:23-28
  3. 하느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3:23
  4. 박태식. 《《타르수스의 바오로》》. 바오로딸. 
  5. 사도행전 22:3
  6. 그들이 채찍질을 하려고 바울을 눕혔을 때에, 바울은 거기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유죄판결도 내리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백부장이 이 말을 듣고, 천부장에게로 가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시민입니다" 하고 알렸다. 그러자 천부장이 바울에게로 와서 "내게 말하시오.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다. 바울이 그렇다고 대답하니,천부장은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이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말하였다.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그러자 바울을 신문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곧 물러갔다.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일로 두려워하였다.(사도행전 22:25-29/표준새번역)
  7.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의 유대 사람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한 마디 말을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사도행전 21:39/표준새번역)
  8.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동역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세대에, 대략 기원후 120-150년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도시대의 일들을 몇몇 자료를 토대로 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대구성서아카데미 성서연구
  9.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빌립보서》3:4-8(표준새번역)
  10. 사도 9:1-19
  11. 고린도후서 11:22; 로마서 11:1
  12. 〈바오로의 생애〉. 《같은 책》. p.37쪽. 
  13.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 비기독교적 자료를 기초로 재구성
  14. R.Jewett. 《A Chronology of Paul's Lif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pp. 96-104쪽.  하워드 클락 키이. 서중석 옮김, 편집. 《《신약성서 이해》》. 한국신학연구소. pp. 306-308쪽.  에서 재인용
  15. 신약성서학자.
  16. 박태식. 《앞의 책》. p.3쪽. 
  17. 오경준(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목사). 〈'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홍성사. 
  18. 김경묵 외. 《《이야기 세계사》》. 청아출판사. 
  19.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르코를 복음사가 마르코로 이해한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
  20. 표준새번역공동번역에서는 사촌, 개역개정판개역한글판에는 누나나 남편누나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를 뜻하는 생질로 번역되어 있다.
  21.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아리스다르코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또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도 문안합니다. -마르코가 가거든 잘 영접하라는 지시를 여러분이 이미 받았을 줄 압니다.-(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4:10/공동번역성서)
  22. 하워드 클락 키이. 《앞의 책》. p.349쪽. 
  23. 사도행전 9장 26,27절
  24. 신약성서학자.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25. 갈라디아서 1:7
  26. 갈라디아서 2:4
  27. 사도행전 20:22
  28. 《인류의 영원한 고전 신약성서》-신약성서 최초의 저자, 바울의 생애와 사상/정승우 지음/아이세움 p.91-93
  29. 하느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손수건과 앞치마는 파울로스가 가죽을 가공하는 일을 하면서 사용한 노동도구들 즉, 파울로스의 과 수고가 담긴 정직한 노동을 뜻한다.-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다.(사도행전 19장 11절-12절 표준새번역성서)
  30. 《하나님나라의 신학에서 읽는 사도행전 2》-에베소 선교:그레코 로만 문명의 기초를 허무는 복음/김회권 지음/복있는 사람 p.212-213
  31. 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편집.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대한기독교서회. p. 351쪽. 
  32. 캐롤라인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편집.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p. 76쪽. 
  33. 정승우.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79-80쪽쪽. ISBN 978-89-7013-488-8. 
  34. 갈라디아서 1:12, 고린도전서 7:10,9:14,11:25, 데살로니가전서 4:15
  35. 박태식, 앞의 책, p.64
  36. 같은 책, p.66
  37. 로마서 12:4-5, 고린도전서 3:11, 고린도전서 12
  38. 에페소 2:14-16
  39. 김득중 지음. 《《복음서 신학》》. 컨콜디아. 
  40. 파울로스의 편지 분류는 하워드 클락 키이의 것이다.
    하워드 클락 키이. 《앞의 책》. pp.304-305쪽. 
  41. 파울로스의 신학 사상이 집대성 된 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교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종교 개혁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존 웨슬리 신부 등 교회사의 쟁쟁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파울로스의 대표적인 서신이다.
  42. 성서신학자 르네 지라르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를 바울로의 제자들이 교회의 요청에 따라 쓴 작품으로 보고 있다.
    르네 지라르. 김주경 옮김, 편집. 《《성경,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 시공사. p.104쪽. 
  43. 박태식(요한)신부(신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사제)는 바울로 서신서중에서 에베소서를 바울로학파의 작품 즉, 바울로의 제자들이 쓴 작품으로 보고 있다.
    박태식. 《앞의 책》. p.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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