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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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Issac Newton
아이작 뉴턴(1689년)
아이작 뉴턴(1689년)
출생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영국 영국 링컨셔 주 울스소프바이콜스터워스(영어: Woolsthorpe-by-Colsterworth)
사망 그레고리력 1727년 3월 31일(1727-03-31)(84세)
영국 영국 미들섹스 주 켄징턴
국적 영국 영국
종교 성공회
주요 업적 고전역학 정립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미적분학 정립
기하광학의 학문적 체계화 등
수상 왕립 학회 회원
분야 물리학, 수학, 천문학, 연금술, 신학
소속 케임브리지 대학교
박사 교수 아이작 배로(영어: Isaac Barrow), 벤저민 풀린(영어: Benjamin Pulleyn)
박사 학생 로저 코츠
윌리엄 휘스턴(영어: William Whiston)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 1727년 3월 20일)은 학자들과 대중들에게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던 영국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광학자, 자연철학자이자 연금술사, 신학자이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고전역학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세 가지의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광선으로 분해시키는 것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 연구했다.

수학적으로는,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 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인 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뉴턴은 2005년 영국왕립 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뉴턴과 아인슈타인중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에서 두 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 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1] 그럼에도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2]

생애

성장 과정

아이작 뉴턴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1643년 1월 4일 영국 링컨셔 주의 콜스터워스 근처의 울즈소프(Woolsthorpe-by-Colsterworth)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 형제들이 있었는데, 외삼촌은 교구에서 목회한 성공회 신부였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규모의 땅의 지주였으며 뉴턴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 하였는데,태어날 때 몸이 약해서 산파들이 따로 아기에게 먹일 을 구해 올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뉴턴이 3살 때 대지주인 바나바 스미스와 재혼했는데, 뉴턴은 훗날 뉘우치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매우 미워했다.

휴학 기간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폐교하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학문 활동

1667년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 스승 버로우 교수의 뒤를 이어 모교의 수학과 교수가 되어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수학의 발견에 대해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인 뉴턴 환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전부터 싹텄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에드먼드 핼리행성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정치활동

뉴턴은 국회의원(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이사(1696년) 등의 사회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후크가 죽은 뒤,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1705년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뉴턴에 대한 일화들

  •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라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 그는 성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성도(Saint)들이 부활하여 하늘에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심판 날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땅에서 살 것이며, 단지 1000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노벨렌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여러 세기 후에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가 주위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들이 뿌리 깊이 퍼져있는 것을 몹시 비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 환난이 오기 전에 복음 전파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 뉴턴은 취미로 연금술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연구 기록물이 노트 세 권가량 되었다고 한다.
  •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추천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1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 수위에게 한 "문 좀 닫아주시오!" 였다고 한다.
  • 뉴턴은 《광학》 제4권에서 물리학 전체를 포괄하고 자신이 선택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통일 이론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그가 책상에 촛불을 켜둔 채 외출했다가 그가 기르던 개인 다이아몬드가 초를 물어서 던져버리는 바람에 아직 공개하지 않은 그의 연구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 뉴턴은 조폐공사 사장에도 임명되었는데 그는 화폐 위조범을 잡아 처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동전의 톱니무늬도 화폐 훼손을 막기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다.
  • 뉴턴은 젊은 시절에 약혼 한 여성이 있었으나 그는 연구와 일에 매우 몰두하며 결혼까지 이어가지는 못 하였고 독신으로 살았다.
  • 그의 강의는 워낙 재미없었기 때문에 인기가 매우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였다.
  • 그는 시(詩)를 "일종의 천재적인 쓸모가 없는 소리"(a kind of ingenious nonsense)로 여겼다.[3]
  • 뉴턴은 손으로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공작에 재능이 있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일 적에 휴대할 수 있는 초롱불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새벽마다 의무적으로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에 참석하러 가던 학생들이 편하게 대학교 내 성공회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저서

참고 문헌 및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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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순욱. 1727년 3월 20일. 전자신문. 2010년 3월 18일.
  2. 첫 번째는 무하마드이고 세 번째는 예수다.
  3. 울프 다니엘손. 《시인을 위한 물리학》. 서울: 에코리브르. 60쪽쪽. ISBN 89-90048-78-8. 

바깥 고리

틀:인물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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