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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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혁명(科學革命, Scientific Revolution)이 일어난 16, 17세기는 서양 과학사상 특별한 시기를 획한다. 이 기간 중 기존 체제 안에서의 점진적인 발전은 찾아볼 수 없다. 낡은 과학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구조의 과학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혁명이란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뜻에서 과학혁명의 경우는 정당화된다고 하겠다. 고대와 중세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위 안에서 발전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논리적 정연성(整然性)을 특색으로 한다. 그것은 잡다한 것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을 이루고 있다. 이런 체계는 동시에 강점과 약점을 지닌다. 즉 전체로서의 정연성 때문에 세부적인 것에 의문을 품기가 어렵다. 어느 한 부분을 문제삼으면 전체가 딸려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곧 약점이 되기도 한다. 한 요소가 틀린 것이 판명되면 전체계가 무너진다. 전체적 맥락(脈絡)에서 개별적 의미를 분리할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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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탄
과학혁명은 천문학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한 요소를 의심한 데 불과하다. 다른 것은 다 그대로 두고 그 부분만 분리해서 공격하려 했으므로 수월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이 공격이 요행 성공하자,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전체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준 충격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의 파문이 전 수면에 번져가듯 역학·광학·생리학 등 각 부문에 걷잡을 수 없이 파급되었다. 이리하여 만신창이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체계는 전혀 새로운 체계로 대치되어 19세기까지 과학의 틀을 이룬다.
근대 유럽문명은 8, 9세기의 격심한 혼돈을 겪은 뒤 10세기에 출현한다. 끊임없는 만족(蠻族)의 침입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 살아남은 유일한 것은 기독교 교회였다. 이 때부터 유럽문명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교회는 국가·경제를 포함한 생활의 모든 측면을 그 통제 아래 두었다. 16세기에 이 문명의 성공은 그 근원에 대한 도전으로 바뀌고 그 결과 유럽문명은 세속화(世俗化)의 길을 걷는다.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속화를 촉진시켰다. 또한 이 때는 거대한 경제적 팽창이 진행되며 근대 자본주의가 대두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신흥 부르주아는 장원(莊園)에 토대를 둔 봉건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국왕들은 교황으로부터 정치 권력을 빼앗았다. 이런 움직임과 병행해서 일어난 근대과학은 세속화의 지적(知的) 측면이며 17세기 말까지는 유럽문명의 구심점으로서 기독교교회를 대치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성서의 몇 구절이 인용돼서 간단히 반박될 만큼 과학은 처량한 신세였는데 뉴턴에 이르러서는 성서가 과학에 의해 정당화될 정도로 과학과 기독교의 역할은 완전히 전도(顚倒)된다. 이것이 불과 1세기 반 동안에 일어난 변화임을 볼 때 과학혁명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편집] 새로운 지식관
중세에 있어 지식의 목표는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는 것이었다. 지식은 신에 의해 계시(啓示)되는 것으로서 인간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지식은 고정된 것이며 확장의 개념은 없었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우리는 지식 개념의 뚜렷한 변화를 본다. 그는 지식의 목표는 명상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함으로써 과학의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즉, 지식은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전취(戰取)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가 강조한 '힘으로서의 지식'은 물질적 편익(便益)과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구경꾼으로부터 자연의 주인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같은 지식관·자연관의 변화는 과학혁명의 주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과학혁명의 기간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과학사가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된 것은 아니지만 대개 16, 17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이 기간 중에도 과학혁명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두 해를 부각시키는 것이 좋겠다. 1543년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발간된 해이다. 이 두 책은 그 자체로는 별로 혁명적인 내용을 담지 못했으나 각각 물리과학과 생물과학에서 뒤따른 혁명의 불씨가 된 책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1687년은 '프린키피아(Principia)'로 통칭되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나온 해이다. 이 책에서 뉴턴은 갈릴레이, 데카르트, 케플러 등의 산발적인 업적을 종합하여 과학혁명을 일단 완결하는 것이다. 이 144년 동안에 과학은 근본적인 변혁을 치렀으며 주요한 진전은 17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다.
[편집] 르네상스의 반동성
과학혁명을 그에 앞선 르네상스, 종교 개혁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한 16세기 초, 유럽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잃어버린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으므로 근대보다는 낡은 세계, 즉 중세에 속한다고 보아야겠다. 더욱이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제외하고는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비슷하게 종교개혁도 종교계의 큰 변화임에 틀림없으나 새로운 종교의 탄생은 아니며 잊혀졌던 원시(原始)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의 주역 루터와 칼뱅은 똑같이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했으며 과학에 대한 이해는 가톨릭보다 더 박약했다. 따라서 버터필드의 말처럼 과학혁명은 기독교가 일어난 이래 모든 것의 빛을 잃게 했으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중세 기독교 체제 안에서의 한 에피소드, 내적변위(內的變位)에 불과한 지위로 떨어뜨렸다고 하겠다. 이렇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과거지향적인 데 비해서 과학혁명은 과감히 전통과 결별하고 전진적인 자세를 취했으므로 근대는 과학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편집] 기계적 자연개념의 확립
과학혁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 감관경험에 의한 상식을 거부하고 추상적인 이성을 채택했다. 이것은 상식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이성적인 플라톤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음을 뜻한다.
-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대치했다. 다시 말하면 과학이 수학화됐다는 것인데 역시 질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양적인 플라톤 과학에 눌렸다는 얘기다.
- 기계로서의 자연개념이 발전되었다. 즉 목적론적·유기체적 사고가 물러가고 기계적·인과론적 사고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그리스의 원자론이 부활한 것이며 모든 현상을 물질과 그 운동에 의해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의 결과로 나타났고 뉴턴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 새로운 과학적 방법이 발달했다. 베이컨은 사실 수집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도달하는 귀납적 방법(歸納的方法)을 내놓았고 데카르트는 명석하고도 판명(判明)한 진리로부터 수학적 연역(演繹)에 의해 결론을 얻으려 했다. 한편 갈릴레이는 수학과 실험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근대적인 과학적 방법을 인출해서 자연 연구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 궁극적 설명을 버리고 즉각적 기술(記術)을 택했다. 즉 왜(why)가 어떻게(how)로 바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이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그 속에 있는 형상(形相)이 고향인 땅으로 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무거운 물체가 왜 떨어지는지는 모르며 알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낙체가 떨어지되 어떻게 떨어지는가를 알아보는, 즉 가속도 측정에 있었다.
실제로 과학혁명의 기수(旗手)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데카르트, 뉴턴 등은 예외 없이 플라톤주의자들이었으며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턴은 모두 기계적 철학의 철저한 신봉자였던 것이다. 결국 과학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플라톤과 원자론자들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혁명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제이다. 과학혁명에 관한 해석은 외적 및 내적 접근으로 나누어진다. 외적 접근은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R. K .Merton)이 『17세기 영국의 과학, 기술, 사회』(1938)에서 17세기 영국에서의 과학 발전은 퓨리터니즘의 기치관과 기술, 항해, 전쟁 등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제기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의 오쿠라 긴노스케(小倉金之助)는 수학의 발전과 계급 투쟁을 연결시켰으며(1929), 구소련의 헤센(Hessen)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당시의 항해술이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씌어졌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 바 있다(1931). 갈릴레이가 대포의 탄도(彈道)문제를 해결하려고 투사체(投射體) 운동을 연구했다든지 토리첼리가 산간의 물의 흐름을 조정하기 위해 수력학(水力學)에 손댔다는 것도 비슷한 주장이다. 이 접근은 극단적 결정론의 입장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필연적 인과관계 수립은 주저하는 온건론자들 사이에 견해차이가 있으나 1930년대의 학계를 휩쓸었던 것이다.
한편, 내적접근은 소르본의 철학교수 쿠아레에 의해 시작되는 바, 그는 획기적인 저서 『갈릴레이 연구』(1939)에서 과학혁명은 외적인 조건과는 무관하게 근대과학자들의 지적(知的) 태도의 변화의 결과 일어난 것이라고 단정했다. 달라진 것은 첫째 공간의 기하학화(geometrisation del'espace)와 둘째 우주의 해체(dissolution du cosmos)이다. 우주가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중세적인 유한한 계층적(階層的) 우주가 무한한 우주로 바뀐 결과 과학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외적접근에 기울었던 학계의 대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40-50년대는 내적접근이 외적접근을 완전히 압도하게 된다.
[편집] 천재냐, 대중이냐
외적접근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종교개혁과 자본주의의 부산물로서 과학사가의 역할은 사소한 지엽적 문제의 해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내적접근에서는 과학혁명은 근세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므로 과학사의 비중은 매우 크게 되는 것이다. 과학사가들이 외적접근에 흥미를 잃게 된 것은 그것이 과학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사의 학문으로서의 독자성이 위협받는 점도 간과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 사회적 관심이 높은 젊은 과학사가들에 의해서 외적접근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역사학계에서는 해묵은 '머튼 명제(Merton 命題)'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내적접근은 과학혁명에 있어 소수의 천재들의 역할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즉 사회로부터 독립된 과학의 자율성(自律性)이 강조된다. 반면 외적 접근에서는 자본주의가 일어나면서 형성된 부르주아가 주동적인 역할을 해서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몇몇 개인이 담당한 몫은 전체적으로 볼 때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과학사학계가 이룩한 찬란한 성취는 내적접근이 기본적으로 타당함을 증명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근 부쩍 활발해진 기술사(技術史)와 과학혁명의 사회적 측면의 연구는 내적접근이 불충분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 결국 어느 한 접근을 극단으로 밀고 갈 때 불가피하게 독단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혁명은 천재들의 출현과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인 힘에 의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편집] 과학혁명의 새 해석
이렇게 본다면 과학혁명은 학자와 장인(匠人)이 힘을 합해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 이래 완전히 분리되어 별개로 발전해 온 과학과 기술의 악수로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베이컨이 응용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는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그는 건전한 지식에 참으로 공헌한 것은 철학자가 아닌 장인들의 업적이라고 하면서 과학자들에게 장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라고 권했다. 보일은 지각없는 자연학도만이 장인에게서 배우는 것을 비웃는다고 말했다. 그는 신사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뜨리고 용감하게 실험실로 뛰어들었다. 갈릴레이는 중요한 개념적 업적을 이룩했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기술적 업적을 찬양하고 새 기술에 의해 관찰, 실험의 범위를 넓히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과학혁명에서의 학자와 장인의 역할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학자들은 과학을 변혁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장인들은 변혁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주로 이론과 설명의 혁명이지만 장인들이 이를 위한 기초를 만드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본격적인 협조 내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에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