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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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

출생 1571년 12월 27일
도이칠란트 슈투트가르트 근처 바일 데어 슈타트
사망 1630년 11월 15일 (향년 58세)
도이칠란트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
거주지 바덴뷔르템베르크, 슈타이어마르크, 보헤미아, 오버외스터라이히
국적 독일의 국기 독일
분야 천문학, 점성학, 수학, 자연 철학
소속 린츠 대학
출신 대학 튀빙겐 대학
지도교수   미하엘 매스틀린
튀코 브라헤
주요 업적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케플러의 추측
종교 루터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는 독일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로,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행성운동법칙으로 유명하며, 후대의 천문학자들은 그의 저작 《신천문학》, 《우주의 조화》,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바탕으로 그 법칙을 성문화하였다. 또한 이 저작들은 아이작 뉴턴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생애 동안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신학교의 수학 선생,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조수,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의 수학 선생, 발렌슈타인 장군의 점성술사라는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광학 연구 분야의 초석을 닦았으며, 굴절 망원경의 성능을 향상시켜 개조(케플러식 망원경)했으며, 동시대의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데 공헌하였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 천문학점성술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천문학(자유 인문의 범위 내에 있는 수학의 한 가지)과 물리학(자연 철학의 한 가지) 사이에는 확고한 경계가 있었다. 그는 신이 '이성의 자연적인 빛'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적 계획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념에 차 있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그의 저술 속에 종교적 논쟁과 과학적 추론을 융합시켰다[1]. 케플러는 천문학을 보편적 수리물리학의 한 갈래로 인식함으로써 고대의 물리학적 우주론의 전통을 바꾸었고, 그의 새로운 천문학을 이른바 "천체 물리학"[2],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의 여행"[3],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보충"[4]이라고 묘사했다.[5]

목차

[편집] 초기 생애

케플러가 여섯 살때 목격한 1577년 대혜성.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바일 데어 슈타트제국도시(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슈투트가르트에 속하고 슈튜트가르트 중심부에서 30 km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시볼드는 그곳 읍의 장이었지만 케플러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불확실한 용병일로 벌이를 했고, 케플러가 5살일때 집을 나가버렸다. 하인리히는 80년 전쟁 당시 네덜란드 전선에서 사망했다고 보여진다. 여관집 딸이었던 어머니 카탈리나 굴덴만은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는데, 이로 인해 후에 마녀로 몰리게 된다. 이르게 태어난 케플러는 병약하지만 영리한 아이였다. 그는 외할아버지의 여관에 묵는 사람들을 자신의 굉장한 수학적 재능으로 놀라게 하곤 했다[6].

케플러는 6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으며, 후에 그 일을 《여섯 살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에서 "나는 1577년의 혜성에 대해 많이 들었고,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라고 회고했다[7]. 9살 때, 그는 또다른 천문학 현상, 1580년 월식을 관찰하였고, 후에 월식을 보기 위해 "밖으로 불려가서" 달이 "약간 붉은 색이 된"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8].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천문학을 알게 되었고, 평생에 걸쳐 천문학에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유년 시대에 천연두를 앓은 바람에 케플러는 병약한 신체와 불구의 손을 가지게 되었고 관측 능력에도 결함이 생겼다[9].

1589년, 초등 학교, 라틴어 중등 학교, 뷔르템베르크의 국영 개신교 신학교를 거친 뒤,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신학 학생으로 들어가 비투스 뮐러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10]. 그는 자신이 굉장한 실력의 수학도임을 증명했고 능숙한 점성술사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동년배 학생들에게 별점을 쳐주곤 했다. 미하엘 매스틀린의 지도 하에서,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관하여 프톨레마이오스설코페르니쿠스설 둘 다를 배웠다. 그는 이 시점부터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었다. 학생들 간에 토론이 벌어지면, 케플러는 이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두 관점 모두에서 지동설을 옹호했고, 태양이 우주의 원동력에 주요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11]. 목사가 되겠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공부 막바지쯤에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그라츠 대학의 전신)의 수학 천문학 선생 자리로 천거되었다. 그는 1594년 4월, 나이 23세 때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12].

[편집] 그라츠 (1594년 ~ 1600년)

[편집] 《우주구조의 신비》

《우주구조의 신비》에서 묘사된, 케플러의 플라톤의 다면체 구조 태양계 모형.

요하네스 케플러의 첫 주요 천문학 연구 《우주구조의 신비》는 코페르니쿠스설을 옹호한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편집] 바바라 뮐러와의 결혼

메달 안에 그려진 케플러 부부의 초상화

1959년 12월, 케플러는 23살의 딸 딸린 과부 바바라 뮐러를 소개받고 연애하기 시작했다. 뮐러는 전남편의 재산들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고 성공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잡스트는 케플러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결혼을 반대했다. 케플러는 할아버지의 신분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의 가난은 신분과 어울리지가 않았다. 잡스트는 케플러가 《우주구조의 신비》작업을 마치고 나자 마음이 누그러졌으나 케플러가 책 출판의 세세한 일에 신경을 쓰는 동안 약혼은 거의 파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약혼이 되도록 도왔던 교회 사람들이 뮐러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압력을 넣었고 뮐러와 케플러는 1597년 4월 27일 결혼했다[13].

결혼 초기, 케플러는 두 아이(하인리히와 수재너)를 낳았으나 둘 다 어렸을때 죽고 말았다. 1602년 그들은 딸(수재너)을 낳았고, 1604년 아들(프리드리히)을, 그리고 1607년, 아들(루트비히)를 낳았다[14].

[편집] 그라츠에서의 다른 연구들

《우주구조의 신비》의 출판과 그라츠 학교 장학사들의 찬성에 따라 케플러는 연구를 연장 및 부연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추가적으로 4개의 책을 쓰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고정된 우주의 외관(태양과 붙박이별들)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행성과 그 운동에 대한 것, 다른 것은 행성의 물리적 특성과 지리적 특징(특히 지구에 초점을 맞추어)의 구성에 대한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하늘(천국)이 지구에 미치는 대기 광학과 기상학, 점성술적인 영향에 대한 것이었다[15].

또한 그는 많은 천문학자들에게 《우주구조의 신비》를 보내 의견을 구했는데, 그 중에는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이자 튀코 브라헤의 숙적인 라이마루스 우르소도 있었다. 우르소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튀코 체계에 대한 튀코와의 논쟁에서 자신의 우선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케플러의 알랑거리는 편지들을 재출판하였다. 이러한 흑점에도 불구하고, 튀코 또한 케플러의 이론에 대한 까칠하지만 이치에 맞는 비판을 시작으로 케플러와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반대자들 중 한 명으로서 튀코는 코페르니쿠스의 부정확한 수치 데이터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 편지들을 통해, 튀코와 케플러는 월면 현상에 대한 이야기 및 코페르니쿠스설(특히 그 신학적 생존 가능성) 등 광범위한 천문학 문제들을 토론했다. 그러나 튀코의 천문대의 보다 정확한 데이터 없이 케플러는 이 많은 이슈들을 제대로 다뤄 볼 방법이 없었다[16].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과 〈조화〉, 즉 음악과 수학과 물리학계의 수비학적 관계와 점성학적 중요성으로 관심을 돌렸다. 지구가 영혼(후에 태양이 어떻게 행성운동의 원인이 되는지 설명하려고 했을 때 케플러가 사용한 도구)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점성술적 아스펙트와 천문학적 거리를 날씨와 다른 지구의 현상들에 결합하여 불확실한 체계를 확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599년, 사용 가능한 데이터들의 부정확함으로 인해 케플러는 또다시 자기 연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마침 이럴 때 심해진 종교적 불안도 그라츠에서 케플러가 계속 일하는 것을 위협했다. 그 해 12월, 튀코가 케플러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1600년 1월 1일(초대장을 받기도 전에), 케플러는 튀코의 후원이 있다면 이 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프라하로 출발했다[17].

[편집] 프라하 (1600년 ~ 1612년)

[편집] 튀코 브라헤와의 연구

튀코 브라헤의 흉상

1600년 4월 4일,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 프란츠 텡나겔롱고몬타누스를 튀코의 새 관측소가 세워지던, 프라하에서 ~50 km 정도 떨어진 장소인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 서 만났다. 다음 두달 이상 그는 손님으로 머물렀고, 튀코의 화성 관측의 일부를 분석했다. 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철저히 극비에 부쳤지만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동을 받아 곧 자료 입수를 허락했다. 케플러는 자기 저서 《우주구조의 신비》에서의 이론을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에 기반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이 작업은 2년이나 걸릴 것이었다(자료 사용을 위한 자료 복사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하네스 예세니우스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정규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튀코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격한 싸움 끝에 깨지고, 4월 6일 케플러는 프라하로 가버렸다. 케플러와 튀코는 곧 화해하고 마침내 봉급과 주거 생활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6월, 케플러는 가족들을 데리러 그라츠의 집으로 돌아갔다[18].

그라츠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이 튀코에게 바로 돌아가겠다는 케플러에게 물을 끼얹었다. 천문학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희망으로, 케플러는 페르디난드 대공의 수학자로 임용되기를 시도했다[19].

1600년 8월 2일,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뒤 케플러 가족은 그라츠에서 추방당했다. 몇달 뒤 돌아온 케플러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떠났다. 튀코는 케플러에게 행성의 관측 결과를 분석하고 튀코의 (이제는 고인이 된) 경쟁자 우르소에게 불리한 내용의 논문을 쓰는 일을 시켰고, 1601년의 대부분 동안 케플러는 튀코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다. 9월, 튀코는 에라스무스 라인홀드의 《프로이센 목록》을 대체하기 위해 황제에게 제출한 새로운 프로젝트 《루돌핀 목록》의 공동 작업자로 케플러를 임명했다. 1601년 10월 24일, 튀코가 어이없게 사망했다[20]. 이틀 뒤, 케플러는 튀코의 미완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한 책임을 지고 튀코의 후임으로 황실 수학자로 임명되었다. 케플러는 튀코의 유족들 소유로 되어 있는 관측 결과들을 불법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로서 튀코의 자료들을 사용하기 위해 저작권을 협상하느라고 두개의 작업물의 출판이 4년이 지체되었다. 케플러는 그 뒤 11년 동안 황실 수학자로서, 자기 일생 중 가장 생산적으로 지냈다[21].

[편집]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2세

궁정 수학자로서 케플러의 주요 업무는 황제에게 별점을 쳐주는 일이었다.

[편집]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에 실린 눈의 구조에 대한 한쪽 삽화.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를 분석하기도 계속하면서 케플러는 — now available to him in their entirety — 《루돌핀 목록》 목록화의 느린 과정을 시작했다. 또한 케플러는 1600년의 달에 대한 논문에서 광학 법칙을 연구하였다. 월식일식 모두 예상치 못한 그림자의 크기, 개기 월식때 붉게 물드는 달, 개기 일식 때 태양을 둘러싼 이상한 빛 등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생각되었다[22].

[편집] 1604년 초신성

1604년 10월, 새로운 밝은 항성(SN 1604)이 나타났지만 케플러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케플러는 그 항성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했다. 점성술적으로, 1603은 수상궁의 시작과 그리고 약 800년 주기의 위대한 합(목성과 토성의 합)의 시작으로 지정되었다. 점성가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의, 그런 종류의 기간을 샤를마뉴의 등장, (약 8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약 1600년 전)과 관련시켰고, 그래서 황제와 같은 위대한 존재의 사건을 기대했다. 케플러가 2년 뒤에 이 새로운 항성을 자기 저서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에서 기술한 것은 황제를 위한 황실 수학자이자 점성술사로서 이러한 정황을 따른 것이었다. 케플러는 많은 점성술적 순환 해석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항성의 천문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항성의 광도가 점차 약해지는 것, 항성의 기원에 대한 추측, 그리고 사용된 관측 시차의 부족으로 인한 그 항성이 고정된 별의 영역에 있었다는 논쟁, 더 나아가서 하늘(천국)의 불변성(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어져 온 천구가 완벽하고 불변하다는 생각) 교리에 대한 의심 등을 기록했다. 새로운 항성의 탄생은 곧 하늘(천국)의 변화성을 암시했다. 또한 케플러는 부록에서 최근의 라우렌티우스의 연대학 작업을 검토하였다. 케플러는 그것을 계산하였고, 만약 4년 뒤의 예정이 용인된다는 라우렌티우스가 옳았다면, 새로 생겨난 항성과 유사한 베들레헴의 별은 이전의 800년 주기에 있는 최초의 위대한 합과 동시에 일어났어야 했다[23].

뱀주인자리의 발치에 N자로 표시된 '스텔라 신성'의 위치 (왼쪽부터 4째칸, 위쪽부터 8째줄).

[편집] 《신천문학》

먼저의 두 행성운동법칙을 거쳐 《신천문학》(Astronomia nova)에서 절정에 달한 연구의 확장은 튀코의 지도 하에 화성의 궤도에 관한 분석적 검토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기 이론에서 무시했던 수학적 요소인 상응점을 이용하여, 케플러는 화성 궤도의 여러 근사치를 계산하고 계산하고 또 계산하여 마침내 튀코의 관측 결과와 2(평균적인 측정 오류) 범위 내에서 거의 일치하는 모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는 이 부정확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형이 특정 지점에서는 관측 결과와 8분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전통적인 수학적 천문학 방법의 광범한 정렬을 따랐다가 실패하자 관측 결과에 타원 궤도를 대입하는 데 착수했다[24].

지구중심설에 바탕한 화성의 역행 운동 궤도 그림. 《신천문학》 1장, 1611년.

케플러는 우주를 종교적인 관점으로, 태양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며 태양계 기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케플러는 《자석에 관해서》(1600년)에 나온 지구의 자기적에 대한 윌리엄 길버트의 이론과 광학에 유추하여 자신의 연구를 이끌어 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에 가깝고 멀리 갈수록 운동이 빨라지고 느려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힘(또는 움직이는 생명)[25]이 태양에 의해 퍼져나가며, 멀어질수록 약화된다고 생각했다[26][27]. 이 가정은 천문학적 체계를 부활시킬 수학적 관계를 수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원일점과 지구와 화성의 근일점 측정에 바탕하여 행성의 운동 비율은 태양까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알아냈다. 궤도 주기를 통해 이 관계를 입증했지만, 이는 대규모의 계산을 필요로 했다. 이 작업을 단순화하기 위해 1602년 말에 케플러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계산을 다음과 같이 재공식화했다.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 이것이 제 2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이었다[28].

그러고 나서 케플러는 기하학적 비율법을 사용하여 화성의 전체 궤도 계산에 착수하고 알모양의 궤도를 확신했다. 거의 40여번에 달하는 실패 끝에, 마침내 1605년 초에 케플러는 전대의 천문학자들이 못 보고 지나쳐 해답이 되기에는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한 타원에 대한 생각을 우연히 떠올렸다. 타원형의 궤도가 화성 관측 자료에 들어맞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이것이 제 1법칙, 타원궤도의 법칙이었다. 케플러는 계산할 때 조수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화성 외의 천체에도 수학적 분석을 하지는 않았다. 그해 말경, 그는 《신천문학》의 원고를 완성했으나, 튀코의 관측 결과를 사용한 것에 대한 튀코의 유족들과의 법적 분쟁으로 인해 1611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29].

[편집] 《굴절광학》, 《꿈》 원고와 다른 작업들

프라하의 오래된 카를로바 거리. 케플러가 프라하 시절에 살았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신천문학》이 완성됨에 따라, 여러 해 동안 케플러의 연구 중 대부분은 《루돌핀 목록》의 준비와, 목록에 바탕한 추산 위치표(행성과 항성의 위치에 대한 예측)의 포괄적인 집합에 맞춰져 있었다(하지만 많은 해가 지나도 둘 다 완성되지 않았다). 또 케플러는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안토니오 마치니와 협력하려고 시도했는데, 이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케플러의 작업중 몇은 연대학(특히 예수가 살던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의 날짜 기입)과 점성학(특히 대참사에 관한 연극 같은 예언을 하는 로슬린 등의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루어졌다[30].

케플러와 로슬린은 서로간에 출판물에서의 공격과 역습에 휘말렸고, 그 동안 치료사 필리프 베살리우스가 점성술(그 중에서도 특히 로슬린의 것)을 완전히 무시한 저작을 출판했다. 케플러는 무절제한 점성술과,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거부 반응을 목격하고는 여기에 응하여 《제삼자의 개입》(Tertius Interveniens)[31]을 준비했다. 이 작업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반목하는 학자들간의 중립적 중재였지만, 그 뿐 아니라 행성과 인간의 영혼간에 상호 작용의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을 포함한 점성술의 가치에 대한 케플러의 총체적인 관점도 제시하고 있다[32].

1610년의 케플러 초상화. 그린이는 미상.
케플러 생가 내부.

1610년 첫째 달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강력한 신형 망원경을 이용하여 목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4개의 위성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오, 에우로파를 발견하였다.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별세계의 사자〉라는 뜻)를 출판하면서 자기 관측 결과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해 케플러의 의견을 구하였다. 케플러는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를 통해 매우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그는 갈릴레오의 관측을 보증하였고, 갈릴레오의 발견이 뜻하고 암시하는 바와 망원경 이용의 추측 범위를 우주론과 점성술 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광학에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해가 지나고, 케플러는 갈릴레오에게 더 나아간 지지를 제공하기 위해 달에 대한 망원경 관측을 가지고 《목성의 위성에 대한 해설》(Narratio de Jovis Satellitibus)을 출판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신천문학》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케플러는 실망하였다[33].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 케플러도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하여 광학 망원경에 대한 이론상·실험상의 연구를 시작했다[34]. 그 결과로서 1610년 9월에는 《굴절광학》( Dioptrice)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1611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양면 볼록 렌즈로 된 수렴 렌즈양면 오목 렌즈로 된 발산 렌즈에 대한 이론적 근거, 또 이 렌즈들이 어떤 작용으로 갈릴레오식 망원경을 구성하는지의 원리, 실상허상의 개념은 물론이고, 똑바로 된 상과 거꾸로 뒤집힌 상, 그리고 확대 및 축소에 따른 초점 거리의 결과까지 설명했다. 또한 케플러는 볼록 렌즈 두장을 사용하여 갈릴레오의 볼록 렌즈 - 오목 렌즈 결합보다 높은 배율을 낼 수 있는 향상된 성능의 망원경을 제시하였는데, 이 형태의 망원경이 오늘날 천체 망원경 또는 케플러식 망원경이라고 불리우고 있다[35].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에 실려 있는 도해 중 하나. 케플러의 추측에 대한 삽화이다.

1611년을 전후하여, 케플러는 《》(Somnium)으로 (사후에) 출판될 원고를 배포하고 다녔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와중에 사라져 버린 이 원고는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우화였고, 부분적으로 자전적이었으며, 부분적으로 행성간 여행에 대한 논문이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과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36]. 후일, 소설 속 화자의 어머니가 악마들과 어울려 지내다 우주 여행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부분으로 인한 왜곡된 이야기들은 케플러의 어머니가 마녀 재판에 끌려가는 결과를 낳았는데, 결국 무죄가 입증되고 나자 케플러는 이야기에 과학적 정보(특히 월면 지리학에 관한)는 물론, 이야기의 속뜻이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까지 설명하는 223개의 주석을 달았는데, 본문보다도 길었다[37].

그해 새해 선물로 케플러는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 마태우스 바커 폰 바켄펠스 남작을 위해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Strena Seu de Nive Sexangula)라는 제목의 짧은 소논문을 지었다. 이 소논문에서 케플러는 눈송이의 육방정계 구조를 연구하고, 대칭에 대한 가설상의 원자론적인 물리적 근거로 해석했으며, 를 포장하는 가장 능률 좋은 배열 방법에 대한 추측도 내포했다. 이것이 후에 케플러의 추측이라고 알려진 것이다[38].

[편집] 개인적, 정치적 문제

1611년, 프라하의 정치·종교적 불안은 곪아 터질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후원자 루돌프 황제는 동생 마티아스의 강요에 의해 보헤미아 왕의 자리를 포기했다[39]. 또한 그 해에 아내 바바라가 홍반열에 걸려, 졸줄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바라가 회복되어 갈 즈음, 세 자식들이 모조리 천연두에 걸려,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아들이 죽자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와 파두아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뷔르템베르크의 튀빙겐 대학교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협화신조에 배치되는 케플러의 칼뱅주의적 반대론을 염려하여 케플러의 귀환을 방해했다. 파두아 대학교 에서는 떠난 갈릴레오의 추천으로 케플러를 빈 수학 교수 자리에 보충으로 쓰려고 했으나, 오히려 케플러는 도이칠란트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해서 교사 자리를 마련하고 린츠의 구역 수학자가 되려고 오스트리아까지 여행을 했다. 그러나 바바라의 병이 재발했고, 케플러가 돌아온 직후 사망했다[40].

케플러는 린츠로의 이사를 연기한 뒤 정치적 대변동, 종교적 불안, 가정의 비극(아내의 유산에 대한 법적 분쟁)에다가, 더이상 연구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612년 초에 루돌프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프라하에 잔류했다.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 원고 《전원시의 역사》를 초기의 연구와 조화되도록 결합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마티아스가 계승한 뒤, 케플러의 궁정 수학자로서 지위와 급료는 재확인되었지만, 린츠로 옮겨 가도록 허가가 내려졌다[41].

[편집] 린츠 (1612년 ~ 1630년)

린츠의 케플러 동상.

린츠에서 케플러의 주요한 일이라고는 지역 학교 수업과 점성술을 해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처음 몇년간 그는 신학적 의심 때문에 루터교회에 의해서 성찬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프라하에서의 시절에 비해 재정적 안전과 종교적 자유를 누렸다. 린츠에서의 첫 저서는 예수 탄생에 대한 1613년의 확장된 논문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신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De vero Anno, quo aeternus Dei Filius humanam naturam in Utero benedictae Virginis Mariae assumpsit)였다. 또한 그는 그레고리오 교황개량 달력을 도이칠란트의 신교 국가들에서 받아들일지의 심의에도 참여했다. 또한 그 해 그는 포도주 통과 같은 용기의 부피를 측정하는 영향력 있는 수학 논문 《술통의 부피를 재는 새로운 방법》(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을 썼으나 1615년까지는 출판되지 않았다[42].

[편집] 재혼

1613년 10월 30일, 케플러는 24살의 수재너 로이팅어와 결혼했다. 바바라의 죽음 이후, 케플러는 결혼 상대를 11번이나 고르다가 다섯 번째 선 상대였던 로이팅어와 결혼했다. 케플러는 로이팅어를 "겸허한 성실, 살림 솜씨, 근면함, 그리고 의붓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이겨낸 여자"라고 하였다[43]. 이번 결혼 초에 얻은 세 아이들(마르가레타 레기나, 카탈리나, 세발트)은 모두 어렸을때 죽고 말았다. 후의 세 아이들(1621년생 초르둘라, 1623년생 프리드마르, 1625년생 힐데베르트)은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케플러의 전기작가에 따르면, 그의 재혼은 첫 결혼보다 훨씬 행복했다고 전해진다[44].

[편집]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그리고 어머니의 마녀 재판

《신천문학》의 완성 이후로, 케플러는 천문학 책을 만들려는 작정이었다[45]. 1615년, 그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처음 세 권을 완성했고, 이후 4권은 1620년에, 그리고 5 ~ 7권은 1621년에 출판되었다. 지동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케플러의 이 책은 그의 타원궤도의 법칙의 결정판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는 케플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업이 되었다. 이 책은 행성운동의 세 법칙의 모든 것을 품고 있었으며 천체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46]. 그러나 이 책은 앞의 두 행성운동법칙을 노골적으로 달과 목성의 주요 위성들에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타원형 궤도가 관측 데이터로부터 결론지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47].

《루돌핀 목록》과 관련된 추산 위치표의 속편으로 케플러는 점성술 달력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매우 인기가 있어 다른 연구를 하는 데의 비용을, 특히 황실 금고에서의 임금이 세금 공제되었을 때 벌충해 주었다. 1617년에서 1624년까지의 6년간 케플러는 이 달력에서 행성의 위치와 날씨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건까지 예측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인들과 신학적 긴장에 대한 케플러의 통렬한 이해 때문에 후자의 경우는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고 기민하게 예측하였다. 그러나 1624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되어가는 긴장과 예언의 모호함은 케플러 자신에 대한 정치적 곤란을 의미했다. 그라츠에서는 케플러의 달력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48].

1615년, 케플러의 형제 크리스토프와 금융적으로 분쟁 관계에 있던 우르슐라 라인골드라는 여자가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사악한 술수로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주장했다. 분쟁이 고조되었고, 1617년에 카타리나는 마녀로 의심받게 되어 함밤중에 빨래 통에 처박혀 끌려갔다[49]. 이 당시 중부 유럽에서 마녀 재판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일이었다. 1620년 8월 초부터 카타리나는 이후 14개월 동안 투옥당했다. 그러나 고발자들은 케플러의 《꿈》에 나오는 약품을 혼합하고 데몬을 사역하여 그 도움을 받는 여자에 대한 왜곡된 헛소문 외에 어떤 확실한 물증도 없었다. 거기다 서둘러 뷔르템베르크로 달려온 케플러가 주민들이 걸린 질병 등의 과학적 이유를 찾으려 동분서주했고, 카타리나는 1621년 10월에 석방되었다[50].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케플러는 "조화 이론"에 대한 연구를 뒤로 미루었는데, 이 연구의 결과물이 1619년 출판된 《우주의 조화》 (Harmonices Mundi)이다[51].

[편집] 《우주의 조화》

《우주의 조화》에 실린 정입방체의 기하학적 조화.
이 부분의 본문은 우주의 조화입니다.

케플러는 기하학에 감명을 받아 "기하학적 물체가 전 우주의 모형을 떠오르게 하였다"고 했다[52]. 《우주의 조화》에서 케플러는 자연계, 특히 천문학적, 점성학적인 면에서의 자연계의 조화를 음악적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우주의 조화》의 중심 설정은 피타고라스, 프톨레미 등 많은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연구했던 〈천체의 음악〉이나 〈천상의 음악〉 이었는데, 《우주의 조화》의 출판 직후에 케플러는 비슷한 때에 독자적으로 조화 이론을 출판했던 로버트 플루드와 선취권 논쟁에 휩싸였다[53].

케플러는 케플러의 다면체라고 알려진 형태들까지 포함하여 정다각형정다면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케플러는 자신의 조화 분석을 음질에서 기인하는 조화가 천체의 영혼에 의해 만들어지며, 점성술의 경우에는 이 음질과 인간의 영혼이 상호작용한다고 음악, 기상학, 점성술에까지 확장했다. 연구의 마지막 부분(제5권)에서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대해 특히 궤도 진입 최저 속도와 태양에서의 궤도 거리의 관계를 다루었다. 비슷한 관계들은 다른 천문학자들도 사용한 바 있지만 케플러는 티코의 관측 자료와 자신의 천문학 이론으로 훨씬 더 정밀하게 다루었으며 물리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54].

다른 많은 조화 가운데 케플러는 오늘날 행성운동의 제3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것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는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라는 것을 (거의) 발견하기까지 많은 조합들을 시도했다. 그러나 천체역학의 넓은 의미에서 이 순수한 운동학적 법칙은 1660년대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원심력에 대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새로운 법칙이 결합되어, 이 법칙은 아이작 뉴턴, 에드먼드 핼리크리스토퍼 렌로버트 훅이(아마도) 태양과 그 행성들 간의 중력적 인력이 그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추측을 독립적으로 증명하도록 도와주었다[55].

[편집] 《루돌핀 목록》 그리고 말년

《루돌핀 목록》의 권두화. 케플러 자신 이전의 위대한 천문학자 히파르쿠스, 프톨레미, 튀코를 기념하는 내용이다.

1623년, 마침내 케플러는 그 당시 그의 주요 저서로 여겨진 《루돌핀 목록》을 완성했다. 그러나 황제의 출판 요구와 튀코 브라헤의 유족들과의 합의 때문에 1627년까지 인쇄되지 못했다. 그동안의 종교적 긴장 상태 — 30년 전쟁의 근원 — 는 다시 한번 케플러 가족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1625년, 가톨릭 개혁자들은 케플러의 장서들을 봉인해 버렸으며, 1626년에는 린츠 시가 공격당해 케플러는 그가 《루돌핀 목록》의 인쇄물을 자비로 편집하던 울름으로 옮겨갔다[56].

발렌슈타인 장군에게 헌정한 케플러의 천궁도

1628년, 발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황제 군대의 승리에 따라, 케플러는 발렌슈타인의 점성사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발렌슈타인의 점성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케플러는 천문학적 계산을 발렌슈타인의 점성사들에게 공급해 주었고 때때로는 자신이 점성을 하기도 했다. 말년, 케플러는 여행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프라하에서부터 린츠로 울름으로 자간으로, 마침내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했다.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케플러는 병이 들었다. 케플러는 1630년 11월 15일 사망하였고 그곳에 묻혔다. 구스타프 아돌프 왕의 군대에 의해 묘지가 파괴되어 그의 무덤은 훼손되고 말았다[57].

[편집] 케플러의 이론에 대한 평가

고전역학
역사 ...

케플러의 법칙이 바로 인정받지는 않았다. 갈릴레오나 르네 데카르트 같은 석학들마저 케플러의 《신천문학》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케플러의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을 포함한 천문학자들은 케플러가 물리학을 천문학에 대입하려던 시도를 마땅찮게 여겼다[58][59][60].

몇 명의 천문학자들은 케플러의 이론을 천문학적 관측에 대하여 다양한 변형을 하여 시험해 보았다. 금성수성의 정상적으로 관측될 수 없는 상황 하에 이 두 행성의 두 번의 일면통과로 이론의 민감한 점을 시험할 수 있었다. 1631년 11월 7일수성 일면통과의 경우에 케플러는 수성에 대한 변수가 극단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일면통과 예정일보다 일찍 찾아보라고 관측자들에게 충고했다. 피에르 가상디는 예정된 날짜에 일면통과를 관측했으며, 이는 케플러의 예측에 대한 확증이 되었다[61]. 이 관측은 최초의 수성 일면통과 관측이었다. 그러나 금성 일면통과 관측 시도는 거의 한달 뒤였고, 《루돌핀 목록》의 부정확에 기인하여 실패했다. 가상디는 당시 금성 일면통과가 파리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62]. 1639년 금성 일면통과를 관측한 제레미아 호럭스는 케플러의 모형의 변수를 조절하기 위해 자기의 관측 결과를 사용했으며, 일면통과 관측을 위한 기계장치를 만들었다. 그는 케플러의 학설을 옹호하는 단체를 남겼다[63][64][65].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는 유럽 구석구석의 천문학자들에게 읽혀졌고, 케플러의 죽음 이후 케플러의 아이디어들을 확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1630년과 1650년 사이에, 이 책은 천문학 교본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천문학의 기반을 타원궤도로 전환시켰다[66].

[편집] 역사적·문화적 영향

프라하에 있는 케플러와 튀코의 기념비.
케플러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서독의 우표.

케플러는 천문학과 자연철학의 역사적 발전에서의 역할 외에도 과학철학과학의 사학사에서 매우 중대한 인물이다. 케플러와 그의 운동 법칙은 장 몽투클라의 《수학의 역사》(1758년)와 장밥티스트조지프 들랑브르의 《근대 천문학의 역사》(1821년) 같은 초기 천문학 사학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계몽주의 사고방식으로 쓰여진 사서들은 무신론·불신자들과의 케플러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을 다루었지만, 후의 낭만적 자연철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케플러의 성공에 중심을 두고 생각했다. 윌리엄 휴얼은 자기 저서 《귀납적 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1837년)에서 케플러를 귀납적인 과학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휴얼은 이후 《귀납적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1840년)에서는 과학적 방법이 가장 진보된 형태의 화신으로 케플러를 치켜올렸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케플러의 원고들(예카테리나 대제가 구입했었다)을 최초로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아펠트는 케플러를 과학 혁명의 열쇠로 확신했으며, 케플러의 수학 연구와 그의 심미적인 감수성, 통합된 사고 시스템의 일부로서의 신학, 그리고 그의 물리학적 아이디어를 보고 케플러의 인생과 연구를 최초로 확장해 분석하였다[67].

케플러의 저작들의 현대의 번역서들이 19세기 후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 출현했다. 케플러 전집의 조직적인 출판이 1937년에 시작되어 21세기 초기에 완성에 가까워졌으며, 막스 카스파의 케플러 일대기는 1948년에 출판되었다[68]. 한편,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케플러를 다룬 저작은 아펠트의 뒤에, 케플러의 우주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주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쿠아레를 비롯하여 많은 과학사 분야의 제1세대 전문가들은 〈과학 혁명〉이라는 개념을 과학사의 중심 사건으로, 케플러는 그 혁명의 중심 인물로 묘사하였다[69].

과학 혁명에서 케플러의 위치에 대한 논쟁으로, 철학적이고 대중적인 평가들은 매우 다양해졌다. 관련 서적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아서 쾨슬러의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 1959년)에서 케플러는 의심할 나위 없는 과학 혁명의 영웅(지성적인 면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신학적으로도)으로 그려진다[70]. 찰스 샌더스 퍼스, 노우드 러셀 핸슨, 스티븐 툴민, 칼 포퍼 등의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들은 재삼재사 케플러를 연구하는데, 예를 들자면 통약불가능성, 유추적 추론, 반증의 가능, 그 외에도 많은 철학적 개념들이 케플러의 연구들에서 발견된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분석심리학과 과학 수사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에 케플러와 로버트 플러드 사이에 있던 선취권 분쟁을 이용했다[71]. 존 반빌의 가공의 역사 소설 《케플러》(Kepler, 1981년)는 쾨슬러의 논픽션 내러티브의 자세한 기술과 과학철학의 많은 테마들을 답사하였는데[72], 이것보다 더욱 가공적인 것은 최근의 논픽션인 《하늘의 음모》(Heavenly Intrigue, 2004년)로, 케플러가 튀코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 튀코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73].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많은 역사적 유산을 남긴 케플러는 가장 유명한 은제 기념 주화 중 하나인 10유로 요하네스 케플러 은화의 모티프가 되었으며, 이 기념 주화는 2002년 9월 10일에 주조되었다. 은화의 뒷면에는 한때 그라츠와 주변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케플러의 초상화가 있다. 케플러는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에겐베르그 성의 축조에 관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화 앞면에는 이 에겐베르그 성이 그려져 있다. 은화의 케플러 앞에는 《우주구조의 신비》에 나오는 구와 다면체가 겹쳐진 모형이 그려져 있다.

2009년, 미국 항공우주국은 케플러의 천문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우주 망원경에 케플러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케플러 계획이다[74].

뉴질랜드의 피오르랜드 국립 공원에는 케플러의 이름이 붙은 산맥이 있는데, 케플러 산맥이라고 불리며, 산맥을 관통하는 산책로 이름 역시 케플러 트랙이다.

이렇듯, 이제 케플러는 과학의 현대화와, 그 이전의 인물들의 아이콘이자, 대중적인 이미지로서 자리잡았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라고 평가했다[75].

[편집] 저작

  • 우주구조의 신비》 (1596년)
  •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1604년)
  •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 (1604년)
  • 신천문학》 (1609년)
  • 《제3자의 개입》 (1610년)
  •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 (1610년)
  • 《굴절광학》 (1611년)
  •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 (1611년)
  •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신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 (1613년)
  • 《전원시의 역사》 (1615년,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와 동시 출판)
  • 《신입체기하학》 (1615년)
  •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1618년 ~ 1621년)
  • 우주의 조화》 (1619년)
  • 우주구조의 신비》 제 2판 (1621년)
  • 루돌핀 목록》 (1627년)
  • 》, 일명 솜니움 (1634년)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케플러의 이름이 붙여진 것들

월면 크레이터 '케플러'

[편집] 대중문화의 케플러

[편집] 음악

[편집] 소설

  • 존 반빌의 1981년 소설 《소설 케플러》

[편집] 영화

  • 프랑크 보겔 감독의 1974년 도이칠란트 영화 《요하네스 케플러》.
  • 케플러루돌프 2세에 관한 1989년 영화 《První sekunda》.
  • 라이언 주넬 감독의 2004년 40분짜리 단편 영화《Unseen forces》.

[편집] 텔레비전

[편집] 주석

  1. 베커와 골드스타인, 〈케플러 천문학의 신학적 기초〉, 112쪽 ~ 113쪽
  2. 케플러, 《신천문학》의 표제지, 도너휴, 26쪽 ~ 27쪽
  3. 케플러, 《신천문학》, 48쪽
  4. 서양의 위대한 책들》의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16권, 845쪽
  5. 스티븐슨, 《케플러의 천체물리학》, 1쪽 ~ 2쪽; 피터 디어, 《Revolutionizing the Sciences》, 74쪽 ~ 78쪽
  6. 카스파, 《케플러》, 29쪽 ~ 36쪽; 코너, 《케플러의 마녀》, 23쪽 ~ 46쪽
  7. 세이건, 칼, 앤 드루얀. 혜성 (한국어). 해냄출판사, 460쪽.
  8. 쾨슬러, 《몽유병자들》, 234쪽, translated from Kepler's family horoscope
  9. 카스파, 《케플러》, 36쪽 ~ 38쪽; 코너, 《케플러의 마녀》, 25쪽 ~ 27쪽
  10. 제임스 A. 코너, 《케플러의 마녀》 (2004년), 58쪽
  11. 로버트 S. 웨스트만, 《저널 포 더 히스토리 오브 애스트로노미》 32호 〈케플러의 물리학-점성학적 문제〉 (2001년) 227쪽 ~ 236쪽
  12. 카스파, 《케플러》, 38쪽 ~ 52쪽; 코너, 《케플러의 마녀》, 49쪽 ~ 69쪽.
  13. 카스파, 《케플러》, 71쪽 ~ 75쪽
  14. 코너, 《케플러의 마녀》, 89쪽 ~ 100쪽, 114쪽 ~ 116쪽; 카스파, 《케플러》, 75쪽 ~ 77쪽
  15. 카스파, 《케플러》, 85쪽 ~ 86쪽
  16. 카스파, 《케플러》, 86쪽 ~ 89쪽
  17. 카스파, 《케플러》, 89쪽 ~ 100쪽
  18. 카스파, 《케플러》, 100쪽 ~ 108쪽
  19. 카스파, 《케플러》, 108쪽 ~ 111쪽
  20. 연금술을 하다가 중금속에 중독되었다는 설도 있고,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21. 카스파, 《케플러》, 111쪽 ~ 122쪽
  22. 카스파, 《케플러》, 142쪽 ~ 146쪽
  23. 카스파, 《케플러》, 153쪽 ~ 157쪽
  24. 카스파, 《케플러》, 123쪽 ~ 128쪽
  25. On motive species, see: Lindberg, "The Genesis of Kepler's Theory of Light," 38쪽 ~ 40쪽
  26. "Kepler's decision to base his causal explanation of planetary motion on a distance-velocity law, rather than on uniform circular motions of compounded spheres, marks a major shift from ancient to modern conceptions of science.... [Kepler] had begun with physical principles and had then derived a trajectory from it, rather than simply constructing new models. In other words, even before discovering the area law, Kepler had abandoned uniform circular motion as a physical principle." Peter Barker and Bernard R. Goldstein, "Distance and Velocity in Kepler's Astronomy", Annals of Science, 51 (1994): 59-73, at p. 60.
  27. 쿠아레, 《천문학적 혁명》, 199쪽 ~ 202쪽
  28. 카스파, 《케플러》, 129쪽 ~ 132쪽
  29. 카스파, 《케플러》, 131쪽 ~ 140쪽; 쿠아레, 《천문학적 혁명》, 277쪽 ~ 279쪽
  30. 카스파, 《케플러》, 178쪽 ~ 181쪽
  31. 원래 제목은 《Tertius Interveniens, das ist Warnung an etliche Theologos, Medicos vnd Philosophos, sonderlich D. Philippum Feselium, dass sie bey billicher Verwerffung der Sternguckerischen Aberglauben nict das Kindt mit dem Badt aussschütten vnd hiermit jhrer Profession vnwissendt zuwider handlen》이다
  32. 카스파, 《케플러》, 181쪽 ~ 185쪽
  33. 카스파, 《케플러》, 192쪽 ~ 197쪽
  34. 쾨슬러, 《몽유병자들》 384쪽
  35. 카스파, 《케플러》, 198쪽 ~ 202쪽
  36. 세이건, 《코스모스》 한국어 번역 완전판, 117쪽
  37. 리어, 《케플러의 꿈》, 1쪽 ~ 78쪽
  38. Schneer, 〈Kepler's New Year's Gift of a Snowflake〉, 531쪽 ~ 545쪽
  39. 카스파, 《케플러》, 202쪽 ~ 204쪽
  40. 코너, 《케플러의 마녀》, 222쪽 ~ 226쪽; 카스파, 《케플러》, 204쪽 ~ 207쪽
  41. 카스파, 《케플러》, 208쪽 ~ 211쪽
  42. 카스파, 《케플러》, 209쪽 ~ 220쪽, 227쪽 ~ 240쪽
  43. Quotation from Connor, Kepler's Witch, p 252, translated from an October 23, 1613 letter from Kepler to an anonymous nobleman
  44. 카스파, 《케플러》, 220쪽 ~ 223쪽; 코너, 《케플러의 마녀》, 251쪽 ~ 254쪽
  45. 카스파, 《케플러》, 239쪽 ~ 240쪽, 293쪽 ~ 300쪽
  46. Gingerich, "Kepler, Johannes" from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302쪽 ~ 304쪽
  47. Wolf, A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Philosophy, 140쪽 ~ 141쪽; Pannekoek, A History of Astronomy, 252쪽
  48. 카스파, 《케플러》, 239쪽, 300쪽 ~ 301쪽, 307쪽 ~ 308쪽
  49. 세이건, 칼.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홍승수: 코스모스, 완전판 (한국어), 사이언스북스, 117쪽.
  50. 세이건, 칼.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홍승수: 코스모스, 완전판 (한국어), 사이언스북스, 120쪽.
  51. 카스파, 《케플러》, 240쪽 ~ 264쪽; 코너, 《케플러의 마녀》, 1장, 11장 ~ 13장; 리어, 《케플러의 꿈》, 21쪽 ~ 39쪽
  52. 카스파, 《케플러》, 265쪽 ~ 266쪽, 《우주의 조화》에서 번역한 인용구
  53. 카스파, 《케플러》, 264쪽 ~ 266쪽, 290쪽 ~ 293쪽
  54. 카스파, 《케플러》, 266쪽 ~ 290쪽
  55. 웨스트팔, 《Never at Rest》, 143쪽, 152쪽, 402쪽 ~ 403쪽; 툴민과 굿필드, 《The Fabric of the Heavens》, 248쪽; De Gandt, 〈Force and Geometry in Newton's Principia〉, 제2장; 울프,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Philosophy, 150쪽; 웨스트팔, 《The Construction of Modern Science》, 제7 ~ 제8장
  56. 카스파, 《케플러》, 308쪽 ~ 328쪽
  57. 카스파, 《케플러》, 332쪽 ~ 351쪽, 355쪽 ~ 361쪽
  58. For a detailed study of the reception of Kepler's astronomy see Wilbur Applebaum, "Keplerian Astronomy after Kepler: Researches and Problems," History of Science, 34(1996): 451-504.
  59. 쿠아레, 《천문학적 혁명》, 362쪽 ~ 364쪽
  60. 노스, 《천문학과 우주론의 역사》, 355쪽 ~ 360쪽
  61. 앨버트 반 헬덴, 〈1631년 수성 일면통과의 중요성〉, 《천문학사에 대한 저널》, 7호 (1976년): 1쪽 ~ 10쪽.
  62. HM Nautical Almanac Office (2004년 06월 10일). 1631 Transit of Venus (mdy). 2006년 8월 28일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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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노스, 《천문학과 우주론의 역사》, 348쪽 ~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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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징거리치, "Kepler, Johannes" from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302쪽 ~ 304쪽
  67. Jardine, 〈쿠아레의 케플러/케플러의 쿠아레〉, 363쪽 ~ 367쪽
  68. 징거리치, 카스파의 《케플러》 서설, 3쪽 ~ 4쪽
  69. Jardine, 〈쿠아레의 케플러/케플러의 쿠아레〉 367쪽 ~ 372쪽; 샤핀, 《과학 혁명》, 1쪽 ~ 2쪽
  70. 스티븐 툴민, 《몽유병자들》 서평, 《The Journal of Philosophy》 59권, no. 18 (1962년), 500쪽 ~ 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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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칼 세이건, 《코스모스》, 3부: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에서 인용. Kepler was hardly the first to combine physics and astronomy; however,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though disputed) interpretation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he would be the first astrophysicist in the era of modern science.

[편집]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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